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는 김시흥(金時興), 시호(諡號)는 문렬(文烈)이다. 경순왕의 8세손이라고 하였다.따라서신라김씨(新羅金氏)의 원조(元朝)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5세손이 된다. 문과(文科)에 올라 한림(翰林)을 거쳐 외관(外官)으로 동북면(東北面) 병마사(兵馬使)를 지냈고, 벼슬이 광록대부(光祿大夫)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식읍(食邑) 1천호(戶)가 되었고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졌고 문렬공(文烈公)으로 시호(諡號)되어 후손들이 김녕(金寧)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신라의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는 범신라김씨계(汎新羅金氏)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그런데 고려말에 지명(地名)이 김해(金海)로 바뀌면서 김녕김씨(金寧金氏)의 본관도 김해(金海)로 부르게 되어 한때는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선김(先金), 김녕김씨(金寧金氏)는 후김(後金)으로 구별하기도 했다. 나서는 등 종통(宗統)을 어지럽히는 일도 잦아, 헌종 15년에 경상도 유생 김주성(金周聲) ㆍ 김근학(金根學) ㆍ 김성현(金成鉉) ㆍ 김치수(金致秀) ㆍ 김홍환(金鴻煥) 등이 선조의 사실 목록에 진정서를 첨부하여 예조(禮曹)에 상소(上疏), 본래의 김녕(金寧)을 본관으로 확정지었다. 한림(翰林)으로 동북면(東北面) 병마사(兵馬使)를 거쳐 광록대부(光祿大夫) 평장사(平章事)에 으르고 김녕군(金寧君)에 봉해진 김시흥(金時興)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후손들이 그의 봉군지(封君地)를 따라 김녕(金寧)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한다. 시조의 아들로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의 난을 평정하는데 기여한 원정공(元靖公) 김향(金珦)이 있다. 서리(胥吏)에서 몸을 일으켰다. 학식은 넉넉지 못했으나 청렴하고 통솔력이 있었다. 인종(仁宗) 때 합문지후(閤門祗侯)에서 경원(慶源)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병부상서동지추밀원사(兵部尙書同知樞密院使)에 이르렀다. 그의 딸이 당시 최고의 권세를 떨치던 이자겸(李資謙)의 며느리가 되어 그와는 사돈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권력이 왕권(王權)을 누르는 것을 보고, 인종 4년 왕명을 받들고 척준경(拓俊京)과 의논하여 이자겸(李資謙)을 잡아 유배(流配)하는 데 성공,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들이 31개파로 분파되었다. 후손이 돈녕부령사공파(敦寧府領事公派), 김형(金형)의 후손이 진주목사공파(晋州牧使公派), 김준영(金俊榮)의 후손이 충정공파(忠貞公派), 김대영(金大榮)의 후손이 군수공파(郡守公派), 김희영(金希榮)의 후손이 동지중추부사공파(同知中樞府事公派), 김석종(金錫宗)의 후손이 진천군수공파(鎭川郡守公派), 김희간(金熙看)의 후손이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김려택(金礪澤)의 후손이 소윤공파(少尹公派), 김위거(金渭巨)의 후손이 주부공파(主簿公派), 김안도(金安道)의 후손이 유수공파(留守公派), 김정필(金廷弼)의 후손이 현감공파(縣監公派), 김흔(金欣)의 후손이 충숙공파(忠肅公派)이다. 그리고 김질(金秩)의 후손이 송암공파(松菴公派), 김길상(金吉祥)의 후손이 만은공파(晩隱公派), 김문기(金文起)의 후손이 충의공파(忠毅公派), 김정기(金鼎起)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김지(金智)의 후손이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이고, 그의 후손인 김응수(金應壽)의 후손이 분성군파(盆城君派), 김보철(金輔哲)의 후손이 생원공파(生員公派), 김계저(金繼儲)의 후손이 좌승선공파(左承宣公派), 김명로(金命路)의 후손이 전법령공파(典法令公派), 김극원(金克元)의 후손이 전농사사공파(典農寺事公派)이다. 