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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조 운봉 성수[雲峰 性粹, 1889~1946]
운봉선사는 13세의 나이로 출가를 하여 경율론 삼장(經律論三藏)을 두루 섭렵하셨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진리의 본체에 한걸음도 다가서지 못함을 절감하고 참선을 시작하게 된다. 참선정진에 몰두하기 10여년,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일념이 현전(現前)하는 경계를 쉽게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세수35세 때 심기일전(心機一轉)하기위해 부처님전에 대 발원을 세워 100일 기도를 한 후 사생결단의 각오로 백양사 운문암 동안거 정진에 들어갔다. 밤낮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대분심(大憤心)이었던터라 자연히 화두 한생각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섣달 보름이 되어 우연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문 밖을 나서는데 그 순간 홀연히 마음 광명이 열려 가슴에 막혀있던 의심이 완전히 해소가 되었다.
운봉스님은 영남 안동사람으로, 성은 鄭씨이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태어날 때 흰 빛 서기(瑞氣)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고 한다.
이름을 성수(性粹)라 하였고 어린 나이에 향교에 들어가 학문을 익힘에 그 총명함이 남달랐다.
13세 살에 부친을 따라 은해사로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문득 발심을 하여 세속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김일하(金一荷)스님께 의지해 출가를 하였으며 15세에 머리를 깎고 계를 받은 다음 강원에 입학을 하여 경율론 삼장(經律論三藏)을 두루 섭렵한 후 선(禪)을 시작하였다..
스님은 어린 나이에 출가시어 20여 세에 경율론 삼장을 두루 배우셨지만, 그것으로는 진리의 본체(本體)에 한걸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것임을 통감하여, 참선에 몰두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운봉스님은 전국의 명산제찰(名山諸刹)을 두루 행각(行脚)하며 선지식을 참예(參詣)하고 공부에 혼신을 기울였다. 그렇게 참선정진에 전력하시기를 10여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두일념(話頭一念)이 현전(現前)되는 경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님의 세수 35세되던 1923년 심기일전(心機一轉)하기 위해 부처님전에 대발원(大發願)을 세워 100일 기도를 한 후, 사생결단(死生決斷)의 각오로 백양사 운문암에서 동안거 정진에 들어갔다.
밤낮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대분심(大憤心)이었던 터라 자연히 화두 한 생각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섣달 보름이 되어 우연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문 밖에 나서는데, 그 순간 홀연히 마음 광명이 열리면서 가슴에 막혀 있던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깊이 참구해오던 화두공안이 새벽녘 문 밖 차거운 공기 속에서 활연히 타파되었던 것이다. 이에 오도송을 읊으시기를,
出 門 驀 然 寒 鐵 骨
豁 然 消 却 胸 滯 物
霜 風 月 夜 客 散 後
彩 樓 獨 在 空 山 水
문을 열고 나서자 갑작스레 찬 기운이 뼈에 사무침에
가슴 속에 막혔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버렸네,
서릿바람 날리는 밤에 객들은 다 돌아갔는데
단청 누각은 홀로 섰고 빈 산에는 흐르는 물소리만 요란하더라.
그리고 깨친바를 점검받고자 당시 남방제일(南方第一)의 선지식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혜월(慧月)선사를 참예하여 여쭈었다. 그 당시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고 계신 혜월선사께서는 운봉스님을 처음 접하고는 운봉스님이 훌륭한 법기(法器)임을 간파하고 계셨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은 어느 곳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하고 계십니까?"
이에 혜월선사께서 양구(良久)하고 계시므로, 운봉스님이 냅다 한 대 치며 다시 여쭈었다.
"산 용이 어찌하여 죽은 물에 잠겨있습니까?"
"그럼 너는 어쩌겠느냐?"
운봉스님이 문득 불자(拂子)를 들어보이시니 혜월선사께서는,"아니다."라며 부정하셨다.
이에 운봉스님이 다시 응수(應酬)하시기를,
"스님, 기러기가 창문 앞을 날아간지 이미 오래입니다."
하자, 혜월선사께서는 크게 한바탕 웃으시며,
"내 너를 속일수가 없구나."하고 매우 흡족해 하셨다.
