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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라는 야생과 몰락하는 수컷의 운명
고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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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의 시에는 ‘세계’가 없다. ‘세계’가 어떤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한 철학자의 말처럼 사람들 각자가 자신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수많은 존재자들과 유의미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세계’라면, 우리들 각자가 삶의 목적에 따라 의미 있는 관계를 통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면, 이동호의 시에 ‘세계’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그의 시는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는, 사방이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으로 차단되어 밀폐된 도시-공간에서 의미나 방향이 부재하는 현대적 삶의 우울한 모습을 기록한 인류학적 보고서를 연상시킨다. 시인에게 ‘세계’라는 기호는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오직 마이너스, 즉 부재와 결핍의 방식으로만 경험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동호의 시를 읽다보면 종종 한 시대가 송두리째 몰락하는 순간에, 이른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질서가 출현하여 모든 고귀한 가치들을 남김없이 잠식해 들어가는 상황에서 현대적 삶에 대해 양가적인 태도를 취했던 파리(Paris)의 시인 보들레르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동호 시집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독자들은 뼛속 깊숙한 곳까지 권태와 우울의 느낌이 번지는 것을, 동시에 온몸에서 생(生)에 대한 긍정적인 에너지가 남김없이 빠져나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동호의 시어들에 스며들어 있는 정동(affection)은 확실히 부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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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세상’은 거대한 책이고, 생(生)은 그 텍스트를 펼쳐서 읽는 과정이다. “새벽이었으므로 나는 이제 눈을 닫겠다 다음 페이지부터는 자고 나서 읽을 분량이다.”(「독서」)처럼 그에게 산다는 것은 곧 읽는다는 것이다. ‘도시’ 역시 그에겐 읽어야 할 페이지일 것이다. 우울하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로 기록된 이 보고서는 몇 개의 독립적이면서도 연속적인 장들로 분할되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의 시를 읽는 방식 또한 복수(複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라는 이름의 ‘책’의 첫 장은 ‘세계’ 또는 ‘도시’라는 공간성의 의미와 형상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어쩌면 도시를 에워싸고 서서히 몸통을 죄고 있는 저 외곽(外廓)도 한 마리 짐승일 수 있다 외곽은 힘이 세다 도시를 칭칭 감아올리며 도시의 숨통을 끊어놓는 저 근육들을 나는 텔레비전을 통해 두려운 눈빛으로 숨죽이며 본 적 있다 샛길이 송곳니처럼 뻗어 있는 외곽, 도시는 서서히 소화될 것이다 도시는 외곽이 먹기에 조금 덩치 큰 불빛들의 집합체일 뿐이다
건널목은 이상한 짐승들의 주거지다 나는 그들의 본모습을 제대로 파악한 적 없다 파란 불빛이었다가 노란 불빛이었다가 금세 빨간 불빛으로 변하는, 양쪽에서 색깔을 바꾸며 점등하는 눈이 각각 두 개씩, 건널목 바닥에 그려져 있는 빗금 표시는 그 짐승의 뱃가죽이 틀림없다 뱃가죽에 깔려 가끔 어린 짐승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육식동물일 거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불빛들은 어둠이 잠든 주변을 서성이다가 배부름이 지루함으로 변하고서야 어둠을 흔들어 깨운다 어둠 주변으로 흩어졌던 불빛이 하나둘 다시 모이고 불빛이 어둠을 핥는다 어둠이 서서히 지워진다 멀리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먼 불빛까지 모조리 불러 모으고서야 어둠이 불빛들을 몰고 나와의 경계를 넘어 집으로 돌아간다
아파트를 주거지로 살아가는 나도 한 마리 짐승이다 나는 야행성이다 창을 통해, 사라지는 어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세상이 환해지고 나서야 이랴 이랴, 꿈을 몰고 잠 속에 든다
