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고 싶으면 : 알로이시오 신부님2 (이정희 알로이시오 기념병원 소아청소년과 과장님)|

[홍혜숙 ( 데레사)]

신부님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진 것은 1989년 7월, 마닐라에서였다.

그날 밤, 갑자기 오른쪽 팔의 이두박근의 이상을 느껴 잠을 깼다. 근육에 강한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근육이 요동치고, 씰룩거렸다. 오른 팔에 힘이 빠지며, 근육의 운동신경은 마비되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만 본 이 증상은 병을 알리는 최초의 신호였다.

예고도 없이 근육과 그를 지배하는 신경이 함께 시들어 가는 별난 병이 찾아왔다. 신경이 더 이상 근육을 자극하지 못하기 때문에 근육도 반응을 못하고 퇴화되어 갔다. 척추신경이 손상되니 하반신도 점차 힘이 없어졌다. 신앙생활을 접고 하늘나라에서 쉬게 할 지병의 시초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갈수록 수면은 불규칙해지고,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니 육체적으로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활동적으로 삶을 원하는 신부님에게는 무료함은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루 낮이 지루했다. 밤까지 하루를 보내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잠을 자는데 따르는 고통과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육체로 밤을 넘기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밤으로 가는 긴 낮 여행이 연극처럼 계속되었다. 밤의 어두움이 무서워 울부짖는 어린아이처럼 초조해졌다.

처음에는 이 병이 두렵기는 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쉽게 대처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신경을 죽이고, 군육을 마비시키긴 해도 정신 기능만큼은 손상되지 않을 걸로 생각했다. 평소에는 늘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기억력은 선명하고, 집중력도 예리한 편이었다. 그러나 시나브로 찾아오는 몸과 마음의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그 동안 살아온 삶을 회상하며, 병을 이기기 위해 글을 썼다. 글쓰기는 하나의 기도였다. 자신의 건강과 소외된 자들의 구원을 바라는 찬미의 기도였다.

신부님은 <<조용히 다가오는 나의 죽음>>에서 그 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저녁식사 후 기도가 끝나면 침대에서 저녁 물리치료를 받는다. 치료가 끝나면 암흑과 밤의 적막 속에 혼자가 된다. 졸리기 시작하지만 일찍 잠자리에 들고 싶지 않다. 밤이 길어 다음 날 새벽까지 버티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다. 관절통이 심한 밤은 다른 밤 보다 길고 고통스럽다. 매 순간 상태가 더 악화 되는 걸 느낀다. 뼈에서 오는 통증과 경련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어떤 자세를 취하고 약을 쓰도 편안하지가 않다. 팔다리를 사용할 수가 없고, 매사를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하는 불구의 몸이다. 사생활과 자립을 완전히 상실한 사실은 나를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게 하였다.

발병하고 생애의 마지막 3년, 이때의 삶이 앞서간 57년의 전체 생애와 같다고 했다.

고통의 분량이 그러하였는지, 행복의 가치가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분명한 것 투병 생활의 고통 속에서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을 것 같다. 편안한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잿더미 속에서 펼친 희생과 봉사에 얼마나 만족하였을까. 시련의 아픔도 있었을 것이고,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감내하기 힘들 때도 있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감정을 억제하는 힘이 소실되고, 안면 그육이 약해져 울음이나 웃음을 조절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런 고통과 수치와 아픔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극복하였다. 이 병을 싸워야 할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

하지만 아무리 신앙이 깊고, 희망이 밝고, 사랑이 순수해도 고통은 고통이고, 수난은 수난이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 수 없었다. 이 병은 보통 3년 안에 아주 천천히, 잔인하게 그리고 조용히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점차 손발은 마비되고, 음식을 삼키고 말하고 숨 쉬는 근육까지 마비가 온다. 몸서리칠 만큼 천천히 진행되는 공포는 마치 쥐를 잡아 단번에 죽이지 않고 즐기며 데리고 놀다 고통을 주며 죽음으로 몰고 가는 고양이 같았다.

신부님에게 이 세상 마지막 일주일은 절망의 세월이었다.

불면증과 폐렴으로 밤이면 숨이 막히고 음식도 제대로 넘어 가지 않았다. 먹는다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미사를 집전하며 기도를 외워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삶의 시간을 예측할 수 있었다. 자살의 유혹을 느끼고, 고통으로 모르핀을 사용하기도 했다. 세상에 이런 고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큰 고통이었을까. 의사에게 자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봐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삶은 절박하면 서도 힘들었다.

생명유지 장치에 대한 의미는 확실하게 부정적이다.

아무리 위급해도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여 의미 없는 생명을 연장하는 일일랑 하지 말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연장된 삶을 누리는 동안 뒷바라지하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희생과 고통이 따르기에 대단히 이기적인 행위로 여겼다. 호흡을 위한 기도절개 수술이나 영양섭취를 위한 위 절개 수술 샅은 별난 수단으로 죽음을 속이려 애쓰지 말고 자연현상대로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부탁했다. 삶에 대한 애착이 왜 없겠는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존엄사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92년 3월 어느 날 저녁 무렵, 마닐라 산타메사의 소녀의 집 사제관에서 출신 아동들의 묵주기도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어느 가난한 나라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희생하고, 한때는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던 신부님은 환갑을 넘긴 지 얼마 안 되는 한창 나이에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이라는 루게릭병으로 하늘나라로 떠난다.

한국에서 완전히 펴지 못한 꿈은 아쉽지만, 길지 않은 생애는 영원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 이 글은 한국의사 수필가협회 공동수필집 제3집 책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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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태[이냐시오]]

좋은 글, 정말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