여기에서 혜월선사께서는 운봉스님을 인가하시고는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으로 부촉하여 전법게를 내리셨다.
付雲峰性粹
一體有爲法
本無眞實相
於相若無相
卽名爲見性
諸相本非相
無相亦無住
卽用如是理
此是見性人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라
일체 함이 있는 법은
본래로 진실한 상이 없는 것
모든 현상이 실상없는 줄을 알면
곧 그대로가 견성이니라
모든 현상은 본래로 상이 아닌 것
모양이 없고 또한 머무름도 없나니
이와 같은 이치를 바로 쓴다면
이것이 바로 견성한 사람이니라
이후 제방에서 납자를 제접하시며 선(禪)의 종지(宗旨)를 크게 펼치시니, 도법(道法)의 성황함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경숙국치 당시 운봉선사께서는 선(禪)의 진리를 깨달아 혜월선사께 인가를 받으신 후 행각(行脚)을 나섰다.
그 당시, 경기도 양주 망월사(望月寺)에서는 제방에서 발심(發心)한 수좌(首座)들이 용성(龍城)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30년 결사(結社)를 맺어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운봉선사께서 입승(立繩)을 한 철 보시는데, 하루는 용성선사께서 상당(上堂)하여 이러한 법문을 하셨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산승(山僧)을 보지 못하고, 역대(歷代)의 모든 조사(祖師)들도 산승을 보지 못하거늘,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어느 곳에서 산승을 보려는고?"
이때 운봉 선사께서 일어나 답하시기를, "유리 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琉璃瓮裏藏身]." 하니 용성선사께서는 아무 말없이 즉시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그 후 운봉선사께서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滿空)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공부하실 때였다. 하루는 만공선사께서 '양생고자화(孃生袴子話)'를 들어 법문하시기를, 옛날에 운거(雲居)도인께서 출세(出世)하여 회상(會上)을 여시니, 각처에서 운수납자(雲水衲子)와 단월(檀越)들이 모여들어 법문을 듣고 지도를 받았다.
당시에 운거도인께서 주(住)하시던 산 내(山內)에 있는 어느 암자에는 수십년 동안 혼자 정진해오던 한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암자승(庵子僧)은 운거도인께서 주산(住山)하여 여러 해 동안 법을 펴도 한 번 내려와서 인사를 한다거나 법문을 듣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운거도인께서 그 암자승을 점검해보고자 시자에게 이르셨다.
"네가 암자에 올라가서 암자승이 참선하고 앉아있거든, 동쪽에서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거동을 한 번 해보여라."
시자가 암자에 올라가 운거도인께서 시키는 대로 행하여 보였는데, 암자승은 좌선(坐禪)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자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산 중 큰절에는 운거도인께서 회상을 열어 여러 해 동안 대중을 위해 법(法)을 설하고 계시는데, 스님은 어찌하여 한 번도 내려오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암자승은, "설령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세 하셔 온갖 법문을 설(說)하시더라도 나는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시자가 내려와서 운거도인께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니 그 때가 마침 여름철인지라 운거도인께서는 잘 지은 삼베옷을 한 벌 싸주시면서 암자승에게 갖다주라고 하셨다. 시자가 다시 그 암자에 가서, "이것은 큰 절 조실스님께서 주시는 옷입니다."하며 옷을 전하자 암자승은, "부모에게 받은 옷만 해도 일생 입고 남는데 어찌 이것을 입을까보냐?" 하면서 옷을 내밀어 버렸다. 시자가 돌아가 또 사실대로 아뢰니 운거도인께서 다시 이르셨다.
"그러면 네가 걸음을 한 번 더해라. 가서 '부모에게 나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하고 물어보아라!"
시자가 또 다시 암자에 올라가서, "부모에게 나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하고 묻자, 암자승은 여기서 그만 말문이 막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운거도인께서는 그 사실을 전해들으시고는, "내 일찍이 그 놈을 의심했노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그 암자승이 앉은 상태에서 몸을 벗어버려 산 중(山中) 대중들이 화장을 했는데 이때 오색광명의 사리(舍利)가 나왔다. 이 일로 인하여 온 산중이 떠들썩했다.
