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나무 홈페이지에 길게 쓴 글이에요. 단식을 하는 동안에는 날마다 일지를 썼는데, 보름으로 단식을 풀고 그 뒤 열흘이 지났습니다. 그 열흘 이야기를 써 보았어요. 마음을 다시 세우면서 말이에요. 길기만 한 글이라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굵은 글씨 제목만 보다가 혹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거들랑 보세요. 파병을 하는 일은 우리 국민 모두를 살인자로 만드는 일, 파병반대는 살인자가 되어 살고 싶지 않다는 아주 절박한 바람입니다. 파 / 병 / 반 / 대
- 단식을 풀고 열흘
단식을 풀고 열흘. 훌쩍 지났다. 한 며칠은 아주 힘이 없었으며 동시에 그 며칠은 마음에 무엇 커다란 걸 잃은 것처럼 휘청였다. 나는 보일러가 얼까봐 라는 핑계를 주워대면서 죽변 집에 다녀왔고, 바다를 보았고, 갈매기들과 인사를 했다. 너희들, 여전히 잘 있구나. 나 왔어. 올라오고 싶지 않았다. 빌어먹을……. 안동에 갔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반겨주었다. 좋았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어머니 생일 모임이 있었고, 나는 죽을 먹고 있다.
1. 몸
단식을 풀고 돌아온 월요일 바로 검진을 받았다. 단식 들어가던 때부터 보아주시던 성수의원 우석균 선생님께 한 번 더 몸을 맡겼다. 이리 저리 검사. 그런데 피를 뽑는데 이상하게 안 나오는 거라. 바늘을 잘못 꽂은 것도 아닌데 피가 나오다가 말아. 다시 꽂아도 또, 주사기 하나를 못 채운다. 왜 이렇게 피가 안 나오나 몰라, 밥 안 먹어서 피가 모자라나봐. 그래서 그 팔뚝 주사 바늘만 몇 대를 꽂았다. 아직도 바늘 꽂은 자리 멍이 번져 팔뚝이 물고구마처럼 시퍼렇다.
몸은 괜찮다. 처음에야 어디 어디 어디 기능이 약해졌다고 하는데 그거야 밥을 그리 먹지 않았으니 안 좋은 게 오히려 당연한 거겠지. 심장 약이랑 위장 약이랑 몇 가지를 주었는데 그건 먹지 않았다. 단식에 대해 한의와 양의에서 하는 말이 다른데 아무래도 단식은 동양의학 쪽이 아닌가 해서이기 때문이었다. 한의에서는 아무 것도 먹지 말랬다.
처음 한 며칠 정말로 힘이 없었다. 보름이 되도록, 단식을 하고 있을 때는 힘이 없다는 걸 느낀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복식에 들어가자마자 그리 힘이 없다. 서 있는 것도, 걷는 것도, 어깨 위로 팔을 올리는 것도 그렇게 힘이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며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나는 단식자도 아닌데 농성장에 가서 가만 앉아 있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농성장에서 몸을 움직여 무얼 하기에는 도무지 힘이 없고,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나 모른 채 자꾸만 농성장 바깥으로 돌게 되었다. 가 있으면 괜스레 미안하고, 그렇다고 안 가 있으면 더 미안한 채로.
2. 죽변
죽변에 갔다. 집이 반갑다. 일 년이 넘었지만 실제로 산 건 몇 달 되지 않는 집, 그런데도 아주 오래된 내 집인 듯, 아주 오래 살던 마을인 것처럼 반가웠다. 편안했다. 오랫동안 불을 때지 않아 썰렁한 집이었지만, 다시 여기 저기 거미들이 내 대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집이었지만 얼른 불을 넣고 이불을 폈다. 뒷집 할머니에게 갔더니 어디 가서 뭔 고생을 하고 온다고 이렇게 얼굴에 가죽만 남겨가지고 왔느냐고 야단이다. 이제 어디 가지 말라고, 그만 다니라고. 할머니에게 이거 드세요, 꿀물이야. 아침마다 드시면 좋대요.
