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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마산문협 사화집 제10집, <마산사랑, 가고파의 물결에 젖다>에 발표한 글입니다.
관해정觀海亭 과 한강 정구寒岡鄭逑 선생
김현우
무학산을 오르는 등산로 서원골 입구 냇가 건너에 관해정觀海亭이라 하는 정자가 있다.
지금이야 건물들에 가려 제대로 바다를 볼 수 없지만 그 시절은 전망이 환하게 트여 마산 앞바다를 잘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으니 정자(;亭舍) 이름을 “관해”라 하였을 것이다.
관해정 내력을 살펴보면 한강 정구寒岡鄭逑(1543~1620) 선생이 여기서 제자들과 시를 지으며 초당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그의 제자 장문재張文哉가 스승을 위해 초창하였다고 전해온다. 초창자인 문재는 우방于房 장익규張益奎(1595∼1634)의 자字로 본관이 창녕인데 한강 문인을 수록한 <회연급문제현록檜淵及門諸賢錄>에 나오는 인물이다.
한강 정구 선생은 성주 사람으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퇴계 이황李滉,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영남 사류의 거목이다. 일찍이 창녕현감, 함안군수를 지내며 지방 역사를 정리한 <창산지>(선조 14년:1581) <함주지>(1588)를 편찬하여 그곳의 풍속과 자연을 수집 조사 편찬하여 향토 사료로 전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우승지, 공조 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며 저서로는 《한강집寒岡集》이 있다.
한강 정구는 심학心學 예학禮學에 정통하였으며 문학, 의학, 서예, 풍수지리, 점술, 지지地誌 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박학다식한데다 매우 실용적이었다. 주자에 정통하면서도 주자학만을 강요하지는 않는 독특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한강 정구 선생은 선조 19년(1586: 44세)에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재직할 때, 이곳의 수석이 좋다는 말을 듣고 틈나는 대로 산책을 나와 제자들과 경관을 즐겼다. 그러면서 남명선생의 산해정山海亭처럼 ‘산과 바다의 정취를 겸하고 있는’ 곳에 정자를 짓기를 원했다. 정자는 예전에 선비들이 훌륭한 스승을 모시어 강학을 듣거나 근처 유림들이 모여 시를 읊고 교유交遊하던 장소로 경치가 좋고 전망이 좋은 곳이면 으레 있었는데 근처 선비들의 집합장소로 널리 애용되었다.
한강 선생이 지은 <관해정기觀海亭記> 서두에 정사 터를 정한 연유가 나온다.
- 내가 …… (산해정) 그곳이 산과 바다의 정취를 겸하고 있어 즐겼고 그윽하고 곧은 예법에 합당하여 은근히 연모하였다. 정해(선조 20년, 1587) 가을에 비로소 이 땅을 얻었는데 또한 최고운의 옛 행적이 절친하여 더욱 아꼈다. 우연히 벗들이 함께 모였을 때 술이 반이나 된 뒤 이 시(다음과 같음)를 지었다.
그때 그곳에 함께 온 문하생들에게 한강이 절구 한 수를 지어 보여 준 것이 <한강집>에 실려 있다.
* 해정海亭을 지을 자리를 정하고서 함께 따라온 여러 군자에게 지어 보이다.
나는야 바닷가에 정자 하나 지으련다,
이 좌중에 그 누가 채서산이 되려는가.
치자, 유자, 매화, 대 일찌감치 심어 두고,
여섯 해를 비바람에 시달리지 않게 하소.
我欲爲亭近梅灣 座中誰作蔡西山 梔橘梅筠須早植 莫敎風雨六年間
* 채서산蔡西山 : 남송南宋 때의 사람 채원정蔡元定,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채원정이 서산西山 정상에 정사를 지어놓고 그곳에서 한평생 학문에만 종사했던 것처럼 할 생각이 있냐고 물은 것이다.
