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날 : 2011. 4. 7(목) 문화재 발굴과 MT
☞ 참석인원 : 주야간 11명, 교수님 3분과 함께
☞ 코스 : 한빛문화재단 현풍발굴현장-중식(추어탕 및 파전, 동동주)-양전리 암각화-고령 대가야체험축제
박연미씨와 박지은씨는 아가야가 아파서 불참 도인수씨는 근무관계로 불참 단촐하게 주야간반 11명, 교수님과 함께 다녀왔다
사람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그 말씀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어딘가로 떠난다는것은 참으로 좋은것 같다
3대의 차에 4사람씩 나누어 타고 목적지 고령을 향해 달려가는 차속에서 주간반 예은이는 현풍에 있는 유적발굴현장에 간다는 일정때문에 가슴이 설레는 모양이다. 나역시 궁금함과 설레임은 같다
고령에는 4월 7일부터 11일까지 대가야체험축제가 열리는 첫날이고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오전이라 행사일정으로 차량이 많이 밀린다 하여 일단 현풍유적발굴현장으로 먼저 가기로 하였다
현풍 문화유적발굴지는 스포츠센터가 들어설 자리라고 하는데 이미 발굴해놓은 것도 있고 진행중인것도 있었다
현장사무실에서 이일을 시작하신지 10년 되었다는 고선생님에게 발굴지의 전체적인 설명을 듣고 유구 원도면까지 볼수있는 영광의 기회도 가졌다
멀리 보이는 무덤의 유구들이 흰색으로 표시되어있건만 흰표시가 없었다면 나의 눈엔 그냥 흙으로 보일뿐이다
진짜 보이는 저곳에서 도자기가 나왔다니 너무 신기하다고 하니 고선생님 역시 본인도 10년째 이일을 하지만 신가하다고 말했다
▲ 발굴해놓은 민묘유구
▲ 묘지터에 돌이 있어서 그나마 유구확인이 쉬웠다는 고선생님의 말씀
▲ 오늘 발굴조사과정을 잘 설명해주신 한빛문화재단 고선생님과 한컷
장정남교수님께서 추어탕집으로 안내하였다. 낙동강이 흘러가고 있는 강변에 위치한 현풍 추어탕집은 꽤나 미식가들에게 소문난 집인가 보다
우유같은 동동주가 아닌 맑은술 동동주가 나오고 두부와 파전으로 먼저 배를 채우고 나서 추어탕을 시킨탓인지 참맛을 못느낀것 같아 조금 아쉽다. 식사를 끝내고 바깥에 나와서 4대강 사업으로 파헤져지고 있는 낙동강을 내려다 보며 무엇이 옳은지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런지 현재 내눈앞에 보이는 낙동강은 유유하게 말없이 흘러가고 있는 모습만은 아닌것 같다
한껏 불러진 배를 두드리며 다시 국도를 따라 양전리 암각화를 보러 간다
대구에서 고령으로 들어갈려면 꼭넘어야 하는 금산고개는 대가야와 신라가 다투던 전초지였다고 하는데 넘어가는 길옆에는 산림녹화기념숲 안내판이 세워진것도 보인다. 다음에 한번 시간내어 와서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기기 위해 뱃길을 이용해 내렸다는 개진면의 개포나루와 녹화기념숲에도 와보고 싶다
금산고개를 넘어 좌회하여 길옆에 있는 양전동 암각화앞에 도착
암각화가 새겨진 마을이름이 알터마을이다
가야건국신화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가야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신 이비하가 상아덤에서 만나 아들둘을 낳았는데 형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 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구지산으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이 깨어 6명의 동자가 되었는데 가정 먼저 깨어 나온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동자가 다섯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가야산 설화에는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신 이비가가 가야산 중턱 상아덤에서 만나 두알을 낳았는데 그알이 가야산 줄기를 타고 하천으로 흘러내려가 이곳 회천 알터마을에서 껍데기를 벗고 나와 대가야의 1대 이진아시왕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낙동강을 타고 경남 김해까지 흘러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알터마을의 이름과 난생설화와 웬지 맞아떨어지는듯하는 느낌이 들어 신기하다