- 「내셔널지오그래픽」 부분
이동호의 시에서 ‘도시’는 일상의 공간이지만, ‘일상’이라는 단어에서 연상할 수 있는 긍정적인 느낌이 전혀 없는 ‘야생’의 공간이다. 이 야생의 공간에 대한 적나라한 문명사적 보고가 바로 이동호의 시세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차가운 자본의 질서가 지배하는 적자생존의 공간이라는 의미일까? 시인은 ‘도시’의 풍경에 ‘내셔널지오그래픽’이라는 반어적인 제목을 붙여 놓았다. 왜 시인은 자연, 탐험, 고고학, 인류학 등을 연상시키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이라는 기호를 ‘도시’라는 인공적인 공간과 연결시켜 놓았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 곧 그의 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이동호 시의 매력은 디스토피아에 근접한 세속도시의 출구 없는 삶과 황폐한 느낌을 특유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이러한 이미지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딱딱한 달”(「리모트 컨트롤」), “딱딱한 허공”(「환승」), “어린 건물들”(「풍선」), “감나무 가지에 홍시처럼 매달려 있는 그”(「폐가」), “고물상 가건물 지붕 위에 걸린 고장 난 달”(「모퉁이 고물상」), “화장실에 들어와 앉은 엉덩이처럼 둥근 달”과 “사람을 닦고 버린 냄새 나는 구름들”(「소화되다」) 등처럼 유동적인 자연적 대상을 인공적․고체적인 무생물처럼 감각하거나 자연 자체를 그로테스크한 장면들과 접합함으로써 부정적인 이미지로 재맥락화하는 것이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거실에 누워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어둠과 함께 불빛들이 등장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화자에게 어둠과 불빛이 공존하는 이 장면은 “불빛이 도시를 뜯어먹”는 모습으로 감각된다. 이러한 야생의 상상력이 “불빛에게 이 도시는 매일 뜯어먹어도 다음날이면 다시 자라나는 고마운 풀밭이다”라는 진술을 가능하게 만든다. 야생의 상상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화자에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불길한 짐승”이거나 “야수의 눈빛”이고, 수많은 별빛들은 ‘달=짐승’의 “사나운 이빨”처럼 보인다. 화자는 야생의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기어가는 길을 “커튼 뒤에 숨어”서 지켜보면서 불현듯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외곽(外廓)도 한 마리 짐승일 수 있다”라고 상상한다. 요컨대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화자에게는 ‘짐승’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에서 ‘어둠’과 ‘불빛’이 분리되지 않듯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과 도시 또한 분리되지 않는다. 아니, 도시 자체가 크고 작은 짐승들이 거주하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도시의 어둠을 비추던 하늘의 ‘달’과 ‘별’에서 ‘짐승’을 발견하던 시선은 “건널목은 이상한 짐승들의 주거지다”라는 진술처럼 어느덧 지상의 모든 불빛들에서도 ‘짐승’의 흔적을 읽고 있다. 건널목에 걸려 있는 신호등, 가끔은 짐승들이 로드킬(Road Kill) 당해 목숨을 잃어버리는 건널목 또한 ‘육식동물’의 일종일지 모른다는 의심의 시선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시선’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바로 “아파트를 주거지로 살아가는 나도 한 마리 짐승이다”라는 진술처럼 도시 공간에 살고 있는 ‘인간’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동물’ 또는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려고 노력해왔다. 그것을 위해 인류는 언어를, 사랑을, 이성적 능력을 근거로 제시해왔고, 눈부시게 발전한 근대 이후의 문명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 욕망을 성취한 듯했다. 하지만 “부산사람을 서울사람으로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겨우 2시간 50분이다 그들을 변화시키는 힘은 돈이 당근이다”(「내셔널지오그래픽」)이라는 말처럼 시인의 눈에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돈’의 힘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 세계에서 인간은 “나무벤치의 일부였다가 저녁이 되면 썩은 나뭇가지처럼 뚝 끊어져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표현처럼 점차 ‘자연’의 일부로 퇴행하고 있다. 이동호의 시에서 이 퇴행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가 바로 ‘짐승’이다.