* 여섯 해 : 주희가 채원정에게 보낸 시에 “당이 이루어진 지 6년째인데 바람이 몰아치고 비가 샌다오.〔堂成今六載上雨復傍風〕”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한강 선생이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인근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이때 창원까지 그 제자들이 있어 자주 이곳을 드나들며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듬해(1587) 제자들이 초당을 지어 선생의 강학장소로 삼고자 하니 관해정을 지을 터를 창원의 회원檜原에 미리 정해 주었다.(오봉선생 문집에는 한강이 집터를 샀다고 했다.)
― 회원은 바닷가에 있는데 옛날에 최 문창후(崔文昌侯: 최치원崔致遠)가 놀았던 곳이다. 선생이 그 경치를 사랑하였고 또 선현의 유적을 경모하여 이곳에 오가며 놀면서 구경하였다. 고을 선비들이 이 때문에 나중에 정사精舍를 세웠는데, 선생이 그 이름을 취백당이라 하였다.(한강집)
<관해정기>에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함안의 제자들과 함께 회원에 살았던 문재 장익규가 주도하여 초당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얼마지 않아 세상에 일이 많은 데다 연이어 임진년의 병화를 만나면서 16, 17년의 세월이 홀연히 지나가 버렸다. 계묘년 겨울에 내 비로소 옛 산천(성주를 말함)으로 돌아와서 다음 해가 되었을 때 함주咸州(지금의 함안)의 선비 벗들과 서로 더불어 초가집을 몇 칸 엮었다. 장문재가 마침 그 곁에 살아 협력하여 성취하였다.
그때 제자인 장익규가 관해정을 짓고 아울러 당호는 취백당聚白堂이라 하였다. 지금 관해정에 같이 걸린 “취백당”이란 당호는 한강 선생이 직접 지은 것이라 한다.
그 시절 함안사람으로 한강의 제자인 작계 성경침鵲溪成景琛이 1604년 스승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관해정이 지어졌다는 소식에 당장 달려가고 싶다는 정황이 성경침에게 보낸 서간에서 확인된다.
― 듣자 하니 새집이 최고운崔孤雲의 옛 자취가 있던 옆에 낙성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채서산蔡西山이 집을 지은 뜻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장 말을 몰아 달려가고 싶지만 병든 몸이 세상일에까지 구애되어 있어 조금 기다렸다가 배를 구해 돛을 펼쳐 달고 청송사靑松寺(지금 함안 장암리 반구정이 있다)와 경양대景釀臺 사이에 이르면 사람을 시켜 내가 왔다고 알리겠습니다. 그 시기가 늦춰질는지 당겨질는지는 지금 미리 기약할 수는 없습니다.
위의 서간을 성경침에게 보낸 3년 후인 1607년 정월 27일, 한강 선생은 마침내 묵은 계획을 실행하여 함안 도흥나루까지 왔지만 창원부 회원까지는 오지 못했다.
성주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날 영산 창암(도천면 우강리)의 곽재우의 정사인 망우정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배를 타고 상류로 올라가 칠원 경내인 경양대(남지 웃개나루 맞은편 절벽) 및 내내柰內(칠서면 계내리, 남지철교 인근마을) 일대를 둘러 본 뒤 도흥촌(함안 부촌리)에서 범주泛舟(뱃놀이)하며 마지막 여흥을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안동부사 부임이 임박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육로여행을 할 형편이 아니어서 관해정행은 포기하고 말았다.
한강이 제자들과 함께한 낙동강의 뱃놀이를 “낙강선유洛江船遊” 또는 <용화산하동범>이라 하는데,
이 모임에는 망우당 곽재우․ 박충후 함안군수․ 여헌 장현광, 의병장 신초, 조방, 성경침, 박진영, 조식과 조임도 부자 등 함안(14명)․ 영산(10명)․ 창녕, 성주 등지에서 정구의 문인 또는 종유관계에 있던 35명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성회를 이루었다.
<관해정기>에 10여 년 후 초당이 허물어지자 기와집으로 중수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시 문재 장익규가 주도하였는데 그 당시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있었던 오봉 신지재梧峰申之悌(1562~1624)가 크게 협력하였다고 한다.
