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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의 저녁
LED화면에 진하게 적혀진 시간을 두 눈으로 읽는다. 약속시간이 되자 두 눈으로부터 찌르르르-하고 신호가 온다. 만남의 알람이다. 금이 그어진 핸드폰을 덮고 주머니 속에 넣는다.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사거리의 저녁을 스치는 바람이 약간 차갑게 느껴졌다. 멀리서 L군이 보인 건 그때였다. 졸업할 때 보다 머리가 훨씬 길어있는 L군은 약간 살이 빠진 듯 보였다. 그러나 언제와 같은 L군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P군을 만나기 위해 520번 정류소로 향했다. 미적미적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L군이 좋아하는 여자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말만 들어보면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 것만 같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 고백하겠다는 그의 모습이 순진해 보이기도 하고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한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반장을 맡고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그가 이런 바보가 되어버릴 줄 누가 알았는가. 그러나 이런 변화 또한 일상의 L군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을 선사해준다. 고향의 친구란 이런 느낌인걸까.
정류소로 향하는 도중 이전엔 보지 못한 가게를 보게 되었다. 술집이다. 안주가 맛있다는 L군의 호평을 들으며 길을 걷던 중 저 멀리서 P군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를 다니는 P군은 못 알아 볼 만큼 바뀌어 있었는데, 살이 빠지고 안경을 벗었고, 머리에 굴곡이 지도록 스타일을 바꾼 P군의 모습은 나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조금 저녁바람이 거세졌다. 마지막 멤버인 C군은 구월동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버스를 탔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마을버스의 내부. 안동에서 시내버스를 탈 때 마다 이 쾌적한 버스가 어찌나 생각나던지. 즐거운 마음으로 돈을 내고 자리에 앉는다. 사람은 많이 타지 않는다. 그리고 버스는 우리들이 풀어내는 이야기와 함께 달린다. 계속해서 달린다.
L군은 또 다른 친구 K군과 함께 재수를 하고 있다. K군은 우리사이에서 괴짜로 통하는데, 그 사이코틱한 유머가 요새 빛을 잃고 있다며 L군은 시시해하는 눈치다. 하긴 K군은 누굴 안주삼아 씹어대며 개그를 쳐야하는데 둘만 있으니 무슨 이야기를 제조해 내겠느냐며 우린 키득거린다. 화제는 K군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정말이지 미스터리한 존재다. 우리가 다니는 고등학교 바로 뒤편에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K군의 집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다는 한 친구의 말로는 다른 친구와 함께 K군의 뒤를 미행했다 하는데 산 중턱에서 모습을 감췄더란다.
그런 소문을 듣자 우리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청난 부자라고 소문난 K군의 집안이 궁금하기도 했으며, 솔직히 우리는 그의 이름, 핸드폰 번호, 나이 빼고 무엇을 더 알고 있단 말인가? 어느 날 우리는 K군의 집으로 추정되는 그 곳에서 몰래 숨어서 K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마치 우리가 거기 숨어있는걸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호기심은 좀체 꺼지질 않아서, 몰래 K군의 뒤를 밟아 본 적도 있다. 그런데 잠시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에 어느새 저만치 멀어지다가 어느새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K군을 둘러싼 음모론이 그때부터 계속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회사의 회장이라 아들들에게 막대한 양의 유산을 물려줬다. 친일파의 후손이다 등등, K군의 정체는 점점 과장되어 부풀려져 갔고, 아버지는 건축업체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회계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중학교 때 인적 기록 란에 주소가 문학산 전체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부자일 것이라는 설이 사실로 몰려갔다. 실제로도 K군은 드문드문 먹을 것이나 놀 거리 계산을 잘 하는 편이며, 큰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우린 항상 K군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혹자는 외계인이라 할 정도로 별난 성격도 한 몫 했다.
그렇게 K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구월동 신세계 백화점 거리에 들어섰다. 언제나 사람이 많은 이 거리엔 나의 기억도 상당수 묻어있다. 수능이 끝나고 친구들과 농구를 하기도 했고 영화를 보러 갈 때나 밥을 먹을 때도 이곳에서 모이곤 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요 근래에 사는 모든 중 고등학생에게 있어서 구월동은 추억의 장소일 것이다.
