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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암 28경(立岩 二十八景)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는 조선 중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입암의 주인이 된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과 우헌愚軒 정사상鄭四象, 수암守庵 정사진鄭四震 및 윤암淪菴 손우남孫宇男의 영양사우永陽四友와 함께 머물며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입암서원 등 다양한 유교문화재가 보존 되어 있는 곳이다. 또 여헌과 교류한 가사문학의 대가 노계 박인로의 발자취(입암 29곡과 입암별곡)와 구한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난 산남의진山南義陣의 발상지이기도 하며 의병사상 가장 뼈아픈 패전의 장소이기도 하다. 근대에 와서는 여러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소설의 무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여헌은 이곳에 머물며 빼어난 경치에 이름을 붙이고 절경을 노래했다. 입암 28경立岩 二十八景은 입암리 솔안마을의 탁입암을 중심으로 반경 2km이내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입암십삼영’, ‘입암기’, ‘입암정사기’ 등 그가 남긴 작품은 문학사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특히 여헌은 28경의 이름을 붙이고, 이름을 붙인 연유를 ‘입암기立巖記’에 설명하고 있다. 28경의 번호는 여헌의 ‘입암기’에서 28경을 설명한 순이다.
1. 입암(立巖)
죽장면 사무소에서 가사천을 따라 300여m 가다 보면 솔안마을 앞개울 도로건너 20여m 높이의 바위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바위가 ‘입암立巖’이다. ‘입암리’의 지명도 이 바위 때문에 생겨났다. 입암은 다른 바위와 달리 강바닥 바위에서 바로 솟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 여헌 장현광이 이름붙인 입암 28경 중 가장 뛰어난 절경이며 28수㝛의 첫 번째 별로서 스물여덟 곳의 종주로 삼았다. 이 때문에 뛰어날 탁卓자를 붙여 ‘탁립암卓立岩’이라고도 불렀다. 여헌은 ‘입암이 기울지 않고 의지하지 않으며 홀로 우뚝 솟아 바라보면 둥근 듯 하고 나아가 보면 네모진 듯하며 앞에서 보면 기울지 않고 돌아보면 치우치지 않으니 중정中正하다고 이를 만하며, 맑은 물을 끼고 깊은 못에 임해 있으니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 산과 물을 좋아하는 자들에게 더 없이 좋은 곳’이라며 극찬했다. 여헌은 이 바위처럼 세속에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음을 본받을 것을 가르쳤다.
2. 기여암(起予巖)
일제당 뒤쪽에 절벽을 이룬 바위가 산처럼 우뚝 솟아 있다. 입암, 계구대, 기여암의 세 바위 중 가장 뒤쪽에 있고, 높이가 4~5길이가 될 만하다. 높이 솟고 우뚝하여 구름이 주둔駐屯해있는 듯한 곳으로 신선이 사는 곳의 풍취가 있다. 바위를 바라보는 이를 엄숙하고 상쾌하며 마음과 생각이 깨끗하고 원대하여 자연히 흥기興期하여 ‘나를 일으키는 바위’라는 뜻에서 논어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 ‘기여암’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여헌이 이 바위를 통해 온고해진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3. 계구대(戒懼臺)
계구대는 일제당 서편에 삼면이 절벽처럼 서 있는 바위다. 계구대 위에는 제법 널찍한 평지가 있어, 10여 명이 앉을 만하고 차를 끓이고 술을 데우며 풍류를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다. 그 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면 고소공포증을 느낄 정도로 삼면이 모두 직각으로 이뤄진 절벽이다. ‘대 위에 앉으면 항상 깊은 못에 임한 듯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계구대’라 하였다. 계구戒懼는 예기, 중용과 좌씨 등에 나오는 말로 ‘도를 떠나지 않도록 경외敬畏하여 마음에 천리본연天理本然의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4. 구인봉(九仞峯)
계구대에 앉아 정남쪽으로 개울 건너 마주 보이는 작은 봉우리가 구인봉이다. 아홉 길의 상당히 작은 산이다.