― 겨우 10년 세월이 지나 집은 이미 기울어지고 무너져 그 정세가 마치 도로 길가에 버려진 땅과 같이 되었다. 문재가 다시 터를 닦고 초석을 세우고 들보와 서까래를 올리고 기와를 덮는데 일을 한지 몇 년에 비용은 다 없어지고 매우 고생을 하였다.
내가 바닷가를 따라서 돌아오니 그 외형의 맑고 아름다움과 엮은 구조의 정갈함이 뜻밖에 이전의 초가집뿐만이 아니었고 또한 당초에 내가 바라는 바도 아니었다. 다행히 30년 숙원을 결국에는 이루게 되었다.
내가 몹시 늙고 쇠약해져서 바야흐로 오랜 병으로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것을 생각하면 또 어찌 산과 바다의 경승景勝을 다 감상하고 그윽하고 아득한 장관을 다 즐기겠는가. 정구 찬撰 <관해정기>
신지제가 창원부사로 재직(1613년 부임)할 때 지은 지 13년이 지나 허물어져 가는 정자를 함안, 창원의 선비들이 협력하여 1617년 3월에 중수할 때, 서찰로 정구의 부탁을 받은 그가 봉급을 보태어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오봉집>에 그때 보낸 한강 선생의 서찰 내용이 실려 있다.
― 정 선생이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바닷가에 예전부터 나의 정자가 있는데, 이제 들으니 고을의 후생들이 새로 지어 강학할 계획이라고 하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 유념하여 살펴줄 것이라 믿네.’라고 하였다.
[鄭先生貽先生書曰: ‘海上曾有弊亭, 玆聞府下後生輩爲改構講學之計. 殊非易事, 窃想留念惠顧云云.’]”
오봉은 관해정을 중수하고 시 “해정중수운”을 남겼다. 칠언율시 「해정을 중수하고 지은 시[海亭重修韻]」에,
― 처음에 비경을 찾아 작은 집을 지었고,
다시 우뚝한 정자 지으니 물색이 새롭네.
[初營小築天慳破 更著高齋物色新]”라고 했다.(오봉선생문집 1)
의성사람 신지제의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으로 처가인 함안 지역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사촌 처남인 간송 조임도趙任道와 용운用韻의 방식으로 수창하는 등 낙중洛中(낙동강 중류)의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유하였다. 그는 문과 갑과로 등과하여 예안현감, 창원부사를 지냈는데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동부승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그 후 오봉은 관해정에 자주 드나들며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특히 중수된 관해정에 늙고 병든 한강 정구 선생이 왔을 때 문하생들과 어울려 뱃놀이를 즐기면서 지은 시가 있다.
맑은 강가 햇빛 백사장에 비치는데
가볍게 노 저어 저녁 물결 따라 떠가네
무엇보다 좌중에 불편한 사람 없고
한바탕 펼쳐진 승경 많을수록 좋구나
晴江日色動明沙 柔櫓輕橈任夕波 最是坐間無白眼 一塲奇勝辨多多
승경이 풍부한 관해정에서 백안시할 사람이 없는 연석의 흥을 나타낸 전구轉句의 ‘最’ 자는 정구를 비롯한 문인門人들과의 각별한 친분을 드러내 준다.
그 시절 관해정의 경치와 운치가 어떠했는지 신지제는 ‘신선의 땅이라 천상의 12루보다 좋다’며 찬탄하고 있다.
* 해정에서 한자진·장문재와 함께 유람하고 광문의 시에 차운하다
海亭同韓子眞張文哉遊 次廣文韻
인간 세상에서 이곳이 신선의 땅이니
천상에 열두 루*있다는 것은 헛소문이네
바람은 물소리와 섞여 휙휙 불고
안개는 푸른 산과 얽혀 둥둥 뜨네
人間是處有仙區 天上虛聞十二樓 風雜水聲來颯颯 霧和山翠落浮浮
한가한 틈에 반나절이나 속된 생각 끊고
교분 맺은 현인들과 멋진 유람을 즐기네
그 속에 기이한 절경 더욱이 있으니
돌 웅덩이 차가운 물 달 밝은 가을
偸閒半日休塵想 託契群賢接勝遊 更有箇中奇絶處 石泓寒水月明秋
신지제가 한강의 제자인 한자진韓子眞, 장문재와 함께 이 정자에 들려 시를 지었는데 <신지제 오봉집>에 수록되어 있다. 자진은 봉악鳳岳 한몽일韓夢逸(1577∼?)의 자로 본관은 청주이다. 그는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는데, 청렴한 것으로 이름났다.
