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프 다이제스트> 6월호에서는 미국 골프계의 내로라하는 선수들에게 ‘멀리건을 받을 수 있다면 어느 순간을 선택하겠느냐’고 질문했고 답변을 얻었었다. 8월호에서는 국내 남녀 프로 골프 선수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고 그들로부터 진솔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글_고형승(여자 프로), 인혜정(남자 프로)
강성훈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리스트로 07년 프로로 전향한 뒤 08년 신인상을 차지하며 주목받았다. 2010년 미국PGA투어 조건부 시드를 얻어 이듬해 미국 진출에 성공했고, 첫 해에 한국인 최초로 풀 시드를 획득했다. 현재 페덱스컵 랭킹 165위(146점).
멀리건을 받을 수 있다면 2009년 발렌타인챔피언십의 마지막 홀 파 퍼트에 사용하고 싶다. 그때 파 퍼트만 성공했더라면 연장전을 치르지 않고 프로 데뷔 후 첫 우승과 유러피언투어 우승까지 동시에 거머쥘 수 있었을 테니까. 당시 발렌타인챔피언십은 제주도 핀크스골프클럽에서 열렸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 경기 때 바람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승부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타 차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었던 나는 마지막 홀 버디 퍼트에서 뒤바람의 저주를 받았다. 오르막 10미터 버디 퍼트가 뒤바람의 영향으로 홀컵에서 1.5미터 지나갔고, 1.5미터 내리막 훅인 파 퍼트도 홀컵 오른쪽으로 스쳐 지나가며 실패했다. 결국 플레이오프에 나갔다. 바람이 너무 심해 중심을 잡지 못한 나는 어드레스를 한 다음 한 번 뒤로 나왔다가 퍼트했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연장에서 패했고, 방송으로 지켜보던 팬으로부터 “처음에 그냥 쳤으면 들어갔을 거야”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구옥희
올해로 쉰여섯이 된 ‘살아있는 전설’ 구옥희에게 지난 한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동안 골프밖에 모르고 살아왔던 자신에게 한국LPGA의 회장이라는 중책이 맡겨졌을 때만해도 잘해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11대 회장으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출 절차의 문제로 인해 물러나게 됐다. 그런 그녀지만 가장 무르고 싶은 것은 불면증이라고 토로했다.
작년에 회장으로 선출됐을 때 다른 것보다 주변 사람들과 엉켜 실랑이를 하는 게 가장 안타깝고 힘들었던 일이다. 살면서 수없이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었다.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쉽게 치유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보다 내가 무르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30여 년 전부터 함께 해온 불면증이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 처음 진출했을 때는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루에 2~3시간을 자고 경기에 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떻게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겠는가? 그런 생활이 반복되자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불면증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고 일상까지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나를 괴롭혔던 불면증을 무르고 건강한 20대의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 그러면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지금보다는 유연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많이 좋아졌다. 한국에 들어와서 사상체질을 통해 나에게 맞는 음식을 먹으며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고 노력하니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다. 많이 건강해졌다.
공항에서 여권을 찾았는데 온데간데 없었다.
결국 첫 비행기를 놓쳐 공항에서 만들어준 단수 여권으로
다음 비행기를 타야했다. 김도훈
김도훈
2009년 신인상을 차지했고 2010년 동부화재프로미오픈에서 첫 우승을 거뒀다. 그 해 일본프로골프투어 JGTO에 진출해 첫해 상금 랭킹 11위, 지난해 18위를 기록하며 활약하고 있다. 그는 올해 초 유러피언PGA투어에 참가하러 가던 길에 일어난 웃지못할 사건에 대해 무르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3월 EPGA투어 정규 대회인 트로피 한센Ⅱ TropheeHanssanⅡ에 참가하러 가던 중 황당한 일을 겪었다. 공항에 도착해 여권을 찾았는데 온데간데 없었다. 결국 첫 비행기를 놓쳐 공항에서 만들어준 단수 여권으로 다음 비행기를 타야 했다. 대회장에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3번이나 타야 했고 모로코에 내려 국내선을 한 번 더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첫 비행기를 놓쳐 모로코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였다. 국내선 비행기가 없는 시간대라 아침까지 한참을 대기했고 평소보다 긴장을 더욱 많이 한 상태로 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대회는 44위로 마쳤다. 이때 일로 인해 여권은 항상 꼼꼼히 챙기는 버릇이 생겼다.
김미회
1988년에 한국LPGA에 입회한 김미회는 1990년 내셔널 타이틀인 한국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그 우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그래서 그녀에게 더욱 아쉬웠던 순간은 93년 88컨트리클럽에서 열렸던 팬텀오픈일 것이다.
팬텀오픈 마지막 날, 18번 홀에서의 버디 퍼트를 무르고 싶다. 그때 불과 3미터 정도 밖에 안됐던 버디 기회였는데, 그것을 안전하게 플레이 하기 위해서 붙여서 파를 했다. 안전하게 치는 것을 택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홀에서 티 샷을 준비하고 있는데 88컨트리클럽 직원 중 한 명이 나에게 “파만 해도 우승이에요”라고 귀띔을 해줬다. 그 소리에 ‘파만 해도 되겠구나’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우승 퍼트라 생각했던 파를 잡았는데도 이상하게 주위가 조용했다. 오랜만에 하는 우승이라 옆에서 환호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린 주변에 있던 동료 선수 중 한 명이 다가와 “플레이오프 준비하셔야겠는데요”라고 했다. 그때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면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오명순과 연장에 나가서 패해 2위에 머물고 말았다. 사실 연장에서의 승부가 억울하거나 졌다고 후회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굳이 연장까지 가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는데, 내가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는 점이 후회된다. 우승을 하더라도 ‘비겁하게 플레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큰 교훈을 얻었던 순간이기도 하다.
김비오
2010년 미국PGA투어 ‘최연소 멤버’가 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지난해 상금 랭킹 125위 안에 들지 못해 시드를 잃었다. 올해 2부투어인 내이션와이드투어에서 시드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지난 5월 국내에서 열린 원아시아투어인 매경오픈과 SK텔레콤오픈에서 2연승을 거두며 자신감을 얻었다. 현재 그는 한국PGA투어 상금 랭킹 1위에 올라있다.