늦은 밤, 거리를 걷다가 하늘을 본다
하늘에는 밖으로 통하는 무수한 구멍들이 있고
구멍 속으로 도망가듯 막 빠져나가는
별빛의 길고 가는 꼬리가 보인다
어둠의 영역을 통과하면 눈이 침침한
늙은 신이 주인으로 사는 낡은 우주가 있고
그곳에는 쥐구멍을 통해 나를 노려보는
신이 애지중지 키운, 외눈박이 고양이가 있다
달빛이 밝아 어둠들이 우왕좌왕 한다
달이 모든 것을 노려보고 있었으므로
골목에는 아직 이부자리에 눕지 못한 창들이 많다
저들처럼 나도 가끔 저 달빛이 몸서리치게 두렵고
목이라도 뜯긴 것처럼 소름 끼치고
달빛에게 누군가를 잃은 것처럼 슬플 때 있다
그러므로 나는 설치류에 가깝다
어두워지면 나는 가로등을 지나
슬픔이 가득한 오줌보를 몸에 지니고
골목으로 기어들어 전봇대를 축축하게 적신다
몸을 텅텅 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면
내가 지나온 구멍들이 잘 보인다
늙은 신도 불을 끄고 이부자리에 들었고
이제 나도 자취방 속으로 기어들어야 할 시간,
늘 그랬던 것처럼 유리창은 흐려 있을 것이다
곧 고양이 울음소리가 크게 들릴 것이고
그들에게 쫒겨 작고 투명하고 빛나는 것들이,
지붕을 마당을 창문을 꿈속을 떼 지어 몰려다니리라
아침이면 나는 제대로 잠들지 못한 눈으로
대문 밖으로 또 이른 출근을 서두른다
방문을 열면 나보다 일찍 일어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막 골목을 빠져 나가는
꼬리 긴 짐승들이 보인다
- 「쥐」 전문
이동호의 시에서 ‘동물’은 기성질서를 교란하는 변이의 능력이 아니라 ‘세계’의 부재를 보여주는, 현실 세계의 디스토피아적 성격을 암시하는 퇴행의 상징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들은 중립적인 ‘동물’이라는 기호보다는 ‘짐승’이라는 부정적인 기호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설치류’, 즉 ‘쥐’ 또한 같은 맥락이다. 나아가 시인은 「전봇대와 개」에서 ‘남자(인간)’와 ‘개’를 동일한 층위에서 비교함으로써 인간이 오랫동안 상상해왔던 비교 우위를 부정해버린다. 아니, “사람들에 비해 개들은 여유가 있다”, “저 열매의 주인은 개다”, “개는 저 전봇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등의 진술은 오히려 ‘개’가 ‘남자(인간)’보다 우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인용시의 화자는 밤거리를 걷다가 불현듯 하늘을 본다. 자연 서정을 노래하는 시인들에게 ‘하늘’은 별빛이 반짝이는 이상적 초월의 세계일 수 있지만, “하늘을 쳐다보는 법”(「팅커벨」)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늘’은 초월의 신성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하늘을 쳐다보기에는 이 도시의 밤이 너무나 화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이 도시에서 태어나 어른이 된 아이들은 아무도 동화 속에 등장하는 “후크 선장을 겁내지 않는”다. 화자에게 그런 하늘은 ‘무수한 구멍’이 존재하는 곳으로 상상된다. ‘구멍’은 ‘문’, 즉 이 “풍진 세상”(「선물상자」)을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아니며, 한때 인간이 초월적인 세계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신성한 대타자와 연결되어 있는 ‘통로’도 아니다. 시인에게 그 ‘구멍’은 “늙은 신이 주인으로 사는 낡은 우주”를 향해 뚫린 ‘쥐구멍’과 같은 것, 그리하여 “신이 애지중지 키운, 외눈박이 고양이”가 그 구멍을 향해 ‘나’를 노려보는 감시 장치로 상상된다. 이처럼 하늘에 붙박힌 별빛들이 ‘구멍’이 되고, 그 구멍을 향해 외눈박이 고양이가 세속도시의 밤을 감시할 때, 그곳에서 살고 있는 ‘나’는 ‘설치류’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이 세속도시에 기거하는 설치류에게는 또 하나의 비극적인 운명이 있으니, 그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해가 뜨면 어김없이 “출근” 길에 나서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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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자동센스 전등에 불 켜지고, 하이힐 소리, 깜깜한 구멍 속으로 열쇠 밀어 넣는 소리, 들린다 나는, 소리만 들어도, 안다
그녀는 무척 느긋한 성격이다
옆집 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것은 부족한 전희 때문? 하지만, 조금만 더 힘주면, 집은, 억지로라도 그녀를 허락할 수밖에 없다
문은 이미 그녀에게 익숙해져 있다
가재도구며 욕실이며 푸들까지도 그녀에겐, 열고 닫는 문이다
그녀는 저녁 여섯 시에 출근하여 새벽 네 시에 퇴근한다
하이힐 소리가 들리면, 그 집 문처럼 내 몸도 열릴 것 같다
그녀가 나를 문처럼 열고 들어오길 숨죽이고 기다린다 하지만 열리는 것은 늘 옆집 문뿐이다
하루는 퇴근하는 나와 출근하는 그녀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만났다 나는 그녀 앞에서,
내 몸을 단속할 수가 없었다 눈과 눈이 마주친 찰라 그녀는, 내가
자신의 문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짙은 화장품 냄새가 내 몸을 따고 들어왔다
나는 자주 덜컹거렸다 나도 내가 그녀의 집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열고 그녀가
들락거렸다
- 「옆집 그 아가씨」 전문