조선 개국공신 김인찬(金仁贊)의 후손이 충민공파(忠愍公派)이다. 김문희(金文熙)의 후손이 상서공파(尙書公派), 김문백(金文伯)의 후손이 시랑공파(侍郞公派), 김문엽(金文燁)의 후손이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김문강(金文江)의 후손이 참찬공파(參贊公派), 김문해(金文海)의 후손이 검교부윤공파(檢校副尹公派), 김극준(金克俊)의 후손이 부승선공파(副承宣公派), 김극중(金克重)의 후손이 승선공파(承宣公派)다. 아들 김귀갑(金貴甲)은 원(元)나라에 들어가 시서화(詩書畵)의 대가인 조맹부(趙孟頫)등과 교류, 문명을 떨쳤으며 여말(麗末) 조선조의 개국에 반대해 절개를 지키다 이방원(李芳遠)·정도전(鄭道傳)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김정병(金挺丙)(병부상서(兵部尙書))은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신돈(辛旽)을 제거하려다 실패, 은거하였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은거, 절의를 지킨 고려기(高麗期)의 충신들이다. 공양왕(恭讓王)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김광저(金光儲)는 조선조의 개국과 함께 은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오를 것을 권하는 태종(太宗)의 제의를 거절했다. 김질(金秩)도 이태조(李太祖)가 분성군(盆城君)에 봉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맡을 것을 권했으나 거절하고 아산(牙山) 도고산(道高山)에서 수절했다. 효자로 다른 사람의 모범이 돼 정려(旌閭)되었고 후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는 치적이 커 예조판서(禮曹判書)로 특진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이른 김인찬(金仁贊)은 조선 개국 1등 공신으로 후에 무과에 등과,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후에 문하시랑좌찬사(門下侍郞左贊成事)로 추증되고 익화군(益和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김종남(金從南)은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선정을 베풀어 형조판서에 올랐고, 그의 아들 김석련(金碩鍊)은 이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세종(世宗) 때 ‘치평요람(治平要覽)’등의 편찬에 참여했고 김종서(金宗瑞)가 육진(六鎭)을 개척할 때도 공을 세웠다. 초명은 효기(孝起), 호는 백촌(白村)으로 시조 김시흥(金時興)의 9세손이며 호조판서 김순(金順)의 손자, 영의정에 추증된 김관(金觀)의 아들이다.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에서 출생했다. 병조정랑(兵曹正郞),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수봉상사윤(守奉常寺尹),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 병조참의(兵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함길도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를 지냈다. 그는 관찰사로 재직 중 둔전법(屯田法)을 실시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단종(端宗) 때는 형조참판을 거쳐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나갔다. 오른 김문기(金文起)는 세조(世祖)가 어린 단종(端宗)의 왕위를 강탈하자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등과 함께 단종(端宗) 복위를 모의하였다. 김문기(金文起)는 병력 동원을 책임졌다. 절의를 지키고, 아들 김현석(金玄錫)과 함께 순절했다. 이유만으로 역적의 누명이 씌우진 사람들도 많아 산중으로 피하거나 본관을 숨기며 고난 속에 명맥을 이었다. 