2010년 오스타컨트리클럽에서 열린 KEB인비테이셔널 10번 홀 티 샷에 멀리건을 주고 싶다. 9번 홀까지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던 나는 10번 홀에서 한 티 샷이 왼쪽으로 로스트 됐고 결국 더블 보기를 기록했다. 그날 날씨가 좋지 않아 비가 내렸고 급한 마음으로 친 것이 화근이었다. 컨디션이나 샷 감 등 모든 것이 좋아 잘할 수 있었는데, 한 번의 실수가 우승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날 경기는 단독 2위로 마무리 했다. 또 하나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학교생활을 아주 열심히 했을 것이다. 학교생활은 거의 포기하고 골프에만 전념했던 것에 대해 큰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골프를 다시 시작한다면, 공부와 병행하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미 지난 일이고, 그런 경험으로 인해 내가 성장하고 있는 거니까 아쉬움은 남지만 후회는 없다.
김순희
한국LPGA투어에서 연속 버디 기록은 6개 홀이 최고다. 2000년 파라다이스여자오픈에서 김미현이 6개 홀 연속 버디를 잡으며 기록을 세웠고, 2005년 레이크사이드여자오픈에서 김순희가 같은 기록을 세웠다. 이후 신지애, 최유진, 양수진이 6개 홀 연속 버디 타이를 기록했지만 7개 홀 연속 버디 신기록은 여전히 작성되지 않고 있다. 김순희는 그 때 신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이다.
2005년 레이크사이드여자오픈 2라운드에서 인 코스로 나갔는데 13번 홀부터 18번 홀까지 연속 버디를 잡았다. 6개 홀 연속 버디를 잡은 것은 2000년 김미현 이후 처음이었다. 레이크사이드 1번 홀(파5, 528야드)은 쉬운 내리막 파5 홀이라 7개 홀 연속 버디를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2온에는 실패했지만 세컨드 샷을 잘 쳐서 그린 앞쪽에 꽂혀있던 핀까지의 거리가 불과 12발자국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어프로치 샷을 잘 했고 핀 바로 옆 한 뼘 정도 거리에 붙였다. 거리가 아주 짧았기 때문에 굳이 마크를 하지 않아도 됐다. 어드레스에 들어가서 백스윙을 하려는 찰나 어떤 부부가 그린 주위로 뛰어오면서 “저 선수가 저걸 넣으면 7개로 기록이래”라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멈칫거렸고, 볼은 홀컵을 훑지도 않고 지나쳐버렸다. 아쉬움이 가득한 순간이었다. 만약 멀리건을 받는다면, 그 버디 퍼트를 받고 싶다. 그러면 아마도 볼 마크를 하고 한 템포 쉬고 쳤을 것이다.
김위중
2008년 연우헤븐랜드오픈과 2010년 하나투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통산 2승을 기록한 김위중. 그는 4년 전 한국오픈 마지막 라운드에서의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2008년 한국오픈 최종일 10번 홀에서 버디 퍼트에 멀리건을 받고 싶다. 최종일 앤서니 김, 배상문과 같은 조에서 경기를 펼쳤다. 전반 홀까지 배상문과 공동 선두를 달리던 나는 후반 첫 홀인 10번(파4) 홀에서 배상문과 나란히 세컨드 샷을 그린에 올렸고, 배상문이 먼저 퍼트를 시도했다. 배상문은 버디를 하는 데 성공했고, 나도 버디를 넣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홀컵으로부터 7미터의 거리를 남겨둔 상태로 충분히 버디를 기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자신있게 한 퍼트가 어이없이 홀컵을 지나치고 말았다. 결국 3퍼트로 3위에 그쳤다. 자신감을 가진 건 좋았는데 욕심이 너무 앞섰던 것 같다. 한국오픈은 그 해 우승 상금이 3억원으로 국내 대회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는데 아마 우승했더라면 ‘상금 랭킹 1위도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김하늘
2011년 한국LPGA투어 상금 랭킹 1위에 오른 김하늘에게도 아쉬웠던 순간이 있었다. 2년 전인 2010년 스카이72골프클럽에서 열렸던 대우증권클래식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18번 홀(파5, 574야드) 벙커에서 친 세컨드 샷을 무르고 싶다. 그때 나는 (이)보미, (서)희경 언니와 마지막 조에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 홀을 앞두고 선두였던 보미에게 1타 차까지 따라붙었다. 18번 홀에서 티 샷을 했는데 나는 왼쪽 벙커, 보미는 오른쪽 벙커로 들어갔다. 보미가 먼저 세컨드 샷을 했는데 토핑이 나서 겨우 벙커를 넘어간 것을 지켜봤다. 그때 상황이라면 보미로서는 도저히 세 번째 샷으로 그린에 볼을 올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최소한 보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 홀에서 파만 하더라도 플레이오프에 나갈 수 있었다. 물론 벙커에 볼이 놓여있기는 했지만, 어려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언으로 칠 것인지 아니면 하이브리드로 공략할 것인지 클럽 선택을 놓고 캐디와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나는 최대한 볼을 멀리 보내기 위해 하이브리드를 들고 쳤는데, 아뿔싸! 보미랑 똑같은 상황이 나왔다. 토핑으로 겨우 벙커를 넘어간 것이다. ‘괜히 욕심을 부렸네. 그냥 아이언으로 칠 걸’이라는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결국 마지막 홀에서 보미와 나는 나란히 보기를 기록하면서 연장에 나갈 수 없게 됐다. 만약 그때 세컨드 샷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5번 아이언을 이용해 세 번째 샷으로 그린에 올릴 수 있는 거리까지만 볼을 빼놓았을 것이다. 그때 받은 충격으로 인한 후유증이 제일 컸었다. 그 다음주에 열렸던 메이저 대회 메트라이프한국경제KLPGA챔피언십에서는 미스 컷까지 했다. 충격도 컸었고, 그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갔다.
김형성
통산 3승을 거둔 김형성은 2008년 한국PGA투어에서 대상, 상금 랭킹 2위를 차지했고, 이듬해 일본프로골프투어 JGTO에 진출했다. 현재 JGTO 상금 랭킹 15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지난달 열린 나가시마시게오인비테이셔널세사세미컵에서 2위에 올랐다.