암각화에는 동심원과 십자형, 가면모양이 새겨져있는데 북방민족과 관련된 유적으로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바램을 새긴것으로 동심원은 풍요를 기원하는 태양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안내되어있다
▲ 암각화 안내
▲ 암각화 실측도
▲ 보호를 위해 지붕을 만들어놓은 암각화
▲ 양전동 암각화 앞에서 단체사진
대가야 박물관과 왕릉전시관을 둘러보기 위해 고령읍내로 이동
고령에서 매년 열리는 대가야축제는 2005년 신비의 왕국 대가야라는 주제로 제1회 대가야 체험축제를 선보인 이래로 2006년 가야금을 테마로 한 "12줄의 비밀", 2007년 대가야의 성장과 발전의 비밀을 담은 "철의왕국 대가야", 2008년 대가야 왕릉속에 담긴 비밀을 찾아 나서는 "무덤의 전설", 2009년 바닷길을 다라 떠나는 대가야 항해의 비밀 "대가야의 대항해", 2010년 "용사의 비밀" 2011년 올해는 "대가야 탐구생활"이라는 주제로 개막 첫날이다
대가야인의 생활과 놀이에 관한 문화를 체험할수 있는 행사가 많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모두 패스하고 곧바로 대가야 박물관으로 들어가서 연세(79세) 지긋하신 문화해설사 선생님께서 열정적으로 설명을 해주셔서 고맙게 잘 보고 들었다. 문화해설사선생님(문창식)께서 본인은 젊음의 비결은 토끼뿔과 지렁이 등뼈를 삶아 먹어서 건강을 유지하시고 계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크게 웃었다
이진아시왕(42년)부터 도설지왕(562년)까지 520년간 16대 왕조가 번영의 누렸던 철의왕국이란 불렸다던 가야국이지만 신라 진흥왕때 신라에게 멸망하여 기록도 미미하지만 작은나라 부족연맹체로 기억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2007년 12월 창녕(비사벌) 송현동고분(15호분)에서 남녀두쌍이 한무덤에서 발견되었다는 순장소녀의 인골을 복원한 "송현이의 고령나들이"를 이름을 달고 송현이가 실체 사람처럼 맞아주고 있었다
송현이는 왼쪽귀에만 금동귀고리를 하고 있었고 치아조사결과 키 152의 16세 소녀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처음 송현이를 만났을때 나는 나이어린 왕비였을꺼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였었는데 인터넷에서 다시 검색하여보니 어린나이임에도 평탄한 삶이 아니었을것이라는내용에 마음이 시려왔다
고고학, 법의학, 해부학, 유전학, 화학, 물리학 등 국내 분야 전문가들이 힘을 합쳐 이들 인골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소장 강순형)가 중심이 돼 ㅣ순장자 4명의 인골을 컴퓨터 단층촬영, 3차원 정밀 스캔,DNA검사,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등 과학적 분석을 했고 이를 통해 혈연관계와 식생활 등 정밀한 정보를 캐낸것. 그결과 무덤입구의 왼쪽 귀에만 금동귀고리를 한 인골은 사랑니도 채 자라지 않은 키 152cm의 16세 소녀임이 밝혀졌다. 넓고 편평한 얼굴에 팔길이가 특히 잛았던 이 소녀는 신산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였다. 뒤통수뼈에서 다공성뼈과다증이 보여 빈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댜. 급성감염, 기생충감염 등 원이은 다양하다.