C군을 만났다. 머리가 길어져서 C군 특유의 귀여움이 사라진 듯 했다. 학교에서 인기가 많을 듯한 C군이지만 아직 사귀는 여자는 없다고 했다. 다들 겉으로는 모두 어른스러워진 느낌이 든다. 돈을 출금하기 위해 농협으로 향하던 도중 나는 친구들에게 동국대학교 경주 캠퍼스에 다니는 친구 J군의 이야기를 꺼냈다.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던 J군은 처음엔 자신의 룸메이트가 활발하고 좋은 사람인줄 알았다고 했다. 밤에 방안에서 보면 조금 과하다 싶었지만 이것저것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즐거워 하니 J군은 룸메이트는 잘 걸렸다 싶었더란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룸메이트의 말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주체를 할 수가 없더란다. 시덥지 않은 말장난으로 J군의 정신을 서서히 분열시키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엔 헤드셋을 끼고 자는 J군의 헤드셋을 벗기고 말로써 그의 잠을 깨웠다고 한다. 계속 더 같이 살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나에게 문자로 자취방 가격을 물어보던 J군. 지금은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다.
J군의 룸메이트의 정체에 대해 추측을 해보며 우리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스테이크를 시키려는데 그냥 스테이크만 먹고 샐러드 바만 돌아다니는건 재미없겠다 싶어 네 명이서 돈을 탈탈 털어서 와인 한 병을 시켰다. 9만원대에 호가하는 비싼 와인이었다. 사실은 가장 싼 것을 시키려니 뭔가 없어 보이고 가장 비싼 것을 시키자니 주머니가 여의치 않다. 그래서 가운데 것을 시켰는데도 9만원. 뭐 한번쯤 이런 경험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나는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견고히 쌓여진 정신의 젠가에 미끌미끌한 기름을 한 통 들이 부어버리는 느낌이 난다고 해야 할까. 라고 말한다면 무슨 내가 정신적으로 굉장히 성숙 해 보이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술이 가격에 비해서 그리 맛있지가 않기 때문이다. 소주 한 병이 1200원이라 할 때 같은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것은 3분 요리 한 개, 롤 휴지 두 개, 이쑤시개 통이랑 면봉 통 한 개 씩, 초콜릿 하나와 막대사탕 하나, 제주 삼다수 한통, 퓨리스 샘물 한통하고 500ml 한통, 쓰레기봉투 50리터짜리를 하나 살 수 있다. 1200원으로 저렇게 실생활에 유용하고 도움이 되는 것들을 살 수 있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이대로 가다가는 열 페이지가 다 채워질지 안 채워질지 몰라서 잠시 내가 올린 과제 글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자학 혹은 자숙의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다. 소설을 쓰는 중 이런 글이 시작되는 것은 뭔가 이상하니 스테이크를 썰던 내가 갑작스레 명상의 상태에 빠져 지난 고전과 이야기 수업시간에 제출한 독후감을 다시 곱씹게 되었다고 설정하도록 하고 말이다.
지난 고전과 이야기에 제출한 과제는 동, 서양의 고전을 읽고 독후감 3매를 써오라는 것이었는데 일자무식한 내가 고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무엇 있겠는가?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우리나라 고전중 하나인 흥부전을 읽고 독후감을 쓰려했다. 그런데 그 쉽고 명쾌한 흥부전의 내용으로 페이지 3장을 채우기란 여간해선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아래는 그 독후감의 전문이다. 중간에 스스로 나를 질책하는 부분이 있겠다.