2008년 금호아시아나오픈 17번 홀 세컨드 샷을 무르고 싶다. 3타 차 선두를 달리고 있었는데 세컨드 샷이 실패하는 바람에 황인춘에 이어 1타 차로 아쉽게 우승컵을 놓쳤다. 어려운 17번 홀의 티 샷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페어웨이 중앙으로 정확히 잘 보냈다. 그런데 세컨드 샷에서 낭패를 보고 말았다. 핀까지 130야드를 남겨둔 상황에 피칭 웨지로 정확히 보내야 성공할 수 있었고, 9번 아이언이라면 좀 긴 상황이었다. 캐디와 상의를 한 뒤 피칭 웨지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볼이 백스핀이 걸려 그린에서 내려와 벙커 근처에 떨어졌다. 게다가 어프로치 샷을 미스하고 3퍼트까지 하며 더블 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세컨드 샷 이후부터 전부 잘못된 샷을 구사했다. 만약 세컨드 샷에 멀리건을 준다면 상금 랭킹 1위까지 거머쥐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해 대상을 받았지만 상금 랭킹은 2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김혜윤
김혜윤은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드라이버 샷을 한다. 발을 모은 상태에서 백스윙 때 오른발을 뒤로 옮기고 다운스윙 때 왼발을 약간 앞으로 이동하며 볼을 쳐낸다. 비거리가 고민인 아마추어에게 레슨 프로가 권하는, 이른바 ‘스텝 스윙’ 스타일이다. 이런 스윙은 그녀가 주니어 시절 짧은 비거리로 인해 고민을 하다가 고안해낸 방법이다.
어린 시절 우유를 마시지 않았던 것을 무르고 싶다. 어렸을 때 우유를 좋아하지 않아서 키가 남들에 비해 안 큰 것 같다. 그래서 거리에 대한 부담을 지금껏 느끼고 있고, 요즘 키 크고 거리 멀리 나가는 선수를 보면 정말 부럽다. ‘어렸을 때 우유를 좀 먹었으면’하는 후회를 무척 많이 한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나는 키가 큰 편이었다. 초등학교 때 키가 지금의 키다. 어렸을 때는 성장이 굉장히 빨라서 학교에서도 큰 아이 중 하나였다. 그 때는 우유를 먹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별로 맛이 없었기 때문에 아예 먹지를 않았다. 요즘엔 우유를 많이 마시는데, 지금 와서 먹어봤자 뭐하나(웃음)? 키가 163센티미터인데 우유를 마시고 5센티미터만 더 크더라도 골프를 조금 더 잘할 것 같다. 아마 그랬다면 ‘스텝 스윙’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류현우
데뷔 7년 만인 2009년에 신한동해오픈에서 첫 승을 거머쥐며 무명의 설움을 털어낸 그는 꾸준히 페이스를 잃지 않고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올해 매경오픈에서 2위에 올랐고 현재 한국PGA투어 상금 랭킹 4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투어 프로가 되고나서의 몇 년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2002년에 한국PGA 정 회원이 되었을 당시의 상황에 대해 멀리건을 받고 싶다. 정 회원이 되고 난 뒤 3년간은 뚜렷한 목표 의식 없이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투어 프로에 대한 관심도 물론 없었다. 그리고 입대를 했는데 그곳에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친구인 (홍)순상이와 (김)대섭이가 우승을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어느 순간 ‘그래, 도전해보자!’라는 생각을 했고, 제대 이후 노력을 많이 했다. 우승도 경험했고 결혼에도 성공했다. 조금 더 일찍 투어 프로로 활동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현재 생활에 만족하며 처음 투어 활동을 할 때의 목표한 마음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잘해야 되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맹동섭
한국PGA 2부투어를 거쳐 2009년 1부투어에 합류했다. 루키 시즌에 조니워커블루라벨에서 1승을 거두며 이목을 끌었다. 자동차 마니아로 유명한 그가 얼마 전 차를 교체했는데 썩 맘에 들지 않는 눈치다.
얼마전 자동차를 새롭게 교체했는데, 구입할 당시로 돌아가고 싶다. 전국 곳곳으로 투어를 다니기 때문에 연비가 높은 차가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연비가 낮은 기존의 아우디 A4를 내놓고, 비엠더블유 BMW 520 디젤로 바꿨는데,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BMW 520 디젤은 소음이 커 드라이빙 때 시끄러운 편이다. 기존 차보다 연비는 뛰어나지만 스피드 감각은 좀 떨어지는 느낌이다. ‘휘발유 차를 탔으면 운전하는 재미가 더욱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가 들었다. 자동차 컬러도 기존에는 화이트였다가 이번에는 진한 그레이로 바꿨는데 나이가 들어보이는 것 같아서 아쉽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디젤보다 스포츠 카를 선택했을 것이다. 아마 BMW Z4로 바꾸지 않을까 싶다.
문현희
2003년에 입회해 올해로 9년째 정규투어에서 활동 중이지만 2년 전 강원도에서 일어났던 클럽 선택 실수를 잊지 못한다. 그때 올바른 선택을 했다면 생애 3승을 올렸을 수도 있다.
2년전인 2010년 하이원리조트컵여자오픈 마지막 날 플레이오프에 나가 안신애에게 져 우승을 놓쳤던 적이 있다. 하이원 대회는 항상 날씨가 변수였다. 그때도 날씨로 인해 2라운드로 축소되면서 마지막 날 버디 4개와 보기 1개를 기록해 합계 7언더파 137타로 마쳤다. 날씨로 인해 전홀 샷건 방식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선수들은 모두 각기 다른 홀에서 끝나는 상황이었다. 당시 내가 스코어카드를 제출하기 위해 텐트에 들어왔을 때 주위에서 누군가가 우승이라는 말을 해줬다. 그런데 3번 홀에서 출발했던 신애가 마지막 2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내며 나와 동타를 이뤄 연장에 들어갔다. 플레이오프에 나가긴 했지만, 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006년 첫 승을 할 때도 신지애와 연장에 나갔지만 이겨 우승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연장 첫 홀에서 지고 말았다. 그때 티 샷은 페어웨이 한가운데로 잘 보냈는데, 세컨드 샷을 그린에 올리지 못했다. 세컨드 샷이 160야드 정도 남아있었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180야드를 보고 아이언으로 공략했다. 사실 그때, 신애는 우드를 잡았는데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도 우드를 선택했을 것이다. 세컨드 샷은 그린 앞에 짧게 떨어졌고, 어프로치 샷을 했는데 핀에 가까이 붙이지를 못했다. 2퍼트 보기를 했고 신애는 파를 잡아 시즌 2승째를 챙겼다. 연장 첫 홀에서의 그 세컨드 샷을 무르고 싶다.
