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의 아버지' 를 추억하다
고 이연호목사 10주기 추모 기념예배 열려
'…그렇지 않아도 이 지역의 처참한 모습에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아무래도 여기 이촌동에 교회를 세우고 신앙 동지들을 모아 봉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이곳은 엄청난 빈민들의 밀집지대에 교회나 병원 등이 하나도 없었다. 서울에서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발생했다면 거의 매년 이곳 이촌동에서 시작했다. 또 술집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곳도 바로 이 마을이었다…평소에는 동네 아이들을 한강 모래밭에 모아놓고 예배를 드렸고 비오는 날에는 내 방을 예배처로 개방했다. 그런데 천정 몇 군데에서 비가 새어 그릇들을 놓았더니 아이들이 물장난을 쳤다…'(고 이연호목사가 지난 1996년 2월 24일부터 24회에 걸쳐 본보에 자신의 신앙여정을 담백한 필치로 그려낸 '살며 바라며' 중)
넝마주이 부랑인 고아 과부 등 전쟁으로 인한 재민들이 모여 살던 이촌동 한강변에서 빈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동거동락했던 '빈민의 아버지' 고 이연호목사 10주기를 추모하는 예배가 지난 5일 이촌동교회(김용민목사 시무)에서 있었다.
고인을 그리워하는 목회자들과 교우들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종일관 엄숙하게 진행된 이날 예배에서 김용민목사는 "이 목사님은 내게 스승이자 아버지같은 존재"라고 소개하며 "만나 뵐 때마다 서두르지 말고 인내하는 목회, 요란하지 않고 바른 목회를 하라고 조언하셨던 목사님이 기억난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특히 그는 "지금도 목사님이 그립다"면서 "그분의 유작을 모아 목사님을 추모하는 작은 박물관을 교회에 마련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단벌 양복에 똑같은 넥타이 차림의 소탈하고 정갈했던 고 이연호목사.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빈민들을 위해 헌신한 진실된 하나님의 종으로 기억되는 고 이연호목사는 때로는 취한의 주먹에 어금니가 부러지고 성경그림 책들을 차가운 방바닥에 깔고 새우잠을 자면서도 정작 '빈민들의 끼니'를 걱정했다. 이날 그를 기억하는 교우들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날 예배 후에는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작가들이 참석해 이 목사의 유작을 소개하는 추모강연회가 열렸다. 고 이연호목사는 '그림 그리는 목사'로 '삶의 나눔 사역'을 예술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미술인이다.
교회건축을 위해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렸던 고 이연호목사는 미국 로렌스대학 유학시절 수채화가인 디트리히 교수로부터 2년간 사사했으며 귀국후에는 대한미술협회와 조선일보사 후원으로 동양화랑에서 제1회 미술전을 개최했으며 1961년 국전에 입상해 미술가로서 객관적인 실력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기독교 미술계에서 그의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은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한 일이다. 1966년 김은호 김기창 김기승 화백 등 한국을 대표하는 화단들을 직접 찾아가 설득한 그는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기독교 미술의 초석을 놓았다.
그러나 이 목사는 "나 같은 아마추어 작가가 어떻게 프로작품 세계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고 겸손해하며 협회 작품전 출품을 조심스러워했다고.
이날 기독미술인들은 "목회사역을 작품에 투영시키며 충성스러운 종으로서의 삶을 예술로 승화한 이 목사님의 작품은 '한국의 기독교 미술이 무엇이냐'는 세간의 질문에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준다"면서 "기독교 미술이란 한국적인 부분과 성서에서 예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투영되는 것인데 이 목사님의 작품은 한국의 현실과 목회현장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진정한 한국 기독교 미술"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이촌동풍경'은 비록 미완성작으로 남겨졌지만 1950년대 이후 현대사의 한 장면을 잘 나타내고 있는을 뿐 아니라 민족의 비극적 역사현장 속에서 빈민들과 함께 한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세브란스 병원의 한 구석에 세워져 있었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촌동풍경'은 그러나 일반 미술계에서는 "재평가 받기에 걸맞는 대작"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한편 고 이연호목사는 본보와도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90년 초부터 1992년까지 기독교미술작품을 해설하는 '교회미술순례' 연재를 비롯해 1995년 미술의 해를 기념하며 기획된 연중기획물 '기독교미술의 흐름' 1996년 초부터 정리한 회고록 '살며 바라며' 등 수많은 옥고들로 이어졌다.
1999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본보에 '아시아 기독교 미술인을 찾아서'를 연재하며 투병 중에서도 "원고가 마무리 되어 간다"며 희망을 전했던 고 이연호목사. 그러나 결국 두 번째 원고가 신문에 개재되고 몇일 후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일생동안 목회 현장을 떠나지 않고 교회와 이웃을 돌보면서도 황량한 기독교 미술에 무너질 수 없는 기초를 다져놓은 고 이연호목사. 그는 분명 한국교회와 기독교미술사에 지울 수 없는 선구자로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2009. 2. 11. 한국기독공보 / 최은숙 기자)
고 이연호목사의 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