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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풍곽씨 가승 서문(玄風郭氏家乘序) - 입재 정종로 찬
나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벼슬로 집안을 유지하여 국내에서 혁혁한 명성이 있었던 자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평범한 것일 따름이다. 선대로부터 매우 고귀하고 현달함이 없으며 옥당(玉堂). 금마(金馬)의 귀함과 좋고 화려한 수레를 타는 고관의 영화가 있지 않으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높은 관을 쓰고 긴 옷자락을 끌며, 학교에서 읍양(揖讓)하고 주선(周旋)하여 성대하게 한 시대의선비들이 공경하고 심복하는 바가 되며 또 혹 후세에 사당에 제향되는 존숭을 받는 것 같음은 그 문학(文學)과 행의(行誼)와 충효와 명절(名節)이 보통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지 않다면 결단코 이와 같이 할 수 없다.
이것의 어려움은 또한 어찌 저것(고관대작)의 10배일 뿐이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세상에서 이른바 명족(名族)도 이보다 낫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가승(家乘)을 보니 더욱 그것이 진실로 그러함을 볼 수 있겠다.
대개 방어사(防禦使)로부터 진사공(進士公)에 이르기까지 4대 동안에 유명한 지위에 있었던 자로 드러난 사람은 군사(郡事) 벼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현자들이 칭술한 글에 드러난 그들의 언행과 사적(事蹟)을 고찰해 보면 대부분 빛나서 볼만한 것이었다.
이양서원(尼陽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된 네 분의 현자는 혹자는청백으로 드러났고, 혹자는명철한 것으로 일컬어졌고 혹자는삼옥(三玉)으로 일컬어지고, 혹자는 적개(敵愾)로 알려져 사림들에게 숭보(崇報) 받은 것이 이미 저와 같았다.
그 외 정재(定齋). 죽재(竹齋). 성재(省齋). 태허정(太虛亭) 등 여러 공(公)은 드러나지 않은 덕과 숨은 빛남이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있다. 대개 대대로 아름다움을 잇고 훌륭한 점을 계승하여 그 문호를 유지함이 우뚝하여 고관대작의 벼슬아치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대저 곽씨에 존재(存齋)와 망우당(忘憂堂)두 선생이 있음은 곧 열성(列星) 가운데 북두(北斗)와 장경(長庚)이 있는 것과 같다.
대저 한 문중에서 삼강(三綱)이 나란히 서고 또 한 가정에서 네 명의 효자가 나란히 배출되어 그들의 거주지인 솔례촌(率禮村)에 전후로 정려(旌閭)를 받은 사람이 열 둘이라는 많은 숫자에 이르렀다.
우리 동방의 사대부 집안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오직 연봉 이씨(蓮峯李氏) 집안의 8정려(八旌閭)외에는 누가 다시 여기에 비길 수 있겠는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한 가지만 들어도 곽씨가 지금까지 사대부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고 시대가 멀어짐에 따라 사적(事蹟)이 쉽게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반드시 현명한 자손이 배출되어 가승(家乘)에 상세하게 드러내고 갖추어 실은 이후에야 바야흐로 후세에 드리워 신빙(信憑) 할 수 있다. 지금 이 책을 편집한 사람은 곧 죽재(竹齋)의 후손 세한(世翰)으로, 편집할 때 엄중하고 삼감을 지극히 하였다.
무릇 세계(世系)의 내력과 소목(昭穆)의 분파(分派) 그리고 고을과 묘소가 있는 장소 등을 모두 드러내 빠뜨리지 않았다. 전의(傳疑)한 것과 믿을 수 없는 것은 또한 사실을 좇아 기록하여 한 번 책을 펴면 내용을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또 입가(立家)의 규범에 대한 몇 조목을 쓰고 인하여 이 뜻으로 자서(自叙)를 써서 서두에 내걸어 후손들이 이것에서 고증하여 믿고 따라 실행하도록 하였다. 그 마음 씀씀이가 매우 정성스러우니, 현명하지 않고서야 능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세한 씨의 당숙 무(堥)가 이 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고 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드디어 내가 마음에 느낀 점을 가지고 그 집안의 세덕(世德)을 역력히 서술하여 우리나라 명문 집안이 저기(고관대작)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인다.