두 번째 장은 디스토피아를 연상시키는 세속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 특히 그들이 타인들을 대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다. 도시의 거주자들은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간 사람들이/계단 아래 영영 눌러앉아 도시를 이루었다”(「노인과 계단」)라는 진술처럼 ‘초월/하늘’에 오르기를 포기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도시에는 천사가 없다. 한때 사람들은 어린 아이를 ‘천사’에 비유하기도 했으나 도시에서 아이는 “바지 주머니에 열쇠가 박히자 아이가 덜커덩 열렸다”(「사물함」) 이미 ‘사물함’이라는 사물로 변신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인물들이 이 도시 거주자로 그려지고 있을까? 시인-화자의 가족을 제외하면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 술에 취해 제 삶을 나에게 쏟아 붓고 사라진 동창 여자(「주(酒)기도문」), 낮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화장을 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도시를 만나러 나서는 “어른이 된 아이들”(「팅커벨」), 첫눈이 내린 세상을 가로질러 “이곳보다 더 추운 곳에서 보내 올 늦은 답장”(「우체국, 간다」)을 기대하며 봉투를 붙이는 사내, “터질 것 같은 전봇대를 꽉 움켜잡고 골목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전봇대와 개」)오는 남자, 간밤에 큰 소리로 우는 소리를 낸 윗집 사람들(「독서」), 공원 벤치에 누워 시간을 기다리는 사내(「꽃」), 이태리 산 낡은 소파에 앉아 맞은편의 허무와 대작하다 조금씩 몸을 접는 고물상 박 씨(「모퉁이 고물상」), 동전 몇 푼 때문에 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우는 그녀(「재래시장」) 등이 그들이다. 이들 모두가 등장하는 ‘드라마’는 어떤 내용으로, 어떤 결말로 막을 내리게 될까?
이동호의 시에서 ‘문’은 사물-대상이면서 동시에 도시적 삶을 지시하는 상징이다. 그는 “현관문들이 맛있게 익은 사람들을 한 공기 드신다”, “저녁 무렵이면 현관문을 통해 사람들이 한꺼번에 바깥으로 배출된다”(「소화되다」)처럼 도시인들의 일상적 삶을 ‘문’을 들고 나는 행위로 표현한다. 그리고 인용시의 화자가 그렇듯이 삶에 대한 이러한 도시적 감각은 때로는 인간관계에까지 확장되어 사용된다. 화자와 ‘옆집 아가씨’의 이웃관계는 대면 관계가 아니라 ‘소리’를 통해 상상하는 관계이다. 아파트가 유일무이한 도시의 주거형태로 자리 잡음으로써, 또한 대부분의 아파트가 건축 비용과 공사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최소한의 방음 장치만을 갖춤으로써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소리’를 통해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비록 이 소리를 통한 관계가 드물지 않게 심각한 갈등으로 치닫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화자의 상상이 그렇듯이 자신의 일상적 질서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인들이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설령 그것이 이웃이라 할지라도 타인과 직접 대면하게 되는 때이다. 예컨대 “퇴근하는 나와 출근하는 그녀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마주치는 순간이 그때이다. 물론 이 만남에서 특별한 의미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우연적이면서도 일상적인 만남은 「드라마」에서 ‘나’와 ‘여자’의 관계가 그렇듯이 묘한 긴장감을 발생시킨다. 도시가 일반화되기 이전의 세계에서 인간이 두려움을 느낀 대상은 맹수, 귀신, 어둠 등이었다. 하지만 현대문명은 도시에서 빠르게 어둠을 몰아내었고, 자연을 개발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인류에게 맹수는 이제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두려워하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인간, 즉 타인이다. 특히 어두운 밤거리나 엘리베이터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타인이야말로 현대인에게는 ‘지옥’이 아닐 수 없다. 낯선 남녀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게 되었을 때 여성이 불안함을 느껴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그런 여성의 모습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 남성이 자신을 “여자의 가장 먼 곳 벽에 전단지처럼 붙여놓는”(「드라마」) 연기(演技)를 행하는 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경험하게 되는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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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도시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의 세 번째 장의 주제는 ‘가족’이다. 이동호의 시세계에서 ‘가족’은 아버지-가장(家長)의 죽음을 정점으로 한 비극적인 가계(家系)에 관한 이야기와, 해체 상태를 향해 달려가는 현대적 가족 관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가족 ‘드라마’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는 과거와 현재, 집단과 개인이라는 이질적인 계열들이 ‘가족’을 매개로 교차한다. 그러므로 한 가계의 예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는 ‘가족’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은 종종 동일한 시간대를 살고 있는 세대가 ‘가족’에 대해 갖고 있는 공통 감각을 건드림으로써 보편적인 성격을 획득한다.