동쪽으로는 절벽으로 이뤄져 있어 피세대가 있는 쪽에서 보면 봉우리가 잘 나타나 보인다. 마치 입암을 향하여 읍揖하는 형상으로 산이라기보다는 언덕 정도로 보면 적당하다. 구인봉은 서경書經의 ‘여오편旅獒編’에 나오는 ‘구인공휴일궤九功虧一簣’에서 따온 말이다. 아홉 길의 작은 산을 쌓아올리는데, 한 삼태기 양의 흙이라도 게을리 쌓으면 아홉 길의 산이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학문 역시 끝까지 전력을 다해야 그 학문을 완성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다.
5. 토월봉(吐月峯)
입암 동쪽에 위치하며 입암서원 맞은편에서 보면 1시방향 뒤쪽 오른편에 둥근 봉우리가 보인다. 계구대에 앉아서 보면 달이 떠오르는 것이 보이는 이 봉우리가 ‘달을 토해내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토월봉’이다. 교훈적 가탁假託없이 서정적으로만 사물을 파악한 이름으로 여헌이 머리를 식히고 감성을 돋우는 소재로 삼은 듯하다. 여헌은 꽃봉오리가 터지지 않은 부용이 물 위로 나온 듯하여 ‘상천봉’이라 불렀는데, 치우치지 않은 원만한 인격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6. 소로잠(小魯岑)
솔안마을을 안고 둘러선 산봉우리들이 은근히 높고 가파르나 계구대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달바위산이 비스듬히 가사천을 향하여 내려와 있다. 소로(小魯)는 ‘노나라가 작다’는 뜻으로, 공자는 동산(東山)에 올라가 노나라가 작다고 했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가 작다고 했다. 공자가 우리나라를 한번 보는 시야가 눈에 차지 못하니 이 산을 소로라 할 것이라 하여 여헌은 ‘소로잠’이라 이름을 붙였다.
7. 산지령(産芝嶺)
욕학담 가기 전 오른쪽으로 깊고 그윽한 감실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여헌은 ‘토월봉 동쪽에 깊고 빼어난 고개가 있어 반은 감추어져 있고 반은 드러나 있으며 사람들의 발자취가 어려워 세상의 소식에서 멀어진 이들의 거처가 될 만하다.’ 하여 상산商山의 깊은 골짜기로 여겨 ‘산지령’으로 이름을 붙였다. 지초芝草가 반드시 이곳에서 생산되지 않고, 다만 사호四皓가 몸을 숨길만한 상산商山으로 여겼으며, 내면의 수양을 통해 경敬을 찾고 수련하는 것이 약 보다 더 효염이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8. 함휘령(含輝嶺)
계구대에서 보면 동남쪽으로 구인봉이 온 곳으로 서원 앞산이 ‘함휘령’이다. 둥글고 높고 농후하여 울창하고 밝게 드러나 함휘라 하고, 주희朱熹의 ‘옥이 묻혀 있으니 산이 빛을 머금고 있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는 군자가 덕을 쌓아 순수함이 얼굴에 나타나고 덕스러운 모양이 등에 가득함을 비유한 것이다.
9. 정운령(停雲嶺)
죽장면 사무소 뒤편 봉화봉에서 죽장초등학교 앞산에 이르기 까지 보이는 산등성이가 ‘정운령’으로 채약동의 뒷산 정상이다. 산이 높고 멀어서 늘 구름이 덮여 있는 듯하여 ‘구름도 쉬어가는 고개’라는 뜻으로 구름이 변화무상하고 가고 오는 흔적이 없는 것이 거두고 펴며 행하고 감추는 도를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10. 격진령(隔塵嶺)
‘격진령’은 입암리의 입구 쪽 초은동 뒷산으로 영천과 경계가 되는 수석봉 일대의 산이다. 진세塵世와 은세隱世로 나눠지는 고개로 티끌세상을 멀리하고, 속세의 먼지를 막아 주는 산, 즉 입암에 은거하면서 이 산수 속에서 은둔의 삶을 추구하며 세상의 뜬 구름과 같은 부귀와 바꿀 수 없는 여헌의 마음이 담겨 있다.
11. 경운야(耕雲野)
죽장정류소에서부터 가사천변의 평지동 마을 앞 일대의 들판을 말한다. 아직 동봉이 정착한 초기라 그리 넓지 않은 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땀 흘려 일하며 사는 삶이 좋은 일이라며 영양사우인 동봉의 후손들이 일군 이 들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여 낮게 내려온 운무를 시적으로 표현하여 ‘구름이 밭을 가는 들판’이라는 뜻에서 ‘경운야’로 이름이 붙여졌다.