박상현
통산 2승을 거둔 그는 지난해 11월에 결혼에 골인하며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고, 올 시즌 상반기에 치른 GS칼텍스매경오픈과 SK텔레콤오픈에서 각각 4위와 2위를 기록하며 상금 랭킹 2위에 올라있다.
16년전 골프를 처음 시작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골프 클럽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이런 생각은 골프 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씩 해봤을 것이다. ‘지금 선수로 활동을 잘하고 있는데 다른 걸 했더라도 잘했을까?’ 아마 다른 일을 했다면 지금 와이프도 바뀌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와이프와는 경희대 골프경영학과를 다니면서부터 오랫동안 교제해왔기 때문이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왠지 지금보다 유명세를 타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골프를 하지 않았더라면 사교성이 좋아 마케팅이나 홍보 관련 일을 했을 거 같다’고 입을 모았다. 아쉽다거나 후회하는 점은 아니지만, 그때로 돌아가 현재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다시 한 번 깨닫고 싶다. 욕심이라고 하면 지금 이대로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조금의 걱정거리, 조금의 행복, 조금의 여유…. 지금 상황에 만족한다.
16년전 골프를 처음 시작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골프 클럽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이런 생각은
골프 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씩 해봤을 것이다. 박상현
박인비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그녀는 2010년부터 일본LPGA투어를 넘나들며 꾸준히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올해 5월에 열린 훈도킨레이디스에서 우승하며 일본LPGA투어 통산 4승째를 거뒀다. 일본에서의 활약에 비하면 미국투어에서는 US여자오픈 우승 이후 아직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있다.
올해 6월 캐나다에서 열렸던 매뉴라이프파이낸셜LPGA클래식 마지막 날, 18번 홀에서 시도했던 세 번째 샷을 무르고 싶다. 최종일에 2타 차 선두로 출발했다. 그런데 긴장을 해서 그랬는지 그날 경기가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홀에서 나를 비롯해 브리타니랭, 최운정, (서)희경 언니 이렇게 4명이 동타가 됐다. 연장에서의 승부보다 나는 마지막 홀에서의 플레이가 마음에 걸린다. 대회가 열렸던 그레이사일로골프코스 18번 홀은 2온 가능한 파5 홀이다. 2온에는 실패했지만 그린 주변에서 어프로치 샷을 시도했다. 그런데 너무 길었다. 버디를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이었지만, 어프로치 샷 실수로 파 세이브에 만족해야 했다. 내리막을 너무 의식하고 쳤던 것 같다. 결국 플레이오프까지 가서 지고 말았고, 미국LPGA투어 두 번째 우승은 다음 기회로 미뤄야만 했다.
서아람
1995년 한국LPGA에 입회한 서아람은 통산 3승을 거뒀다. 투어 선수로서도 성공을 거뒀지만 은퇴 후에도 호서대학교 골프학과 교수이자 골프 해설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서아람을 롤 모델로 꼽는 후배가 적지 않다. 그녀는 투어 생활 때보다 중계를 하면서 실수를 많이 해 후회가 남는다고 말한다.
대회에서는 후회의 연속이고, 돌리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2위만 11번을 했었다. 그러니 안타까웠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지만 대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금방 잊어버리는 편이다. 경기 중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고 미련을 갖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중계를 할 때는 긴장의 연속이고 실수에 대해서는 정말 창피하다. 한 번은 우승자 인터뷰를 하는데 갑자기 선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질문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이 친구 이름이 뭐였지?’하는 생각에 답변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지금까지 우승을 한 000 선수였습니다”라는 멘트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끝까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지금까지 음~~네” 이렇게 허무한 멘트로 끝내버렸고 이 장면은 지상파 방송에 그대로 나가고 말았다. 이건 정말 돌리고 싶은 순간이다. 요즘도 해설을 하지만 방송에서 실수를 하면 충격이 오래 간다. 끝나고 나면 주위 사람에게 “나 이거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라며 투덜거리기도 한다. 나에게 해설은 가장 어렵고, 조금 더 잘했으면 하는 분야다.
한 번은 우승자 인터뷰를 하는데 갑자기 선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질문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해서 ‘이 친구 이름이 뭐였지?’
하는 생각에 답변은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서아람
신용진
1988년 프로에 데뷔해 통산 8승을 기록했지만 프로로 생활한 24년동안 힘든 시기도 있다. 2010년과 11년에는 각각 상금 랭킹 66위, 91위를 기록하며 1부투어 시드를 잃어 퀄리파잉스쿨을 다시 치렀어야 했다. 올해 마흔여덟인 그의 요즘 고민은 바로 체력이다.
시간을 24년 전으로 되돌려 골프를 막 시작할 때로 돌아가고 싶다. 요즘 20대 젊은 선수들과 활동하다 보니 골프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집중력과 기량이 예전만큼 발휘되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내가 20대 초반에 골프를 시작했을 때 운동은 커녕 골프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선수들은 어떤가. 운동과 골프를 병행하며 기본을 충실히 다지는 데 노력하고 있다. 나이 들어 뒤늦게 퍼스널 트레이닝도 받고 체력 보강에도 노력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느껴진다. 골프에만 전념하는 젊은 친구들은 아직 늦지 않았다. 몸 관리에도 힘을 쓰라고 조언하고 싶다.
신지애
미국LPGA투어 8승, 일본LPGA투어 3승, 한국LPGA투어 20승. 모두 합쳐 31승이다. 박세리 이후 최고의 골퍼라는 극찬을 받고 있는 신지애가 지난 6년간 거둔 승수는 그야말로 놀라울 따름이다. 프로 무대에서 단 1승도 챙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프로 골퍼가 수두룩한 상황에서 세계 3대 투어를 넘나들며 거둔 우승 횟수는 구옥희가 세계를 무대로 거둬들인 44승에 가장 근접해 있다. 그런 그녀지만 올해 4월에 일본에서 열렸던 대회에서의 실수는 안타깝다. ‘파이널 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최종 라운드에 강했던 그녀이기에 더욱더.