열린 창문 너머로 밤하늘이 보인다
아내가 창문 아래 세워놓은 스팀다리미는,
벽시계의 초침이 카운트다운을 끝내는 순간,
우주선이 되어 하늘을 날아오를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다
그 경지가 높아서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은 날에도 만취상태였다
어머니는 늦게 배운 바느질 솜씨로
산격동에서 서문시장까지 비단길을 닦았다
한복에 동정을 달던 어머니 이마 위 주름살을
아버지가 다리미로 빳빳하게 펴놓은 날 밤
어머니는 다리미 줄을 목에 감았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식칼을 휘둘렀다
작은누나는 골방에서 무릎 꿇고 아버지가
얼른 떠나기를 구들장에게 빌고 또 빌었다
아버지는 그런 가족들을 피해
서둘러 무덤 속으로 도망쳤다
잊을 만하면 다리미를 타고 아버지가 찾아왔다
아내가 빳빳하게 다린 옷의 주름이
어머니 같아서 다리미를 힘껏 던진 것이었는데,
다리미가 아내의 허벅지에 불시착했다
제 방에서 공부하던 아들이 멱살을 붙잡았다
연락을 받고 날아온 처갓집이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도망가듯 작은 방에서 별거했다
작은 방 벽에 달린 시계초침의 카운트다운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미 점화되었다는 거다
이혼서류의 적색버튼을 꾹 누르면,
나는 창 밖 밤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것이다
내가 가야 할 목적지가 창 밖 먼
별자리에서 반짝인다.
- 「다리미」 전문
비극적인 가족사의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다. 물론 “처녀의 몸으로 미군부대를 잉태”(「하얄리아」)한 고모와 그녀를 태평양 건너편으로 던져버린 할아버지, 역사적 격동기에 남편과 자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삼밭 마을 작은 할머니 이야기도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화자가 회고하는 비극적인 가족 이야기의 중심에는 이미-항상 문제적인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문제적인 존재가 자리하고 있다. “태초에 아버지의 트럭이 있었다 아버지는 시멘트로 이 세상을 지으셨다”(「레미콘 트럭」)라는 진술처럼 화자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 속에서 아버지는 레미콘을 운전하여 세상을 만드는 창조자였다. 그리고 한때나마 그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형제의 머리를 쓰다듬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리미」의 화자가 회고하는 바에 따르면 ‘술주정뱅이’였다. “그 경지가 높아서 아버지는,/술을 마시지 않은 날에도 만취상태였다” ‘술주정뱅이’ 남편을 둔 이유로 어머니가 바느질로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야 했으니, 하루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다리미를 던지는 가정폭력이 발생했다. 그 일로 인해 어머니는 “다리미 줄을 목에 감았”고, 화자는 “아버지를 향해 식칼을 휘둘”렀다.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가장(家長)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이동호의 시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들은 공통적으로 무능력하다. 한때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 사내들이 시인의 문장 속에서는 모두 권위를 잃어버리고 퇴물처럼 낡아간다. 가령 ‘우리 동네 정씨 아저씨’는 빚쟁이를 피해 “저수지의 과녁 속으로 숨”(「과녁」)었고, ‘폐가’의 주인은 “감나무 가지에 홍시처럼 매달”(「폐가」)렸다. 그런 점에서 “아들에게 안긴 가루가 된 아버지”(「선물상자」)의 모습은 사뭇 전형적이다. 화자의 아버지 역시 “배가 헬륨을 넣은 것처럼 점점 부풀어”(「풍선」) 오르다가 끝내 하늘로 올라갔다. 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수면제 오십 알을/한꺼번에 입속에 넣어 넣”(「나사렛」)은 친구 또한 어떤 집안의 가장, 누군가의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이처럼 이 ‘도시’라는 야생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수컷’의 운명이 대동소이하다면 화자 역시 그 운명적인 반복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다리미’가 아내의 ‘스팀다리미’로 바뀌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나’가 아내를 향해 다리미를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아들이 ‘나’의 멱살을 잡았고, 처갓집 사람들이 주먹을 휘둘렀다. 과거 아버지는 ‘무덤’으로 도망쳤지만, 죽음을 수락하지 않은 ‘나’는 작은 방에 칩거하면서 ‘별거’하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한다.
