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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의 3대 성씨, 한국의 성씨 내력(來歷)
나라마다 어떤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을까?
영국은 스미스,존스,윌리엄스,가 가장 많고
미국은 스미스,존슨 ,카슨,순이라고 한다 .
프랑스는 마르텡,베르나르,뒤퐁,이며
독일은 슐츠,뷜러,슈미트 가 3대 성씨라고 한다 .
러시아는 이바노프,바실리에프,페테로프 순이다 .
중국에 가장 많은 성씨는 리씨로 12억 인구 중 7.9%인 9천 6백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
다음으로 왕, 장씨가 그 뒤를 잇고 있다 .
한국에는 286개의 성씨가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성씨는 김,이,박 씨로 한국
전체 인구의 21.6% 14.8% 8.5%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
그 다음은 최,정,강,조,윤,장씨 순이다 .
이씨는 한국,중국의 숫자를 합치면 1억 명이 넘는 세계 유일의 성씨가 되는 셈이다 .
[출처] 세계 각국의 3대 성씨|작성자 겨울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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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한국 성씨의 발자취]
우리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로 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여 각 시대가 전환하는 고비마다 성씨제도에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되어 새로운 성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그럴 때마다 기존의 성이 분화되어 분관·분파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등 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다.
삼국
삼국시대
-통일신라-고려시대-조선시대-일제시대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대 씨족사회에는 성이라는 것이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이다.
1.고구려
고구려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高氏)의 성을 썼다.
그밖에 고구려에서는 해(解)· 을(乙)· 예(禮)· 송(松)· 목(穆)· 우(于)· 주(周)· 마(馬)· 손(孫)· 창(倉)· 동(董)· 예(芮)· 연(淵)· 명림(明臨)· 을지 (乙支) 등 10여종 성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백제
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 때(600∼640)부터 부여씨라 하였다.
그밖에 사(沙)· 연(燕)· 협()· 해(解)· 진(眞)· 국(國)· 목 (木)· 백()의 8대성과 왕(王)· 장(張)· 사마(司馬)· 수미(首彌)· 고이(古爾)· 흑치(黑齒) 등 10여종의 성이 사용되었다.
3.신라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金)이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신라의 종성인 김씨·박씨는 7세기 초부터 《구당서》· 《신당서》에 나온다. 거기에 의하면 “(신라)임금은 김진평이며, 국인에는 김·박 양성이 많고, 이성끼리는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라든지, “왕의 성은 김씨,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은 씨는 없고 이름만 있다.”라고 하였다.
한편, 6성(이·최·정·손·배·설)의 대두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 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손·배씨는 통일신라시대, 최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밖에 장(張)·요(姚) 등의 성도 보인다
통일신라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조선시대-일제시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삼국의 성씨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에서 출자한 성씨가 9주5소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삼국통일 후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혼(同姓不婚)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사정은 전혀 그러한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왕실부터 철저한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대비 또는 왕비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글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성씨관계 기록이 국내의 실제사실을 반영한 국내자료와 당나라의 책봉을 받기 위하여 보낸 외교문서와는 차이가 생겨났다.
즉, 국내의 실제사정은 왕과 왕모 또는 왕비가 다같이 김씨였지만, 당나라의 책봉을 위하여 보낸 문서에는 그 김씨가 왕모 또는 왕비의 부명(父名)을 따서 숙씨(叔氏)·신씨(申氏)·정씨(貞氏)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고려시대
삼국시대-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일제시대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층인 호족은 사성· 모성· 자칭성 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군현 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 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 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을 분정(分定)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씨가 귀족·관료에서 점차 양민층으로 확대되어갔으며, 천민층의 양민화에 따라 성씨를 새로 취득한 계층이 후대에 올수록 늘어갔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국적 성씨 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정, 씨족지· 성씨록의 편찬·반포 및 ‘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우리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 沈· 河· 玉· 明· 俊· 昔· 諸· 益· 森· 邦· 芳· 價· 勝· 濯· 承氏)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의 성씨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하였다고는 볼 수는 없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본디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漢姓化) 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시대
고려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화척(禾尺),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 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이 그만큼 많았다. 그렇게 많았던 천민층이 16세기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 성을 가지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계급이 타파된 것은 성의 대중화를 촉진시켰으며, 1909년 새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부터 누구나가 다 성과 본을 가지게끔 법제화되었다. 무성인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때를 기하여 새 성을 갖게 되자 갖가지 희화극이 벌어졌다고 한다.