올해 4월6일부터 사흘간 일본 효고현 하나야시키골프클럽에서 열렸던 스튜디오앨리스여자오픈 최종 라운드 17번 홀 세컨드 샷을 멀리건 받고 싶다. 전날까지 2위와는 2타 차 선두였고 마지막 날 15번 홀까지 2위였던 사이키미키에게 4타 차로 앞서고 있었다. 남은 3홀에서 모두 파만 하고 사이키미키가 모두 버디를 잡더라도 내가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파4 17번 홀 세컨드 샷에서 그린 가운데를 노렸지만 오른쪽으로 밀리고 말았다. 그 이후 칩 샷까지 미스하면서 4번만에 볼을 그린에 올렸고 2퍼트하며 더블 보기를 범했다. 그 홀을 빌미로 역전패했다. 1년이 넘도록 우승이 없었던 나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절호의 찬스였는데 놓치고 말았다. 만약 멀리건이 주어진다면 그린 가운데에 올리려고 더욱 신중을 기했을 것이다. 비록 우승을 놓쳐 아쉽기는 하지만 후회는 없다. 운명이자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안신애
2010년 2승을 거두며 최고의 해를 보냈던 안신애는 그 이듬해 최악의 상황을 만났다. 2010년 상금 랭킹 3위에서 11년 22위까지 추락했다. 뛰어난 실력과 삼촌팬을 거느리며 인기몰이를 하던 그녀에게 제동이 걸렸다.
작년 5월에 열렸던 러시앤캐시채리티클래식을 준비하던 도중에 갑자기 장 腸에 문제가 생겼다. 대회가 열리기 열흘 정도 전부터 아프기는 했지만, 당시에 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프로암 도중에 ‘아 사람이 이러다가 죽겠구나’ 할 정도로 아파서 결국 포기하고 서울로 와서 병원에 갔다. 그날 당일 바로 수술실에 들어갔다. 장에 출혈이 심해서 어쩔 수 없었다. 사실 나한테는 그때가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우승을 하고 난 바로 다음 해였고 US여자오픈이나 에비앙마스터즈와 같은 큰 대회 참가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수술 후 3주 뒤부터 대회에 출전했는데 리듬이 많이 깨졌고 체력적인 문제도 있었다. 무리를 해서 해외 대회까지 나갔다 오면서 체력이 많이 고갈됐던 것 같다. 하반기 국내투어에는 큰 대회가 많았는데 결국 좋은 성적을 낼 수는 없었다. 그 때 아프지 않았던 몸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 그랬다면 작년에도 2010년에 이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양수진
한국LPGA투어 통산 4승을 거둔 양수진은 프로 데뷔 후 잊지 못하는 샷이 하나 있다. 그녀는 이 샷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얼굴을 붉힐 정도로 부끄럽고,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다고 했다.
그건 최악이었다. 2010년 엘리시안컨트리클럽에서 열렸던 에쓰-오일챔피언스인비테이셔널 2라운드이자 대회 마지막 날. 대회 최종일이 악천후로 인해 취소가 됐기 때문에 2라운드로 끝났던 대회였다. 2라운드 18번 홀(파4, 369야드)의 세컨드 샷이 145미터 정도 남아있었다. 훅 바람이 불었고 약간의 앞 바람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6번 아이언으로 쳤다. 그날은 내가 마지막 조에서 플레이를 했기 때문에 갤러리가 꽤 많은 편이었다. 보통 볼이 날아가면 그린 주변에 있는 갤러리의 고개가 위로 향했다가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인데, 내가 볼을 쳤을 때는 갤러리의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가 갑자기 그린 뒤로 휙 돌아가는 것을 봤다. 알고 봤더니 볼이 그린을 넘어서 주차장까지 날아갔다. 거리 계산을 완전히 잘못했다. 그린에 올라갔을 때는 이미 내 얼굴이 창피해서 빨갛게 변해있었다. 마치 갤러리가 속으로 ‘프로 선수가 어떻게 저렇게 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홀에서 2타를 잃었다. 그 때의 세컨드 샷. 그것이 최악의 샷이었고,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는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금 더 짧은 클럽을 잡을 것이다.
그린에 올라갔을 때는 이미 내 얼굴이 창피해서 빨갛게 변해있었다.
그 때의 세컨드 샷. 그것이 최악의 샷이었고, 잊고 싶은데 잊혀지지 않는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금 더 짧은 클럽을 잡을 것이다. 양수진
원재숙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과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했고, 그 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아마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92년 4월, 한국LPGA에 입회한 그녀는 바로 일본LPGA투어에 진출했다. 일본에서 통산 6승을 거두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다가 2002년 일본투어 시드를 잃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녀는 심기일전해 일본 무대에 복귀했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2002년 시드를 잃고 한국에 들어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나갔는데, 그 때를 무르고 싶다. 그 선택은 실수였다. 그때는 10년 전이니까 지금보다야 젊지 않았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시드를 잃었지만 어느 정도 추스르고 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때는 일본에서 재도전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국내 투어도 어느 정도 안정화되었고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투어 생활을 했어야 했다. 나는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국내 무대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국내 투어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좀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일본을 택하지 않고 한국에 남았다면, 지금은 보는 시야도 더 넓어졌을 것이고 한국 골프에 대한 이해도도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그 점이 무척 아쉽다.
유소연
2008년 한국여자오픈은 그녀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신인으로 첫 메이저 대회에서 신지애와 연장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며 그녀의 이름을 팬에게 각인시켰던 대회이기 때문이다. 반면 아쉬움이 가장 큰 대회이기도 하다.
2008년 한국여자오픈 마지막 라운드 17번 홀(파4, 356야드)의 어프로치 샷을 무르고 싶다. 최종일에 비가 워낙 많이 내리고 있었고, 오르막 라이라서 러닝 어프로치를 하는 것이 훨씬 좋았을 텐데 당시에는 58도 웨지를 선택했다. 칩 샷으로 보낸 볼은 홀컵보다 1.5미터 짧은 곳에 멈춰 섰다. 그때 우승을 했던 (신)지애 언니는 같은 홀에서 버디를 잡았고, 나는 그 퍼트를 놓치면서 보기를 기록했다. 순식간에 타수가 좁혀져 동타가 됐고, 플레이오프에서 패해 2위에 오르는 데 만족해야 했다. 엄청난 비를 맞고 천둥번개가 치는 와중에 플레이 했던 당시 상황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날씨도 멀리건을 받았으면 한다. 쾌청한 날씨로.