창문은 반쯤 열려있다
창 밖에서 어둠이 훔쳐보는 줄도 모르고
여자는 TV를 시청하고 있다
그녀의 몸은 소파에 둥둥 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그녀를 떠나고 없다
텅 빈 그녀의 몸에서 뻗어나간 다리가
허공을, 밟고 있다
주문도 없이 현관문이 열렸다 닫힌다
발자국 소리도 없이 아이가 제 방에 누워 있다
형광등 불빛이 아이의 목덜미를 깨문다
아이가 돌아눕자 방안이 관속처럼 변한다
아이는 무어라 혼자 중얼거렸지만
소리가 아이의 몸 바깥으로 빠져나가지는 못한다
아이의 귀에는 십자가처럼 이어폰이 꽂혀있다
화장실에서는 알 수 없는 말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 아무도 없다
배수구 틈으로 누군가 있었던 인기척처럼
마른 머리카락이 걸려 있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면
익숙한 머리통이 서서히 끌려나올 것만 같다
거울 속으로 무표정한 얼굴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다
수도꼭지가 물방울로 배수구를 죽일 듯이
꾹꾹 찔러대고 있다
자정이 지난 다음에야 사내가 돌아온다
사내는 여자를 한번 쳐다보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간다
그런 남자의 뒤통수를 향해 꺾이던
여자의 고개가 다시 TV 속으로
툭, 굴러 떨어진다
- 「조용한 가족」 전문
‘사내-여자-아이’가 등장하는 이 드라마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만일 첫 장면(“창 밖에서 어둠이 훔쳐보는 줄도 모르고/여자는 TV를 시청하고 있다”)을 1인칭 시점으로 바꾸면 “아랫목에 누워 아내가 드라마에 몰입한다/나는 그런 아내를 연속극처럼 바라본다”(「리모트 컨트롤」)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인용시에 등장하는 익명의 한 집안의 풍경은 결국 시인-화자 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으며, 나아가 현대사회에서 가족이 직면해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동호 시의 등장인물들은 ‘가족’ 또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대개 무기력한 형상으로 그려진다. 하게 멈추어있는 형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미 마음이 육체를 떠난 상태로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여자, 발자국 소리도 없이 자신의 방에 누워 있는 아이, 자정이 지나 귀가했으나 소파 위에서 잠든 아내를 힐끗 쳐다보고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사내. ‘가족’이라는 법률적 장치로 묶여 있으나 이들 사이에서는 최소한의 인간적 유대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풍경은 아랫목에 누워 드라마에 몰입한 아내와, 그런 아내를 ‘연속극’처럼 쳐다보는 남편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아내가 리모컨의 채널을 누를 때마다 화면 속의 계절은 바뀔지언정 “아무리 눌러대도 창밖은 변화가 없”(「리모트 컨트롤」)듯이 이들 가족의 음울한 풍경이 바뀔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 대책 없는 풍경 속에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권총만 종일 만지작거”(「총잡이」)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나’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예의 비루하고 무력한 수컷의 형상에 가까운 ‘나’는 “종일 텔레비전을 켜놓고 강도를 응원”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 사내는 “저 고추처럼 붉게 잘 익어/풍성하게 수확”(「고추밭을 지나다가」)되기를 기대하지만 정작 “화장실 변기통을 향해 권총을 정조준”(「총잡이」)하는 것 정도만 실행할 수 있다. ‘세계’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야생의 도시 공간에서는 자신을 ‘총잡이’라고 상상하는 수컷들 역시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이동호의 시는 이 소멸의 운명 앞에서 내지르는 짧은 단말마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