어금니를 비롯한 여러개의 충치는 심한 치통을 앎았음을 알려주고, 앞니에서 반복적으로 무너가를 끊은 흔적이 보여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을 했던 것으로 추정됐다. 정강이와 종아리뼈에서 무릎을 많이 꿇은 생활은 했음이 드너났다. 살아생전 온갖 병을 달고 살던 이 소녀의 죽음 마져도 평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매장되기전에 목이 졸리거나 독약을 먹고 주인과 함께 순장되는 운명을 겪었기 때문이다.(부산일보 기사내용)
순장의 장례풍속은 가야권을 끝으로 사라졌고 신라시대 지증왕(502년)에 남녀 5명씩 순장했던 풍습을 폐지하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토우(토용)가 순장자를 대신했다고 했다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대가야는 신라나 백제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의 남방까지 철기를 수출했다
미숭산 일대는 대가야 철기문화와 관련된 제철유적이 반룡사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경남 합천군 야로면과 경북 고령군 쌍림면 용리 등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고 대표적 철기유물인 마구류와 철갑옷과 특이하게 생긴 창달린 투구, 덩이쇠, 환두대도 등이 전시되어있다
신라 백제 가야의 토기를 비교해놓았는데 가야토기의 특징은 목부근에 물결무늬 뚜껑에는 단추모양, 투창이 직렬로 배치,굽다리 접시, 긴목항아리, 그릇받침등으로 대표되는 대가야양식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이 특징이다. 굽다리접시는 접시가 납작하고 팔(八)자 모양으로 벌어지는 굽다리에는 좁고 긴 사각형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다. 긴목항아리는 긴 목이 부드럽게 좁아들어 몸체부분과 S자형 곡선을 이루며 여러 겹의 정밀한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다.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대야 같이 넓고 깊은 몸체에 여러 겹의 물결무늬와 솔잎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토기 허리와 뚜껑에 ‘대왕‘(大王)이란 글씨가 새겨진 긴목단지, 주둥이에 ‘하부사리리’라는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다. “하부사리리란 합천의 하부 지역의 ‘사리리’라는 이가 만든 토기를 나타낸 듯하다”며 “대왕은 당시 가야 왕의 위상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전시물중에 야광조개국자는 일본 오키나와쪽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대가야와 일본이 교류했던 중요한 증거라고 할수 있다
대가야 하면 유명한것은 우륵과 가야금이다
가야의 가실왕을 명에 의해 12곡을 작곡했고 괘빈리(금곡)은 우륵의 가양금 연주소리가 정정 하는 웅장한 소리가 났다고 해서 마을이름도 현재 정정골이라 부른다. 가야국이 혼란해지자 신라로 망영한 우륵을 진흥왕은 지금이 충주에 한치시키고 산라의 관료 세사람(계고,법지,만덕)를 파견시켜 음악과 춤 , 노래 등을 전수하게 하였다
금관 10개중 우리나라에서 8개나 나왔는데 6개는 신라에서 2개는 가야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 가야의 금관
반룡사 다층석탑(고려초기): 점판암으로 만든 2층의 기단과 여러층의 탑신을올렸다. 점판암은 벼루를 만들때 쓰이는 재료로 부서지기 쉬운 특성이 있다
반룡사 동종 :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높이 50cm, 무게 100근, 영조29년(1753년)에 반룡사에서 만든것으로 조선후기의 간략화된 동종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김종필:아버지 김숙자는 1419년 (세종1년)문과에 급제하여 고령현감등을 지냈다. 1456년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인 밀양으로 내려갔다. 김종직은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1446년 (세종28년)소과에 응시 낙방. 1459년(세조4년)에 문과에 합격 1489년 형조판서와 지중추부사를 끝으로 벼슬을 마감하고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온 김종직은 149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6년후 1498년 무오사화로 김종직의 시신이 무덤에서 꺼내져 목이 잘리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 인해 김종직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5대손이 1650년께 고령 개실마을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어 정착하며 집성촌을 이룩 되었다고 한다
부관참시를 수모를 겪은뒤 중종때 이르러 복권
▲ 대가야 박물관 전시장 앞에서
순장의 요건:동시성(추가장의 증거가 없어야 한다), 강제성,종속성(강력한 지배자와 피지배자 관계)
2010년 총확인한 고분수가 704개에 달하고 공식적으로 발굴한 고분은 10기 그중에서 44호고분과 45호고분에서 문헌상으로 존재하였던 순장무덤으로 확인되었다
왕릉전시관은 44호 고분을 그대로 재현해놓았는데 32개의 순장곽이 있고 2개의 딸린돌방(창고)가 있었고 순장자들의 신분과 연령대 그리고 강제로 죽였는지 독살을 했는지 생매장을 했는지 알수 있는데 대부분 두개골에 심한 상처가 있어서 죽여서 매장했던것이로 파악되었다고 한다.독살을 당하면 뼈가 검게 된다고 한다30대의 남자와 8세가량의 여아와 같이 순장된 석곽을 보았을때는 충격적이었다
30호고분과 32호 고분에서 금동관이 나왔기에 역사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가야도 부족국가의 수준을 넘어 왕권국가일것으로 여긴다고 하는데 오늘 안내를 맡아주신 자원봉사자 선생님께서는 마지막으로 과연 대가야가 부족연맹체였을까요? 아니면 고대국가였을까요? 라는 화두를 던지며 앞으로 가야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는 말로 끝맺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