윤채영
윤채영보다 우승과 인연이 없는 선수가 또 있을까? 2005년 한국LPGA에 입회한 윤채영은 번번히 우승 문턱에서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다. 4년 전 휘닉스파크골프클럽에서 열렸던 삼성금융레이디스챔피언십은 그 백미였다.
나는 2라운드까지 선두였던 안선주와 5타 차이기는 했지만, 챔피언 조에 들어가서 플레이를 했다. 하지만 이미 타수 차이가 많이 났던 터라 마음을 비우고 경기에 임했다. 그런데 2번과 3번 홀에서 연속으로 버디를 잡으면서 천천히 따라잡기 시작했다. 그날만 2언더파로 가고 있었고 7번 홀(파5, 506야드)에서 세 번째 샷으로 그린에 잘 올려놓은 상황이었다. 길지 않은 퍼트를 남겨놓았는데, 거기서 왔다 갔다 4퍼트를 하고 말았다. 무슨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선두를 추격하려는 중요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이후에도 버디를 잡으면서 계속해서 잘 따라갔다는 점이다. (안)선주가 10언더파로 경기를 마쳤고 내가 8언더파로 끝냈다. 그 더블 보기만 아니었다면 동타를 이뤄 플레이오프에 나가서 생애 첫 우승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7번 홀 첫 번째 퍼트, 정말 무르고 싶다.
이보미
‘스마일 캔디’라는 별명을 가진 이보미는 동료보다 2년 늦게 1부투어에 발을 들였다. 대학 문제도 있었고, 한국LPGA 2부투어인 드림투어에서 2년간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2007년 한국LPGA에 입회했고 그 해 2부투어에서 활동했다. 사실 대학을 다니면서 프로 데뷔가 좀 늦어 내 또래 선수들은 이미 1부투어에서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1년 정도 늦어진 것에 대해서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무안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시드순위전에 나갔는데 첫날 81타를 쳤고 둘째 날 72타를 쳐 합계 153타로 112위에 올라 예선 탈락했다. 처음으로 쌀쌀한 날씨에 플레이를 하면서 허리에 무리가 갔고 부상으로 이어졌다. 당시 시드순위전이라는 부담도 컸었고 날씨가 워낙 춥다 보니 긴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옷도 얇게 입었고 핫팩 같은 걸 붙이는 것도 몰랐었다. 무지했다. 결국 시드순위전에서 떨어지며 친구들보다 또 1년이 늦어지게 됐다. 다시 2부투어에 출전했고 그 해 상금 랭킹 1위에 올라 1부투어에 나갈 수 있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2007년 시드순위전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플레이를 해보고 싶다. 하지만 멀리건이 주어져 1년을 단축시켰더라도, 동기 부여라는 측면에서는 마이너스 아닐까?
이인우
2005년 기아로체비발디파크오픈우승 이후 올해 볼빅-힐데스하임오픈에서 승수를 추가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그가 5년 전 한국오픈에서 겪은 뼈아픈 경험이 올해 우승을 거두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2007년 코오롱하나은행한국오픈 4라운드 경기 시작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셋째 날 비제이 싱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나는 공동 2위로 마무리했다. 마지막 날 비제이 싱과 마지막 조에서 경기를 펼쳤다. 사실 그때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비제이 싱과 플레이를 한다는 자체에 나는 이미 주눅이 들어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싱’ 앞에서 내 자신이 한참 작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넘기 힘든 산’이라고 생각해버렸다. 당연히 그날의 플레이는 잘 될 턱이 없었고 결국 아쉽게 15위로 경기를 마쳤다. 지금 와서 생각하건데, 제아무리 유명한 선수라고 해도 항상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 그날 내가 갖고 있던 기량을 최대한 발휘했다면 결코 넘지 못할 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4라운드 시작 전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 물론 기량이 떨어질 수 있지만 강한 정신력만큼은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근성으로 물고 늘어지면 못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사실 대회마다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임한다. 그때 아픈 경험은 투어 생활을 하고 상반기에 우승하는 데 큰 교훈이 됐다.
엄청난 비를 맞고 천둥번개가 치는 와중에 플레이 했던 상황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날씨도 멀리건을 받았으면 한다. 유소연
이태규
2009년은 최고의 한해였다. 4월에 열린 한중투어 KEB인비테이셔널Ⅰ에서 첫 승을 거두며 설움을 깨끗하게 씻었기 때문이다. 그 해 아쉬웠던 대회도 있었다.
2009년 가을에 열린 한중투어 KEB인비테이셔널Ⅱ 3라운드를 무르고 싶다. 당시 2라운드 때까지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 해 4월에 한중투어 KEB인비테이셔널Ⅰ에서 우승을 경험했던 지라 자신이 있었고, 두 번째 우승에 대한 욕심도 컸다. 그런데 바로 욕심이 화근이 됐다. 3라운드 첫 번째 홀부터 더블 보기를 기록하며 잘 풀리지 않았다. 처음 우승했을 때는 우승에 대한 기대나 욕심 없이 막연히 플레이에만 최선을 다했던 것 같은데, 우승을 기대하고 경기를 펼치니 샷에 집중하기보다 다른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 결국 그날 김대현이 우승했고 나는 10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욕심을 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플레이를 할 것이다.
정일미
1999년 상금 랭킹 1위에 오르며 그 해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지만, 기억에 남는 대회와 홀이 있다. 레이크사이드 18번 홀. 그녀는 아직도 그 때의 퍼트가 가장 후회된다고 말한다.
1999년 6월, 레이크사이드컨트리클럽에서 열렸던 LG019여자오픈 마지막 날 18번 홀(파4, 323야드) 파 퍼트를 무르고 싶다. 30센티미터 내리막 버디 퍼트를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깝게 놓쳤다. 거기서 나는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숏 퍼트가 들어가지 않자 울컥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물론 그럴 수 있다.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30센티미터 퍼트는 가끔 실수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10센티미터도 안 되는 거리의 탭인 파를 시도했는데 홀컵을 타고 돌아나왔다. 당시 플레이오프에 김희정과 이정연이 7언더파로 나가게 됐는데 나는 6언더파로 경기를 마쳤다. 그 탭인 파만 성공했더라도 연장에 함께 나갈 수 있었지만 짧은 거리에서 3퍼트를 하고 말았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볼 마크를 하고 다시 정비를 해서 플레이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배우기도 했지만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하지만 그것이 자극이 되어 그 해 생애 첫 상금 랭킹 1위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다행이다.
