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학생회장출마포스터~
"공약을 만화로 풀어 재미있게 선거운동"
저의 20대의 젊음은 암울한 시대의 그늘진 곳에서 있었습니다. 그곳이 제가 있어야할 곳인 줄 알았습니다. 미련하게 비켜가지 못하고 저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1978~9년 홍천고등학교 재학 중에 박정희유신정권을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교회에서 빌려온 가리방으로 그 시대의 감정이 담긴 글들을 한 장 한 장 등사판에 밀었던 기억이 납니다. 옹달샘이라는 작은 책을 만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어린 고등학생까지 10월유신이 장기독재정권이니 반대할 정도였으니 그 정권이 온전할리 없었습니다. 이듬해에 패망했으니까요. 세계사에서도 드문 일들이 바로 한국사에서 학생운동사입니다.
저는 고등학교졸업 후 농촌현장에서, 노동현장에서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답답한 현실을 노동자 농민들과 토론하며 싸우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점차 빨갱이(?)로 물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고등학교때 이미 의식화(?)된 전, 학교수업보다는 노가다에서 주는 술에 일당에 익숙했습니다. 노가다판을 기웃대며 질통을 져 나르고 데빵을 비비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레미콘차가 시멘트를 퍼 나르지만 당시엔 사람힘으로 힘들게 하다보니 참도 점심도 술도 푸짐히 주었읍니다. 하루 일당이 2, 3.000원 정도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책한권사고도 막걸리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노가다판에서 봉제공장으로 농판으로 산판 막장까지 남들이 이야기하는 따라지인생들을 겪은 것은 오히려 제겐 큰 경험들이었습니다.
사실 저희 집은 그렇게 유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작인들이 몇 있었고 광속에 쌀팔 여유가 있으니 작은 부자는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종가의 맏이신 아버님은 저를 미친놈으로 취급하시며 심하게 두둘겨 주시기도 했는데 어느날부터는 제가 힘이 더 세 무력으로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80년대 초, 비리의 온상이던 농협의 조합장 직선제추진운동, 외국농축산물수입반대, 농가부채탕감, 소 값 투쟁 등 농촌민주화를 위해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홍천천주교에 집결해 데모를 할 때 였는데 당시 홍천의 수많은 농민들이 경운기를 몰고 오셨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군사정권의 서슬퍼런 보안사 경찰보다 우리 농민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1983년 저는 군복무 중 악명 높은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소속부대원 전원을 대상으로 민주화관련 서명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서명부를 시민단체에 전달하고 부대복귀 중에 체포되었습니다. 행위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일은 누군가는 해야 했기에 제가 나섰던 것 같습니다. 저희 부대는 졸지에 빨갱이 부대로 낙인찍혔고 저는 긴급체포되었습니다. 보안사에 의해 소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 빨갱이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소설책에서 보던 행악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졌습니다.수날을 벌거벗긴 채 총구를 겨누는 그들의 총사이로 촘촘히 박혀 있던 별들이 그날은 유난히 밝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석방되던 어느 날, 저의 부친께서는 저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첫 말씀이 ‘거기 서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답이 없자 택시 안에서 몇 번을 더 물어보며 확인하려 하셨습니다. 부친께서는 해방 이후, 오랬동안 경찰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고문과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덕분에 부모님께 보약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제가 보약을 잘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충 제대후, 사찰기관으로부터의 감시는 저를 더욱 더 낮고 험한 곳에 두게 하였습니다. 경기도 광주의 한 콘크리트회사에서 3교대로 노동일을 할 때 였습니다. 공장에 전기가 나가보니 모현지역이 다 정전이라고 하는데 산위의 한 별장은 대낮같이 훤했습니다. 알고보니 박근혜별장이라고 하더군요. 교량의 목수일과, 철근, 미장이로 보일러공으로 결국 산판 막장까지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삶의 고단함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저는 진실로 없는 사람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작은 기쁨들을 통하여 민주주의가 싹트고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1984년 9월 어느날, 어머니께서는 망신창이가 된 저를 더이상 속세에 놔둬선 인간이 안되겠다 싶은지 형님을 통하여 저를 두촌면 가리산에 소재한 관음사에 저를 의탁해 놓으셨습니다. 열흘만에 식사를 하게되었고 50kg 남짓 나가던 몸도 다시 살이 붓게 되었습니다.절간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염불도 따라할 즈음 우여곡절 끝에 뒤늦게 다시 대학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인이지만 당시엔 강한 불가집이었습니다.
