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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문집 제6권 / 행장(行狀)
연릉부원군 이공 시장 을해년(1635, 인조13)
(延陵府院君李公諡狀 乙亥}
공의 휘(諱)는 호민(好閔), 자는 효언(孝彥), 성은 이씨(李氏)이다. 시조 무(茂)는 당(唐)나라 중랑장(中郞將)으로 소정방(蘇定方)의 예하 장수가 되어 백제를 정벌하고, 그대로 이 땅에 머물러 연안(延安) 사람이 되었다. 그 후예들을 분명하게 열거할 수 있는데, 공조 전서(工曹典書) 계손(係孫), 그리고 전의감(典醫監) 정량(正亮)이 곧 공의 8대조와 7대조이다.
증조(曾祖) 휘 숙기(淑琦)는 재차 연안군(延安君)에 책봉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재직하다가 운명하였다. 조부(祖父) 휘 세범(世範)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선고(先考) 휘 국주(國柱)는 이천 현감(伊川縣監)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니, 조부와 선고(先考)가 증직된 것은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비안 박씨(比安朴氏)는 사직(司直) 여(旅)의 딸이다.
공은 네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일찍 머리가 깨여 일곱 살에 책을 읽을 줄 알았고 지은 시가 훌륭하였다. 일찍이 200명이 기록된 방목(榜目)을 딱 한 번만 보고도 한 사람도 틀리지 않고 암기하였다. 당시 나이 열두 살이었으니, 신동으로 여겨졌다.
기묘년(1579, 선조 12)에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가 조사(詔使)를 맞이하기 위해 널리 막속(幕屬)을 뽑았는데, 공이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선발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계미년(1583)에 선조(宣祖)께서 많은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셨는데, 또한 장원을 차지하였다. 곧바로 전시(展試)에 응시하여, 드디어 이듬해 갑신년(1584)에 갈옷을 벗고 탐화랑(探花郞)이 되었다. 처음 성균관(成均館)에 보임되었는데, 소재(穌齋) 노 상국(盧相國)이 당대의 문사(文士)들을 파악하고서 공의 재주가 사명(辭命)을 담당할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임금에게 아뢰어 곧바로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임금께서 우연히 분(苯) 자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는데, 좌우의 신하들이 대답이 없었다. 임금께서 공에게 “듣자니, 그대가 문학에 풍부한 학식을 지녔다고 하던데, 나를 위해 말해 보라.”라고 하셨다. 공이 사양하다가 말하기를 “이 글자는 〈서경부(西京賦)〉의 ‘무성하고 수북하게[苯䔿蓬茸]’에서 나온 것으로, 무성한 모양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소차(巢車)의 옛 제도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아뢰니, 임금께서 대단히 기뻐하셨다. 예문관(藝文館)으로 옮기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훌륭한 인재이니, 배양하는 데 있어서 상규(常規)에 얽매이게 할 수 없다.”라고 하시고, 숙직(宿直)을 면제시켜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하셨다.
임금께서 유신(儒臣)들에게 정시(庭試)를 보이셨는데, 공이 거듭 장원을 차지하여 자급이 올랐다. 전후의 응제(應製)에서 매번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거듭 많은 물품을 하사받았다. 병술년(1586, 선조 19)에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무자년(1588) 이후로 수찬(修撰), 정언(正言), 지평(持平), 교리(校理)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다. 임진년(1592)에 이르러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는데, 왜구의 침입 소식이 갑자기 전해졌다.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서쪽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눈물을 흘리며 대부인(大夫人)과 이별하니, 지켜보는 사람들이 오열하였다.
박천(博川)에 이르렀을 때 왜적들이 바짝 뒤쫓아 왔는데, 다급한 나머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용만(龍灣)으로 갈 것을 청하니, 명(明)나라에 귀의하려는 계획이었다. 공은 힘껏 그 결정에 찬성하였다. 이미 용만에 도착했지만, 왜적들이 더욱 압박해 오자 요동으로 건너가자는 의론이 제기되었다.