12. 야연림(惹煙林)
구인봉이 있는 산줄기를 따라 가사천 남쪽 개울가에 늘어서 있던 숲이다. 이 숲은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우거진 숲이었다. 시냇물이 흐르는 곁에 숲이 연하여 마을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거나 노는 손님들이 차를 끓이고 고기를 삶을 적에 아련히 피어오르는 연기 한 가닥이 야기惹起하여 ‘야연림’이라 하였다.
13. 초은동(招隱洞)
포항에서 입암을 향해 들어오는 협곡에 입암 28경의 초입인 까치소(세이담)의 맞은편에 ‘도덕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초은동’이다. 입암 28경 중 세이담과 가장 바깥쪽에 있는 경물이다. 벼슬길에 혼미하여 빠져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긴 것이라 하였으니 귀거래를 권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14. 심진동(尋眞洞)
여헌이 ‘골짜기가 시내 위에 있는 것을 심진동’이라 해서 학자에 따라 위치에 대한 오류를 가장 많이 범하는 입암 28경중의 하나다. 가사천을 따라가면 욕학담이 있는 협곡 위의 골짜기. 즉 매현리 쪽이 심진동으로 이다. 특별한 경치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진리를 찾아 나서는 골짜기’란 뜻으로 참을 간직하고 은둔하는 자를 그리워하나 만나 볼 수 없는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다.
15. 채약동(採藥洞)
죽장면 사무소 뒤편에 있는 봉화봉 좌우로 흘러내리는 골짜기의 골안을 말한다. 구체적인 한 승경이 아니라 정운령과 조화를 이룬 깊고 아득한 골짜기임을 칭한 것으로 보인다. 방외方外의 인사들이 단사丹砂나 석수石髓를 가지고 그르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가로이 거처하며 병을 치료하여 수양하고 성명性命을 보전하는 데에는 약물이 없을 수 없는데 이 골짜기에 이러한 약물이 많이 생산되므로 ‘채약동’이라 이름을 붙였다.
16. 경심대(鏡心臺)와 17. 수어연(數魚淵)
입암의 정면 냇바닥에 펼쳐져 있는 암반이 있고, 그 암반 사이에 가장 깊고 선명한 못이 있다. 연못의 좌우에는 돌이 노출되어 길게 늘어서 있는 곳이 있다. 흐르는 물이 불어나면 잠기게 되고 수위水位가 떨어지면 드러난다. 그러나 잠기게 될 때가 적고 나올 때가 많은 바, 이 돌에 앉으면 못을 굽어볼 수 있다. 혹 몸을 씻기도 하고 혹 양치질하면서 노는 물고기가 오고 가는 것을 구경할 수 있으므로 이에 이 돌을 ‘경심대’라 하고, 이 못을 ‘물속에 노는 물고기를 하나하나 셀 수 있다’고 ‘수어연’이라 이름 하였다.
18. 피세대(避世臺)
구인봉의 동쪽면은 절벽으로 되어 있다. 절벽 아래로 소를 이루며 물이 흐른다. 노계 시비가 있는 쪽에서 보면 절벽의 하단부에 작은 방처럼 팬 곳이 있고 제법 넓은 대가 있다. 이곳을 ‘피세대’라고 한다. 여헌은 ‘초옥 수간을 지을 수 있겠는데 다만 높지 않아서 물이 불으면 잠기므로 짓지 못하겠다.’고 했다. 뒤로는 절벽을 이루고 앞으로는 깊은 물이 있어 세상과 단절된 듯 아늑하고 깊고 조용하여 외인外人이 접하지 못하는 듯하여 ‘피세대’라 이름 하였다.
19. 상엄대(尙嚴臺)
피세대에서 냇가의 둑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건너편에 바위의 맥이 내려온 것이 보인다. 현지인들은 자라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자라소’라 부른다. 산 쪽 벼랑에 한 대가 있어 시내를 굽어보며 낚시를 하기 적합하여 중국 한漢나라의 명사名士였던 엄자릉嚴子陵을 숭상한 뜻으로 ‘상엄대’라 이름 지었다. 엄광嚴光은 벼슬을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낚시질하며 은거한 후한後漢 시대의 인물이다. 여헌은 벼슬을 거절하며 은거한 한 자신의 모습을 엄자릉에 비유한 것이 아닌 가 생각되어진다.