할머니가 내 대신 받아 놓은 우편물들 챙겨 집으로 들어왔다. 편지 한 통 한 통 뜯어 보는 기분 참 좋다. 한 달도 넘게 지난 것들, 궁금해하면서 나를 기다려했을 그것들, 벌써 시간이 훌쩍 시간이 지나버린 사연. 나 또는 편지가 서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어서 그러한 것처럼 재미있다.
실은 단식을 풀어 몸, 마음이 약해있는 것과 동시에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 동안 나에게 크게 나쁘게 해오던 이가 하나 있는데 이 때 들어 더 크게 잘못을 했다. 고질적인 소심증에다가 예민한 신경증을 가진 나는 마음이 아주 어지럽고 힘이 들었다. 어쩌지도 못하면서 속으로만 푹푹 끓고, 앓고,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했다. 가증스러운, 가증스러운! 하면서 내 마음 또한 오물을 가득 채우며 사람을 미워했다.
다행히 죽변에 가서 바다를 보았고, 바다 앞에서 잠시나마 싹 잊는 듯 했다. 그리고 다행히 책 몇 권을 아주 잘 읽었다. 농성장에 있는 동안 여러 선생님들이 읽으라고 주고 가신 책들에 일부러 책방에 들러 고른 책 몇 권까지. 올 한 해 읽지 못하던 책을 며칠 사이 아주 잘 읽었다. 그리고 나는 글이 쓰고 싶었다. 글이 쓰고 싶어, 글이 쓰고 싶어. 지금이라면 손이 느려 다 받아 적지 못해 그렇지, 이야기가 술술술 나오고 있는데. 너무 너무 글이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했다. 목요일에 축변에 내려갔으니 토요일에 일정에 맞추어 오자면, 게다가 안동에 들러 권정생 선생님을 뵙고 오자면 바로 바로 움직여야 했다. 그냥 토요일 일은 젖힐까? 대전에 사는 동훈이는 일부러 그 날 집회 때문에 학교를 또 빠지고 올라오기로 했는데, 그걸 내가 부탁해놓았는데 나만 안 가자니 마음에 걸렸다. 기차길옆 식구들, 아이들도 오게 될 텐데 그것도 그렇고. 해서 다음 날 바로 집에서 나왔다. 그래도 바다에 들러 두어 시간 퍼질러 앉아 모래를 조물락대었다. 갔다 올게, 이번에 올라가면 이제 아주 안 갈 거야. 서울 안 가.
3. 권정생 할아버지
근으로 달아 파는 사탕이 보였다. 박하 사탕 한 봉지, 유가랑 초코 유가 한 봉지, 과일맛 젤리 한 봉지, 계피맛 사탕 한 봉지, 양갱 한 봉지……. 조금씩 산다고 한 주먹 만큼씩만 담았는데도 다 하니까 만 오천원이 넘었다. 우와, 너무 많은가? 덜어낼까 어쩔까 하다가 그냥값을 다 치루고 나왔다. 할아버지만 먹나 뭐? 마을 할머니들 놀러 오면 인심쓰라고 하지 뭐, 주머니에도 넣고 있다가 마을 아이들 보면 인심쓰시라 하지 뭐.
사탕을 샀다. 맨 손 말고 뭐라도 챙겨 가야지 하는데 막상 사려고 보니 살 것이 없다. 할아버지가 무어 못을 사드리면 좋아할까, 그렇다고 고급 음식을 사다 드리면 좋아할까? 할아버지에게는 오히려 다 쓰레기 밖에는 안 될 것을. 돈들여 비싼 옷, 비씬 음식 사가지고 가 보아야 할아버지 마음 언짢게 하는 일밖에 안 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그냥 가기는 싫어서 사탕이라도 한 봉지 사야지 했는데 마침 근으로 달아 파는 사탕이 보였던 거다. 평생 몸이 그래 좋지 않으신데 사탕이라고 드시기나 할까, 에이 몰라. 안 드시면 다른 이들한테 인심이라도 쓰시라 하며 되지 뭘. 몰라, 몰라.
