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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7,17 영천뉴스24 에서 복사옮김 | ||||||||||||||||||||||||||||||||||||||||||||||||||||||||||||||||||||||||||||||||||||
임진왜란, 정유재란 공신 영천출신 영고정 전삼달 장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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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고정 전삼달 장군은 고려 충숙왕 원년 1315년 과거합격, 원나라에 파견 집현전 태학사, 병부상서를 지내면서 공민왕 1354년까지 고려와 원나라를 넘나들며 조공삭감 외교를 38년간 펼쳐 나라를 소생시키고 피폐한 국민을 보호한 역사적 인물 축산(龍宮 舊號)부원군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선생의 9대손이다.
이글은 영고정 전삼달 장군이 임진년 시월 안강 진중에서 쓴 것이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들과 대치한 23살의 젊은 의병장이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겠다는 뜨거운 충정을 표현한 글로서 이순신 장군이 임란을 맞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앉아 나라를 걱정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장군이 형제들과 정규군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서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노력 공로와 둘째 아들 전내성(全乃性ㆍ훈련원 주부)도 제2차 조ㆍ청 전쟁(병자호란, 1636년) 삭녕(경기 연천)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장군의 충효정신은 후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역사적 그늘에 가려져있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시작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이듬해 북쪽 변방지역에 오랑캐가 나타나 노략질을 자행하므로 왕의 명령에 따라 북방 경비책으로 심양(瀋陽)에 급파되어 이를 쳐부수며 큰 전과를 올렸다. 1605년 선무 원종공 3등에 녹훈(伯兄 全三樂 예조좌랑 2등 녹훈, 仲兄 全三益 봉화현감 3등 녹훈, 弟 西岡 全三省 公을 사양, 낙향)되었다.
부산진에 주재할 때는 섬 오랑캐들이 교화되었으며 제1차 조ㆍ청 전쟁(정묘호란,1627년)후 조정에서는 청의 위협이 걱정되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1627년 2월 29일 경상 좌수사로서 병사(兵士)를 뽑아 군량을 운송하는 일 때문에 왜인을 응접하는 물건을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狀啓)로 있는 공을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목사(黃海道兵馬節度使 兼 黃州牧使)로 발탁 1628년 8월 16일 인조대왕이 친히 인견하여 황주가 안주다음 국가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을 강조하고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당부하였다.
황해 병사로 재임시 나쁜 일에 엄격하고 주변사람들을 편하게 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는 욕심이 없이 깨끗하였고 공적으로 누를 끼친 일이 없이 청백하고 근검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사졸들에게 미쳤으며 겹 비단 옷을 입지 않았고 창고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朝鮮王祖實錄, 墓地銘(이장 당시 墓에서 발견된 誌石, 晋州牧使 鄭好仁 謹誌) 參照〕
숭정원년 7월 황해도병마절도사 겸 황주영 목사 부임시 충정을 표현하는 詩 한수가 역시 전해져오고 있다
1628년 8월 16일 인조대왕은 유수(諭守)를 통해 “황해도병마절도사 전삼달에 이르노라. 경은 국방에 맡은 책임이 중하므로 병졸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히 하고 도적을 막는데 최선을 다하라. 혹 나와 독대할 일이 있으면 비밀로 하라. 만약 간모한 일이 있을지 모르니 비상시는 짐과 합의한 후에 시행하기로 하고 청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21명부를 보내니 경은 잘 보관하여 때가 오면 실행하여 국가에 더욱 충성하라”
지금까지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御書閣(영천시 금호읍 약남리 소재)의 諭守 내용으로 볼 때 지략과 무예를 겸비한 장군을 인조대왕이 신임하여 오만불손한 청나라를 응징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나 불행히도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유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633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전삼달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지덕장으로 나라를 위해 구국의 충정을 바쳤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3년상을 마친 효자이기도 했다.
400여년(1633년 6월 14일 別世, 12월 27일 장례)이 지난 후 2004년 1월 15일 후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학 대사의 비결에 나오는 영천 10대명당중 하나로 꼽히는 천마시풍(天馬凘風)인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 백산으로 이장하였다.
이장과정에서 관은 송진이 10센티미터 가량 두께로 둘러져 있어 장군의 시신은 미라로 남아있었고 묘지석(두께 2㎝, 가로 20㎝, 세로 20㎝) 2개와 수의 1습은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에 기증하였다.
장군은 재직하는 곳마다 성을 쌓거나 보수하고 군기정비와 군사 확충으로 적의 출입처나 염탐꾼을 봉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토록 했다. 주민들이 장군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장단(長短)에는 선정비(善政碑)가 황주(黃州)에도 거사비(去思碑)가 각각 세워져 있다.
1616년 2월 3일 창원별장 全三達 賞加書(광해군), 1628년 2월 23일 諭 경상좌도수군절도사 全三達(인조), 숙마(熟馬) 일필(一匹) 하사(下賜), 1628년 8월 16일 유수(諭守) 황해도병마절도사 全三達(인조) 등 3회의 어서를 내렸다.
임진왜란 당시 운주산과 팔공산, 영천, 경주 일대를 넘나들며 전쟁의 현장을 누빈 장군의 壬亂日記와 행적 등이 기록된 潁皐亭 實紀와 어서 3점, 교지 16점, 유물 5점이 후손들에 의해 전해져오고 있다.
영천경찰서 역전파출소장 전오식 ycn24@hanmail.net Copyrights ⓒ 영천뉴스24 (www.yc24.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1. 朝鮮王朝實錄(仁祖, 1627-1628년)
“목숨 건 구국충정… 이제는 편히 쉬소서.”