임금께서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뽑으시자,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신은 이미 모친과 이별하였으니, 원컨대 목숨을 바쳐 따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가을에 응교(應敎), 전한(典翰), 집의(執義)로 옮겼는데, 혼란한 시국에 사령(辭令)을 내리려면 반드시 공에게 의지하였기 때문에 항상 승문원(承文院) 관직을 띠고 있었다. 또 문단의 중망(重望)을 받고 있었으므로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하였다.
그해 겨울에 이 제독(李提督)이 병력 일부를 이끌고 적을 시험하려 하였다. 이에 공이 필마(匹馬)를 몰아 밤낮으로 달려 요양(遼陽)에 이르러 구원병을 요청하니, 제독이 공의 지극한 정성을 보고 정월(正月)에 출병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에 평양성의 승리가 있게 되었다.
처음에 평양을 차지한 적들이 오만불손한 편지를 보내 자신들과 함께 명나라를 치자고 요구하였는데, 공이 임금께 대의를 내세워 적들의 간악한 음모를 꺾자고 권하였다. 우리 조정의 상황을 엿보던 명나라 사람이 돌아가 대사마(大司馬)에게 보고하여 우리의 본의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니, 명나라의 왜구 토벌이 이에 실행되었던 것이다.
시사(時事)가 급변하여 자주(咨奏)할 것이 매우 많았는데, 공이 다급한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여 차질을 빚지도 않았고 일을 망치지도 않았다. 명나라 장수 황응양(黃應暘)이 유민(遺民)들을 불러 모으기로 하였는데, 길을 나서면서 회유할 격문을 급박하게 지어 달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공에게 명하자 곧바로 글을 써서 완성하였다. 일찍이 임금이 스스로 질책하는 교서(敎書)를 공이 지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용만의 한 모퉁이까지 왔으니 국운이 어렵게 되었도다. 땅이 이미 다 하였으니 내가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저 긴 강을 바라보니 또한 동으로 흐르는구나. 돌아가고자 하는 한 가지 생각이 저 넘실거리는 강물과 같도다.”
이 글을 보고 원근의 백성들이 눈물을 뿌리고 의병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떨쳐 일어나니, 사람들이 흥원(興元)의 조서(詔書)에 비유하였다.
제독 이여송은 이미 왜적을 격파했고,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병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각자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자 장차 우리나라에서 올리는 승전 보고서를 살펴서 자신에게 유리한 형세를 만들려고 하였다.
공이 두 사람의 공로를 모두 추천하여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으면서 기리는 말을 지극히 드날리니, 두 사람이 모두 만족해하며 동방에 인물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임금을 좌우에서 모시며 일에 따라 보좌하였는데, 임금께서 언제나 직함으로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다.
명나라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전란이 오래도록 끝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왜적과의 화친을 허락하려고 하니, 비록 우리나라 사람이라 하더라도 회유(懷柔)를 생각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는 원수들에게, 하루아침에 강화를 허락한다면 어찌 돌아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께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시종(始終) 적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나와 그대뿐이오.”라고 하셨다.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개성(開城)으로 제독 이여송을 만나러 가는 길에 대부인의 병을 살피고, 이윽고 상을 당하자 영구를 모시고 돌아가 안장하였다.
공이 조정에서 물러나자 수없이 밀려드는 문서를 처리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상중에 있는 공을 조정에 나오게 하였는데, 공이 열 차례에 걸쳐 소장을 올려 간절히 상례를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임금께서 사명(辭命)의 득실(得失)은 실로 국가 존망과 관계된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사태의 실상을 조리 있게 드러내 명백하게 펼쳐냄으로써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원해 전공(戰功)과 표리가 되니, 붓끝이 어찌 칼끝만 못하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위로하고 타이르시는 말씀이 극진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상기(喪期)를 마치자, 승지(承旨), 참지(參知), 대사간(大司諫)에 두 번, 부제학(副提學)에 네 번 임명되었다.