남안동 인터체인지에서 나가 바로 왼 편 조탑리로 들어가는 길. 이번이 세 번 째 할아버지를 만난다. 탑 언저리에 자동차를 세워 놓고 할아버지 댁으로 걸어들어가는데 기분이 좋다, 마음이 좋다. 실은 안동으로 가는 길 위에서도 다시 어지러운 마음, 괴롭히는 마음이 일어나 힘들었는데 탑 마을에 내려서는 그게 싹 가셨다. 아, 뭐라고 하지? 전화도 안 드리고 왔는데…… 걱정을 하면서도 할아버지 만날 생각에 히히, 웃음이 나왔다.
주머니에 넣어간 일회용 사진기. 글쎄 혹시 사진을 찍어도 좋은 자리가 되면 그 때 가서 사진기가 없어 아쉬워하는 일이 있을까봐 하나 사서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할아버지 집 앞에 섰는데, 어? 못 보던 명패가 있네? 종이를 말아 할아버지가 손수 쓴 이름 ‘권정생’. 글씨도 참 예쁘다. 사진기를 꺼내어 명패를 찰칵, 이왕 찍을 거면 할아버지 사는 집을 이쪽 저쪽에서 찍어야지, 뒤로 한 걸음 찰칵, 저 쪽으로 몇 걸음 찰칵, 변소 앞에서도 찰칵. 나는 꼭 하면 안 되는 걸 몰래 하는 아이처럼 숨 죽이며 찰칵찰칵이었다.
그러고도 선뜻 선생니임~ 하고 부르거나 할아버지이~ 하고 부르지 못했다. 겁이 났다. 왜 왔느냐고 하시면 어떻게 하지? 그냥 돌아가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지? 오늘따라 몸이 더 안 좋은 날이어서 정말로 내가 할아버지를 괴롭히게 하는 거면 어떻게 하나……. 걱정한다고 뭐 어쩔 수 있나,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문을 열었지. 한 번에 잘 안 열려, 그래도 크게 소리 안 내고 열려고 조심조심 당겼다 놨다 해가며 여는데 할아버지는 오히려 그 소리에 기척을 느꼈나봐. 나는 얼굴을 쑥 들이밀고, 저요, 기범이요 했다. 할아버지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하더니 이리 들어와요, 들어와요 한다. 전에도 마루 (마루래봤자 두 사람 앉으려면 서로 무릎이 닿게 앉아야 하지만) 까지는 들어가본 적이 있다. 마루에 올라섰는데 어서 방으로 들어오라신다. 헤에, 방에? 정말요? 방에 들어가도 돼요? 방에 들어갔다. 딱 할아버지 누우면 빈틈이 남지 않는 방. 여느 1인용 고시원도 그 보다는 넓을 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딱 가로 50센티미터 정도에 세로 1미터 70센티미터 쯤. 그 방에 할아버지도 일어나 앉고, 나도 곁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아, 좋아라. 좋아라. 할아버지가 그냥 가라고 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방에 들어오라 해 줘서 너무 좋아요.
할아버지하고 오래 놀았다. 그리고 내내 혼이 났다. 헤헤. 혼이 났대봤자 선생님은 하나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한 건 없다. 오히려 그 맑디 맑은 얼굴로 나직이, 조용 조용 말씀을 하셨을 뿐, 내가 스스로 계속 찔려들고 부끄러워 혼이 나고 있다는 느낌인 거지.