장군의 11대손인 대한노인회 전영대(73) 영천시지회장이 여러 친족들과 더불어 전 도의원 김종덕씨(수덕예식장 대표)의 조언을 받아 무학대사의 비결에 나오는 영천 10대 명당 중 하나로 꼽히는 천마시풍(天馬嘶風)인 영천시 금호읍 호남리 백산으로 이장하는 과정에 무덤에서 유기로 구운 묘지명(가로 20㎝, 세로 20㎝, 폭 1㎝) 2개가 발견되었고 시신은 수의 10습을 입고 있었다.
문중에서는 발견된 유물중 수의 1습과 지석 2점 등 총 2건 3점을 지난 6월 10일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고 2천여만원의 예산을 들여 비석, 문인석, 사자상, 석등, 망주 등을 세워 묘역을 단장하여 장군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편히 잠들게 했다.
미라(mirra)는 천연적 또는 인공적인 처리로 오랫동안 원형에 가까운 형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인간 또는 동물의 시체를 일컫는 말로 지난 2002년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당하리에서 430년 만에 발견된 파평윤씨 모자 미라 및 유물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돼 세간의 화제가 된 바 있다.미라가 되기 위해서는 밀폐된 공간에서 습기가 거의 없어야 하고 미생물이 살 수 있어서는 안 된다.
파평윤씨 모자 미라가 추운 겨울인 12월에 사망했고 시신 전체를 정결한 옷으로 꽁꽁 사맸으며 매우 두꺼운 이중목관을 사용했음을 미루어볼 때 전삼달 장군의 시신도 이와 비슷한 환경요인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또한 두꺼운 송진으로 둘러싸인 관도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산 넘어 천리 계신 왕이 어찌 아시리요
이 글은 영고정 전삼달 장군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안강 진중에서 쓴 글이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왜병을 상대로 정규군이 아닌 의병들을 모집하여 대치한 23살의 젊은 의병장이 죽음으로서 보국하겠다는 뜨거운 충정을 표현한 것이다.
1570년 녹전동에서 태어난 장군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치밀하여 학문을 익히고 무예를 연마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의 충정으로 형제들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사천(沙川)전투와 영천복성전투, 경주전투에 참가해 큰공을 세웠다.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주부로 관계에 첫발을 디뎠고 1612년 함평현감으로 있을 때 북쪽 변방지역에 오랑캐가 나타나 노략질을 자행하므로 왕의 명령에 따라 북방 경비책으로 심양(瀋陽)에 급파되어 이를 쳐부수며 큰 전과를 올렸다.
1616년 정3품인 절충장군에 봉직되었고 용양위부호군 영흥대도호부사, 장단진도호부사가 되었다. 재직하는 곳마다 성을 쌓거나 보수하고 군기 정비와 군사 확충으로 적의 출입처나 염탐꾼을 봉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토록 했다. 장군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장단에 선정비(善政碑), 황주에 거사비(去思碑)가 각각 세워졌다.
1626년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배명 받는 자리에서 광해군은 “경은 이미 임지에서 온 힘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였으므로 상으로 임직을 특명하니 용렬한 일을 경계하고 군율을 바로잡아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라. 더욱이 경은 학식이 높고 검도와 궁술이 출중하니 그 무예를 바탕으로 영남지방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훌륭한 의용군이 되도록 훈련을 시켜라. 이가 곧 나라와 종묘사직에 충성하는 길이요, 스스로 명성을 얻어 모든 사람으로부터 추앙을 받게 될 것이다”하고 교시했다.
이는 장군이 격전장에서 치른 용맹은 물론이거니와 주도면밀한 작전계획과 사전 방어계획을 훌륭하게 세웠음을 반증하고 있다.
1625년 4월 용양위부사, 7월 장단진병마첨절제사겸 도호부사, 1628년 황주목사와 황해도병마절도사, 2년 후에 행용양위부사와 김해도호부사를 거치며 장군이 소임을 다하자 조정에서는 크게 기뻐하여 인조대왕이 친히 말 한 필을 하사하기도 했다.
“가선대부 황해도병마절도사 전삼달에 이르노라. 경은 국방에 맡은 책임이 중하므로 병졸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히 하고 도적을 막는데 최선을 다하라. 혹 나와 독대할 일이 있으면 비밀로 하라. 만약 간모한 일이 있을지 모르니 비상시는 합의한 후에 시행하기로 하고 21명부를 하사하니 경은 잘 보관하여 때가 오면 실행하여 국가에 더욱 충성하라”
지금까지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는 어서각(금호읍 약남리 소재)의 유서내용으로 지략과 무예를 겸비한 장군을 인조대왕이 신임하여 오만불손한 청나라를 응징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나 불행히도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유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633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전삼달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지덕장으로 나라를 위해 구국의 충정을 바쳤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3년 상을 마친 효자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목민관으로 한 평생을 불살랐다.
371년이 지난 지금, 후손들에 의해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로 이장된 장군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에게 전하고픈 말이 떠올랐다.
“아! 전삼달 장군… 이제는 편히 쉬소서.”
영고정 전삼달장군은 처남 고,전영식의 11대직계 선조임 영천지방에서 우리문중 호수실기(휘 世雅), 양계공문집(휘 好仁), 복제실기(휘 湛), 묘지명 양계공(위 好仁) 근지, 참고문헌에 올려있네요, 영고정 아우이신 서강공(휘 三省)은 호군공(휘 守藩)사돈되시고 삼휴공(휘 好信)의 형님 명계공(휘 好義)의 장인이 됨니다, |
첫댓글 영고정에 대한 자세한 사료들을 대하니 방갑구나!
호수공과 같이 창의 하시여 나라에 크게 공헌하셨군!
2부 "임란의병장 전삼달 장군 시신 미이라로 발견" 추가로 등록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