병신년(1596) 겨울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어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이 간사한 자를 비호한 죄를 바로잡자,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 사이의 일을 경이 모두 말하니, 그 풍채(風采)가 가상하오.”라고 하셨다. 정유년(1597)에 대사헌,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都承旨兼弘文館提學)을 거쳐 8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기해년(1599)에 감군 어사(監軍御史) 진효(陳效)가 군중에서 죽자, 공이 빈사(儐使)가 되어 제문을 가지고 가서 제사하였는데, 그 글에 “거백옥(蘧伯玉)이 궁 앞을 지나가도 옛 수레의 소리가 아니고, 왕손가(王孫賈)가 돌아오지 않으니 영원히 저물녘에 나간 아이가 되었네.”라고 하니, 한 무리의 군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조정으로 돌아와 거듭 소장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니, 대개 당시의 의론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극력 공격하여 근거없는 비방이 공에게까지 미쳤기 때문이었다. 임금께서 그 정상을 살피고 넉넉한 비답을 내려 불허하면서 “경의 충효는 해와 달을 관통하는데, 어찌 차마 나를 버리고 가려고 하오.”라고 하셨다.
신축년(1601, 선조 34)에 학사 고천준(顧天峻)이 조칙(詔勅)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다. 임금께서 문장을 잘 짓는 사람 중에서 의주 연위사(義州延慰使)를 뽑게 하셨는데 공이 뽑혔다. 이듬해 봄에 과연 이정귀(李廷龜)를 대신하여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사행(使行)에서 돌아와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었다. 계묘년(1603)에 숭정대부(崇政大夫)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갑진년(1604)에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이윽고 부원군(府院君)에 오르고 정1품이 되었다. 이에 종백(宗伯)과 문형(文衡)과 겸직의 해임을 요청하였다. 그리고는 문을 닫고 정원의 길도 쓸지 않았으며, 세상일을 털어 버린 채 일찍이 관직에 몸담지 않았던 것처럼 초연하였다.
신 문정공(申文貞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지나 일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니, 그 밝은 식견과 고매한 인품은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수준이다.”라고 하였다. 무신년(1608, 선조 41)에 선조(宣祖)께서 승하하시자, 공이 경사(京師)에 가서 부음(訃音)을 알리고 왕위 계승을 요청하였는데, 명나라 조정에서는 광해군(光海君)이 적장자의 위호가 바르지 않다는 이유로 곧바로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바른 사람을 미워하고 아첨을 좋아하는 간흉한 사람이 사신의 죄로 얽어서 법률을 혹독하게 적용하였다. 광해군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다가, 마침내 정인홍(鄭仁弘)의 참소대로 공을 파직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서용(敍用)하였다. 광해군이 수년간 재위하면서 전혀 충간(忠諫)을 듣지 않고, 줄줄이 언관(言官)들을 내쫓았다. 정온(鄭蘊)이 외지로 전보된 일을 계기로 공이 소장을 올려 보류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륵(金玏)은 선왕조(先王朝)의 구신(舊臣)인데, 70세의 나이에 영남(嶺南)을 떠돌고 있으며, 이준(李埈)은 일을 논하다가 용납되지 않자 조각배를 타고 남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심집(沈諿)과 김치원(金致遠)이 연달아 멀고 험한 곳으로 폄척되었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언관을 미워하는 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임을 알겠습니다.” 소장이 들어갔으나 광해군은 살펴보지도 않았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조카사위 김직재(金直哉)가 사형수로 체포되고 집안사람이 줄줄이 엮여 들어가 집안이 뒤집힐 때, 공도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정인홍이 이전의 유감을 잊지 못하여 다시 무신년(1608, 선조41)에 사신으로 갔다가 인준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던 일을 끄집어냈다.
그러자 삼사(三司)가 정인홍의 의도대로 연달아 소장을 올려 귀양 보낼 것을 청하였다. 광해군이 정인홍의 뜻을 어기기도 어렵고, 한편으로는 죄 없는 공이 가엾기도 하여 곧바로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이로부터 7년 동안 교외에서 처분을 기다렸다.
