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정릉동에는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있다. 신덕왕후 강씨는 태조의 사랑을 듬뿍받고 신의왕후가 낳은 장성한 아들 여섯을 제치고 자신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는데 까지 성공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도성 안에 능을 조성하지 않는 원칙마처 깨고 자신이 바라볼 수 있는 현재의 정동에 능을 조성하고 정릉이라 하였다. 현재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 자리였다. 하지만 태조의 다섯번째 아들인 방원은 세자로 책봉된 방석과 방번 형제를 죽이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이 된 후에 신덕왕후가 자신의 계모임을 부정하면서 왕릉을 훼손시키기 시작한다. 정릉 주변에 집을 짓게하고 청계천의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으로 다리를 복구하는데 사용하였다. 뭇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태종은 능이 성안에 있는 것을 지적하고 이에 신하들이 능의 거대함과 위치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신하들의 상소가 잇따르자 정릉을 당시 경기도 양주(현 정릉동)으로 이장하였다. 이후 능의 존재가 잊혀졌다가 선조 때에 들어서서야 능의 존재를 파악하고 현종때 능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정릉은 다른 능에 비해 능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석물들도 소박하기 그지 없다. 이장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장명등과 혼유석의 받침돌 정도라고 한다.
정릉 금천교 올 여름에만 정릉을 두번 째 찾게 되었다. 일주일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카메라의 밧데리가 방전되어 사진 한 장도 찍지 못하고 돌아보기만 하였다. 정릉을 찾아가는 길은 참으로 지루하고 많은 시간이 투자되었다. 수원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성신여대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서 다시 언덕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정릉 입구가 나온다. 매표소를 지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금천교이다.
정릉 금천교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하는 다리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성역인 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정갈하게 몸과 마음을 다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릉 홍살문 금천교를 지나 몇걸음 걷다가 고개를 들면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으로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그 위에 역시 붉은 살을 박아 놓은 모습이다.
정릉 참도 참도는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박석을 깔은 길로 왼쪽의 약간 높은 곳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神道)라 하고, 오른쪽 낮은 길은 왕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御道)라고 한다. 이곳 정릉은 특이하게도 참도가 직각으로 꺽여 정자각으로 향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정릉 정자각과 능침 정자각은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왕릉은 일반 묘와 달리 묘 앞에서 제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정자각에서 제를 올린다. 건물의 모양이 정(丁)자를 닮아 정자각이라 한다.
정릉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
정릉 전경
정릉 수복방과 비각
정릉 수복방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관리인들이 머물던 공간으로 정자각 동쪽에 비각 아래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엌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어 항시 이곳에 머물며 능을 수호하고 보살폈다.
정릉 비각 정자각 동쪽에 있는 비각은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워둔 곳이다.
정릉 신덕왕후 비 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같다. 조선국이 아니라 대한이라고 쓰여지고 황후라는 표현으로 보아 대한제국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정릉 전경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릉의 규모는 다른 능에 비해 작다. 정자각의 크기도 그렇거니와 능침의 규모도 작은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정릉 전경
정릉 정자각 지붕의 잡상
정릉 정자각 지붕의 잡상
정릉 소전대 정자각 좌측에 있는 소전대는 제향이 끝난 후 축문을 태우던 곳으로 예감이라고 하여 네모나게 우물 모양으로 만든 것이 많이 있다. 이렇게 대를 만든 것을 소전대 또는 소대라고 한다. 안내하시는 분의 얘기로는 이 소전대가 정릉 위쪽의 약수터에 있었다고 한다. 이후 소전대임이 밝혀져 지금의 자리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정릉 능침에서 바라본 정자각 주변
정릉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의 모습
정릉 능침 정릉의 능침은 다른 능에 비해 소박하고 검소하다. 상계,중계,하계의 규모는 갖추었지만 무인석도 마련되지 않았다. 능의 크기 역시 다른 능에 비해 작기만하다. 지아비에게는 지극한 사랑을 받았지만 권력을 움켜진 배다른 아들에게는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 계모의 처지를 능이 그대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정릉 능침 정릉 능침에 있는 석물들 중에서 장명등과 혼유석의 받침돌인 고석만 옛 정릉에서 옮겨온 것이고 나머지 석물들은 후대인 현종때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정릉 장명등과 봉분
정릉 장명등 다른 능에서 볼 수 없는 형태의 장명등이다. 사각 형태로 전면이 트인 모습으로 조선 초에 만들어지다 보니 고려시대 장명등의 양식을 계승하였다고 한다. 장명등은 옛 정릉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정릉 장명등
정릉 혼유석 혼유석 아래 받침돌인 고석이 2개이다. 다른 능의 혼유석은 4개나 5개인 경우가 많으나 2개인 점이 특이하고 고석은 옛 정릉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정릉 문인석
정릉 문인석과 석마
정릉 문인석
정릉 석양 석호와 함께 능침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석양이다. 능침 수호의 임무를 수행하기 밖을 지켜보듯이 곡장을 바라보고 있다.
정릉 석호 살이 두툼하게 오른 석호이다. 석양과 함께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정릉 망주석
정릉 망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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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山寺愛人 원문보기 글쓴이: 山寺愛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