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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적 비판을 향한 고독한 냉소
우리는 이른바 기득권층, 가진 자들, 권력자들, 상류층 등으로 통칭되는 사람들이나 무리나 세력에 대해서 반감이나 적대감을 품고 있거나 아니면 그런 감정을 표출하거나 그런 감정의 대상들을 비판하고 성토하는 이들을 가리켜 흔히 ‘좌익’, ‘좌파’, ‘진보적인 사람 또는 세력’으로 간주하거나 지칭해왔다. 그런데 이런 좌파 내지 진보세력을 반대하고 적대하는 이들로 여겨지는 이른바 ‘우익’, ‘우파’, ‘보수적인 ― 대부분 기득권층에 속하거나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나 신념(특히 자본주의)을 공유하는 ― 사람 또는 세력’을 포함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좌파 또는 진보세력을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간주하고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요컨대 기득권층을 자의로든 타의로든 ‘적대시’하고 ‘비판하는’ 개인이나 집단은 거의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알게 모르게 편입되고 또 암묵적으로든 공개적으로든 그렇게 분류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전반적인 판세이다. 이 판세를 요약해보면 오늘날 ‘모든 진보는 마르크스주의로 통한다’거나 ‘모든 진보의 원천은 마르크스주의에 있다’는 명제로 집약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마르크스주의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주적(主敵) 내지 대적(大敵)으로 간주된다. 아니, 그렇게 간주되어오다가 지금은 거의 패배한, 몰락한, 붕괴한 ‘주의(ism) 또는 이념(ideology)’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이 “오여손잡이주이”[김성동의 자전소설 『길』의 주인공 ‘영복’의 고향에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가리켜 사용하던 사투리로 ‘왼손잡이주의’라는 말. 김성동, 『길』(푸른숲, 1994 참조).]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추억의 적이요 현재의 포로이기도 한 ‘실패한 이념이자 좌절된 본능인 동시에 운동’이기도 하다.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패배를 두고 새삼 의혹이나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바야흐로 지구 전체를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패인(敗因)도 누누이 분석되고 선포되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속성을 제대로 ‘몰랐다’거나, 아직 마르크스주의를 실현할 ‘시기’가 도래하지 않아서 ‘때를 못 만났다’거나, ‘인간’을 몰랐다거나, 인간의 ‘심리‘와 ‘욕망‘과 ‘본능‘을 몰랐다거나 하는 패인들이 제시될 수 있고 또 제시되었을 것이다.
이런 판국이라면, 오늘날 대부분의 진보세력은 패배자들인 셈이다. 자본주의를 몰랐거나 때를 못 만났거나 인간-심리-욕망-본능을 모른 채 근 200년이 다되도록 자본주의를 상대하여 비판하고 투쟁하다가 끝내 패배하고 만 이런 ‘주의’에 자의로 편입했든 강제로 편입당했든, 하여간 이런 ‘주의자’로 불리고 또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패배자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자본주의의 무차별적인 세계화를 지극히 당연하게 인정하는 자본주의적인 ‘무의식’ 혹은 ‘본능’이 대세 중의 대세를 이루어 마침내 자본주의가 인간의 무의식 혹은 본능 자체가 되어버린 판국까지 벌어진 듯하다. 바꿔 말해서, 인간의 어떤 심리나 욕망이나 본능을 ‘억압-자극’하여 이용하고, 그런 술책에 편승하여 승리한 자본‘주의’가 이제는 아예 세계인들의 ‘심리욕망본능’ 자체가 되어버린 듯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판은 계속 제기되고 또 계속 제기되어야한다는 주장도 진부한 단말마처럼 잦아들 줄 모른다. 말하자면 이미 패배하여 포로로 전락한 지경에서도 ‘포로의 복지개선 또는 생활수준향상’을 요구하는 비판만은, 늘 ‘적대적’이지만 ‘개선’과 ‘발전’을 요구하는 비판만은, 어찌된 영문인지, ‘패배를 모르는 듯한 패배한 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런 형국을 관찰하면서, “자본주의는 어쩌면 원래부터 ‘적대적 비판’을 허용했고 심지어는 암묵적으로 그런 비판을 장려하고 부추겨 이용해왔을지도 모른다”는 나의 고질적인(?) 