흥부전으로 본 현대사회
민속학과 20100138 이 상윤
(여기까지가 이 글 중에서 가장 잘 쓴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권선징악(勸善懲惡). 흥부전의 모토이자 거의 대부분의 고전소설에서 나타나는 흔한 주제이다. 흥부전에서 흥부는 선한 인물의 대표자로, 놀부는 악한 인물의 대표자로 나오게 된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흥부는 많은 자녀들과 함께 놀부에게 구걸을 하기도 하는데 놀부는 그때마다 매몰차게 흥부를 내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부는 놀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흥부로 대변되는 인물들은 누구일까. 그 어떤 누가 자신에게 불이익을 당하고 나서 원망하지 않는가? 신문을 펴보아도 대립과 갈등에 대한 이야기만 나올 뿐, 아무도 흥부처럼 묵묵히 당하지 않는다. 힘없고 소외된 자들, 현대의 흥부들은 약하지 않다.(흥부와 놀부같은 평면적 인물들을 살아 숨쉬는 입체적 존재인 인간에게 빗댄것은 과연 적절한 처사였나? 그리고 이렇게 부층과 빈층을 내 의지로 편을 가른것이 과연 옳은 비유였나?)
그러나 현대의 놀부들 또한 한없이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놀부는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데, 박씨를 물어다 준 제비, 박속의 도깨비들처럼 흥부에게 도움을 주고 놀부에게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칠 존재는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시민들, 흥부의 힘으로 놀부를 이겨내야 하는데 그러기에 현대의 흥부들은 놀부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한다. 자신들의 사생활을 비밀스럽게 감춰두었기 때문이다.(흥부가 놀부를 꼭 이겨야 할건 뭐람. 흥부전에서 둘이 치고박고 싸우는 것도 아닌데.)
이 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 우리 사회는 항상 뜨거운 감자처럼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흡사 60년대를 보는듯한 경찰들의 강제 진압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 그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배웠는가. 흥부가 착하기에 현대는 너무 무섭다.(직접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올리다. 지금 생각하면 허술하기 짝이없는 문장)
몇 달 전 수능을 보고 나서 졸업식을 하는데 교장선생님이 한 말씀을 하신 뒤에 시 대표라는 국회의원이 와서 피그말리온 효과를 운운하며 한바탕 연설을 펼쳤는데 결국 그 연설의 끝엔 한 표만 던져달라는 뜻이 진하게 배어있었다. 친구들과 나는 어째서 우리가 학교를 떠나는 이 시점에서 선거유세를 하는 것이냐며 싫은 기색을 비췄지만 담임선생님은 난처한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놀부와 흥부를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나누는 내 생각이 운동권적인 성격이 강하다 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사람과 사람이 갈등을 유발시키는 동기의 저 깊숙한 근원에는 재물과 권력에 관한 것이 빠질 수 없다. 또래 집단끼리도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싸우고 서로 상처를 주기 마련인데 이 사회라는 커다란 원 안의의 두 집단은 어떻겠는가.
흥부전에서 박씨를 얻고 그것을 심어 기른 박에서 나온 금은보화로 큰 부자가 된 흥부는 선한 마음을 잃지 않은 채 어려운 어른들을 제 부모처럼 여기며 공양하며 살고 제비다리를 일부로 부러뜨려 얻은 박씨를 길러 그것에서 나온 도깨비들과 오물들로 재물을 모두 잃고 거지가 된 놀부를 거둬들이기 까지 한다.
잠시 다른 옛 고전 이야기인 콩쥐 팥쥐전을 살펴보면 악인의 말로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흥부전에서 잘못을 빈 놀부는 흥부의 은혜를 입게 되지만 콩쥐 팥쥐전에서 팥쥐와 계모는 벌로 죽임을 당하고 그 시체는 젓갈로 만들어져 독에 담기게 된다. 악인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묻어나는 잔인한 결말이다. 그에 비하여 흥부전은 악인의 개선을 바라는 결말로 이어진다.(그래서 이 글의 요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악인의 개선?)