20. 욕학담(浴鶴潭)
입암서원에서 도로를 따라 600여m 올라가다보면 가사천과 전읍천이 만나는 곳 아래에 물이 맑고 암벽이 절경을 이루는 곳이 나온다. 지금은 아쉽게도 못은 없어졌고, 작은 폭포를 이루었던 바위에는 근래에 만들었던 시멘트 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욕학담’이란 ‘학이 목욕하는 연못’이라는 뜻이며, ‘학담’ 또는 ‘학욕담’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여헌은 ‘매끄럽고 빛나며 깨끗한 바위는 유리를 깔아 놓은 듯 하고 동쪽의 암벽은 이끼와 푸른 등라가 울창하게 덮여 있어 수석이 기이하고 깨끗함을 나타낸 것이다.’고 설명한다. 지금은 동쪽의 바위에 클라이머들의 등반 연습장소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1. 화리대(畵裏臺)
향옥교(響玉橋) 아래 산 쪽 냇가에 비스듬히 서 있는 바위가 화리대다. 경치가 특이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평범하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 시 가사천변에 도로를 만들면서 훼손되어 더더욱 볼품이 없어졌다. 대 앞의 소도 많이 메워져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여헌은 홀로는 기이하지는 못하나 산과 봉우리, 바위와 돌이 어우러져 한눈에 거두어 볼 수 있는 것이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려우며 마치 그림 속에 있어 진면목이 아닌 것 같아 ‘화리대’라 이름을 붙였다 한다.
22. 합류대(合流臺)
동쪽에서 흐르는 가사천과 북쪽에서 흐르는 자호천이 합류한 물은 금호강의 지류가 된다. 이때 가사천과 자호천은 서로 먼 길을 달려와 아름다운 바위가 겹쳐 언덕을 이루며 그 앞에 만나 합류하니 이를 ‘합류대’라고 한다. 자호천과 가사천이 만나기 직전 멋진 바위는 아직도 남아 있지만, 지금은 대를 많이 허물고 입암1교가 놓여 아름다운 절경을 잃었다. 또, 다리 아래 고르지 못한 암반에는 아름다운 바위가 절경을 이루었는데 일제강점기 시에 바위를 부수어 제방을 쌓아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있다.
23. 조월탄(釣月灘)
합류대 바로 아래 넓고 깊은 못이 중국의 명승지인 위수 渭水의 북쪽이 이 보다 나을까 하여 ‘조월탄’이라 이름을 붙였다. 산이 모두 멀리 있어 달빛을 먼저 받아 밤낚시하기에 마땅하니 강태공이 강호에서 낚시를 하며 일생을 마치듯 ‘달빛을 낚는 여울’이라는 뜻으로 여헌도 그를 따르고 싶어 한 듯하다. 과거에는 제법 깊고 넓었으나 지금은 많이 메워져 옛 풍경을 찾아 볼 수 없다.
24. 세이담(洗耳潭)
초은동의 입구에 있는 까치소가 ‘세이담’이다. 입암으로 들어오는 이 협곡峽谷을 진세塵世와 선계仙界, 선인仙人과 범인凡人의 경계로 하여 신선이 사는 이곳으로 오려면 소유 許由와 허부巢父처럼 진세에 더럽혀진 귀를 씻는 곳이라 하여 ‘세이담’이라 했다. 지금은 도로 확장공사로 모습이 훼손되고 소沼도 메워져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당시에는 절벽위로 난 오솔길로 다녔는데 1930년도 후반에 도로를 만들고 근래에 확장공사로 점차 모습을 잃어갔다.