사례 1
성이 없는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서기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주었다.
사례 2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을 따랐다.
사례 3
김·이·박씨가 많은 데서 그러한 대성을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이 때문에 종전의 대성명문들은 그 수가 더욱 늘어갔다. 가령,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은 이씨, 경주지방 출신은 김씨나 최씨 하는 식으로 출신지의 대성이나 문벌을 본떠서 자기 성을 삼은 경우가 많았다.
사례 4.
오늘날의 희성·벽관 가운데 당시 경찰이 호구조사를 할 때나 호적담당 서기가 호적을 기재하면서 한자의 획(劃)을 잘못 적은 데서 비롯된 것도 적지 않다.
일제시대
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시대-조선시대-
일제시대
국민 모두가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된 시기는 신분과 계급제도가 타파된 한말에 와서 단행된 것이며, 그것이 일제의 식민통치과정에서 시행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우리의 성씨사상 최대의 수난기는 무엇보다 일제 말기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겠다.
일제가 내선일체·황국신민화의 일환에서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했던 창씨개명은, 성이란 일생토록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관념이 철저한 우리 민족에게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웃지 못할 비극이 연출되었다.
그때 각 씨족 문중에서는 회의를 열어 창씨를 하면서도 우리 민족은 어떻게든 고유의 성이나 본관의 흔적을 남기려고 무척 애를 썼다.
사례 1
이가(李家), 김본(金本), 배정(裵井), 오산(吳山), 장전(張田) 하는 식으로 본성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였다.
사례 2
남양(南陽)·수원(水原)·경산(京山)·광산(光山) 하는 식으로 본관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사례 3
시조전설이나 연고지를 상징화하여 성으로 쓴 일도 많았다. 예컨대, 파평윤씨의 경우 평소(平沼)라 하였는가 하면, 한산이씨는 본관에다 목은(牧隱 李穡)의 자손임을 강조하여 목산(牧山)이라 하였고, 청주한씨는 청주의 고호인 서원(西原)을 그대로 성으로 썼다.
이러한 일본식 창씨는 입부혼인(入夫婚姻)·서양자(庶養子) 제도와 함께 1939년말부터 실시되었다가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의 조선성명복구령이 법령 제122호로 공포되자 창씨개명한 호적부 기재와 이에 배치되는 모든 법령·훈령 및 통첩은 그 창초일부터 무효가 되었다.
[가씨에서 흥씨까지]
우리 성씨의 수는 문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세종실록》 지리지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관계자료인 이 문헌에는 전체 250여성 가운데 이미 소멸된 망성이 포함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1486년(성종 17)에 편찬된 이 문헌에는 세종 이후에 귀화한 성과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씨(망성 포함)를 모두 수록한 결과 277성이나 포함되어 있다.
《도곡총설 陶谷叢說》
영조 때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했는데, 298성이 수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
고종 때 발간한 이 책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재했던 고문헌에 있는 것을 거의 망라하였기 때문에 무려 496성이나 수록되었다. 여기에 한성화 이전의 고유명자(固有名字)와 이미 소멸전 역대의 망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후대까지 존속된 성의 숫자는 15세기 지리지 소재 성수대로 대략 250성 내외였다.