사실 콩쥐 팥쥐전 말고도 악인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비치는 작품들은 많다. 그렇기에 흥부전의 결말은 조금 독특하게 다가온다. 권선징악이 모토라지만 그 끝에서 결국 선이 악을 포옹하고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 우리 사회가 놀부에게 원하는 것 또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인걸까. 사실이 그렇다. 국민들이 정부에 맞서서 듣고 싶었던 말은 ‘죄송합니다.’라는 다섯 음절 이었다. 그렇건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잔인한 발길질과 높게 쌓여진 컨테이너 장벽이었다.(결국 놀부는 정부가 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흥부가 놀부와 같이 살아 갈 수는 없는 것일까? 아직까진 그 희망이 보이진 않는다. 단절되고 비밀에 쌓인 그들은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고, 심지어는 거짓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런 놀부의 앞에서 흥부는 무엇 하나 할 수 조차 없다. 주걱으로 뺨을 때리는 대신 차갑게 한번 무시하고 말 뿐이니 흥부는 볼에 붙은 쌀 한 톨이라도 떼어먹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 전 사회학 수업시간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가진 방송물 한편을 보았는데 잠금장치가 어린아이들이 열기엔 턱없이 어렵고 잘못된 설계를 가진 탁아소에서 일어난 커다란 화재로 인하여 기르던 아이를 잃고 한국에 대해 환멸을 느낀 후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있는 부부가 나왔다. 그들이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추운 거리에서 울며 바랐던 것은 사과였는데 돌아온 것은 면담 거절이라는 냉담한 처사와 여론의 카메라였다.
그렇게 여론에서 이야기가 거론되며 점차 실뭉치가 커지기 시작하자 1시간 정도 남짓 면담시간이 주어졌지만 이미 상처 받을 대로 받은 그들에게 그것은 어떠한 의미도 없는 1시간이었다. 그렇게 소외된 민중은 한국을 등지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그 영상에서 비치는 그들은 항상 고국을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단지 한 번의 무시가 일으킨 파장이 이토록 커진 것이다.
이렇게 현대의 놀부의 모습을 보았을 때, 고전 속 놀부는 오히려 정이 가는 존재로 다가올 정도다. 심술궂은 반응조차 없는 싸늘하게 굳은 현대 사회 속 놀부들은 점차 흥부들과 멀어지고 서로에 대해 감정의 벽만 높아지고 있을 뿐이다. 차갑게 흐트러진 마음이 다시 붙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정도로 현대의 흥부전은 불안한 절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창의력 신장을 중요로 여긴다는 학교의 수업방식도 바뀌지 않은 채, 학생들을 좀 더 좋은 학교에 보내고 학교의 이름을 빛낼 요량으로 학생들의 자유도 막은 채 문제집과 참고서들로 수업을 꾸려나가는 학교에서 키워내는 것은 결국 차가운 얼굴을 가진 놀부 아닌가. 따뜻한 인정 넘치는 사회를 존중한다면서 정작 원하는 인력은 인성보단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겉과 속이 다른 이 사회에서 상처받는 것은 어린 학생들일 뿐이다.
고 3시절 고민 상담을 하러 부장 선생님에게 간 친구가 다음날 수업시간에 ‘나는 너희들 대학 보내는 사람이지 고민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무시당하고, 자율 학습이라는 명목 하에 매질을 당하며 강제로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은 자신의 인격과 창의력 신장을 배제 받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고쳐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교육 체제? 법? 관습? 그러나 놀부와 흥부는 사라질 수 없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이어진 혈연인 것처럼,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더라도 놀부와 흥부. 강자와 약자, 대립과 갈등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흥부전이 현대 사회에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면서도, 종래에는 둘의 화해를 바라고 화목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가장 큰 의문이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둘의 사이를 이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콩쥐와 팥쥐처럼 극단적인 악을 징벌하는 형태로도 끝날 수 없다. 왜냐하면 사회는 끝이 없는 구조를 가진 이야기이고, 언제까지나 절정의 형태를 유지할 뿐 해피엔드와 배드엔드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물음 속에서 나는 내가 흥부인지 놀부인지 생각하게끔 된다. 인간의 본연적인 특징인 탐욕을 취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때가 타지 않은 순백색 타올과도 같은 것이다. 사회는 나의 어떤 능력을 원하는가? 그리고 나는 나의 어떤 능력을 신장시키기를 원하는가? 흥부전 속에서 나타난 교훈을 따른다면 나는 흥부처럼 선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가 원하는 방향은 어디인가. 나는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가?