만공스님께서 이러한 운거도인 회상의 법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암자승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기 전의 옷을 알았다면 어찌 답을 못하겠으며, 몰랐다면 죽은 뒤에 어떻게 오색사리가 나왔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셨다.
이에 운봉선사께서 일어나셔서, "여름에는 안동포를 입고 겨울에는 진주 목화옷을 입습니다." 라고 멋진 답을 하셨다.
그 후로는 제방 산중 선방에서 운봉선사를 조실로 서로 모시려고 하였다.
운봉선사께서 내원사(內院寺) 조실로 계시던 중 훗날의 법제자인 향곡스님을 만나셨다. 열반에 드시기 전에 향곡스님에게 전법게를 내리셔서 임제정맥을 부촉하셨다. 그 후 제자 향곡스님께서는 스승의 노환을 걱정하며 곧 입적하시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쭙기를, "큰스님, 언제 입적하시렵니까?"
"토끼 꼬리 빠지는 날 가련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임종일에 좌우에 제자들을 다 불러놓고, "오늘은 내가 가리라." 하셨는데, 이날이 바로 2월(卯月) 그믐날이었다.
향곡스님께서 묻기를,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운봉선사께서 답하시기를, "도를 도라고 하면 도(道)가 아님일세."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그러자 운봉선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육자배기를 읊으셨다.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묻어 오는구나
우장 삿갓을 두루고서
김을 매러가야겠다
향곡스님이 다시, "스님!" 하고 부르자,
"날 불러서 뭣하려고?"
"스님 법신이 무엇입니까?"
"부처와 조사가 지옥으로 거꾸러져 갔나니라."
그리고는 조용히 열반에 드셨다 .운봉선사께서는 스스로 말씀하신 대로 음력 2월 그믐날 열반에 드셨다. 그때가 세수 56세, 법랍 44세였다.
수행자가 출가 이후 세속에서의 삶을 마칠 때까지 오로지 일대사(一大事)에 전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갖은 유혹이나 곤궁함이 어디 세속의 일에만 해당되는 일인가.
일개 범부(凡夫)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 힘든 것이 세상사이니 준엄한 자기질서를 담보로 해야 하는 출가 수행자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차치하더라도 한 평생 수행 속에서 살다간 일만으로도 복 받을 만하다.
운봉(雲峰, 1889~1946)스님은 우리나라 근현대 격동기를 살다 간 인물이다.
당대의 선지식(善知識)으로 추앙받고, 세인들의 입에 회자된 소위 '큰스님'이었건만 무심히 본분사만을 지키다 수행자답게 사라진 것이다.
하기야 이런 스님들에게 '선지식'이니 하는 말은 부질없는 것이다.
허망한 이름에 목숨 걸고 산 것은 아니니 말이다.
스님은 1899년 12월 7일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셨다.
출가하기 전에는 향교(鄕校)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신 것으로 보아 입신양명(立身揚名)에 뜻을 두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12세 때 부친을 따라 은해사(銀海寺)로 불공을 드리러 간 것이 계기가 되어 세속에 미련을 버리고 발심(發心)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일하(一荷)스님을 스승으로 출가하여 계를 받고 강원에서 경전을 탐독하였다.
천진난만한 소년이 뚜렷한 출가의 이유도 없이 불문(佛門)에 귀의한 것은 이채롭다.
아울러 출가자로서의 행적도 남다른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스스로의 발심에 의한 출가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본분을 좀처럼 망각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고 싶고 그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알고 있다.
스님은 25세 되던 해부터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 만행(萬行)을 시작한다.
경전은 스님의 구도에 대한 열망을 채우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지리산 등 배울만한 스승이 있다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불법(佛法)을 위해 몸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데 무슨 일인들 못할까.
급기야 10년 뒤인 35세 때 백양사(白羊寺) 운문암(雲門庵)에서 눈을 떴다.
수행자는 깨달은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들 한다.
스님은 곧바로 당대의 '큰 도적' 혜월(慧月)스님을 찾아 인가를 받고 그의 법제자가 되었다.