공이 처음 조정에 들어가 문아(文雅)함으로써 임금에게 인정을 받아 특별히 선택되어 높은 관직에 올라 지위가 극품(極品)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운(否運)을 만나 천지가 어두워지고 연달아 좌절을 겪으며 법망에 걸렸으니, 이 또한 운명이다.
남쪽 성곽 아래 땅을 빌려 집을 짓고 살면서 쓸쓸히 세상일에 관심을 끊은 채 눈과 귀를 닫았다. 비록 맥없이 순리대로 지냈으나, 윤리가 무너지고 여러 명현(名賢)들이 일시에 쫓겨나는 것을 보다가,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관북(關北)으로 유배될 때 길에서 이별하면서 서로 시를 지어 서글픈 마음을 나타내니, 듣는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였다.
금상(今上 인조(仁祖))께서 즉위하시자, 공이 선왕조(先王朝)의 덕망(德望) 있는 노신(老臣)이라 하여 항상 넉넉한 예로 대우하셨다. 공은 당시 대질(大耋)의 연세가 되어 걸음걸이가 불편했는데, 여러 노인들과 아회(雅會)를 갖기로 약속하여 견여(肩輿)를 타고 오가니, 그 풍류가 볼만하였다.
공은 처음에 호를 오봉(五峯)이라 하였는데, 늘그막에 한가롭게 지내면서 온갖 상념을 다 잊고 온종일 눈을 감고 지냈기에, 다시 호를 수와(睡窩)라고 하였다. 갑술년(1634, 인조 12) 윤8월에 감기에 걸려 댁에서 운명하니, 태어난 계축년(1553, 명종 8)으로부터 헤아려 보면 향년 82세였다. 궁에서 장례 물품을 돕고, 예관(禮官)을 보내 조문하였으며, 제사를 전례에 맞게 지냈다. 양근군(楊根郡) 북쪽 마유산(馬游山) 등성이에 안장하고 두 부인을 합장하였다.
첫 번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사직(司直) 문로(文老)의 딸이다. 아들 경엄(景嚴)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이고, 딸은 급제한 신율(申慄)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학생(學生) 호(昊)의 딸이다. 두 딸을 낳았는데, 진사(進士) 송민고(宋民古), 학생 강헌(姜瓛)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 소생은 경륙(景陸)과 경호(景湖)이다.
공은 자질이 특별히 뛰어나고 풍채가 맑고 시원하였다. 평소에 깔끔하게 씻고 의관을 바르게 하였으니, 의젓한 모습이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효성과 우애와 돈독함과 화목함이 천성적으로 지극하여, 선조의 기일을 만날 때마다 사흘 동안 흰 옷을 입고 재계하며 일찍이 치아를 보이지 않았다. 항상 자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셨으니, 경서를 공부하여 입신(立身)을 바란 것은 애당초 작은 벼슬이라도 해서 어머니를 잘 모실 요량이었지, 문한(文翰)으로 화려하게 드러나 귀한 자리에 오르는 것은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간에 혼란한 시대를 겪으며 훈봉(勳封)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더욱이 꿈에서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려서 여의고 어머니는 난리 중에 여의어 모두 예법을 다 지키지 못했으니, 이것이 내 평생의 지극한 아픔이다.”젊어서 맏형 참판공(參判公)을 섬겨 우애와 공경을 지극하게 하였다. 아우 창성공(昌城公)이 일찍 운명한 것을 슬퍼하며 여러 조카들을 친자식과 다름없이 돌보아 주었다.
친척들 가운데 가난하여 넉넉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굶주림과 배부름을 함께하며 난색을 보이지 않았다. 진실로 친척의 정의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내외(內外)와 친소(親踈)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우하였다. 고향 선비들 가운데 서울에 올라와 객지 밥을 먹는 사람들은 반드시 공에게 의지하였는데, 공이 머물 곳을 제공하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있고 없는 것을 물어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성취시켜 주었으니, 원근의 사람들이 그 의리를 사모하였다.