의혹이 다시금 내 입술(혹은 손가락?)을 간질임을 느낀다. 이런 의혹의 간질임을 조금 참다보면,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발전에 필요불가결한 적대적 경쟁자요 일등공신이었다”는 의혹의 간질임이 쾌감인지 고통인지 모를 기막힌(?) 느낌마저 내게 선사하기에 이른다. 요컨대, 나는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롯한 이 ‘맑家’의 공기를 조금이라도 들이마셔본 좌파 내지 진보세력이 자본주의에 대하여 제기한 적대적이나 개량적인 비판들은 기껏해야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비판’에 불과했다”는 확의(確疑)를 제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나의 ‘확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아니 이 확의에 관심이라도 보이는, 혹은 이 확의와 조금이라도 유사한 의혹을 제기하거나 제기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좌파 또는 진보세력을 본 적도 없고 발견할 수도 없다.(물론 여기에는 나의 악질적인 게으름도 한몫을 단단히 했을 것이다.)
하여간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아마도 그들은 적대적 비판의 ‘비장한 열정’만 알지 고독한 냉소의 ‘비극적인 쾌통(快痛)’은 모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오른손마저 다 ‘알게’ 왼손이 한 비판이 결국 오른손을 ‘위한 비판’이었다”는 자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비판의 심리학’ 내지 ‘비판의 생리학’을 모른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적대적 비판에만 몰두한 나머지 자본주의와 부지불식간에 ― 암묵적으로 야합공모하는 자신들의 심리욕망본능을 도무지 자각할 줄 모른 채 일종의 ‘칸트 식 비판’(내가 보기에 ‘칸트 식 비판’은 이른바 전복이나 차이의 혁명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수성과 보존, 개량과 발전을 목표로 하는 비판이다.)만 남발해온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이런 판국이니 내가 그들에게 “본시 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니체의 충고[“친구여, 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376절의 마지막 문장)고 선언했던 자칭 “살아있는 바보” 니체도 이런 칸트 식 비판의 심리적 맥락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고사하고 ‘손뼉소리도 두 손이 마주쳐야 난다’는 지극한 상식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구료!”라고 ‘냉소’를 던져봐야 그들로서는 소귀에 경을 읽는지 눈 가리고 아웅을 하는지 분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좀더 알아먹기 쉬운, 주류적(主流的)인, 학술적인 ― 아마도 나의 고질적인 어투 때문에 불가능하겠지만, 하여간 ― 표현법을 흉내 내어 말해보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롯한 진보세력이 자본주의에 가해온/가하는 적대적 비판은 자본주의 심리학 내지 생리학도 모른 채 자본주의를 전복 내지 개선시키겠다는 포부에 들뜬 나머지 저지른 “자본주의를 위한 ‘쓴 약’ 달이기”와 다름없는 “적=잠재적 친구를 위한 비판”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적대적 비판’은 ‘잠재적 친구를 위한 비판’으로 귀결될 것이다.
따라서 적=친구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개선하기 위한 충고와 같은 적대적 비판을 통해서는 결코 전복이나 혁명 ― 더구나 나는 이른바 ‘진정한’ 전복이나 혁명이란 것의 가능여부마저 의혹한다 ― 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전복이나 혁명을 기도하지 않았던 비판이라면, ‘적대적일’ 필요도, ‘피 흘릴’ 필요도, ‘역사를 운위할’ 필요도, 그토록 처절하고 ‘가열 찰’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하간, 이런 견지로 본다면 적대적 비판 내지 반감에서 촉발된 갖가지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혁명들은 물론 심지어 프랑스혁명조차 진정한 전복과 혁명 ― 그런 혁명이나 전복이 가설(假說)로나마 이루어질 수 있더라도 ― 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확의에 의거하면, 이들 혁명은 ‘적과 친구되기 내지 적과의 동침’에 불과한 당연한 수순이었을 뿐이다.
