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통령 별장
청남대(靑南臺)를 다녀와서!
2016년은 병신년(丙申年) 원숭이 해라고 하는데 그 것도
붉은 해라고 합니다. 붉은 원숭이는 불을 뜻하고 양(陽)의
기운과 열정이 강하기에 병신년에 태어난 사람은 관심분야가
다방면이고 창의와 창조성이 넘친다고 하지만 한국산 토종 야생
원숭이는 없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의 ‘패관잡기에도 원숭이가
없다고 전해오지만 평양 상원군 검은모루 동굴, 충북 청원군
두루봉과 제천시 점말동굴 등지에서 원숭이 뼈가 화석으로
발견된 예가 있어 선사시대에는 한국에도 원숭이가 살았음을
알 수 있고 삼국유사의 기록에도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
이차돈이 순교한 뒤 곧은 나무가 부러지고 원숭이가
떼지어 울었다고 합니다
동양 신화의 원숭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명나라 때 소설이자
중국 4대 기서 중 하나인 ‘서유기(西遊記)’에 등장하는 손오공이
원숭이의 왕이 되고 도술을 익힌 손오공은 신계와 지상을 오가며
날뛰다가 석가여래의 손에 잡혀 500년 동안 오행산 아래 갇히게
된 이후 반성한 손오공은 불경을 받으러 서역(인도)으로 가는
삼장법사를 수행하며 온갖 잡귀를 퇴치하고 깨달음을 얻어
투전승불(鬪戰勝佛ㆍ싸워서 이긴 부처)이 된
손오공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창작물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손오공의 궤적이야말로 한국에서 원숭이가 상징하는
바를 모두 보여준답니다 손오공은 처음에는 경박하고 자기
멋대로이나 뛰어난 도술을 지녔기에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지만 원숭이는 흔히 진중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존재로
묘사되기도 하고 원숭이도 나무에서 굴러떨어질 때가 있다는
한국 속담에 등장하는 원숭이는 자신의 잔꾀와 재주만을
믿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존재로 원숭이는 재수가
없다는 편견이 있어,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잔나비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기도 합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육십갑자의 세시 풍속쯤으로 전해져 오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은 이후의 원숭이는 그 꾀를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조선 후기 화가 장승업이 그린 ‘송하고승도’
역시 서유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원숭이가 불교 경전을
스님에게 바치는 모습을 그렸고 토우 원숭이는 잡귀를
쫓아내는 효력이 있어 부적이나 부장품으로 자주 사용
됐으며 천도복숭아와 함께 그려진 원숭이는 장수의
의미를 지니며, 출세를 뜻하기도 해 과거를 앞둔 선비의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그림에 등장하곤 합니다...
이틀 전에 구정연휴가 지난 오늘은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
5060 길동무동호회"에서 길동무길로 정한 대둔산과 청남대를
가는 날인데 겨울 가뭄이 심해서 바람불 때면 먼지가 풀풀 날리고
전 날 동네 산길을 오르고 내릴 때의 발길에서도 흙먼지가 심하게
날려 옷 색깔이 변할 정도였는데 어젯밤 자정쯤부터 내리던 비가
아침까지도 계속 내려서 혹시 길동무 일정이 취소되지 않았나
확인해보니 우천불구라기에 여섯시 삼십분에 집을 나서니 기온은
포근한데 동녁이 밝아오는 시간인데도 어둑컴컴한 야음(夜陰)속에
빗소리가 심했지만 바라고 기다리던 단비인지라 상쾌한 기분이 나서
고개를 뒤로 젖이며 얼굴에 비를 맞아보기도 하면서 버스정류장에
가서 목적지에 바래다주는 버스로 전철로 종로3가에 도착 대진관광
버스에 승차하여 우중위험을 피하기 위한 대둔산행이 취소되어
변경된 목적지 청남대(靑南臺)에 도착한 시간이 열시 반이 넘은
시각 (時刻) 역대 대통령들의 산책로인 대통령길을 걷다가
오후 두시쯤에 뒷풀이 장소로 이동 아침 점심을 겸한 식사를
마치고 귀경길에 올라 양재역에 도착하니 다섯시가 조금 지났
는데 귀가시간이 조금 일르기도하고 헤어지기 섭섭하여
역 근처 빌딩 지하의 포장마차에 가서 익살스런 才談으로
소담(笑談)을 나누다가 집에돌아오니 밤 아홉시였습니다...
대통령 휴양지 청남대를 다녀와서
정의
대전광역시 대덕구·동구, 충청북도 보은군·청주시 사이에
건설된 복합형 댐에 의해 형성된 인공호수.
개설
만수 면적은 72.8㎢이고, 저수지 길이 86㎞, 총저수량은 높이
76.5m에서 80m까지 홍수조절 용량을 합쳐 14억 9,000만㎥에 이른다.