관작이 복구된 김문기(金文起)는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조(正祖)는 그의 충절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해 불천위(不遷位)의 부조묘(不祧廟)에 제향하라는 왕명과 함께 정려의 명도 내렸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판정으로 원래의 사육신(死六臣)에 속함이 확인돼 노량진 육신묘역에 가묘가 마련되었다. 증손 경남(景南)·현손 약전(約前) 등이 충(忠)과 효(孝)의 맥을 이어 전대미문의 오세충효(五世忠孝)정문이 세워졌다. 월악산(月岳山)에 들어가 3년간 복상, 세조(世祖)의 좌의정 등용 제의도 고사한 김준(金遵),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도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한 김현(金鉉) 등도 김문(金門)의 기개를 보여준 인물들이다. 충절의 인물들을 많이 낳았다. 김준(金遵)의 5세손이다. 그는 권율(權慄) 장군 막하에 들어가 행주(幸州)·수원(水原) 등지에서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丁酉再亂)때는 이순신(李舜臣)의 막하로 달려가 고금도(古今島)·노량(露梁)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순국, 선무원종(宣武原從)2등훈(等勳)에 녹훈되었다. 올랐고 뒤에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냈다. 김유부(金有富)는 노모를 업고 대구(大邱) 팔공산(八公山)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 선무(宣武)2등공신(等功臣)에 녹훈되었다. 또 김유부(金有富)의 아들 기남(起南)·난생 (蘭生)형제는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순절했고 두 며느리는 열행(烈行)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져, 양대에서 삼충일효양렬(三忠一孝兩烈)이 나왔다고 ‘ 밀양읍지(密陽邑誌)’는 전하고 있다. 만나 권율(權慄)장군 휘하에 들어가 영천(永川)·금산(錦山) 등지에서 공을 세웠다. 그는 아들 복달(福達)과 함께 정유재란(丁酉再亂)때는 의병 4백명을 인솔해 진주성(晋州城)에서 적을 막았고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는 섬진강에서 적을 막아 방어사(防禦使)가 되었다. 노량대첩(露梁大捷)때는 적선 수십척을 화전(火箭)으로 불태우는 등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시위호종환도(侍衛扈從還都)에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다. 김용호(金龍虎)는 김문기(金文起)의 7세손으로 선조(宣祖)때 무과에 합격, 임란(壬亂)때는 곽재우(郭再佑) 선생과 함께 낙동강변 적포진(赤浦津) 박진두(泊津頭)에서 적과 싸우다 순절, 선무원종(宣武原從)2등훈(等勳)에 녹훈되고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으로 추증되었다. 김경세(金景世)는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피하자 의병대에 참여, 청군(淸軍)과 여러 차례 싸워 이겼으나 광주(廣州) 전투에서 전사했다. 순조(純祖) 때 충신 정려의 왕명이 내렸고 충경(忠敬)의 시호를 받고 상산군(常山君)에 봉해졌다. 토평에 공을 세우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김준(金遵)의 증손 김구룡(金九龍),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우고 형조판서를 지낸 김경의(金敬義), 선조(宣祖) 때 병조판서를 지낸 김전(金銓), 역시 병조판서· 세자이사(世子貳師)를 지낸 김성부(金成富), 임란(壬亂)때 아들 김영길(金永吉)과 함께 순절한 김득성(金得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부안(扶安) 호벌치(胡伐峙)싸움에서 독전하다 전사한 김영년(金永年) 등도 조선조에 김문(金門)을 빛낸 인물들이다. 항일 의병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대구(大邱)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벽산(碧山)은 출감 후 의병을 일으켰다가 중과부적으로 실패하자 ‘시신이라도 왜적의 손이 닿는 것이 싫다’며 바위를 몸에 매달고 동해바다에 투신했다. 