사실 여기서 ‘적’이라고 하면, 그들은 그들이 축출하고 숙청한(혹은 그렇게 하고 싶은 혹은 그들을 그렇게 처우했고 하고 있을) 기득권을 지닌 육체적 인간들을 거명하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적은 그런 육체의 주체인 적, 그런 주체가 이끌거나 이끌리는 심리욕망본능, 그리고 그런 본능이 추구하고 숭배하고 과시하기 원하고 ‘없으면 못살 것으로 여기는’ 그들만의 소중한 ‘가치’를 아울러 가리킨다. 진실로 적은 바로 그런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심리욕망본능이데올로기고정관념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대적 비판과 그런 비판에 입각한 혁명을 통해서는 기존의 기득권세력들 그리고 특히 그 세력들이 중시하는 가치와 완전히 단절하거나 그 가치를 전복하거나 새로운 가치를 내세워 혁명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혁명의 가능성은 차라리 냉소 쪽에 더 많이 더 쾌통(快痛)하게 더 비극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냉소에 야합이나 공모가 깃들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쩌면 적대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자들 ― 기득권자들, 지배자들, 부자들, 상류층, 유한계급, 부르주아들, 보수세력 등등 ― 이야말로 바로 이 냉소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무분별하게 잘 아는 자들이리라. 이들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경멸’이나 ‘무시’도 냉소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경멸과 무시가, 그들을 불편하고 성가시게 만들 수 있는 적대적 비판세력의 적대감과 반감을 조장하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경멸과 무시가 그들이 중시하는 가치의 최고성 내지 귀중성을 견지하고 보수하는 최적의 수단이라는 것 역시 ‘부지불식간’에 ‘분별없이’ 그리고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런 경멸과 무시의 대상자들은 다만 자신들이 경멸받고 무시당했다는 사실과 경멸하고 무시하는 자들이 ‘가진 것’과 ‘중시하는 가치’를 자신들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만 알지, 그들도 역시 그런 ‘가치’를 ‘중시하고’ ‘가지기를 원한다’는 사실의 의미는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나 자본의 악성(惡性)을 마음대로 비판하라. 하지만 나 자본은 너희 비판자들을 가만두지 않겠다. 억압하고 착취하겠다. 그래야만 너희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자본의 귀중함을 절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자본이 악하게 보이는 것은 자본이 너희에게 골고루 배분되지 않기 때문이지만, 자본이 골고루 배분된다면 너희가 과연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나 자본은 자본에 대한 너희의 적대적인 비판은 허용하되, 비판하는 당사자들은 때려잡는 것이다. 알겠느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그러니 열심히 자본을 성토하고 자본가들을 성토하라. 그리하여 온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바로 그 길이 나 자본의 신성을 온 세계에 전파하는 길이니라!”[이 대사는 내가 지금껏 어설피 관찰해온 결과들을 나의 고질적인 억측에 비추어 창작해본 것이다. 어쩌면 이런 대사는 ‘자본-토템’을 숭배하는 자들 혹은, 아주 일반화된 용어로 말하면, 이른바 ‘물신주의’나 ‘배금주의’를 아우르는 ‘자본주의’의 ‘물신(fetish)’인 자본을 숭배하는 자들의 ‘초자아’가 내리는 절대명령(곧 모순명령)으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적대감과 반감은 경멸과 무시 앞에서는 태생적인 패배자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탁월한 심리학자이자 생리학자인 니체의 시각을 응용하여 말하자면, 적대감과 반감을 느낀다는 것은 적대와 반대의 대상자들이 ‘중시하는 가치’를 인정하고 똑같이 중시한다는 것, 아니, 차라리 그런 ‘가치’의 중요성을 배가시키는 야합공모활동에 적대적으로 부지불식간에 동참한다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적대시하는 자들의 가치와 위상의 확고한 ― 지독한, 일반적인, 염빙(厭憑)할, 보편적인, 징글맞은, 세계적인 ― 기반을 다지고 또 다지는 데 부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토록 자신들을 괴롭히고 억압하고 무시하고 경멸해온 자들이 중시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 ― 주류세력이 중시하는 지배적인 ‘가치’ ‘문화’ ‘자원’ ‘지식’ ‘권력’ 등등 ― 을 적대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결국 그것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똑같이 공감하고 그것들을 똑같이 중시하며 그것들의 중요성을 배가시키는 데 기여하는 공모협잡과 다름없다. 그것은 “나도 그것들을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다!”는 원망 혹은 원한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소치의 발로이다. 바로 이런 ‘동일한 욕망의 구조(내용과 형식)’를 사수하고 보수하기 위한 비판이 이 시대의 진보적이고 적대적인 비판의 진상이다. 이럴진대 원한=비판으로써 어찌 혁명이 가능할 것인가.