25. 향옥교(響玉橋)
솔안 마을 구인사로 들어가는 곳에 잠수교가 있다. 그 곳에 흰 청석이 깔려있고 돌다리로 사용한 바위들이 많이 보인다. 옛날 야연림의 오솔길을 거쳐 마을로 들어가는 돌다리가 있었다. 입암 앞을 흐르는 물이 소를 만들고 여기서 여울을 만들어 돌다리 사이로 흐르면 옥 소리 같은 물소리가 들려 ‘향옥교’라 불렀다. 지금은 돌다리가 없어지고 잠수교가 생겼지만 옛 돌다리의 부문이었던 암반은 그대로 나아 있고, 입구 쪽 넓은 암반은 휴로단休老壇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26. 답태교(踏苔橋)
계구대에서 입암 오른쪽(입암 서편)으로 내려와 수어연과 경심대로 가기 위한 돌다리가 있는데 숲속에 있어(지금은 숲이 없어짐) 돌바닥에 이끼가 잘 자라므로 이끼가 낀 바위를 밟고 지나야 해서 ‘답태교’라 불렀다. 이름처럼 실제로 돌다리 모양을 한 것도, 다리 구실을 한 것도 아니고 다만 몇 개의 큰 돌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어 그 돌을 밟고 지나 다녔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져 흔적이 없다.
27. 물멱정(勿冪井)
물멱정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고 실존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일제당 옆 민가가 있는 곳에 옛날 물이 찬 작은 샘이 하나 있어 그 근처가 아닌가? 추측한다. 여헌은 주역의 정괘井卦․상육上六․효사爻辭를 취하여(우물을 긷고 나서 그 뚜껑을 덮지 마라, 믿음이 있어 크게 길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물멱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마을이 커지고 인구가 늘어나자 수량이 부족하여 다른 곳에 샘이 생기면서 자연 없어지게 되었고, 여헌이 만활당에 기거할 때 뒤편 느티나무 아래에 사용한 샘을 여헌 사후 200여년 이후 향토인인 포암 권주욱, 함취정 손동걸은 이 우물을 ‘물막정勿幕井’으로 불렀다. 이것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지금도 그렇게 믿는 학자들이 많다. 입암 28경 중 유일하게 실형과 위치가 명확하지 않은 경물 중의 하나다.
28. 상두석(象斗石)
계구대 아래에서부터 일제당(기여암) 앞 까지 주위의 바닥에는 큼직한 바위들이 깔려 있다. 모양이 북두칠성과 유사하여 ‘상두석’이라 이름을 붙였다. 여헌이 머물 때는 7개가 있었지만 지금은 여러 번의 하천 정비 사업으로 그 개수와 위치가 많이 변하였다.
입암 28경의 위치 및 입암리 지역 명칭
(별도)
탁입암 주변 28경의 위치
(별도)
權寧世
첫댓글 입암28경의 위치가 학자마다 주장하는 장소가 다른데 우리 문중에서는 앞으로 위의 글을 참고하셔서 안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년간 연구하고 조사한 결과입니다.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제당의 방 이름도 바뀌어 있고 일제당 안내판의 제자가 틀리게 표기된것도 있습니다. 빨리 고쳐져야 할 것 같습니다.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아지매 새해에도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위 입암 28경 자료 잘보고 카페에 잘 보관될것으로 봅니다.
한가지 생각할 점은 과거의 사실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눈으로 경치가 아름답거나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답사해 본 바로는 대표적인 곳인 탁입암이나 기여암이나 합류대나
모두 지형이 변형되었거나 훼손되어서 솔직히 국내의 많은 명소에 비해 실망스럽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고민해봐야 할 거 같습니다.
몇곳이라도 참 절경이구나할 곳을 찾거나 잘 꾸며는것이 위치 문제보다 현실적으로 더 중요해 보입니다.
설날 고향의 명소를 돌아보며 추억을 회상게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것은 우리가 다듬어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너무나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입암 28 경 위치자료 등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리고 벌써 몇 년 전인 거 같은데 저는 당시 3~4권을 이곳을 통해 구입해 숙부님들께 전해드렸던 거 같습니다만,
지금 이곳에 계신 일가 중에서 형님이 저술한 '입암28경' 책자를 모르고 또 못 보신 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책자에 대한 소개와 구입 방법에 대해 안내해주시면 어떨까요?
'죽장 이야기'는 발행당시 급히 출판하느라 오자와 탈자가가 많았고, 추가할 내용과 필요없는 내용을 삭제하여 다시 출판하려고(재판) 하고 있으니 책이 출판 되면 문중을 통해 배부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