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예 어떤 면에서는 이제 구약의 오랜된 하나님의 사람들과 현대를 사는 저희들이
옛사람들을 만나봄으로서 어제와 오늘의 대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역사학자인 E.H Carr 교수가 역사가 무엇이냐?
역사는 바로 어제와 오늘의 대화다. 그런 얘기를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까마득한 옛날 어른들하고 우리가 좀 만나서
그 분들의 삶을 지켜보고 그들의 신앙고백과 그들이 걸어간 길들과
이런 것들을 쭉 같이 살펴 보면서 마음의 대화가 쭉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이제 구약성경 안에서는 마지막으로 나오는 인물인데요. 말라기죠. 말라기.
이 말라기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말라기가 이름의 뜻이 나의 사자 그런 뜻이거든요.
나의 사자라는 뜻인데 그냥 하나님께서 나의 사자다. 이렇게 말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사자라는 이 말라기라는 자체가 정말 인명인지 불분명해요.
뜻은 나의 사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자라면 그가 말한 것은 하나님 말씀이죠.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있었던 아픈 이야기가 사실 말라기인데
놀랍게도 말라기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우리가 별로 많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어떤 역사 가운데 어떤 왕 때 무슨 사건을 놓고 나타나서 외쳤다 그런 말이 없고
맨 처음부터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시작하니까
그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성경자체에 별로 설명이 없어요.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학자들의 견해를 빌릴 수도 있겠고
아니면 성경 본문 안에서 이뤄지는 대화 즉 주고받는 대화를 면밀하게 검토함으로써
그 때 당시 영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대개 등한이 해버리고 그저 말라기 속에서 성도들이 복 받는다. 아니면 잘된다. 아니면 설교자들이 설교하기 편안하게 세운 것. 이런 한 두 구절만 뽑아서 쓰게 되면 말라기 전체 내용을 다 놓치게 됩니다. 말라기 전체를 다 놓치게 되면 사실 구약의 결론이거든요. 구약의 맨 마지막 장식인데 이 결론을 놓친다면 큰 손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사실 말라기는 우리가 시간이 되면 차분하게 우리가 1장 1절부터 마지막장 마지막 절까지 정밀하게 공부를 해야될만한 그런 책입니다. 대부분 말라기 3장 10절 말씀이 이것이 요절이고 이것이 주제고 중심사상인 것처럼 이렇게 착각을 많이 하는 그런 책인데 말라기는 전혀 그런 책이 아니고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 그 말하려고 기록된 책은 아닙니다. 이 책은 정말 하나님의 쓰라린 가슴이 엿보이는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상처가 그냥 보이는 그런 책이 바로 말라기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게 이제 하나님의 첫 마디에요. 지금 이 말을 하기까지는 천지창조부터 여기까지 온 겁니다. 천지창조부터 이런 진솔한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데 까지가 오랜 세월이 걸렸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들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관계가 아주 안 좋아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엉망이 되어 있어요. 바빌론 포로 갔다 온 이후에 처음에는 좋아진 것 같았는데 오래지 않아서 에스라가 세상을 떠나고 느헤미아도 돌아가시고 그러고 나니까 백성들이 아주 해이해지고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고 해이해지고 이렇게 해서 아무 정성도 하나님을 위한 사랑도 없는 그런 형식주의에 그치고 있었습니다. 제물을 가지고 오는 것 보면 져는 것. 병든 것. 눕는 것. 토색한 물건. 이런 것들을 갖다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거에요. 머리 잘라버리고 다리 잘라버리고 하는데 눈 먼 것이면 어떠냐? 하면서 정성도 없이 그런 것을 가지고 오고 그 자기들 양떼 가운데 좋은 것 수컷이 있고 흠 없는 것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런 것은 하나도 안 가져오고 하나님의 제물로. 다 불태워 버리는데 좋은 것 가지고 가면 손해다. 이래서 형식주의에 빠져 버린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께 제사하는 연기가 하루 종일 올라간다 할지라도 그 정성이 없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없을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다. 나는 번제 연기에 취해있고 그리고 코에 아주 시려서 넘쳐서 염증이 난다고 할 정도로 그런 정성 없는 예배라든지 정성 사랑이 결여된 찬송이라든지 이러한 것은 내가 싫어한다고 하실 정도로 그런 말씀들이 이사야서라든지 아모스라든지 여기 말라기에도 기록되고 있는 것이지요. 어쨌든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 하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배은망덕해도 유분수죠. 이게 저희의 모습이네요.) 아니 그 아브라함부터 같으면 1500년 모세 때부터 연수를 계산하면 1000년이 되거든요. 천년사랑의 결론이 하나님의 짝사랑이었을 뿐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불감증 환자처럼 된 겁니다. 하나님이 죽도록 사랑하고 죽여 버릴 만큼 사랑하는 그런 진한 사랑을 도무지 감각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한다는 소리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렇게 나오니 말이죠. 