전쟁 반대한다는 사람들, 거 모인 사람들 봐도 죄 입술에 빨강 거 칠하고…… 환경 운동 한다는 사람들 다들 자가용 타고 다니고, 그래서 무슨 전쟁을 반대하고 환경을 살린다고 해요…… 세상에 전쟁이 왜 일나는데, 그 자동차에 기름 채워 넣으려고 전쟁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무슨 전쟁을……. 나는 계속 고백하고 자수하고 그랬어요. 저요, 저도 오늘 여기 승용차 타고 왔어요, 저 사실은 손빨래 하나도 않거든요, 다 세탁기로 빨아요. (할아버지는 평생을 그리 힘들게 살아오셨지만 옷가지를 모두 손수 손빨래 했다는 말씀에.)
글쓰기 회보 11월호, 죽변 집에 가서야 보았는데 표지 안쪽 할아버지가 쓴 글이 떠올랐다. 전쟁을 누구보다 아파하는 할아버지는 이 세상 그치지 않는 전쟁을 들어 이야기하면서 과연 무엇이 전쟁을 계속 있게 하는지 고민해보자 하며 글을 맺었다. 할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엇이 전쟁이 일어나게 하는가, 과연 누구 누구를 비롯한 전쟁광, 군수업자들 뿐인가. 입으로는 전쟁을 반대하고 생각으로 평화를 사랑하지만 내 삶이, 내 생활이 전쟁을 낳게 하는 삶, 생활은 아닌가? 나는 옷을 더 사 입었고, 고기를 더 먹었고, 가지 않아도 좋을 곳을 다녔다. 잠깐 눈이 즐겁자고, 잠깐 손이 편하자고, 잠깐 쓸모가 있다고 해서 곧 쓰레기가 되고말 것들을 사고 버렸다.
할아버지는 말씀을 많이 했다. 손님이 찾아가 말씀을 조금만 해도 기운을 빼앗겨 사흘은 앓아눕는다는 할아버지인데 이 날은 나중에 걱정이 들 정도로 말씀을 많이 했다. 나는 할아버지 앞에서 계속 부끄러웠고, 그렇게 부끄럽고 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주 가볍고 좋았다. 편안했다. 할아버지랑 있어서 좋아요.
저녁 다섯 시 오분 쯤 되었나? 저기요, 저, 이제 그만 일어날게요 해야 하는 거 아는데, 그래도 할아버지랑 같이 더 있고 싶어서 그 말을 못하고 있어요. 저, 이렇게 다녀가면 선생님 많이 아프실 거라는 거 다 알면서 ……. 띄엄띄엄 솔직하게 고백하니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럼, 다섯 시 삼십 분에 일어나세요. 나는 입이 귀에 걸리면서 헤헤, 정말요? 하고 좋아했다.
나는 방 안에 웃풍이 있는 것 같아서 할아버지한테 보일러를 더 세게 트시라고 했다. 혼날 줄 알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내가 올릴게요 하고는 내가 스위치를 돌려 올렸다. 역시 혼났다. 이래서 이라크에 전쟁이 나고 그런다니까요. 히이잉. 나는 내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면서 이거 새거는 아니고요, 제가 하던 건데…… 하고 말을 꺼내니까 선생님은 방바닥에 있던 목도리 하나를 얼른 목에 매시며 말했다. 아, 나도 있어요. 그리고 나도 쓰던 건 안 받아. 이렇게 있잖아요. 내가 목도리를 감아드리려 한다는 걸 눈치 채시고는 그런 거였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움직임이 빠른 건 처음 보았다. 얼른 목도리를 두르고는 손을 가랑이 춤에 넣으시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습던지. 해해해. 그거요, 나 준다고 주고 가면 나는 또 다른 사람 누구한테 주나 그거 찾아야 하니까 그냥 하고 가세요. 오늘도 누가 주고 간 게 있어서 그거 우체부한테 줬어요.
다섯 시 반이 되어 할아버지네 집에서 나왔다. 나는 펄쩍펄쩍 뛰면서, 겅중겅중 뛰면서 골목을 뛰어 나왔다. 와아아아, 소리도 질렀다. 너무 크게는 말고.
