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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게 결혼입니다.”(마 19:3~10)
결혼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결혼 당사자가 축하받고, 가족, 친척, 친구들은 축하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그저 나이되고 조건 되어 대충 짝 맞춰 식을 올릴 뿐 아무 기대, 생각, 의지 없이 그저 결혼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경우도 보인다. 제한된 오늘 본문만으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남녀를 지으셔서 결혼하게 하신 본뜻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도 올바른 결혼을 앞서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 일이니 함께 깊이 묵상하자.
* 3절: 한 마디만으로도 매우 남성 중심적인 사고임을 느낄 수 있지?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은 일단 당연한 것이고, 다만 제한적 이유인지, 어떤 이유든 만들기만 하면 가능한 건지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크게 두 가지로 답변하신다.
* 첫째(4~6절), 하나님이 사람을 처음 지으실 때 원래부터 남자와 여자로 지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성장하면 가장 가까운 부모로부터도 떠나 지금껏 다르게 살아온 남녀가 이젠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게, 그 어떤 이유로도 함부로 나눌 수 없는 하나님의 본래 뜻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사실 출생 때부터 우리가 결코 쉽게 풀 수 없는 비밀을 갖고 태어난다. (부모형제, 국가, 제도, 환경 등) 아무튼 부모형제 같은 혈연관계는 개인적 선택과 상관없이 평생에 걸쳐 가장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핏줄, 삶의 여건과 조건, 경험의 깊은 상관성).
그러나 결혼은 어떤가? 그런 상관성이 거의 없는 이미 성인된 남녀가 약속만으로 더 오랜 세월들을 살아간다면 그게 얼마나 큰 모험이며, 위험인가? 그런데 그 남남인 사람들이 결혼을 통해 가족을 이루며 피를 나눈 부모형제보다 실제로 더 깊은 하나가 되어간다. 그게 하나님의 본래 뜻이요, 신비다. 그래서 사람이 함부로 나누지 못한다.
* 그러면 바로 의문이 생긴다. 이혼은 결코 안 되는 것인가?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묻는다(7절). 이 배경이 되는 모세법(신 24:1~4)과 그 취지를 여기서 길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두 번째 답변에서 그 핵심을 이렇게 말씀한다.
* 그건 너희가 이미 아내 사랑함도, 부부로서의 대의를 지키려는 마음도 없이 되는대로 살다가 싫증나면 내 버리는 못된 습관에 물들었기에 할 수 없이 더 큰 부작용 막기 위해 최소한의 제한규정이라도 둔 것이지 본래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8절).→당시 유대인들은 남자 맘대로(아무런 조건과 이유 붙여) 아내를 쫓아냈다. 그러므로 최소한 규정을 아내의 간음으로 못 박아. 오늘날도 이미 사실상 부부 아닌 그저 법적 부부가 얼마나 많은가? 모세법은 그런 무지막지한 습관에 최소한의 쐐기를 박았고, 예수님은 한걸음 더 나아가 본래 하나님의 의도를 말씀하며 남자들의 자의성을 고발하신다.
* 그러니 심지어 옆에 듣고 있던 제자들조차 이 점에서는 예수님께 동의할 수 없어 한 마디 한다. “사실이 그렇다면 어떤 남자가 결혼하겠습니까?”(남성기득권에 물든 고정관념이 느껴지나?)→결혼조차도 손익계산을 따져 뭔가 이득이 있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생각이다. 오늘날 남자고 여자고 결혼에 대해 이런 덕 보려는 마음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국내 최대의 결혼정보회사라는 ‘선우’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제일 첫 화면에 이런 게 있다.
<프로필 검색(상대의 원하는 조건)>
-사용가능언어: 독일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일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한국어
-결혼구본: 초혼, 재혼
-학력: A~E, 직업: A~E, 소득/재산: A~E, 가정환경: A~E(A 비교적 높음, E 비교적 낮음)
-연령: 최소~세, 최대~세
-신장: ~cm이하
-국내: 내 거주지에 가장 가까운 거리, 중간거리, 먼 거리, 전국
-글로벌: 국가, ~지역 또는 ~지역
-종교: 종교선택
-취미: 취미선택
<공개프로포즈>
(턱 받친 사진)
진**(28세), 대한민국, 서울, 공무원(6~9급), 신뢰지수 99점
이렇게 정작 따져볼 건 하나도 안 따져보고, 조건만 대충 맞춰서 일단 살아보자 하니, 얼마 살지 못하고 ‘너 밖에 없냐?’며 이혼. 그러다보니 가장 큰 이혼사유는 ‘성격 차이.’ 성격이 그렇게 다른 걸 왜 확인도 안 해보고 결혼 했나? 이 말 자체가 건성으로 대충 조건 맞춰 결혼했다는 반증이다.
말씀으로 되돌아가보자. 결혼이 혈연 부모형제마저 떠나 새로 태어나는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그건 특권인 동시에 책임과 의무다. 그래서 새로 빚어진 한 몸이다. 그리고 한 몸이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나’가 ‘우리’ 되는 약속이 바로 결혼이다. 오늘날 부부가 과연 한 몸인가? 결혼 후에도 변치 않고 자기 식대로만 살아가려고 하면서 왜 결혼해? 처음부터 여차하면 헤어질 수도 있다고 여겨서는 누구도 한 몸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생각할 것은 갈수록 결혼은 단지 개인적 책임 이상을 벗어나 환경적 요인과 구조적 요인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과 농촌총각들의 결혼, 그리고 병든 사업으로 전락한 국제결혼 문제 등을 우리는 내 일 아니라고 결코 방관할 수 없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결혼을 하여,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을 낳아, 행복하지 않게 기르고, 그로 인해 그들을 만나는 이웃, 직장, 사회, 국가도 행복하지 않게 되는 슬픈 악순환을 우리는 나 몰라라 할 수 없다.
결혼은 그저 개인적 행, 불행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 우리 자녀세대의 건강성의 문제요, 우리 사회의 문제요,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좋은 세상을 향해가는 신앙의 문제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자유는 무엇이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정말 그럴까? ‘결혼, 이혼도 내 맘대로’가 정말 우리에게 행복, 자유, 소망 줄까? 성경이 ‘아니라’ 할 뿐 아니라, 우리 시대 경험도 그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이건 이혼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결혼의 계절인 가을을 맞아 다시한번 깊이 성찰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