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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 광주행차량에 총격다수 사상
남평교부근서 시위대 피( ) 집단참변
20사,국도 차단... 곳곳서 총격전 벌어져
무장시위대에 협조하던 기관 단체 , 발포명령 소식듣고 선무활동.무기회수 나서
57 시위확산 <2> 나주 하
민주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로 짓뭉개지자 분노한 시민들의 무장시위는 21일 2일에 걸쳐 전남 전역으로 확산된다.
광주라는 일개지역을 타격 목표로 삼았던 신군부는 예기치못한 사태확산으로 놀라움과함께 큰 부담을 안게 된다.
광주시민의 열화같은 투쟁에 밀려 공수부대를 외곽으로 철수시킨 신군부는 항쟁이 전남일원으로 확산되자 두가지 조치를 취한다.
신군부는 우선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전교사 병력으로 광주로 통하는 모든 교통망을 봉쇄한다.
타지역으로 항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 광주를 고립시켜 놓고 적절한 시기에 무력 소탕작전을 벌이기 위한 준비작업을 한것이다. 이와 함께 광주 항쟁에 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본격화된다.
광주 외곽도로 봉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21일 오후 3시 35분 전교사에 [사태의 전국확산 방지,선무활동으로 시민.불순분자세력분리,지휘체계의 일원화로 사기진작, 교도소는 끝까지 몸으로 방어 광주 외곽도로망 차단,광주시 외지역 자제촉구 선무활동 전개]등의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한다.
전교사는 이날 오후 7시께까지 공수부대 3.7.11여단과 20사단,31사단병력으로 하여금 광주로 통하는 7개 주요도로를 점령케 해 봉쇄작전에 돌입한다.
[전교사전투상보]에 기록된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 31사단:오치(1개중대)-31사단방면
* 3공수:교도소(순천방향)1개여단-담양 여수 순천방면으로 통하는 문화동
* 11공수:소태동(화순방향 1개여단 -지원동 주남마을 부근
* 20사단:극락교(광주-송정간 도로)백운동(광주-목포간 도로)1개대대, 톨게이트 (광주 -전주)1개대대,통합병원입구 화정동 1개대대.
시위대는 차단사실을 까마득히 모른채 이곳을 통과하다 또는 알고도 기어이 통과를 시도하다 계엄군의 무차별 발포에 집단적인 희생을 당하고 만다.
계엄군은 시위대 차량뿐만 아니라 일반차량과 통행인, 심지어는 그 지역 주민들에게까지 총격을 퍼부어 무수한 양민을 학살한다. 이에앞서 이희성계엄사령관은 21일 오전 대책회의에서 공수부대를 외곽으로 철수시키고 자위권을 발동키로 결정한다.
그는 오후 7시 30분 특별 담화를 발표해 [계엄군은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하여서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한다]고 선언한다.
광주에서의 발포사실을 은폐하는 동시에 앞으로 있을 발포를 정당화 하기 위한 조치였다.
계엄군은 국도를 통행하는 시위차량과 행인들에게 갖가지 만행을 저지른다.
광주-담양간 국도상에 위치한 광주 교도소 부근 광주 -화순구간 국도변의 지원동과 주남마을, 광주-나주-목포간 국도변 송암동 일대에서의 양민학살이 그 대표적 사례다.
20사단 61연대 2제 2대대 (대대장 김형곤 중령)는 21일 오후 4시부터 광주 -나주 -목포간 국도를 차단하고 광주로의 모든 통행을 봉쇄한다.
그리고 상무충정작전이 실시된 27일까지 학살은 계속된다.
계엄군의 만행은 자신들의 기록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 [5월 21일 20시께 폭도들이 탑승한 트럭 및 버스 6대가 광주방향으로 진입해 교전이 시작되었다. 폭도차량 3대는 이미 광주로 이탈하였고 사병 1명이 관통으로 부상을 입자 동부대요원이 일제히 응사하였다.이 과정에서 폭도차량 2대가 바퀴를 관통당하고 피해를 입었다. 폭도들이 버스 2대를 증원 재차 공격을 해왔으나 일체 응사하지 않고 폭도들 스스로 부상자 구출후 현지 이탈하게 유도 하였다. 이러한 작전에서 3명을 사살하였다.]
([20사단 충정작전보고]) 그러나 이 기록 역시 군의 만행을 합리화하기 위한 조작에 불과하다 .