어머님의 배려로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공부와는 담을 쌓을 수 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사회과학연구회 동아리를 만들고 커리큘럼을 통하여 스터디를 하고 학생운동의 전초를 기획하며 총학생회장에도 출마하였습니다. 학생민주화와 군사정권을 타도하는 투쟁의 대열에서 그리고 87년 6월 항쟁의 함성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참 승리를 함께 얻어내기도 했었습니다.
총학생출마 당시의 비아인드를 다 밝힐 수 없지만 어머님께서 어느 날, 곱게 한복을 차려 입으시고 제가 유세하는 대학 광장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신문지에 둘둘말아 제게 주신 돈이 거금 삼백만원이었습니다. 문간방에 세준 보증금이었습니다. 검은 안경과 검정두루마기, 흰고무신을 신고 백여명의 아지단들과 함께 대학광장에서 유세하던 제 모습을 보시고 어머님은 자랑스러웠다고 하셨습니다. 자식이 형사들에 의해 미행 당하고 고초를 겪는 것을 아시면서도 저를 반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항쟁의 승리, 제도권정치의 변화,학생운동의 정점으로 점차 이념의 무게가 퇴색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경제학과를 졸업 후, 저는 (주)진양이라는 중견무역회사에 입사하였습니다. 이 회사는 국내 농수산물을 직접 수매, 제조, 가공, 수출하는 회사였습니다. 통조림제품을 브랜드화하여 유럽 일본 등에 주로 수출하였는데 저는 이곳에서 전과정을 마스터하면서 시장변화에 따라 국내유통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회사에 도저히(?) 입사할 수 없는 요주의 인물이었지만 교수님의 도움으로 낙하산으로 입사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 당시 55세의 젊은 연세에 암투병을 하시면서 제게 넥타이메고 출퇴근하는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소원이시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희망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준비하면서 다른 몇 곳에 합격한 곳도 있었지만 노조포기각서를 요구하여 거부하고 스스로 합격을 포기한 사실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어머니는 이듬해 돌아가시고~ 저는 투쟁과 다른 회사라는 기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회사에 근무하면서 제품의 브랜드를 차별화하여 당시 '신토불이'라는 말을 캔속에 처음 담았고 4호관 통조림 원터치캔도 처음 시도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템 하나하나를 개발하고 소비자나 바이어에게 새롭게 포지셔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기업들이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투쟁과 또 다른 진정한 애국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투쟁은 다른 곳에서의 투쟁이 있음을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글로벌세계경제의 흐름에서 기업의 역할은 수출신장입니다. 국제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맞추어 변화에 빨리 순응하는 것이 바로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000년 이후, 민주투쟁을 빙자하여 제 밥그릇만 챙기는 각종 이기집단들에게서 그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친기업, 반 기업정서로 이분화 하는 것에서도 식상함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회사에 있어보니 회사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노동자들이 악덕 기업주에 의해서,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권이 유린되고 최저생계조차 위협받는 일이 비일비재함을 볼 때 분노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기업가는 노동자와 동등한 노사관계를 지향하고 상생이 길을 걷습니다. 노사가 윈윈하는 사회적시스템이 필요하며 창의적인 리더쉽이 필요할 때입니다.
세계변화에 꼼짝하지 않는 탈색된 이념논쟁과 수구보수세력의 창궐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몫입니다.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그리고 회사원으로 자영업자로 저는 남들이 이야기하는 산전수전을 대부분 겪어 왔습니다. 블루에서 하이칼라로, 누가 시킨일도 아니었고, 보상받으려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아버님말씀대로 미친놈이었던거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또 다른 일을 시작합니다. 제게는 모든 것이 새로운 시작입니다. 지금의 형편을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형편을 보고 낙망하고 낙심하기보다 도전하고 부딪히는 것이 저의 삶을 붙들어주는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