높은 관직에 50년이나 몸담았지만 일찍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집에 이롭게 하지 않았으니, 온 식구가 오직 공의 녹봉(祿俸)만 바라보았다. 관직에서 물러나는 데 이르러서는 조석의 끼니를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거처하였다. 사람들이 혹 선업(先業)을 경영해 보라고 권하면, 공이 말하기를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어찌 쓸데없이 마음과 힘을 낭비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정이 혼탁하여, 뇌물을 주고 결탁하여 형벌을 면하는 일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공을 유혹하며 말하기를 “부모님이 늙으셔서 방법을 찾아야 하니, 공은 굳이 다르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임금의 은혜를 지나치게 많이 받았는데, 죽어가는 시기에 무엇을 다시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은 평소 검약하여 화려한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선조(宣祖)께서 일찍이 공에게 말씀하시기를 “오늘 연신(筵臣)들이 모두 무늬 있는 비단 옷을 입었는데, 경만 홀로 그렇지 않으니 매우 가상하오.”라고 하시고, 어의(御衣)를 들어 보이셨는데 무명 도포였다. 이에 좌우(左右)의 신하들이 대단히 부끄러워하였다.
집의(執義) 김순명(金順命)이 임해군(臨海君)의 횡포와 방자함을 논하여 그 말이 매우 올곧았는데, 임금께서 배척하셨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변호하자, 임금께서 곧바로 말씀하기를 “경(卿)의 말이 옳소. 나도 뉘우치고 있소.”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분이었지만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지내면서부터는 조정의 득실(得失)을 묻지도 않고 인품(人品)의 고하(高下)를 말하지도 않았으며, 여러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문란하지 않았고 홀로 있을 때는 더욱 엄격하였다. 분주하게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만나지 않았으니, 당세에 맑은 명망을 지닌 분들을 헤아릴 때는 반드시 공을 앞세웠다.
공의 시문(詩文)은 기(氣)를 위주로 하여 날아갈 듯 호방하고 뛰어났다. 남의 것을 답습하지 않고 참신한 글을 지어, 차라리 작은 흠이 있을지언정 구슬과 같고, 조금 절뚝거릴지언정 천리마와 같았으니, 붓을 들고 흉내나 내는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탈고한 뒤에는 자제들이 보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고인의 글에 다 갖추어져 있으니, 다시 더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하였기 때문에 문집이 약간 권에 불과하다.
