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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2021년 11월 14일 주일 설교
제목 : (Revival With COVID19)2.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걱정은?
본문 : 요한일서 2장 6절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새번역>
다시 제법 추워졌습니다. 지난 주일이 절기상으로 입동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소위 ‘수능추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쌀쌀함을 넘어서는 추위를 느낀 한 주였습니다. 건강하고 평안하게 보내셨습니까?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영육 간에 강건하시길 응원하면서 축복합니다. 그리고 수능을 맞이한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단계적 일상 회복과 함께 교회의 회복, 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Revival With COVID19’를 표어로 하여 두 번째 시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회복과 도약을 위해 두 번째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2장 6절입니다. 먼저 새번역으로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새번역>
오늘은 이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걱정은?’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에 귀 기울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때로 '걱정에서 걱정으로' 이어지는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나의 걱정거리가 해결되고 나면 다음 걱정거리를 만들어서 또 다시 걱정을 시작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시험이 하나 끝나자마자 다가올 다음 시험을 걱정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시험을 하나 끝냈으면 잠시 여유도 가지고, 쉬기도 해야 하는데 다시 긴장모드로 돌입하는 친구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청년입니다. 가끔은 걱정 하나 없이 평탄한 것이 내심 걱정거리인 분들도 만나곤 합니다. 너무 평안하다는 이유로 감사한 것이 아니라 불안해합니다. 이런 분들은 꼭 이런 표현을 자주 씁니다. '폭!풍!전!야! 뭔가 큰 일이 닥치기 전에 고요함의 시간일거라 생각하면서 걱정거리를 굳이 만들어 그 걱정거리를 걱정삼아 오늘을 살고, 내일을 또 걱정하고,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곤 합니다. 이쯤 보면 사람이란 존재는 '걱정의 삶'을 사는 게 맞는 것 같아 보이지 않으십니까?
실로 우리에게는 많은 걱정이 존재합니다. 가장 평범한 ‘건강’에 대한 걱정부터, 부모와 자녀, 친구 등의 ‘관계’에 대한 걱정, ‘나라’에 대한 걱정, ‘신종바이러스’에 대한 걱정, 사소하게는 오늘 저녁에 뭐먹을지 ‘메뉴’에 대한 것까지 걱정하고 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과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걱정을 하고 지내고 있을까요? 혹시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 동일한 걱정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완전히 다른 걱정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아니면 혹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하며 걱정하시는 분들은 없으신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걱정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특별한' 걱정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하셨던 그 '특별한' 걱정에 대해서 동의하고, 묵상하며 함께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특별한' 걱정을 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특별한' 걱정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확실하게 해야 할 것 하나는 걱정이라는 단어조차도 예수님에게는 특별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걱정의 의미로 무슨 일이 잘못될 거 같아 느끼는 불안에서 오는 걱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걱정은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긴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걱정은 바로 이런 간절한 소망이 담긴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랑할 것인가?"