송나라 소사(邵思)의 《성해 姓解》에 의하면 한자성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2,568성이나 되며, 우리의 성에 해당되는 일본의 씨(氏)는 그 종류가 10만에 가깝다 하니, 중일 양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성종은 많은 편이 아니다. 더구나 250여성 가운데 김·이·박·최·정씨 등 5대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 성씨에 대한 전체조사가 최초로 실시된 시기는 1930년도인데 이때 전국에 250성이 있음이 국세조사에서 밝혀졌다. 8·15광복 후 최초의 성씨조사는 1960년도 인구센서스의 부대조사로 실시되었는데, 30년 전의 조사보다 8종이 많은 258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의 조사는 북한지역이 제외된 남한만의 조사라는 데서 1930년도의 조사 결과와는 정확한 비교가 될 수 없다. 남북분단에 따른 대규모의 인구이동으로 인하여 남북한의 성씨 구성에도 변동이 컸다. 남한지역에만 사는 성씨가 있는가 하면 북한에만 있는 성씨도 많다.
1985년 11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이 인구센서스를 실시하면서 성씨와 본관을 조사한 결과 1975년도의 247성에 비하여 25성이 새로 추가되어 272성에다 본관은 3,435개로 나타났다.
이 때 나타난 인구 100명 미만의 희귀성씨 40여 개는 호적 기재 착오로 인한 경우와 고아출신이 입적하거나 외국인의 귀화 때 생겨나는 등 최근에 만들어졌다.
이 조사에서 나타난 10대 성씨의 본관수를 보면 김씨가 285, 이씨 241, 박씨 128, 최씨 127, 정씨 122, 강씨 33, 조(趙)씨 56, 윤씨 44, 장(張)씨 63, 임(林)씨 60개로 각각 집계된다.
가씨(賈氏)의 유래와 본관
가씨는 명나라 신종 때의 가유약(賈維 )을 시조로 삼는다. 가유약은 중국 소주 사람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신종의 명을 받들어 원병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와서 안주 등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갔다가, 정유재란 때 아들 상(祥)과 손자 침(琛)을 데리고 다시 조선에 들어와 남원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며, 1600년 부산싸움에서 아들 상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의 손자 침은, 전쟁이 끝난 후 안동 권씨 순의 딸과 혼인하여 울산에 살면서 우리나라 가씨의 뿌리를 내렸다. 1647년(인조 24) 침이 죽자 아들 4형제가 충남 서산으로 자리를 옮겨 가문을 크게 번창시켰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1,786가구에 7,89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씨(姜氏)의 유래와 본관
강씨의 본관은 문헌상으로 114본이 전한다. 그 중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진주·금천·안동·배천·해미·동복·광주 등 7본의 시조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씨는 대부분 진주 강씨에서 갈라진 것이 확실하다.
오늘날 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도시조로 삼는다.
진주 강씨는 다섯 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에서 인헌공파는 파조인 강감찬(姜邯贊)의 출생지가 금천(衿川)이라고 하여 금천 강씨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씨는 아득한 옛날부터 진양 지방(진주)에서 하씨(河氏)·정씨(鄭氏)와 더불어 '진양3성'으로 일컬어 오는 전통적인 영남의 명문이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227,097가구에 958,1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편씨(片氏)의 유래와 본관
편씨는 중국 당나라 왕족의 후손으로, 남송 때 유학자였던 이동의 8대손 이지(李址)가 명조 때 편씨의 성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편일(片鎰)이 절강백(浙江伯)에 봉해지면서 본관을 절강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나라 편씨는 편지(片址)의 손자 편갈송(片碣頌)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들어와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3,181가구에 13,3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남궁씨(南宮氏)의 유래와 본관
남궁씨의 시조는 본래 은(殷)나라 사람으로, 기원전 1l22년경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멸망시키자 기자(箕子)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함열남궁씨세보(咸悅南宮氏世譜)》에는 고려 성종 때의 대장군인 남궁원청(南宮元淸)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원래 감물아현(甘勿阿縣:전북 익산군 함열읍) 출신이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관향을 함열(咸悅)로 삼았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전국에 3,874가구에 16,2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공씨(孔氏)의 유래와 본관
공씨의 시조는 성인 공자(孔子)로 전하며, 그의 54세손 소(紹)가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 위왕(衛王)의 딸 노국대장공주 (魯國大長公主:공민왕비)와 함께 고려에 귀화하여 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지고 창원(昌原)을 사적(賜籍) 받아 우리나라 공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본관을 창원으로 써 왔는데, 조선 정조 때에 공자의 출생지인 곡부(曲阜:중국 산동성 곡부현)를 관향으로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공씨는 곡부(曲阜) 단일본이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17,209가구에 72,38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씨(盧氏)의 유래와 본관
노씨의 시조는 노수(盧穗)이다. 중국 범양(范陽) 출신으로 당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877년(신라 헌강왕 3)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아들 아홉 형제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이주하였다.