나 민구(敏求)가 공의 문하에 출입한 지 20년쯤 되었다. 비록 감히 공의 전모를 들어 평가하지는 못하지만, 문장의 격조는 드높고 훌륭한 명성과 아름다운 덕망을 지녔으며 중흥의 시기에 훌륭한 지혜를 발휘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공은 육경여(陸敬輿)와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였다. 어려운 시대를 만나 곧은 절개를 지켜서 시종 이름을 온전히 하였으니, 어찌 고상한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삼가 가장(家狀)에 기록된 행적과 뛰어난 공적을 채록하여 시호(諡號)를 내려 주는 은전(恩典)을 청한다. <끝>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오승준 김문갑 정만호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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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延陵府院君李公諡狀 乙亥
公諱好閔。字孝彥。姓李氏。始祖茂。唐中郞將。隷蘇定方伐百濟。遂留爲延安人。其後裔班班可譜。工曹典書係孫,典醫監正亮。寔公八世七世。曾祖諱淑琦。再策勳延安君。卒戶曹判書。祖諱世範。弘文修撰。贈左贊成。考諱國柱。伊川縣監。贈領議政。咸以公貴故。妣比安朴氏。司直旅之女。公生四歲而孤。夙性開悟。七歲知讀書。占句奇警。嘗一覽二百榜目。闇記不錯一人。時年十二。見以爲神童矣。己卯。魁進士。聲譽騫鬱。李文成公迓詔使。盛揀幕屬。公布衣豫選。辭不赴。癸未。宣廟試多士。又擧第一。直赴殿試。遂以翌年甲申釋褐探花。初補成均館。穌齋盧相國衡一世文士。知公才任辭命。爲言於上。尋拜注書。一日。上偶問苯字何義。左右默然。上謂公。聞爾富文學。爲我言之。公辭謝曰。是出西京賦苯䔿蓬茸。茂盛之貌。又對巢車舊制甚悉。上甚悅之。轉內翰。賜讀書暇。上曰。此人奇才。培養不可拘常規。命脫禁直。專意學業。上庭試儒臣。公再居魁陞資。及前後應製。輒爲冠。荐蒙蕃錫。丙戌。弘文著作。戊子以後。屢授修撰,正言,持平,校理。至壬辰。拜吏曹佐郞。而寇警猝急。扈駕西出。泣與大夫人訣。觀者哽咽。到博川。賊鋒踵後。倉卒不知所往。西厓相請幸龍灣。爲歸依父母計。公力贊其決。旣至賊益迫。則有渡遼之議。上簡願從者。公哭曰。臣旣忍絶裾。願以死從衛。秋。遷應敎,典翰,執義。以搶攘中宣達辭令必資於公。常帶承文院職。又以負藝苑重望。兼藝文應敎。其冬。李提督檄偏師嘗敵。公匹馬晝夜馳詣遼陽。籲請濟師。提督見公血誠。許以正月進兵。於是有箕城之捷。初。平壤賊騰謾書。要以助逆犯順。公勸上聲大義逆折奸謀。中朝人覘國者歸報大司馬。我情益白。天討乃行。時事變錯。出咨奏旁午。公副急應卒。不躓不竭。天將黃應暘招募遺民。臨行索諭檄甚遽。上以命公。立草成文。嘗撰罪己敎書。有曰。龍灣一隅。天步艱難。地維已盡。予將何歸。瞻彼長江。亦流于東。思歸一念。如水滔滔。遐邇雪涕。義旅扼腕。感奮世以。比興元詔云。李提督旣破賊。宋經略尸兵柄。各欲僝功。將觀我國報捷爲之形勢。公兩俱推功。不左右其手。語極揚厲。二人者意皆滿甚得。謂東國有人矣。於是擢同副承旨。侍上左右隨事贊益。上常以職呼而不名。兵部尙書石星以亂久不解。計欲許倭款。雖我邦人亦思羈縻。公曰。不共戴天之讎。一朝許講。何以歸謁宣,靖兩陵。言未已。上厲聲曰。終始不懾於賊。唯我與爾。奉朝命候李提督于開城。過省大夫人病。已遭喪。奉柩歸葬。公旣去。牋牘紛委。無管理者。命奪情起服。公十上疏。懇乞終喪。上以辭命得失實關存亡。不准辭。至曰。條達事情。敷陳明白。拯濟艱危。表裏戰功。詞鋒豈下於兵鋒耶。慰諭備至。乙未服闋。拜承旨,參知,大司諫者再。副提學者四。丙申冬。特授嘉善大夫大司憲。