4. 외방리 석고개
안동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오다가 호법분기점에서 서울로 꺾지 않고 바로 춘천으로 넘어갔다. 그리고는 그 길로 가평, 청평, 마석으로 해서 아, 외방리 석고개엘 갔다. 춘천을 넘으면서 가평, 청평을 지나면서 거기에 사는 아저씨들을 생각했다.
갑식이 형이 전화를 받지 않아 야근인가 했는데 집에 불이 켜 있다. 똑똑똑, 혀엉! 하는데 왠 아주머니가 나온다. 새로 이사를 왔다. 아, 드디어 갑식이 형 살던 방도 다른 식구가 들어와 사는구나. 그리고 그 옆 나 살던 방.
갑식이 형은 공장 기숙사로 들어갔다고 한다. 갑식이 형은 야근 중이었고, 열 달 동안 마을을 떴다던 용휘 형은 다시 돌아와 일을 하고 있었다. 톱밥을 뒤집어 쓴 갑식이 형과 형 기숙사 방에 들어갔다. 석고개 주소로 계속 들어오던 우편물들 형이 모아둔 것들을 챙겨 주었다. 형 방 책상에는 내가 죽변으로 이사와 보낸 편지가 우리 아래에 끼워 있었다. 아니, 그것 말고 거기 석고개에 다녀간 많은 선생님들, 이 편지를 보낼 때에도 늘 그렇게 끼워놓던 것처럼 말이다.
그 평화를 박차고 나가 나는 무슨 평화를 말하고 있나 모르겠다.
5. 대전의 동훈이네, 인천의 작은학교 식구들
토요일, 대학로 파병반대 집회. 대전에서 동훈이와 nan느티나무 님이 올라왔고, 인천에서 기차길옆 작은학교 식구들이 왔다. 국제반전공동행동에서 준비한 집회였는데 우리 소망의 나무에도 와서 이야기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그 자리에 우리는 우리 목소리, 우리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게 준비하고 싶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아이들의 목소리, 우리 보통 사람들의 작은 소망. 그 동안 소망의 나무에 함께 한 작은 목소리, 작은 소망이야 얼마나 많은가? 그 가운데 지난 번 대전에서 올라온 동훈이에게 안부 전화가 온 길에 동훈이에게 한 번 더 부탁했다. 동훈아, 토요일에 서울에서 사람들 많이 모여서 큰 자리에서 파병반대 이야기하는데 거기에서 동훈이도 발표 한 번 할래?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 봄부터 누구보다 열심히 전쟁 반대, 평화 사랑을 이야기해온 기차길옆 아이들, 기차길옆 아이들에게 그 동안 함께 해 온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부르면 좋겠다고 했다.
막상 집회 시간이 되어 속이 상했다. 집회를 준비하는 이들은 예정한 집회 시간에 견줘 발언자가 너무 많다면서 아주 짧게 하고 내려와 달라고 다짐, 다짐을 주었다는 거다. 내가 직접 들은 얘기가 아니었는데 전해 듣기만 해도 화가 났다. 아이가 학교에 결석을 내고 대전에서 올라오고, 스물이 넘는 공동체 식구들이 두어 시간 전철을 타고 일부러 오고 있는데 이제 와서 짧게, 짧게 만을 강조하는 거였다. 기차길옆 아이들은 주말마다 올라오고 있었고, 이번 주 토요일은 예정에도 없던 거인데다가 중학교 아이들은 시험이 있다 하는데도 무리해서 올라오는 것인데 말이다. 분명히 우리는 무대에서 우리 시간을 갖게 되면 누가 올라가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할 거라고까지 다 이야기를 해 놓고 있었다. 시간이 넉넉지 못해, 빨리 빨리 마쳐 달라는 진행자들의 요구 때문에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나 준비한 노래도 다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지하철에 내리자마자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무대에 올라갔다 내려오느라 섭섭한 마음을 느낄 새도 없어 보였지만,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6. 상상