어렸을 때는 동화로만 읽던 흥부전을 이렇게 접해보자 나의 기초 자아에까지 깊은 성찰을 요구하게 된다. 옛날 옛적에 살던 착한 남자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커다란 메시지를 받게 되었을 때, 우리들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심술보 형님에게 구걸을 하며 힘들게 살다가 우연히 위험에 빠진 제비를 도와주게 되고, 그 제비가 물어다준 박을 키우고 박을 타서 나온 금은보화로 행복하게 살게 되고, 못된 짓만 일삼던 형은 일부러 제비를 위험에 빠트리고 구해주는 척 하여 얻은 박을 키우고 타서 온갖 재액을 입게 된다. 그러나 그 끝에서 동생은 형을 구제해주고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이 사회는 끝이 없고, 흥부와 놀부는 언제까지나 대립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고 그 사이가 좁혀질 것인지 더 멀어질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은 그 기로에 서서 어떤 모습을 선택할 것인지 정해야 한다.
나의 꿈은 작가이다. 처음에는 내가 쓴 글로 누군가가 웃고 울고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하였고, 지금에는 하나의 재단을 설립하여 신예들을 양성함으로써 한국의 문학수준을 강성하게 이끄는 것을 나의 목표로 잡고 있다. 비록 순수한 꿈이었다 할지라도 이미 나의 욕심에 이끌려 더욱 크게 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놀부인 것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꿈이 순수한 거라 믿고 있고, 결국 나는 나의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흥부와 놀부가 끊임없이 대립하는 이 사회 속에서 나는 누구를 위하여 펜을 잡게 될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원하는가. 풀릴 듯 풀리지 않은 깊은 의문만을 남긴 채 흥부전을 다시 곱씹어본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애매한 마무리
중간에 개입을 계속 하다가 이 글의 수준이 절망적이란 것을 깨닫고 첨삭 아닌 첨삭을 멈췄다. 한말을 계속 반복하고 모호한 문장에 극 운동권적인 단어 선택이라니. 나름 글 좀 쓴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런 글을 독후감이라고 제출하다니 절망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이 독후감은 다음 수업시간에 다른 학생들 앞에 공개된 바가 있다. 정치적인 색이 짙은 글이지만 글의 단정함과 줄거리 요약글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펼친 좋은 예라는 이유로 말이다. 기분은 좋았지만 이런 어린 글을 만인 앞에서 공개하게 되다니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럼 다시 이 먹먹한 까만 공간을 나와 다시 5월 9일의 저녁으로 향하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고 있다. 고급스러운 스테이크와 함께, 싸구려 수다를 곁들여서.
그때 W에게 전화가 왔다. 충주대 토목학과에 다니는 친구인데, 최근 여자문제로 나에게 자주 전화를 걸곤 한다. W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약간 떨리는 것 같기도 했는데, 고백을 했다는 그의 용기 있는 선택의 끝에 돌아온 건 거절이었다.
과제 때문에 서울에 잠시 다녀온 W는 지금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왠지 모르게 그를 만나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한 뒤, 나는 3명의 친구들과 헤어졌다. 다음에는 좀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하고 나서, 나는 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10시 20분경 W가 비틀비틀 걸어왔다.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녀석은 구역질을 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W에게 향했다. 나는 말없이 W를 부축했다.
“왜 기다리라고 해놓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W의 힘없는 한마디였다.
그 뒤에는 W와 함께 택시를 타고 동춘동 까지 향했고, 5월 9일의 저녁은 이렇게 끝이 난다. 즐겁지만은 않은 인천에서의 휴일. 그렇게 끝났다.