[주해]
[주01] 금마(金馬): 한(漢)나라 궁궐 문인 금마문(金馬門)의 준말로, 동방삭(東方朔). 주보언(主父偃). 엄안(嚴安) 등 문인들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기다리던 곳인데, 뒤에는 조정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02] 좋고 화려한 수레: ‘주륜화곡(朱輪華轂)’은 바퀴에 붉은 칠을 하고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로, 한나라 때 왕후(王侯) 등 고관대
작(高官大爵)들이 탔다고 한다.
[주03] 학교: ‘횡상당숙(黌庠黨塾)’의 뜻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의 가르침은 25가(家)에는 숙(塾)이 있었으며, 당(黨500
가)에는 상(庠)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횡(黌)’과 ‘상(庠)’과 ‘숙(塾)’은 모두 학교를 말한다.
[주04] 선비: ‘금패(衿佩)’는 푸른 옷깃과 푸른 패옥(佩玉)을 말하는 것으로, 푸른 복장(服裝)을 한 청년 학도를 가리킨다. 《시경》 〈정풍
(鄭風) 자금(子衿)〉에 “푸르디 푸른 그대의 옷깃이여,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로다. 비록 나는 가지 못하나, 그대는 왜 소식을 계
속 전하지 않는고. 푸르디 푸른 그대의 패옥이여,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로다. 비록 나는 가지 못하나, 그대는 어이하여 오지 않는
고.[靑靑子衿, 悠悠我心. 縱我不往, 子寧不嗣音? 靑靑子佩, 悠悠我思. 縱我不往, 子寧不來?]”라고 한 데서 옷깃[衿]과 패옥
[佩]을 합친 말이다.
[주05] 이양서원(尼陽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있다. 1707년(숙종 33)에 청백사(淸白祠)를 건립하여 곽안방(郭安邦, 생
졸년 미상)과 곽지운(郭之雲, 1498~1551)을 배향하고, 1786년~1871년 사이에 곽규(郭赳, 1521~1584)와 곽황(郭趪,1530~
1569)을 추가 배향하면서 이양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곽재우(郭再祐)의 5대조를 배향함으로써 곽씨 전 문중을 포괄할 수 있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뒤에 복원되었다.
[주06]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 도동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求智面) 도동리(道東里)에 있는 서원이다. 1605년(선조
38)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1607년(선조 40)에 도동(道東)이라
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1678년(숙종 4)에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배향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별사에는 곽승화(郭承華, ?~?), 원개(元槩, ?~?), 배신(裵
紳, 1520~1573)이 배향되어 있다. 곽승화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자실(子實), 호는 규헌(睽軒)이다. 현풍에 거주하였으며,
1477년(성종 8) 진사에 합격하였다.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청개(淸介)한 인품으로 사
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았다.
[주07] 청백으로 드러났고: 곽안방(郭安邦)을 말한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여주(汝柱)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해남 현감(海
南縣監), 익산 군수(益山郡守) 등을 역임하였고 봉렬대부(奉列大夫)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
담하여 공을 세워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오르고, 관직에 있을 때 정사를 공정하게 다스리고 청빈하여 청백리(淸白
吏)에 녹선되었다.
[주08] 명철한 것으로 일컬어졌고: 곽황(郭趪, 1530~1569)을 말하는 듯하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경정(景靜), 호는 탁청헌(濯淸
軒)이다. 1556년(명종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3년(명종 18) 예안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다. 재임 시
선정을 베풀었으며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어 고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주09] 삼옥(三玉)으로 일컬어지고: 곽지운(郭之雲)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여우(汝雨), 호는 연일당(燕日堂). 삼옥당(三玉堂)이
다. 곽안방(郭安邦)의 증손자이다. 1524년(중종 19)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은 예조좌랑에 이르렀는데 학행과 문장이 탁월하였다.