이 저수량으로 금강유역의 만성적인 홍수를 조절할 뿐만 아니라
대전광역시·청주·군산·전주 등 유역내의 인접 도시에 연간 13억㎥의
생활 및 공업용수를 공급한다. 또한 금강 하류 연안·미호천 연안
및 만경강 유역의 농경지에 연간 3억 5,000만㎥의 관계용수를
공급하고, 최대출력 600㎾의 전력과 연간 2억 600만㎾h의 발전량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 울창한 산림으로 둘러싸인 주위의 높은 산,
깊은 계곡과 함께 수려한 경관을 뽐내고 있는 대청호는 우리나라
충청북도 지방의 관광 명소 중의 하나로서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
자연환경
대청호의 2005년 강우 패턴은 하절기에 연간 총강우량의
대부분이 집중되는 전형적인 온대몬순기후의 강우 특성을 보인다
. 대청호의 총강우량은 1,204㎜로서 이중 71%가 장마철이
포함된 6,7,8월의 하절기에 집중되었으며 동절기인 1, 2월과
10, 11, 12월의 강우량 합계가 총 강우량의 5%에 불과하여 계절
간 강우량 차이가 심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강우 형태를 나타낸다.
형성 및 변천
금강 수계 최초의 다목적 인공 저수지로 1975년 3월부터
1980년 12월까지 5개년에 걸쳐 4대강 유역 수자원 개발 계획이
일환으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미호동과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덕유리 사이의 좁은 협곡에 높이 72m, 길이 495m의 필댐
(fill dam)이 건설됨으로써 거대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졌다.
현황
인근 지역에는 대청댐 광장 맞은편인 북쪽의 구봉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현암사를 비롯하여 대청댐 물홍보관, 대청댐
전망대, 취백정, 청남대 등의 자연생태 및 문화관광자원이 있다.
청남대는 충청북도 청원군 대청댐 부근 1,844,843㎡ 의 면적에
지어진 대통령 전용별장으로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의미이다.
1980년 대청댐 준공식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이 주변 환경이
빼어나다는 의견에 따라 1983년 6월 착공,
6개월만인 12월에 완공되었다.
청남대는 휴양 중에도 항상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완벽한
시설을 갖춤은 물론 대청호 상수원 보호를 위해 최고의
수질정화시스템을 구축, 운영하였다. 또한, 청남대는 국가
1급 경호시설로 청와대에서 관리하고 4중의 경계철책과
경호실338경비대가 경비를 수행하다가, 2003년 4월 18일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양되고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2003년에서 2008년 기간 동안 4,018,552명
(1,671일/1일평균 2,405명)이 이용하였다.
청남대는 2009년 6월 19일 습지생태원 및 자연생태관찰로를
조성하였다. 이는 2006년도에 사업을 계획하여 2007년 8월에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을 하였으며, 2008년에 메타세쿼이아
숲 데크 및 생태관찰로 일부 구간을 완료하였고, 2009년 5월 25일
전체 구간을 준공하였다. 습지생태원 내에는 메타세쿼이아 숲
관람데크 200㎡와 음악분수 1식, 수생습지원 900㎡, 습지관람로,
쉼터 등을 조성되어 있고, 자연생태관찰로에는 호반을 따라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산책로 6.0㎞ 및 등산로
2.0㎞를 개설되어 있다. 또한 남천, 산철쭉 등 관목류 7종
25,000주가 식재되어 있고, 진범, 흰그늘돌쩌귀, 깽깽이풀,
삼지구엽초, 꽃잔디, 금계국, 할미꽃 등 야생화 30종
72,550본이 있으며, 꽃창포, 부들, 어리연꽃, 부처꽃 등
수생식물 8종 10,000본 등, 생태체험장 기능이
부가된 충청북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참고문헌
『관광관련 정부정책』-제158호(2009년 6월 넷째주)-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09)
『대청다목적댐공사지』(산업기지개발공사, 1981)
『대청다목적댐 사업타당성조사보고』(건설부, 1973)
청남대(http://chnam.cb21.net)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윤보선 대통령상
최규하 대통령상
대전 부르스 1959년 sp
최치수:작사
김부해:작곡
안정애:노래
대전 부르스〉는 1959년 안정애가 발표한 대한민국의 트로트 곡이다.
다른 가수들이 다시 부르면서 〈대전 블루스〉로 표기하기도 했다.
작곡자는 김부해, 작사자는 최치수이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로 시작하는 가사는 대전역을 배경으로 이별의 아픔을 그리고
있으며, 끈적한 블루스 리듬과 애절한 가락으로 헤어지는
사람들의 비통한 심정을 잘 담아냈다.
자정이 넘은 새벽에 대전에서 목포로 향하는 완행열차가 중심
소재로 등장하며, 가사 중 "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 부분이 유명하여 흔히 "대전발 영시 오십분"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 노래의 가사로 이야기를 엮어 1963년에
영화가 만들어졌을 때도 《대전발 영시 오십분》
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1999년 대전역 광장에 노래 가사를 적어넣은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노래비에 작곡가와 작사가, 가수의 이름까지 새겨 넣으려 했으나
, 원곡을 부른 가수 안정애가 조용필의 이름도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여 가수 부분은 이름이 빠져 있다는 일화가 있다.
안정애가 부를 당시에도 크게 히트했으나 조용필이 1980년대에
취입해 새롭게 인기를 얻었다. 이후 장사익 등 여러 가수들이 다시
부른 바 있다. 대전이나 충청남도 지역을 대표하는
응원가로도 불리워졌다.
2016-02-1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