운봉대종사행화비(雲峰大宗師行化碑)를 지은 성철(性徹)스님은 두 분 사이의 법거량을 "화살과 창끝이 서로 마주치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였다.
절박한 문제 앞에서는 생사가 부질없는데 스승과 제자는 찾아 무엇을 할 것인가 혜월스님은 운봉스님에게 기꺼이 방장실을 맡긴다.
깨달은 이에 대한 최고의 예우인 것이다.
이후 스님은 도봉산 망월사의 용성(龍城)스님과 덕숭산의 만공(滿空)스님을 친견하기도 하고, 통도사 • 내원사 • 범어사 • 도리사 등지에서 조실(祖室)을 맡아 후학(後學)을 제접하였다.
출가의 참뜻을 알고자 한다면 오로지 '이 무엇고?'를 참구할 지어다.
무엇을 일러 '이 무엇고?' 하는가.
허공도 설법과 청법(聽法)을 하지 못하고 사대(四大)도 설법과 청법을 하지 못하지만 오직 눈앞에 뚜렷하고, 외로이 밝지만 그 모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이것이 무엇인고?
이를 어느 곳에서나 어느 때에나 의심을 하되, 잠이 완전히 들었을 때 외에는 언제나 '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할 지어다.
법광(法光)이라는 스님이 망자의 천도재(薦度齋)에 스님을 초청하고자 쓴 편지에 부질없는 일임을 꾸짖고 정진하기를 바라는 답장의 일부분이다.
현존하는 스님의 법어집에는 여러 스님과 오고 간 글이 적지 않다.
안부를 묻는 글이나 법을 묻는 글이나 분별하지 않고 스님의 답은 한결 같다.
화두를 던져주고 게으름을 경책하는 글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1941년에는 산 속에 은거하며 수행을 계속하였는데, 말이 자연과 화합하여 자재하게 노닌 것이지 '재 묻은 머리에 흙 묻은 얼굴' 이었다고 하니 그 행색이 온전할 리 없었다.
출가한 자체만으로도 복을 지었고, 거기에다가 소위 '한 소식'을 들은 대접받는 큰스님의 몰골은 더더욱 아니었다.
세간의 기준으로는 도무지 이해 못할 일이다.
만년의 스님은 병을 얻어 제자 향곡(香谷)스님을 따라 동해안 월내포(月內浦) 묘관음사(妙觀音寺)에 주석하셨다.
입적하시기 3년 전의 일이었다.
"스님께서는 도를 깨치셨습니까?"
"깨달을 것이 있으면 벌써 도가 아니요, 도라고 하면 벌써 깨달음이 아니니라."
그리고는 문득 한 대 때리셨다.
향곡스님이 또 여쭈었다.
"적정삼매(寂靜三昧)도 변함이 있습니까?"
"누가 적정삼매라 하더냐?"
"열반의 길 끝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아야, 아야."
<운봉선사법어>에 기술된 운봉스님과 제자 향곡스님과의 선문답이다.
병으로 아파 누워있는 스승에게 제자의 질문은 맹렬하고 집요하다.
표현은 부드러울지 모르지만, 제자는 스승이 인연이 다 하기 전에 깨달음의 경지를 훔쳐내기 위해 스승을 추궁하고 있다.
스승 또한 제자의 그 간절한 마음을 알고 자신의 경지를 보여주기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이다.
이쯤되면 중국의 선사처럼 죽어가는 스승의 멱살을 잡고 한소리 일러달라고 으름장을 놓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세속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수행자들의 이 아름다운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사제 간의 정이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온 몸을 던져 가르치고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향곡이라고 하는 호랑이 한 마리가 태어났다.
1946년 2월 그믐날 제자 향곡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하셨다.
돌아가신 다음 어디로 가는지 묻는 제자의 질문에 "동쪽 마을 시주네 집에 물소가 되어 가리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고상한 열반송 대신 육자배기를 읊으셨다고 한다. 무슨 의미일까?
저 건너 갈마봉에
비가 묻어 오는구나
우장 삿갓을 두르고서
김을 매러 갈거나
#오경후 #한국불교선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