[주10] 정재(定齋): 곽월(郭越, 1518~1586)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시정(時靜), 호는 정재이다. 곽승화(郭承華)의 증손자이며 아
들은 곽재우(郭再祐)이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56년(명종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청송부사(靑松府
使)에 이르렀다. 무재(武才)를 겸비하여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큰일을 맡길 만하다 여겼다.
[주11] 죽재(竹齋): 곽간(郭趕, 1529~1593)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정(元靜), 호는 죽재이다. 1546년(명종1) 문과에 급제하
여종부시 정(宗簿侍正)과 강릉부사(江陵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으며, 전란 중
에 사망하였다.
[주12] 성재(省齋): 곽근(郭赾, 1554~?)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치정(穉靜), 호는 성재이다. 곽안방(郭安邦)의 후손으로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을 지냈다.
[주13] 태허정(太虛亭): 곽홍지(郭弘祉, 1600~1656)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자구(子久), 호는 태허정이다. 1624년(인조2) 진사에
합격하고 1635년(인조 13)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와 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경사자집(經史子
集) 외에 의약. 복서. 산수 등에도 통달하였다.
[주14] 고관대작의 벼슬아치들: ‘잠영헌사(簪纓軒駟)’의 뜻이다. 잠영은 관(冠)에 꽂는 비녀와 매는 갓끈으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이르
고, 헌사는 사마헌거(駟馬軒車)의 준말로 지위가 높고 귀한 이가 타는 사마(四馬)가 끄는 높은 수레인데, 역시 고관대작을 말한다.
[주15] 존재(存齋): 곽준(郭䞭, 1551~1597)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면(金沔)의 막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황석산성을 지키
던중 아들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황암사(黃巖祠)와 예연서원(禮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주16]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유(季綏), 호는 망우당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만년에 낙동강가에 은거하였다. 1709년(숙종 35)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 《망우당집》이 있으며 현풍(玄風) 예연서원(禮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주17] 장경(長庚): 금성(金星)의 별칭이며 태백성(太白星)이라고도 하는데,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
[주18] 한 …… 이르렀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솔례에 영조 때, 세운 현풍곽씨 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이 있다.
1598년(선조 31)부터 영조 때까지 곽씨 일문(郭氏一門)에 포상된 12정려(十二旌閭)를 한곳에 모은 것이다. 정려된 12명은 다음
과 같다.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전사한 곽준과 두 아들 곽이상(郭履常). 곽이후(郭履厚), 곽준의 며느리 열부(烈婦) 거창신씨
(居昌愼氏), 출가 후 남편을 따라 자결한 곽준의 딸 열부 곽씨이다.
또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병환 중인 부친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곽재우의 사촌 동생인 곽재훈(郭再勳)의 아들 4형제
즉 곽결(郭潔), 곽청(郭淸), 곽형(郭泂), 곽호(郭浩)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강으로 투신해 자결한 곽재기(郭再祺)의 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대신 죽은 곽홍원(郭弘垣)의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 결혼 후 1년도 못 되어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대신 죽기를 주야로 기원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남편을 잃게 되자 식음을 전폐하여 따라 죽은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
(安東權氏)이다.
[주19] 연봉 …… 8정려(八旌閭): 연봉(蓮峯) 이기설(李基卨, 1556~1622) 집안의 8정려를 말하는데, 서울 숭례문 밖 자연암(紫煙巖)에
있었다고 한다. 이기설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이다. 이지남(李至男)의 아들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맨 먼저 장령에 발탁되고 당상관으로 승진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죽었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연봉집(蓮峯集)》이 있다.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기설(李基卨)은 어버이를
섬기고 사람을 대함에 한결같이 《소학(小學)》의 법도를 그대로 준수하였다. 향교(鄕校), 구동(舊洞)의 여러 명망 있는 사람들이
공(公)의 극진한 행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인조가 특별히 포장(褒獎)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정문(旌門)에, ‘효자와 더불어 공의 할
머니 절부(節婦) 안씨(安氏), 아버지 효자 참봉(參奉) 영응(永膺)선생 지남(至男), 어머니 절부 정씨(鄭氏), 형 효자 수재(秀才)
기직(基稷), 누이동생[昧妺] 효녀 이씨(李氏)와 함께 한집에서 여섯 정문(旌門)이 있는 것은 세상에 없는 일로서 혁혁(赫赫)하게
빛나니 일세에서 칭찬하고 감탄하노라.’ 하였다.