擧正王子臨海君容庇姦宄之罪。上曰。父子之間。卿能盡言。風采可尙。丁酉。由大司憲,都承旨。兼弘文館提學。八月。超資憲判禮曹。己亥。監軍御史陳效卒于軍。公爲儐使。操文以祭。有曰。伯玉過宮。不是舊車之音。王孫不歸。長爲暮出之兒。一軍掩泣。旣還。再疏乞退。蓋時議齮齕西厓相甚力。流謗波及。上察其狀。優旨不許曰。卿忠孝貫日月。何忍棄予以去。辛丑。學士顧天峻奉詔東來。上命擇義州延慰使才任主文者。公膺是選。翌年春。果代李廷龜爲遠接使。使還。拜兩館大提學。癸卯。陞崇政階左參贊。甲辰。策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延陵君。俄進府院君。位正一品。迺控解宗伯及文衡兼局。杜門却掃。擺落世務。超然如未嘗在事。申文貞公常稱知命之後謝事就閒。達識高邁。人自不及。戊申。宣廟陟遐。公如京師告訃。且請繼襲。朝廷以光海未正世嫡位號。不卽准封。纖人之醜正效諂者。組織爲使臣罪。擬律慘礉。光海初不從。竟用鄭仁弘讒訐。罷公職。未幾復敍。光海在位數年。愎諫滋甚。斥逐言官相繼。公因鄭蘊外補。上疏保留。且言金玏先王朝舊臣。七十之年。流離嶺南。李埈論事不容。片舸甫歸。沈諿,金致遠連貶遠惡。臣知所惡於言官者非暫而久也。疏入不省。壬子。姪壻金直哉被死囚。鉤引家覆。公亦逮繫得釋。而仁弘嗛前憾不已。又發戊申使事。三司承頤下氣。連章請竄。光海重違仁弘意。又愍公無罪。不卽批下。自是待命郊外者七年。公始立朝。用文雅受知人主。迪簡騰踔。致位極品。及是而遭罹否運。天地䨧曀。連蹇挫閼。動扞於文罔。其亦天也。僦地南郭。結宇棲止。蕭條屛散。絶耳目之營。雖頹然處順乎。見倫彝喪敗。諸名賢一時流逬。而白沙相得關北。就別途次。相與賦詩悲慨。聞者傷之。及今上卽位。以公先朝耆宿。常見優禮。公時登大耋。蹈履已愆。約諸老爲雅會。肩輿還往。風流可賞。公始號五峯。晩迺居閑息念。闔眼終日。又號爲睡窩。甲戌閏八月。感疾卒于寢。距其生癸丑。爲八十二歲 。宮庀襄葬。禮官致弔。祭具視例。窆于楊根郡北馬游山之麓。兩夫人祔。先夫人坡平尹氏。考司直文老。生男景嚴。文科富平府使。女適及第申慄。後夫人陽川許氏。考學生昊。生二女。適進士宋民古,學生姜瓛。側出景陸,景湖。公資稟特達。體氣朗爽。平居盥濯脩潔。整飭衣冠。穆然若不可干。孝友敦睦。天性篤至。每遇先忌。三日白服齋素。未嘗見齒。常語子弟曰。早失嚴顏。奉侍偏慈。治經生業。覬幸發身者。初爲奉一檄便養之計。文翰華膴。實非始望。而中更板蕩。至叨勳封。尤非夢寐所及 。父喪以幼。母喪以亂。俱不得守制。是余平生至痛。少事伯兄參判公。愛敬備隆。悼其弟昌城公早殞。撫視諸孤。恩均己出。親屬之居貧不給者。與之同飢飽無難色。苟有以戚懿至者。不問內外親疏。待之如一。鄕士之旅食于京師。必以爲歸。舍館致餼 。存問有無。爲之成就願欲。遠近慕其義焉。積膴仕五十年。未嘗商量尺寸濡益家私。百口唯仰給俸祿。及其屛廢。殆不具朝夕 。處之晏如。人或勸以經紀先業則曰。吾生無幾。止此足矣。何用枉費心力。朝政穢濁。多行金結奧。援以除罪。有一人餂公曰 。親老欲事蹊徑。公勿爲苟異。公曰。老誖受恩過厚。垂死之日。奚所復望。公素尙儉約。不喜服美。宣廟嘗謂公曰。今日筵臣衣俱文綺。卿獨不然。深用嘉尙。因擧示御衣。乃綿布襖也。左右大慙。執義金順命論臨海君橫恣。語甚讜。上命斥之。公涕泣救解。上遽曰。卿言之是也。予亦悔恨。然旣退家居。不問朝政得失。不言人品高下。群居而不亂。獨處而愈莊。不肯數數權要造請進取。而當世數淸名者。必以公先之。公詩文以氣爲主。翩翩豪逸。作新杼柚。寧瑕而璧。寧蹷而千里也。有非筆墨摸儗所可到。然旣脫稿。不許子弟藏收曰。古人書具在。不得更爾。以是見集僅若干卷。敏求出入門下二十年所。雖不敢擧其全而槪之。文章標致。令聞令望發揮宣猷於中興之辰。衆許以陸敬輿其人。而處險居貞。終始完名。詎非大雅君子者哉。謹採家狀所載行蹟功最。請易名之典。<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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