당시 숭일고 3학년으로 총상을 입었던 이순노씨(33)와 송암동 주민 김복동씨는 89년 국회광주특위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이 생생히 증언. 20사단병력이 공수부대와 마찬가지로 통행차량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사망자도 3명이 아닌 9명이었음을 폭로한다. [이날 저녁 광주로 오는데 효천역 부근에서 매복한 군인들에게 기습을 당했다 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혀 응사할 겨를이 없었다. 당시 차량에는 20-30 명이 타고 있었는데 버스 전방 헤드라이트가 들어오지 않자 랜턴으로 전방을 비추며 광주방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군은 랜턴 불빛을 보고 차량에 집중난사를 했다. 군은 야산에서 사격을 하였는데 우리가 총을 가졌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운전기사는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앞에 있있던 몇 사람이 총을맞았다. 그리고 차는 바로 밑 언덕재기에 처박혔다. 5분내지 10분정도 난사가 계속되다 사격이 멈춰 우리는 항복한다는 표시로 손을 들고 일어 섰으나 다시 사격을 가했다. 총소리가 멈춘후 다시 손을 흔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또다시 난사를 했다.] (이순노씨 증언)
효천역 계엄군 매복
[다음날 아침 일찍 벌통을 돌보러 나가보니 논에 시체3구가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앞 언덕에는 등이 피범벅이 되어 잇는 시체 2구 가 있었다. 또 집에서 1백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버스 한대가 처박혀 있었는데 그곳을 가보니 버스 운전대에 2명이 죽어 있었고 바닥에 1명 깨진 유리창에 1명이 엎드린채 죽어있었다. 그후 군인차가 와서 이 시신들을 차에 싣고 가졌갔다 . (김복동씨 증언)
이날 나주를 거쳐 해남 강진 영암 목포 등지로 빠져나갔던 시위대 차량은 광주-목포간 국도가 차단되자 인근 샛길로 차를 몰거나 차를 버리고 농로등을 통해 광주로 진입하다 여러곳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는다.
당시 대동고 3학년 학생으로 21일 해남까지 진출했던 덕준씨 (32.현재 기능공)의 처절했던 상황증언. [우리차가 남평비행장에 도착했을때 다른 지역으로 내려갔던 40여대의 차량이 모여있었다. 어둔 컴컴한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빙빙 돌고 있었다. 차들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선두 트럭에 올라가 [지금 효천에는 공수 부대가 들어와 있습니다. 이순간에도 광주시민은 죽어가고 있읍니다.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광주시민을 구출합시다 라고 외쳤다. 남자들이 많이 탄 차를 앞으로 배치하고 여자들이 탄 차는 뒤로 뺐다. 차가 남평을 통과 했을때 (정확히 어딘지 기억할 수 없음) 남선연탄 2.5t트럭에 시체 7구가 가마니로 덮여 있었다. 트럭에는 피가 흥건했고 아주머니 한분이 적재함 밖으로 나와있는 발을 붙들고 반미치광이가 돼 [내새끼야 ,내새끼야]하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광주시내 진입 실패
우리 버스에는 남자 열댓명과 여자 열명이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됐는지 여성 노동자들이 울면서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죽음으로 가는길,용기를 주라는 내용 같았다. 차가 드들강다리를 건널때 앞에서 콩볶는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앞차가 멈추더니 뒤로 빠지라고 했다. 우리 그길로 나주까지 한숨에 달려와 버렸다. 나주예식장에서 이야기를 들으니 선두로 갔던 지프차에 탄 사람은 모두 즉사하고 트럭이 돌진하다 커브길에서 운전수만 빠져나왔다고 했다.] 이후 나주 지역에 머무른 시위대는 광주 진입을 줄기차게 시도하나 송암동 인성고부근의 계엄군 바리케이드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곳곳에서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인다.
서로 추격과 기습의 숨박꼭질이 계속되면서 수십명의 시민군이 죽거나 부상 도는 연행된다.
계엄군의 총격을 피하다 나주군 왕곡면 국도상 트럭에서 떨어져 두개골 함몰로 숨진 이종연군 (당시 재수생)나주군 다도에 일보러 갔다 시위차량에 탑승해 광주로 들어오다 대퇴부 관통상을 입고 숨진 박인천씨(당시 26세.동광택시 기사)등이 바로 이과정에서 희생당한 무고한 양민들이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희생 이세상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함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