홀로 길을 찾아 나선 아이들
‘자퇴’라는 단어의 느낌은 우리의 귀에 그렇게 곱상히 들려오진 않는다. 불량 청소년들의 개념 없는 일탈이라는 편견이 박혀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꿈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상 속에 담긴 친구들은 저마다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자퇴를 했고, 또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았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이 밝고 따뜻하리라 장담할 수는 없다. 음악을 위해 자퇴를 한 가수 김사랑은 스스로의 꿈은 이뤘으나 자퇴를 한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댄서가 되고 싶었던 친구는 이제 방 한쪽에 마련된 연습공간에서 단지 취미생활로만 춤을 추고, 자퇴를 하려는 학생들을 말리고 싶다고 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때 만화 공부를 위해 학교를 자퇴하려 했던 친구가 있었다. 1학년 때부터 봐왔던 친구 인데 솔직히 재능이 없었다. 나의 권유로 자습과 보충학습을 빼고 만화학원에 다니기로 했는데 학원이 자기랑 맞지 않는다며 수업료를 빼돌려 오토바이를 사서 타고 다니다가 심하게 다쳐서 병원에 장기 입원했던 적이 있다.
이런 사건을 옆에서 겪어봐서 인지 나는 자퇴를 하겠다는 중, 고등학생들이 믿음직하지 못하다. 하루 일과에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학교생활이 없어지면 그 공백의 시간동안 정말 자신이 원하는 일에 매진할 만큼의 정신력을 가진 학생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꿈을 위해 좋아하는 것 한두 번 참아낼 수 있는 학생은 많다. 그러나 수많은 시간동안 참아낼 수 있는 학생은 많지 않다.
그러므로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커다란 핑계로 학교를 포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실업계 고등학교나 특성화 학교 등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길들은 보지 않은 채 바로 자퇴를 입에 담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가 조금 원칙적이고 고지식하다 생각되지만 봉우리도 틔어내지 못한 새싹이 벌써 꽃을 맺으려 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홀로 길을 찾아 나선 아이들. 그 길에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래도 홀로 나섰다면,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으면 한다. 너무 빨리 세상에 서게 된 만큼 빨리 견고해졌으면 한다.
(사회학 시간 과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민속학과 20100138 이 상윤
‘군자’란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지성이 높고 성품이 온건한 지성인을 일컫는다 했다. 그러나 내 벗인 K군을 보고 있으면 꼭 지성이 높은 사람이 군자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K군과의 첫 만남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 당시 다니던 중학교에서 이사를 하는 바람에 새로운 중학교로 전학을 온 나에게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다시 친해지는 일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그때 제일 처음 사귀게 된 친구가 K군인데, 이 친구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몹시 순하다는 것이었다.
후배들이 무거운 짐을 옮기고 있거나 짐을 옮기는 일이 있을 때 솔선수범하여 나서던 K군이 남몰래 봉사활동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K군의 집에 놀러갔던 어느 날이었다. 자장면을 시켜서 먹으며 K군의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보던 나는 사진첩 사이사이에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K군이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K군에게 물으니 주말에 별 일이 없으면 봉사활동을 다녔고, 지금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사진 속의 어린 K군이 수많은 사진 속에서 점점 성장하기 시작했고, 지켜보던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정도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했으면 학교에 쌓인 봉사시간이 대체 몇 시간이냐고 묻자 K군은 20시간 이라 하였다.
20시간이면 그저 학교 잘 나가고 방학 중 소집일 만 안 빠지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K군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한 봉사활동은 봉사시간에 넣지 않는다고 하였다. 자신이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인데 보상을 받아서 무엇 하냐는 친구의 모습이 너무 어른스러워 보이고 그에 비해 하는 것 하나 없는 내가 한심스레 느껴지기도 했다.
K군은 비록 학문적으로 뛰어나진 않았으나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각과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가지고, 친절을 베푼 것에 대한 보상을 전혀 바라지 않던 친구였다. 그 시절에 나는 학교에서 조금만 일을 시켜도 왜 봉사시간을 주지 않느냐며 따지려 들고, 하기 힘든 일이 있으면 그에 대한 보상을 꼭 알아보고 하곤 했었는데, 그 힘들다던 장애우들 수발을 들면서도 한없이 환하게 웃던 K군의 사진 속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K군에게 물었다. 봉사시간 10000시간이 넘어서 신문 지면에 실리는 아이들을 보면 어떤 감정이 드느냐고. K군의 대답은 그저 그들이 대단하다는 느낌만 받을 뿐이다. 라는 것이었다. 여태껏 해온 봉사시간으로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을 거라는 말에 K군은 그저 웃으며 자기 분수에 맞는 대학에 가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 하였다.