그렇다고 냉소만으로 혁명이 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냉소는 단지 이토록 동어반복적인 비판의 굴레를 벗어나서 기득주류의 가치와 문화 따위와는 생리적으로 단절하고 결별하여 그것들을 전복시킬 수 있는, 아니 완전히 무시하고 경멸할 수 있는 조금 더 확실하고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비판보다 냉소가 혁명의 본령 ― 그런 본령이 존재하고 또 존재할 수 있다면 ― 에 훨씬 더 가까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경제사회학자 베블런Thorstein Veblen(1857~1929)은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보다도 더 혁명적인 지식인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물론 베블런은 마르크스보다 반세기 이후에 활동한 인물이지만, 19세기의 경험을 공유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베블런과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차이는 마르크스는 비판을 택했지만 베블런은 냉소를 택했다는 데 있다. 이런 맥락에 볼 때 마르크스의 『자본론Capital』과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은 시기를 잘 못 만났거나 오해받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적대적 비판의 산물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한 때나마 자본주의만큼이나 온 세계의 노동자들을 단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블런의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은 비판이 아닌 냉소를 기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숨기고 싶어 하는 유용하고 귀중한 본능과 가치를 일말이라도 드러낼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본능과 가치를 가리는 데 봉사했다면 베블런은 바로 그런 본능을 드러내기 위해 냉소의 묘미를 선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 아마도 미국경제학계에서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해 기존의 갖은 학술적인 논리를 성가실 정도로 동원하면서 ― 자본주의 문화는 야만적인 “약탈문화”에서 유래한 “금력과시문화”라고 비꼬았다. 진지하고 비장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와는 다르게, 자본가들의 심중에 더 깊이 비판의 바늘을 찌름과 동시에 그런 자본가들을 흉내내고자하는 많은 이들의 욕망의 실상마저 폭로하는 냉소까지 시전(示展)했다는 점에서 보면 100년 전의 베블런은 오늘날의 무수한 자칭타칭 진보지식인보다도 더욱 진보(역시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적인 지식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베블런은 인간의 흉내와 모방의 심리학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아니, 다른 학자들도 잘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심리학을 그들의 협소하고 옹색한 ‘학문’에 적용하여 설명하기를 기피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 스스로도 찔리는 바가 없지 않았을 터이고, 그래서 그런 불쾌한 심리학을 구차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학문적 허영과 권위로 무시했을 터이니 더욱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런 현실적인 맥락이 베블런이 구사한 비판을 풍자적인 비판 즉 ‘슬픈 냉소’로 견인했으리라.