나라에서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액(額)을 내렸다.”라고 한 말이 있다. 《練藜室記述 別集 12卷 政敎典故 旌孝》 또 이기설의
아들 돈오(敦五)와 돈서(敦敍) 및 돈오의 처 김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殉節)하여 모두 정려되었다. 《燃藜室記述 第18
卷 宣祖朝儒賢 李至男》
[주20] 세한(世翰): 곽세한(郭世翰, 1760~1789)으로, 일명 세헌(世憲)이며,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가헌(可憲), 호는 낙와(樂窩)이
다. 정관재(靜觀齋) 곽기(郭基)의 아들이다. 문학과 재행(才行)이 뛰어나 사림(士林)들이 흠모(欽慕)하였다. 이회근(李晦根, 慶
州人/고령 출신), 최흥벽(崔興壁), 박문국(朴文國) 등 제현과 같이 지은 《남귀창수록(南歸唱酬錄)》과 자신의 유고(遺稿)가 있다.
[주21] 전의(傳疑)한 것: 역사를 기록하면서 임의대로 취사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일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곡량전
(春秋穀梁傳)》 환공(桓公) 5년 조에 “춘추의 의리는 미더운 것은 미더운 대로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것
이다.[春秋之義 信以傳信 疑以傳疑]”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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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玄風郭氏家乘序
愚嘗謂我東士大夫家。其以仕宦維持。赫赫然有名於國中者盖無數。然此則直尋常耳。乃若自先代無甚隆赫。非有玉堂金馬之貴。朱輪華轂之榮。而閱累世嵬冠長裾。揖讓周旋於黌庠黨塾之間。蔚然爲一時衿佩之所欽服。又或爲後世俎豆之所尊奉。則非其文學行誼忠孝名節有大過人者。决不能爾也。此其難又奚啻十倍於彼哉。吾故以爲世之所謂名族。莫是之過。今觀玄風郭氏之家乘。則尤有以見其信然矣乎。盖自防禦使以下至進士公四世。其間有名位者。顯則止於郡事而已。考其言行事蹟之見於諸名勝稱述之文者。類皆彬然可觀。至如尼陽院及道東別祠入享之四賢。或以淸白著。或以明哲稱。或以三玉稱。或以敵愾聞。其爲士林之所崇報旣如彼。而a254_412c餘若定齋竹齋省齋太虛亭諸公。其潛德幽光。皆有可傳於後者。盖其世世焉趾美襲休。以維持其門戶。卓乎非簪纓軒駟家之所及。而大抵郭氏之有存齋忘憂兩先生。卽列星中北斗長庚也。夫以一門之中。三綱幷立。又於一庭之內。四孝幷出。其所居率禮村前後綽楔。至於十二之多。則我東士夫家。非不多矣。而惟蓮峯李氏家八旌閭外。誰復彷彿於此哉。未論其他。擧此一節。郭氏之至今得列於士大夫之林者已章章矣。然而年代久遠。事蹟易以磨滅。必有其贒子孫出而詳著俱載於家乘。然後方得垂諸來後而可徵信。今玆編輯之者。卽竹齋之孫世翰。而其爲書克致嚴謹。凡世系來歷曁昭穆分派與夫邑里墳墓所在。俱著無遺。至其可傳疑及無徵者。亦從實書之。一開卷瞭然若指掌。而又書立家模範若干條。因以此意。自叙以弁其首。使後人得攷信於此而遵行之。其用意甚勤矣。不賢而能之乎。今其從祖叔父堥持此卷示余要一言。遂以所感於心者。歷叙其世德。以見其我東名族不在彼而在此云爾。<끝>
立齋先生別集卷之四 / 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