자기를 알리고 인정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심인데 그것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조용히 선행을 베푸는 K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 군자가 K군이라는 것에 대하여 나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온건한 마음이 언젠가 조용히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길 바라며, 나 또한 조용히 학문에 매진하며 스스로의 목표에 조금씩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현대인과 동양고전 시간 과제)
<스펙 공장>
얼마 전 남한은 김길태라는 이름 하나에 온몸을 떠는 분노를 느껴야 했다. 그는 어렸을 적 부모에게 버림받아 길에서 양부모에게 주어졌고, 길에서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이름 ‘길태’로 살게 되었다. 어린 시절 활발한 성격이었던 소년 길태는 사춘기에 접어서며 방황을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된다. 그러다 자신의 이름의 뜻을 알게 되고 그는 서서히 망가져가기 시작한다.
그런 길태를 잡아준 사람은 없었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그의 인생에 개입한 교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 스스로도 말했듯 자신의 인생에 ‘스승’은 없었다. 학생을 바른길로 인도하며 때로는 친구, 부모보다 더 가까이 다가서야할 스승의 존재는 어디로 간걸까? 실제로 요즈음 중, 고등학교의 교육 사이클을 보면 어이없음에 치를 떨어야 할 정도다.
제 7차 교육과정의 슬로건은 ‘창의력’이다. 그러나 지금 학교의 모습은 그 옛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선생은 매와 체벌로 학생을 다스리고 거기서 학생과 선생사이의 불신이 싹트기 시작한다. 우리가 교육받은 참 교사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실제로 필자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부장을 맡은 선생은 자신에게 상담을 하러왔던 학생을 지목하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너희를 대학에 보내는 사람이지 상담가가 아니야. 뭐 그 전화번호 있잖아? 전문 상담가랑 상담을 하란 말이야.”
이런 교사들이 있는 현재 한국의 교육상황 속에서 길태같이 방황하는 학생들은 홀로 속앓이를 해야 할 뿐이다. 학생의 창의력, 개성을 존중한다는 7차 교육과정의 슬로건은 어느 나라 어느 지방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건가. 학생을 더 좋은 고등학교, 대학교에 ‘상납’하기 위해 ‘다듬고’ ‘깎고’있는 이 중.고등학교의 실태에 대해서 자각하고 각성하지 않는 이상 이런 범죄가 재발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만약 그때 길태가 참된 스승을 만나서 올바른 길로 이끌렸다면 지금 그는 그 활발했던 성격으로 어디선가 리더가 되어있지 않았을까.
(글읽기와 쓰기 시간 과제)
분포
1. 서울 · 경기도
도당굿은 무당굿형의 동제로 1년 혹은 2,3년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신을 청해 들여 신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함께 즐긴후 신을 본연의 장소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서울 지역의 도당굿은 한강을 기점으로 북쪽에선 강신무가 주도하며 남쪽에선 세습무가 굿을 주도한다. 경기도 남부지방의 음악과 춤은 공수가 간략하고 무복이 간소하며, 도무(跳舞)가 적다는 점에서 타 지역과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2. 강원도
산간지방인 영서지방과 해안지방인 영동지방에서 행해지는 동제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영서지방에서 행해지는 서낭제는 서낭신을 모시는 의례로서 정숙형 동제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에 비하여 영동지방에서 행해지는 풍어제는 흥겹게 노는 성향을 띄는 무당굿형 동제의 모습을 나타낸다.
3. 충청도
산신제와 거리제, 장승제가 전승되어 내려온다. 풍작과 아들낳기, 호환과 산로 안전, 역신을 비는 산신제와 마을의 입구나 큰거리, 삼거리, 사거리에서 제액과 무서운 짐승으로부터의 보호를 빌던 굿인 거리제, 마을의 액을 밖으로 내몰아 마을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장승제. 이 세가지가 복합하여 행해지며 추가로 탑제라는 동제가 행해진다. 탑제는 산신제, 거리제와 같은 정숙형 동제의 성격을 뛴다.