시대는 점점 개인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는 개인주의라는 기차를 증기기관차에서 KTX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너무도 빠르게 개인주의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흐름일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사탄이 가장 최우선으로 내세우고 있는 21세기의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개인화' 일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홀로! 혼자서!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이 교과서가 되어 혼자 먹는 밥, 혼자 가는 여행, 혼자서 하는 무엇이든지, 혼자 사는 삶이 이제 더 이상 민망한 일이 아닌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많은 교회일수록 고민과 염려도 더욱 빠르게 많아지고 깊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 중에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교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단 청년들이 많은 교회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두가 바로 이 '개인주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 '개인주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왜 개인주의가 이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 시대를 만든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교회'에게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코로나보다도 먼저 증기기관차였던 개인주의를 새마을호 정도로 만든 요소가 있다면 바로 ‘교회가 보여준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청년들에게 보여준 모습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경험했던 모습, 교회 밖으로 비춰지는 모습, 그 모습들은 더 이상 예수님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커녕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 교회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데 까지 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만났던 수많은 각자 개성 가득한 ‘개인’들이 하나가 되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삭개오'와 같은 인물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삭개오들을 몰아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차갑고 냉정해야 할 곳은 '악' 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이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예수님처럼 그들을 만나러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도록, 언제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빈자리를 만들어주고, 나의 옆자리를 내어주고, 내 자리마저도 내어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수많은 이들이 우리보다 앞서 그렇게 했기에 그들은 하나 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인주의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그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상처받기 싫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관계에서 오는 상처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개인주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어느새 부터인가 관계에서 벗어나면 상처받지 않게 되는 편리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깊은 외로움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개인주의의 원인이 교회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바로 오늘 함께 본 본문과도 연관이 있는 '교회의 양면성'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교회는 교회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우리 자신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지금 교회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인들 역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양면성은 결코 다양함의 측면이 아닙니다. 동시에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의미합니다. 마치 한쪽은 악의 얼굴을 또 한쪽은 사랑의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악을 행하는 그런 양면성! 바로 교회와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6절은 이런 양면성을 가진 우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장 6절, 새번역>
"너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분명히 빛 가운데에서 살아야하는데, 왜 너희는 여전히 어둠에서 살고 있는거지? 너희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고, 진리를 행하고 있지 않은거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팩트폭행! 찔림이 너무 심해서 피가 날 정도로 아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비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만났으면서도 여전히 어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빛이 내게 임하여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어둠을 사랑합니다. 그 어둠이 바로 '양면성'을 자꾸만 만들어내서 공동체에게, 동역자에게, 세상에게,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게 하는 것입니다.
최근 여러분 곁에 있는 누군가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개인주의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주변에 마음을 열고, ‘우리’라는 공동체가 되기를 결정한 이유가 바로 빛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때문이었노라 고백하는 이를 만나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빙빙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런 빛과 진리의 삶을 살고 있었기에 누군가 당신을 보고 나도 당신과 같이 빛 가운데 밝은 삶을 살고 싶노라 고백하는 분이 곁에 있으십니까?
아니면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교회를 다니지 않는거야!", "도대체 당신이 어디를 봐서 그리스도인인거야?", "그리스도인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네!", "그리스도인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더라" 이런 이야기들에게 익숙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실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그래서 하나 된 공동체를 만드는 귀한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리가 되고, 통로가 되어야 할 우리가 무너져 있고, 막혀 있다면 이 땅에 개인주의는 더욱 팽배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결국 그리스도인들조차 그 개인주의에 익숙해져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선포하고 있는 구원은 결코 개인의 구원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구원을 설명합니다. 아마도 개인 구원이었다면 예수님은 이미 오셨을 것입니다. 이미 재림하셔서 모든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한 영혼이라도 더, 기다리시며 지금보다 더 많은, 더 나아가 모든 공동체의 구원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나만 구원 받으면 끝이 아니라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주고, 통로가 되어주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간절히 소망하기는 내가 구원받았으니 그걸로 됐다고 부디 이야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신앙이 아닙니다. 그 생각은 성경을 기초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힘들게 하고, 괴롭게 만든 적국이 너무도 싫어서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외면하고 도망까지 치게 됩니다. 가까스로 회개한 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모습을 끝내 보고 싶어 했던 요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니느웨를 품고 용서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 때 요나가 했던 말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말은 아닐까요?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스페인으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요나 4장 1~3절, 새번역>