그런데 냉소는 심리학적-생리학적 자각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냉소는 적대감이 아니라 비극정신으로 이어진다. 시대가 중시하는 가치를 부정하기보다는 아예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고 격하시키는 냉소는 그래서 허무주의적이지만 진정 혁명적일 수도 있다. 따라서 냉소하는 인간은 고독하다. 베블런이 ‘일반적으로’ ‘대체로’ ‘대개’ ‘통상적으로’ ‘보통’ ‘대부분’ ‘다소’ ‘약간’ ‘어느 정도’ ‘예를 들어’ 같은 부사들을 그토록 성가시게 동원하면서 이른바 ‘논리의 일반성’을 확보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는 이유를, 나는 어쩌면 이런 냉소의 혁명성을 완화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냉소의 진미를 조금이나마 맛보게 하는 그의 냉소적인 관용과 친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억측한다. 내가 보기에는 다소 갑갑하게도 보이는 그런 식의 부사들의 남용을, 나는, 이를테면, 인간에 대한 베블런의 비극적 인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조치들이라고 억측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베블런의 이러한 일반화 욕구 혹은 관용이 오히려 그가 구사하는 냉소의 의미를 흐리게 만들고 말았다는 데 있다. 나의 편견에 비추어보면 불필요해보이는 그런 번거롭고 귀찮은 노력은 그의 냉소에 마르크스주의의 색채를 ― 자의든 타의든 ― 더 강하게 가미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일반 독자들의 분노와 원한감정을 더욱 자극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학문하는 자들, 옹색하고 협소하기 그지없는 자들에 대한 과도한 배려와 일반 독자들에 대한 지나친 친절이 한편으로는 그의 탁서(卓書)의 의미를 반감시키고 만 것이다. 그리고 특히 ‘문명사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이른바 야만적인 “약탈문화”의 잔재가 사라져가는 좀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로 전망하는 그의 시선은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을 현대사회에 너무 안이하게 해석적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즉 다윈의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발전론’도 ‘진보론’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의 제반조건이 갈수록 나아지고 좋아지고 개선되고 복잡해지고 세련된다는 이론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존의 학자들의 대다수와 일반인들의 대다수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베블런도 바로 이런 단순하고 편협한 맥락의 진화론을 서양의 경제사회문화에 적용하고 있다. 이런 안이함이 바로 ‘베블런 식 냉소’를 비판의 역부족으로 몰아간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이 한편으로 ‘비판서’로 읽힐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 한계는 베블런이 철저히 독자적인 시각을 고수하지 못한 데서도 연유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덕분에 이 책이 ‘미국’에서는 고전의 반열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판의 태생적인 역부족은 비판이란 본시 홀로하기 불가능하다는 데서 비롯된다. 비판은 보편적인 논리를 근거로 삼아 타자를 지향하는 담론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극단적인 비판은 모든 보편적인 논리 자체, 기존의 모든 가치 자체를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 비판은 비판을 넘어서, 냉소와 전복과 ‘자아의 혁명’으로 파문되기 시작한다. 이 파문과 교차하는 것이 바로 냉소이다. 냉소는 자기에 대한 냉소, 자아에 대한 냉소, 즉 쾌통한 냉소의 통점(痛點)을 통과하여 자아의 혁명으로 나아간다. 그 길은 가녀린 자유의 꼬리빛이나마 언뜻 목격할 수 있는 고독한 길이다.
그래서 비판은 홀로 할 수 없지만 냉소는 홀로 가능하다. 일찍이 다른 이유로 “혁명은 왜 고독해야하는 것인가를”[김수영, 「푸른 하늘을」, 『김수영 전집 I 詩』) 간파했던 시인 김수영이 지향한 자유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의 이름도 내가 보기에는 “피의 길”이기보다는 이러한 냉소의 길이어야 했다.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를 전복시키고 기각하기 위한 냉소도 그래서 늘 고독하게 시작되어야한다. 베블런이 냉소보다는 비판에 ― 자의든 타의든 ― 경사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그가 철저히 독립독행하지 못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와 거의 동시를 살면서 『악마의 사전The Devil’ Dictionary』이라는 ‘냉소의 정전(正典)’이라고 할만한 기서를 펴낸 독창적인 냉소가(冷笑家) 앰브로스 비어스Ambrose Bierce(1842~1914)만큼이나 고독한 지식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들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원한어린 적대적 비판보다는 쾌통하고 고독한 냉소야말로 진정 ‘자아 혁명’을 가능케 할 지극하고 극단적인 비판의 출구임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 출처: 문학계간지 《리토피아》(2007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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