김근배(金根培)는 다음해에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문명을 떨쳤으나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에 반대, 고향에 은거했다. 그는 1910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자 울분을 참지 못해 절명시를 남기고 우물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순구한 김한종(金漢鍾), 독립협회원 김용현(金溶鉉), 의병중군장 김준성(金駿聲), 항일투사 김순흠(金舜欽)·김용흠(金溶欽)·김용흠(金溶欽)· 김탁흠(金鐸欽) 일가, 심천(深川) 의병장 김언규(金彦圭), 독립투사 김경성(金慶聲),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김강(金剛)· 김보형(金寶炯), 광주(光州) 학생 의거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순국한 김재용(金在瑢) 등은 어두운 시대에 민족의 혼을 밝힌 김문(金門)의 인물들이다. 전남 고흥(高興)으로 가 살게 되었고, 9세 김현(金鉉)이 서울에서 충북 진천(鎭川) 옥동(玉洞)으로 옮겨갔던 사실들이 나타타 있으므로 김녕김씨(金寧金氏)의 선대(先代)는 서울에서 살았던 것 같다. 김언영(金彦永)이래로 함안(咸安)에, 11세 김원석(金元碩) 이래로 괴산(槐山)에 세천지(世阡地)를 지키고 있으므로 이들 지역에 나뉘어 살았던 것 같고, 15세의 대에 와서 김려(金呂)가 경북 상주(尙州)로, 김정길(金鼎吉)이 경북 성주(星州)로 옮겨간 사실이 ‘병진보(丙辰譜)’에 보인다. 김현(金峴)의 손자인 김순(金順)이 충북 옥천(沃川)의 산수(山水)에 반해 그곳에 자리잡은 뒤, 일부 자손들이 그곳에서 세거하였다. 자손들이 금산(錦山)·정읍(井邑)의 태인(泰仁)·함양(咸陽)· 고성(固城)·청송(靑松)·창녕(昌寧) 등지와 함안(咸安)·담양(潭陽)·단양(丹陽)·합천(陜川)의 초계(草溪)·의령(宜寧)·공주(公州)· 남원(南原) 등 영·호남 각지로 이거해갔다. 김덕기(金德璣)는 재녕(載寧)으로, 14세 김시보(金時普)는 밀양(密陽)으로 옮겨갔으며, 그밖에 남해(南海)·진주(晋州)· 밀양(密陽)으로 옮겨갔으며, 그밖에 남해(南海)·진주(晋州)· 거창(居昌)·무주(茂朱)·무안(務安)·남양(南陽) 등지와 황해도 장연(長淵)·연안(延安)·신주(信州)·황주(黃州), 평남 용강(龍岡) 등지에도 이 무렵부터 자손들이 살게 되었던 것 같다. 자손들은 주로 경기도 일대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일부는 14세 김시창(金時昌)의 대를 전후하여 진주(晋州)에, 일부는 12세 김원(金元) 이래로 경북 영일(迎日)에 옮겨가 정착했다고 믿어진다. 김종남(金從南) 이래로 함남 북청(北靑)에 살았고 김문엽(金文燁)의 자손들은 영천(永川)과 경북 의성(義城)의 비안(比安), 10세 김거석(金巨石) 이래로 전북 남원(南原)의 운봉(雲峰) 등지에 나뉘어 정착했던 것 같다. 전후하여 김해(金海)·동래(東萊)에, 11세 김욱남(金頊楠) 이래로 경주(慶州)에, 7세 김대검(金大劍) 이래로 담양(潭陽)의 창평(昌平) 등지에 나뉘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평창군(平昌郡) 진부면(珍富面), 충북 옥천군(沃川郡) 청성면(靑城面), 충남 논산군(論山郡) 은진면(恩津面), 전북 무주군(茂朱郡) 일원, 순창군(淳昌郡) 금과면(金果面), 고창군(高敞郡) 무장면(茂長面), 전남 담양군(潭陽郡) 봉산면(鳳山面), 구례군(求禮郡) 구례읍(求禮邑), 고흥군(高興郡) 일원, 무안군(務安郡) 해제면(海際面), 경북 울진군(蔚珍郡) 온정면(溫井面), 대구시(大邱市) 북구(北區), 군위군(軍威郡) 산성면(山城面)· 고로면(古老面), 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영덕군(盈德郡) 일원, 영일군(迎日郡) 동해면(東海面), 성주군(星州郡) 금릉군(金陵郡) 일원, 상주군(尙州郡) 상주읍(尙州邑)·사벌면(沙伐面), 경남 진양군(晋陽郡)·의령군(宜寧郡)·합천군(陜川郡)· 울주군(蔚州郡) 일원, 창녕군(昌寧郡) 창녕읍(昌寧邑), 의창군(義昌郡) 북면(北面)·대산면(大山面), 고성군(固城郡) 거류면(巨流面),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설천면(雪川面), 함양군(咸陽郡) 병곡면(甁谷面)·안의면(安義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