요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하여 요나를 설득하십니다. 요나도 사랑하시고, 니느웨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요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큼 니느웨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서 4장 10~11절, 새번역>
하나님의 이 질문이 요나서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렇게 끝나는 요나서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며, 그 마음을 아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결코 이것만큼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그 개인을 사랑할 때, 그 개인이 공동체로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간절함 가득 담긴 고민을 위해 이런 질문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자처럼 살고 있는가?", "혹시나 어둠 속에 거하면서 거짓말을 하거나, 진리를 행하지 않는 삶은 아닐까?", "진짜 하나님과 사귀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 끝에서 만나게 되는 구절이 바로 요한1서 1장 7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요한일서 1장 7절, 새번역>
우리가 빛 가운데 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죄에서 사함 받아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된다’라는 부분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 <요한일서 1장 7절, 공동번역>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 때에 사귐이, 친교가 시작됩니다. 바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기록된 한 구절, 한 구절 주옥같은 모든 '사랑'에 대한 말씀들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드디어 다리가 되는 것입니다.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1John 1:7, NIV2011>
네. 그렇습니다. 세상은 각박해 질대로 각박해져서 더 이상 각박해질 수 없을 때까지 갈 것입니다. 개인주의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런 무관심증후군에 시달리는 '나' 중심의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 ‘교회 공동체의 변화’ 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이 땅의 희망인 이유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절망을 도래해 관계를 깨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희망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걱정을, 고민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 상처받을지도 모릅니다. 외면당할지도 모릅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돌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처럼 수많은 편견과 독설에 마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묵묵히 그 길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빛 되신 하나님으로 인해 진짜 '밝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이런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지금 여기부터, 저부터 그 다리가 되고, 통로가 되기 위해 걱정하고 고민하며 살아내고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함께 해 주십시오. 함께 질문해 주십시오. 함께 고민해 주십시오. 함께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 주십시오.
요즘 어떤 걱정을 하고 지내십니까? 돈 문제, 건강문제, 관계문제, 미래문제 등등 많은 문제들이 우리 눈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고민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 고민거리를, 걱정거리를 대하는 방법은 완전 다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시길 소망합니다. 그런 문제들 때문에 걱정하지 마시고,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걱정을, 고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기를 소망합니다. 개인과 개인을 잇는 공동체를 만드는 다리가 되어 주십시오. 개인과 개인의 소통을 만들어내 소통의 장을 만들 통로가 되어 주십시오. 그게 우리의 역할이며, 소명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 <마태복음 6장 33~34절, 새번역>
마지막으로 2017년 후반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쓰이는 신조어를 하나 소개 시켜 드리며 설교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00이 00했다."는 말입니다. 이 신조어는 축구 경기로부터 시작된 말입니다. 나무위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말의 유래는 해외축구 갤러리에서 레알 마드리드 팬들이 바르셀로나 팀의 심판매수설을 들어 축구 경기에서 바르셀로나에게 심판 판정이 유리하게 갈 때마다 "바르셀로나가 '바르셀로나'했네"라고 한 것이 그 시작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비판 및 비난, 모욕의 용도로, 인물, 사상, 종교, 국가 등 모든 고유명사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한 뒤, 그것이 반복될 때 비아냥조로 사용하게 됩니다. 즉,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아주 짧게 축약해 '네가 그럼 그렇지'나 '네가 어디 가겠냐?' 식으로 비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가 교회했네’ 라는 표현으로 자주 비꼬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이 말을 이용해서 다시금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교회했네!" 이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교회가 드러내야 할 정체성인 '사랑의 공동체'로서 회복되어, 모든 이들로부터 인정받는 말로 이 말이 사용되어지기를 기도해봅니다. "그래! 교회가 교회했네!", "그래,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네!", "역시! 교회가 있어야 해!", "역시 그 교회는 교회답단 말이야!", "저 교회는 교회답게 말씀에 따라 사는 것 같아", "역시 저 교회는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교회야!" 이렇게 사용되어지는 "교회가 교회했네"가 되기를 간절히 정말 간절하게 소망해 봅니다.
너무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 시작은 언제나 이 말씀을 전하는 저로부터, 이 설교를 들은 여러분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미리 감사인사와 축복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 땅에 희망이 되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은 빛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통해 이 땅의 개인주의가 KTX에서 레일바이크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당신을 통해 메마른 땅에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나고, 열매 맺는 귀한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Beacuse of You..! 다시 세상이 빛으로 가득찰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6절,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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