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의학의 발전 덕분에 그런 희생은 더 없을 것이지만 여전히 코로나는 우리 주변에서 물러날 기색이 없다. 그때는 그 실체를 몰랐으므로 그저 병에 걸려 죽으면 시체를 묻어버리거나 외면하는 것이 거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암울함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나는 법이다.
흑사병의 참혹한 과정 후에는 피렌체를 발원지로 한 화려한 르네상스의 꽃이 피어났고 마침내 유럽은 중세의 암흑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그 선두에 단테의 <신곡>이 있고 피렌체의 소설가이자 인문주의자인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있다.
데카는 10을 의미하고, 메론은 이야기란 뜻이다. 소설은 열흘간 매일 열 명의 젊은이들이 각자 한 가지씩 이야기한 백 가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10일간의 이야기>라고도 번역된다.
이쯤에 이르면 페르시아의 무려 천 일의 이야기가 담긴 <아라비안 나이트>가 연상된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살아남기 위한 지어낸 환상적인 이야기 중심이라면 데카메론은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드러낸 적나라한 풍자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떻든 이야기가 백 가지나 되니 한 편이 짤막하기는 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라 읽기가 다소 지루하다. 그러니 읽으면서 무슨 문학적 향기 같은 것을 느끼기보다는 당시 중세의 야사를 읽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유럽의 중세는 종교가 우위를 점했던 시기다. 그림은 온통 성화 일색이고 문학은 하나 같이 신을 찬양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데카메론>은 파격적이다. 소설은 당시의 귀족사회나 성직자들에게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자기네들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며, 소설 속의 성직자와 귀족들의 추악한 이야기들은 서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인쇄술이 막 꽃피어난 때이므로 ㄴ구나 소설을 접할 기회가 많아져 소설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테의 <신곡>의 신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데카메론>은 인간들의 적나라한 이야기이므로 <인곡>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소설은 흑사병이 만연한 도시를 피해 열 명의 젊은 남녀가 교외 별장에서 열흘 동안 지내며 돌아가며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전부다.
매일 한 명씩 그날 이야기를 이끌어갈 왕 또는 여왕을 정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하루를 생활하며 이야기 차례를 정한다. 이야기는 변화가 풍부하고 그 무대도 유럽 각지에서 동방까지 걸쳐 있으며, 인물의 신분은 왕, 기사, 성직자, 영주를 포함해 최하층에서 최상층까지 다양하다.
그 방대한 이야기를 보카치오가 혼자 상상해서 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당시 입 밖에 내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선술집이나 부인들의 뒷담화, 친한 친구 사이의 농담들을 채집하고 분류하여 나름대로 각색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유부녀에 대한 사랑 이야기가 특히 많은 것 또한 당시의 성생활이 상당히 문란했을 것이라는 짐작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분명 종교 중심의 사회에서는 충격적이었을 것이 분명하며 성직자의 몰락으로 연결되었을 법하다.
데카메론은 근대적인 리얼리즘의 산문정신으로 그려진 최초의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작품 속에서는 아름답게 꾸민 미사여구가 거의 없다. 직설적이고 거칠다. 이를 통해 보카치오는 시대를 앞서 가는 도도한 풍자정신과 여성성의 가치를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야기의 이곳저곳에 봉건적인 세력에 대한 신흥 부르주아 서민계층의 조롱은 섹스의 해방과 기쁨, 성직자의 모순과 부패에 대한 조소 등을 표출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또한 소설은 여성은 신비감보다는 육욕과 직결되는 인간의 냄새를 고스란히 풍긴다.
이로 인해 실리주의가 눈을 뜨자 인간의 가치란 벼슬이 아닌 재능, 즉 합리적인 두뇌가 존중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선량한 우둔함보다 스마트한 잔꾀가 인정되고 속는 자보다 속이는 자가 갈채를 받기도 한다. 새로운 도덕이 미쳐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저자에 따르면 데카메론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역사서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작품이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것은 세 가지라고 한다. 첫째, 중세말의 시대적 흐름을 잘 보여주고, 둘째, 당대 사회적 문제를 섬세하게 묘사했으며, 셋째,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데카메론이 당시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고 마침내 암흑 속을 헤매던 중세시대가 장막을 거두고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했다면 오늘의 코로나 펜데믹 상황을 빠져나올 때 무엇이 우리에게는 길을 제시할지 궁금하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 펜데믹 이후의 세상은 4차 산업혁명이 급속히 밀어들 것이라는 점에서 동의하고 있고 그 중심에 인공지능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도 동의하고 있다. 말하자면 하드웨어는 동의하고 있지만 그를 견인할 소프트웨어, 즉 인문학은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듯하다.
이는 인간이 기계를 생활에 유의미하도록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에 이끌려간다는 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미 학자들 중 일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말하기도 한다.
앞으로 세계는 점점 더 빠르게 돌아갈 것이다. 과거에는 한번 익힌 내용은 평생을 걸쳐 활용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자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판이다. 나이 든 사람은 새로운 기기를 익힐 겨를도 없이 또 다른 새로운 기기 앞에서 당황한다.
은행이 사라지고 거리의 택시는 아무리 손을 들어봐야 그냥 지나간다. 그리고 저만치서 젊은이 앞에 정차하여 그를 태우고 사라진다. 그 젊은이의 손에는 당연히 스마트폰이 들려있다. 자동차는 보닛을 열어도 엔진이 사라지고 없어 그 속이 허전하다.
누가 이 시대의 단테이고 보카치오일까. 이제 더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치 않는 걸까.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휩쓸리느라 정신이 없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을 차리라고 했지만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는 세상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