처음에 평안도 정주 능리촌(平安道定州菱里村)에 정착(定着)하였다가 용강쌍제촌(龍岡雙悌村)으로 옮겨 뿌리를 내렸다. 이것이 우리나라 노씨(盧氏)의 시작이다.
노수의 아들 대에 이르러 각각 광주(光州), 교하(交河), 풍천(豊川), 장연(長淵), 안동(安東), 안강(安康), 연일(延日), 평양(平攘), 곡산(谷山)으로 관향을 정하고 분파하였다. 그리고 다시 교하(交河)에서 신창(新昌), 광주(光州)에서 해주(海州), 안강(安康)에서 경주(慶州), 평양에서 만경(萬頃)으로 분파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전국에 47,252가구에 196,285명이 사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안씨(安氏)의 유래와 본관
우리나라 안씨의 도시조(都始祖)는 당(唐)나라 출신으로 신라 애장왕(哀莊王:신라 40대왕, 재위 기간;800∼809) 때 우리나라로 들어온 안원(安瑗)이라고 하며, 그의 본래 성은 이씨(李氏)였는데 그의 아들 3형제가 서기 864년(신라 경문왕 4)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안씨의 성을 받았다고 한다.
맏아들 방준(邦俊:죽산군에 봉해짐)의 8세손 영의(令儀)를 시조로 하는 죽산안씨(竹山安氏)와 둘째아들 방걸(邦傑:광주군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광주안씨(廣州安氏)에서 순흥안씨(順興安氏:시조는 자미)· 신죽산안씨(新竹山安氏:시조는 원형)· 탐진안씨(耽津安氏:시조는 원란) 등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안씨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124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전해지는 본관은 20본 미만이다. 안씨는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131,864가구에 556,4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김씨(金氏)의 유래와 본관
김씨는 우리나라 성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성씨이다. 문헌의 기록을 보면,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623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499본,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는 120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그 중 시조가 뚜렷이 밝혀진 것은 100여 본이다.
김씨는 가락국의 수로왕 계통과 신라의 알지계통으로 대별되며, 현재 전하는 거의 모든 김씨가 이 두 계통 중 어느 한쪽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우선, 가락국 원조로 전해 오는 수로왕에 대한 일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전한다. 수로왕의 후손 가운데는 김해김씨와 허씨 및 인천이씨·함창김씨 등이 있고, 진주김씨·수원김씨·영동김씨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둘째, 신라의 알지(閼智) 계통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으로 했다고 전한다. 알지계는 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무려 6백여 관향으로 나누어졌으나, 그 중 뚜렷하게 현존하는 본관은 대략 80여 본으로 추정된다. 알지계에서 갈려나간 타성으로는, 안동권씨·강릉왕씨·광산이씨·감천문씨·수성최씨 등이 있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전국에 2,080,768가구에 8,785,34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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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엠파스 실시간 지식 (http://kdaq.empas.com/)
[원문] [실시간 지식] 우리나라의 성씨에 대한 기원은?? (교육·학문 > 인문·사회과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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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 세상에... 성씨가 286개나 된다구요? 한국의 성씨내력 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