조민규
2007년 국내 투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일본프로골프투어 JGTO에 진출했다. 지난해 간사이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2010년에는 국내 투어 시드까지 확보해 현재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년전, 세가세미 연장전 4번째 홀 첫 번째 퍼트에 멀리건을 주고 싶다. 오사나이 마모와 소노다 순스케와 연장전을 치렀다. 소노다 순스케는 두 번째 연장전에서 떨어지고, 오사나이 마모와 나는 네 번째 연장전에 돌입했다. 첫 번째 퍼트 전에 캐디를 맡은 친형이 “홀컵 근처에 볼을 붙여서 파로 마무리 하자”라고 했는데 나는 내리막이었던 첫 번째 퍼트에서 한 번에 성공시키려다가 볼이 홀컵을 지나치는 바람에 3퍼트로 보기를 기록했다. 반면 오사나이는 파를 잡았고 나는 아쉽게 우승을 놓쳤다.
조영란
2007년 KB국민은행스타투어 5차대회에서 생애 첫 우승을 차지했던 조영란에게 가장 무르고 싶었던 순간은 바로 이듬해 함평다이너스티에서 열렸던 KB국민은행스타투어 1차대회였다.
2008년 KB국민은행스타투어 1차대회에서 (조)아람 언니, (안)선주와 함께 플레이오프에 나갔다. 18번 홀(파4, 387야드)에서 치러진 연장 첫 홀에서 승부가 갈렸는데 아람 언니가 6미터짜리 긴 훅 라인의 버디 퍼트를 성공시켰다. 당시 선주는 파로 홀 아웃 했고 나는 2.5미터 정도의 짧은 버디 퍼트를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그때 아람 언니가 내 뒤쪽에서 퍼트를 했기 때문에 유심히 지켜봤었다. 오른쪽 홀컵 쪽을 향해 무척 크게 돌아서 들어가는 퍼트였다. 그래서 내가 봤던 라인보다 조금 더 봤다. 그런데 그 퍼트가 빗나갔고 결국 아람 언니가 우승을 했다. 만약 언니의 퍼트를 참고하지 않고 그냥 본대로 쳤다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아람 언니의 그 퍼트를 멀리건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러면 언니가 삐칠 수 있으니까 그것보다 내 버디 퍼트를 무르고 싶다. 이것을 멀리건 받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2007년에 우승하고 2011년 ADT캡스챔피언십까지 무려 4년 동안 우승 없이 보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버디 퍼트를 성공하고 연장에 나가서 우승을 차지했더라면, 2승을 거두는 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을 텐데,
주흥철
올해 프로 7년째로 접어들었지만 아직 우승이 없다. 모든 대회가 아쉬울 법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쉬웠던’ 대회가 있기 마련. 그는 씁쓸하게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로 우승을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008년 조니워커블루라벨오픈 마지막 날 5번 홀을 무르고 싶다. 파4 홀이었는데 그 전 홀까지만 해도 단독 선두였다. 그런데 그 홀에서 오비 OB를 냈다. 전날 그 홀에서 누군가 OB를 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티 박스 위에 서니 갑자기 OB 말뚝이 선명하게 보였다. 갑자기 불안해졌고, 결국 OB를 냈다. 우승 컵은 강욱순 프로의 차지가 되었고 나는 2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 후 많은 후회와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 볼이 똑바로만 날아 갔더라면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멀리건을 주었다면, 일찍 첫 승을 거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전날 그 홀에서 누군가 OB를 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티 박스 위에 서니 갑자기 OB 말뚝이 선명하게 보였다.
갑자기 불안해졌고, 결국 OB를 냈다. 주흥철
최진호
지난해 3월 결혼한 최진호는 올 봄 득남했고, 메리츠솔모로오픈에서 우승까지 챙겼다. 통산 3승. 그는 올해 우승 원동력으로 가족의 힘을 꼽았다. 그런데 그는 ‘오래전 아내에게 잡힌 약점이 있다’면서 ‘그 일을 무르고 싶다’고 했다.
아내와 7년간 연애를 통해 지난해 3월 결혼을 했고 올 봄 아들 승언이까지 얻었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아내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사실 아내와 연애하기 전 친구 사이였을 때 내가 좋아하던 여자에 대한 연애 상담을 지금의 아내가 해줬기 때문이다. 그때 추억이 지금은 상당한 약점이 되어 그때 부끄러웠던 일을 지우고 싶다. 현재 내 아들과 든든한 가정을 꾸리게 해준 아내를 정말 사랑한다. 특별히 다른 건 멀리건을 받을만한 게 없다. 나에게 슬럼프 시절도 있었지만 그때는 얻은 게 정말 많아서 멀리건은 사용하고 싶지 않다.
최혜용
주니어 시절부터 유소연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라이벌이었다. 함께 국가대표를 지냈고 도하아시안게임에서 단체전 금메달을 합작하기도 했다. 2008년에 한국LPGA 1부투어에 출전해 나란히 1승씩 거뒀지만, 최혜용이 신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2009년에는 유소연이 최혜용을 두산매치플레이챔피언십에서 9홀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눌렀고, 상금 랭킹 2위에 올랐다. 2009년 최혜용은 유소연에게 한 번 더 우승컵을 내준 일이 있었다.
엘리시안제주컨트리클럽에서 열렸던 에쓰-오일챔피언스인비테이셔널 둘째 날까지 선두였다. 그런데 마지막 날 3오버파 75타를 치며 3위에 그쳤다. 우승은 (유)소연이가 했다. 최종일 12번 홀(파3, 170야드) 두 번째 샷에 대한 멀리건을 받고 싶다. 12번 홀 그린 주변에서 10미터도 채 되지 않았던 어프로치 샷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에이프런이었는데 퍼트를 잡을까 웨지를 잡을까 고민하다가 웨지를 잡고 어프로치 샷을 했는데 핀을 5발자국 정도 지나쳤다. 12번 홀 그린은 핀 뒤로 가게 되면 급격한 내리막 퍼트를 해야 한다. 그 홀에서 보기를 했는데 나한테 실망을 많이 했다. 더 이상 버디를 잡을 수 없었고 소연이는 13번 홀부터 3개 홀 연속 버디를 잡아내 결국 역전패했다. 만약 멀리건이 주어진다면 핀 앞으로 짧게 떨어뜨려 파 세이브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럼 이후 홀에서 추격할 여지가 분명 있었을 것 같다.