하나님이 여기에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그 뒤에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 뒤에 하나님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이었는지 하나님이 할 말을 잃어버린다고요. 그래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고 어쩌고 말씀을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납득이 안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야곱은 정말 사랑받을 만한 아무 건덕지가 없는 그런 존재지만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는데 에서 미워한 것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에서만 미워한 것이 아니라 우리까지 다 미워한 것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 사랑받은 기억은 하나도 없고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님께 얻어맞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아마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꺼에요. 실제로 많이 맞았으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하기를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들이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아니하냐. 봐라~ 내가 아버지라면 나를 공경해야 할 것이고 내가 주인이라면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터인데 도대체 너희는 나를 두려워함도 없다. 하니까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는데요. 하면서 역시 말대꾸를 계속합니다. 하나님께서 8절에 보면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1: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1: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가슴 아픈 이야기가 쭉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무슨 말을 하면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꼬박꼬박 말대꾸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한 게 없다고 잡아떼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기가 막힌 이야기는 2장4절에 보면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기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레위기인데 이거 맺은 지가 1000년이 되었어요. 1000년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잊어버린 지가 1000년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1000년이 되었는데도 역시 그 때 언약한 것을 그 광야에서 시내산에서 마치 약혼식 하는 것처럼 언약한 그 언약을 하나님은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들고 나오는 거에요. 5절에 보면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었다. 왜 너희가 그것을 저버렸느냐. 8절에 보면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다. 레위기를 너희가 다 파하지 않았냐? 하고 징책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하고 이런 말 저런 말 다하는 중에 나중에 이제 무슨 말을 해도 꼭 말대꾸 하니까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했는데 너희는 지금 돌아오려는 마음이 없지 않느냐? 우리가 어떻게 하면 돌아갑니까? 하고 이렇게 이제 또 덤비고요. 아니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이라 하겠느냐? 근데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했나이까? 이렇게 이제 또 말대꾸를 합니다. 봐라 너희가 나의 것을 도적질 했다. 그건 뭐냐. 십일조와 헌물이다. 온 땅이 다 나의 것을 도적질 하지 않느냐? 하고 이제 말씀을 하셨는데 그 때 나온 말이 십일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픈 이야기가 진행 중에 한 번 튀어나온 말이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섬기는 것 말짱 헛것이다. 3장 14절 보면요. 13절부터 보지요.
3: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3: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예. 하나님 성경만 놓고 유익만 따지고 있는 거에요. 이렇게 하나님을 섬겨봐야 유익이 뭐 있느냐? 15절 보면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그런 소리를 막 입에 담고 있습니다. 그 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몇 사람 있어가지고 그들이 피차에 말하는데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셨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이 되어있다. 그리고 내가 때가 되면 그 아비를 공경하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낄 것이다. 하시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하나님과 떠나시게 됩니다. 떠나신 후 하나님께서는 400년간 할 말을 찾지 못하시는 그리고 아무 예언자도 보내지 않는 그런 기간이 신구약 중간사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이 이렇게 아픈 이야기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