4. 영남
골맥이(골매기) 동신제가 전승되어 내려온다. 골맥이는 풍년과 제액을 비는 마을의 수호신으로써 부락창건신, 시조신 등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영남의 골맥이 동신제는 특징적인 신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별신굿 탈놀이와 기산오광대가 같이 전승되고 있다.
5. 호남
당산제가 전승되어 내려온다. 당산 할아버지와 당산 할머니가 가장 보편적인 동신이며 당산 할머니는 지모신(地母神)으로 여겨져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가진다. 여러 형태의 굿이 복합 전승되어 나타나며 줄다리기와 복합 병행되는것도 특징이다.
6. 제주도
본향당굿과 포제가 전승되어 내려온다. 마을마다 있는 본향당에서 해마다 제를 지내는 본향당굿은 동민 전체가 교단 신도이지만 현재는 여성 위주이다. 공동제의라는 면에서 지연적 화합성이 넘치는것이 특징이다. 그에 비해 한 밤중에 엄숙함 속에서 청결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는 포제는 생명, 생업등을 수호하는 신에게 제를 올리지만 유교의 합리성 때문에 하등의 본풀이가 없고 개성도 없다.
(민속학 시간 과제 중 나의 파트)
<한국을 떠난 사람들. 과연 옳은 선택인가?>
조 이름 : 오렌지(4조)
조장 : 이 수진
발표자 : 이 수진
서기 : 이 상윤v
참여멤버 : 이 샛별
이 예슬
정 은지
정 영성
차 민준
우리 조는 2번째 영상물인 ‘한국을 떠난 사람들’에 대하여 토론을 했다. 그 중에서도 자의로 한국을 떠난 사람들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토론을 하였는데, 6명의 토론자들 중에서 찬성 3명, 반대 3명의 토론 결과가 나왔다.
<찬성 입장>
이 예슬 - 한국을 떠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사고를 당했는데도 보상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서 큰 상처를 입고 결국 외국행을 결정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큰 실망을 하게 되어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한국’에서 적응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래서 떠나는 것에 대하여 찬성한다.
정 영성 - 떠난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어서 떠났고 정부에서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떠난 것이므로 그들에게 가지 말라고 할 권리가 없으므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여야 한다.
이 수진 - 국가가 떠나는 사람들을 위하여 제대로 된 관리를 하지 못하였고, 그들은 외국에서 한국의 아픈 기억을 잊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들의 타국으로의 이주에 대하여 찬성한다.
<반대 입장>
이 샛별 - 아무리 한국이 싫다고 하여도 떠나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다. 다른 방법을 모색하지도 않은 채 극단적인 이주를 선택한 것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표한다.
정 은지 - 한국을 버리고 떠나서 그 사람들이 얻은 것은 ‘현실에서의 도피’일 뿐 실질적인 해결이 아니다. 한국을 떠나서도 한국을 걱정하거나 한국에서의 주변 사람들이 던지는 차가운 눈초리로 더 큰 심적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정부에 더 큰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에 한국의 부조리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한국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차 민준 - 힘들다 하더라도 외국으로, 한국을 버린다면 그건 회피일 뿐이다. 현실을 인지하고 맞설 방법을 생각해야 하지 이면하고 피한다면 그는 영원히 사건에 제대로 대면할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종합 의견 정리>
이렇게 3 : 3으로 의견의 대립이 있었으나 결국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애착심이 더 큰지, 실망감이 더 큰지에 기인하여 갈려진 의견으로 보였다. 갈등의 고리를 끊을 것인지 망각하고 새로운 길을 찾을 것인지 각자 많이 생각하고 토론을 하였다. 그리고 서로 각자의 의견에 대하여 좀더 확고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다.
4조 오렌지였습니다.
(사회학 시간 토론과제)
메일로 발송해드릴게요~
첫댓글 블러그 <주막의등불>에도 편집된 5월9일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