관해정이 있는 서원골은 회원서원檜原書院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없어지고 관해정만 남았다.
지금 건물에는 ‘관해정’과 ‘취백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인근 사림에서 해마다 3월과 9월에 한강 정구와 그의 제자 미수 허목을 향사를 지내고 있다.
한강의 도통을 이어받은 미수 허목의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한강의 제자인 여헌 장현광, 모계 문위 등과 함께 배웠으며 또 여헌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따라서 영남에도 그와 교유한 유림 인사들이 많았다,
벼슬은 우의정을 지냈는데 오리 이원익의 손녀사위로 결혼하게 된 이야기는 재미있어 세간에 아주 유명하게 전해온다. 56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나 이후 오래도록 별 탈 없이 벼슬살이했다. 하얀 눈썹이 눈을 덮고 있는(미수眉叟) 그의 초상화가 유명하며 그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 도인과 같은 풍모를 지닌 인물로 90세 가까운 천수를 누렸으니 처세에도 능란했던 인물이라 할 것이다.
지금도 한강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오는 수령 400여 년 은행나무가 관해정을 지키고 있다. ***
첫댓글 마음을 얻는 것이 재물을 얻는 것보다 낫습니다.
마음을 얻는 순수한 지혜를 가지세오.
마음을 잘 만져주시고.
마음을 잘 치유해 주심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안녕하세요~??♥
소중하고 정겨운 남녀 친구 님~!!!愛
♥*빵긋~방가워요♥(*^-^*)♥ 쵝오!@!@~♥★
하루 1분 나를 향해 웃는 시간을 가진다면
힘든 일도 어느새 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것이다.
오늘도 고운 미소 가득 지을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함께 행복한 웃음의 하루 보내세요~乃 .
미소안에 담긴 마음은 배려와 사랑입니다.
우리 삶속에 영원히 미소 짓는 나 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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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시간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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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하니욕심을 채우려
발버둥쳤던 지나온 시간들이 내 발목을 잡아.
뒤돌아 보며 하나 둘 생각하고 반성하며
한해 사랑 해 준 친구분들게 감사한 마음으로
감사 안부를 띄우는 기도를 올립니다~~!!!
★ⓗⓐⓥⓔ ⓐ ⓝⓘⓒⓔ ⓓⓐⓨ★ "*.forever!.* ♡~★
마음이 우리를 병들게도 하고 또 치료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병이라도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유쾌한 마음이 아픈 우리의 몸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만듭니다~!!!.
계묘년(癸卯年)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한해를 보내는 아쉬움이 있지만 마무리 잘 하시고
희망괴 화합의 대통합을 위한 갑진년(甲辰年)에
서로 배려하고 소통하며 국민 모두 화합하는
밝은 내일을 맞이하도록 함께 해야겠습니다.~♡♡愛
안녕하세요~?? ♥"
정겹고 소중한 남녀 친구님~!!!愛
빵긋~!!! 방가워요~♥♥`★愛 쵝오@!@~!!
닥쳐올 새로운 한해 멋진 계획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한해되도록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기쁨과 웃음 가득한 날 되시기 소망해 봅니다~乃
__ ㆀ● ''______새해 甲辰年에는 _____ ㆀ● ''
__ ┏■┛______幸運이 있으시고______┏■┛ 우헤헤
____┛┓_____健康하고 幸福하세요____ ┛┓
한해 잘 보살펴 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격려와 사랑을주신 친구님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 ⓐ ⓝⓘⓒⓔ ⓓⓐⓨ★ "*.forever!.* ♡~★
가는 해 오는 해 마무리와 계획과 실천으로 뜻하시는 바
꿈 이루시며 행복하시고 즐겁고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리며
가정에 행운 있으시고 신의 가호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습니다.떠날 때는 잘 떠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