한장상
한국 골프의 ‘살아있는 전설’. 1958년에 프로에 입문해 통산 22승(국내 19승, 해외 3승)을 기록했다. 특히 일본오픈(1972년) 우승 후 이듬해에 초청 자격으로 한국인 최초로 마스터즈에 출전하기도 했다.
1973년 마스터즈 12번 홀(파3, 155야드)에 멀리건을 주고 싶다. 이 홀은 티 샷이 어려운 ‘아멘’ 코스 숏 홀로 그린 경사가 연못 방향으로 있었다. 6번 아이언으로 펀치 샷을 구사했고 티 샷은 그린 중앙에 정확히 안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반대편에서 안타까운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린에 떨어진 내 볼이 백스핀을 먹어 연못으로 굴러내려가 빠져버린 것이다. 드롭한 볼도 라이가 좋지 않아 결국 더블 보기를 기록했고, 그 홀에서 무너지면서 메이크 컷에 아슬아슬했다. 더군다나 마지막 홀에서 2미터 내리막 퍼트까지 놓쳐 보기를 하는 바람에 2라운드 합계 8오버파를 기록했다. 컷이 7오버파였는데 1타 차로 탈락을 하게 됐다. 그 일은 내 평생 아쉬움으로 남는다.
홍란
그녀에게 2010년 에비앙마스터즈는 아쉬움이 큰 대회였다. 처음으로 참가해 기대가 컸었는데 날씨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2010년 에비앙마스터즈 둘째 날 마지막 홀에서 친 세 번째 샷을 무르고 싶다. 사실 그 대회에서 예선 탈락했었다. 우승을 아깝게 놓친 것도 아니고, 예선 탈락했던 대회가 가장 아쉽다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생각이 가장 많이 난다. 그때 파5 마지막 홀에서 세 번째 샷을 남겨 놓고 천둥번개로 인해 경기가 잠시 중단됐었다. 때문에 전체적인 스코어도 알 수 있었고, 메이크 컷을 할 수 있는 타수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있었다. 계산을 해보니 마지막 홀에서 그린에 온을 시키고 2퍼트로 파만 잡아도 메이크 컷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코스로 나가 서드샷을 했는데 그린 뒤에 있는 벙커에 볼이 박혀버렸다. 핀이 그린 뒤쪽에 꽂혀있어 핀보다 약간 뒤를 겨냥해서 친 것이 스핀을 먹지 않아 그래도 벙커로 들어갔다. 내리막 벙커 샷을 남겨두었는데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한 번에 탈출을 못했고, 두 번 만에 나왔지만 그때는 이미 맥이 풀린 상황이었다. 파를 기록하지 못하면 미스 컷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순상
지난해 한국PGA 대상을 수상한 그는 유러피언PGA투어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퀄리파잉스쿨 Qualifying School에서 6라운드 합계 5언더파 423타로 공동 45위에 머무르며 시드를 얻지는 못했다.
지난해 참가한 유러피언PGA투어 Q스쿨 6라운드, 14번 홀 티 샷에 멀리건을 주고 싶다. 14번 홀은 해저드를 넘겨 공략해야 하는 210야드의 내리막 파3 홀이었다. 4번 아이언으로 정확히 맞혀야 그린에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티 샷한 볼이 워터해저드에 빠지는 바람에 더블 보기를 기록했다. 그 홀부터 멘탈이 무너지며, 다음 홀에서도 실수가 이어졌고 생각한 대로 샷을 하는 게 힘들었다. 13번 홀까지의 페이스만 유지했더라도, 고대하던 유러피언투어 Q스쿨을 통과했을 것이란 생각에 큰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한 순간에 대해 후회를 하거나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아쉬웠던 기록도 모두 나에게는 값진 경험이기 때문이다.
홍진주
2010 시즌을 앞두고 미국에서 국내 무대로 돌아왔고 그 해에 결혼까지 하면서 신혼 생활에 푹 빠졌었다. 하지만 호사다마. 작년 하반기에 갑자기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다.
지난해 넵스마스터피스 1라운드를 전부 무르고 싶다. 상반기는 물론 바로 이전 대회까지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쩡했던 드라이버 샷이 왼쪽, 오른쪽으로 난리가 났었다. 1라운드에서 85타를 쳤다. 결국 기권까지 했고, 다음 대회인 LIG손해보험클래식 1라운드에서도 83타를 쳤다. 그 이후에 완전히 ‘멘붕(멘탈 붕괴)’에 빠지고 말았다. 원인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남은 시즌을 모두 망쳤고 시드순위전까지 가게 됐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때 드라이버를 치지 않고 플레이 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돌아간다는 상상조차 하기가 싫을 정도로 악몽이었다. 지금은 그 충격에서 거의 회복을 하고 있는 단계다.
황인춘
스물여덟 살에 데뷔해 2007년 첫 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2승을 추가하고 다음 시즌을 앞두고 훈련하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치는 바람에 상승세가 꺾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부상에서 벗어나며 2010년 다시 우승 숫자를 늘려가고 있다. 그는 부친이 별세한 그 해에 치른 대회에 대해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3년 전 조니워커클래식 마지막 홀에서의 일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처음 참가해 ‘꼭 우승을 거둬 아버지께 마지막 선물을 드리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대회였다. 17번 홀까지 선두를 달리던 나는 크게 긴장은 하지 않았다. 파만 지켜도 우승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라인을 잘못 보는 바람에 버디 퍼트를 놓쳤고, 볼은 홀컵을 2.5미터나 지나쳤다. 파 퍼트마저 실패하면서 3퍼트를 기록해 연장전으로 끌려갔다. 결국 김대섭, 맹동섭, 배상문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고, 맹동섭이 우승하며 나는 공동 2위에 이름을 올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