집회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생각보다’ 말이다. 그런 식, 패배적인 마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지만 그래도 힘이 너무 모자란다는 생각이었다. 이래서 어디 저들이 눈썹 하나 깜짝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할 수는 없을까. 철도와 지하철을 세우고, 고속도로를 막고, 공장의 기계들을 멈추면서 모두 나와 파병을 하지 말라고,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이웃 나라 사람들 죽이는 일에 쓰지 말라고 한 목소리로 외치게 될 수는 없을까? 학생들은 동맹휴업으로 등교를 거부하고, 선생님들 또한 학생들과 함께 나서고 그렇게 될 수는 없을까? 전쟁을 벌이러 가지 말라고, 내 형제, 아들 딸을 침략군으로 보내지 말라고,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반대하는데 누구 마음대로 보내는 거냐고…… 그리 될 수는 없을까? 각계각층의 시민사회 단체들이, 학생회 조합, 노동자 조합, 농민 조합이 다 한 뜻으로 나서 우리 군이 침략 전쟁에 나서는 일에 반대하게 된다면 막을 수 있는 것 아닐까? 엉뚱한, 참으로 엉뚱한 상상일 뿐일까? ‘그것’만큼은 안 되는 것, 그러한 일에 총궐기, 총파업으로 맞서는 그러한 전통이 이 땅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지 자신이 속한 조합의 문제, 자신이 관계한 부문의 문제, 지역의 문제 뿐 아니라 안 되는 일에는 다 같이 손을 잡아 힘을 모으는 전통, 연대의 그것, 약한 자들의 연대. 아, 그것은 멀기만 한 그런 것인가?
지금 이 파병이 일본에 땅을 빼앗겼을 때 강제 징집 되어 대동아 전쟁터로 끌려 나가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 때도 명분은 국익이었다, 조선이 잘 살기 위해, 조선과 본토 일본의 번영을 위한 전쟁이라 했다. 지금 파병 군인에 자원하는 병사들이 있듯, 그 때에도 정말로 황국신민의 병사가 되는 것을 영광되게 생각하며 자원하던 병사들이 있었다. 지금 국익 때문이라며, 경제 때문이라며 어쩔 수 없이 찬성하는 사람들이 반 정도 있다면 그 때에도 그런 식의 논리로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있었다. 그 때 강제 징집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그 때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려고 선동해대던 친일 지식인, 문인들의 행위를 민족을 팔아버리는 짓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지금 눈앞에서 우리 동생들이 총과 포를 가지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터로 또 다시 끌려가는 처지이다. 사람들은 간사하여 지금 또다시 한미 동맹, 경제, 국익 어쩌고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파병에 찬성한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 병사들 가운데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나름으로 용기 있는 행위인 거라, 애국이라 여기며 자원을 하기도 한다. 일제의 군복을 입고 대동아 전쟁에 나가던 그 때에도 그랬듯. 그러나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 정부는 미국의 요청에 의해 침략전쟁터로 우리 젊은이들을 보내려 하는 것이다! 침략전쟁터로, 우리 군인들을!
이 원죄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을 갈 것이다. 우리 발목을 잡고, 우리를 떳떳치 못하게 할 것이다. 내가 낸 세금으로 바꾼 총탄이 그이들 가슴을 겨누었다. 그리고 쏘게 된다. 죽이게 된다. 가면 죽이기 마련이다. 죽인다. 나와 똑같이 약하고 힘없는 그곳 백성, 동무들을…… 그런데도 지금 입을 다물고 있어도 되는가, 그저 가는구나 하고 가슴만 치고 있어도 되는가, 우리는 어차피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마음만 아파할 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곧, 침략자 미국은 곧 미사일 발사대를 한반도 쪽으로 돌려 놓을 것이다.
당장 지하철과 철도를 세워라, 공장을 멈추게 하라. 교문을 닫고 교사와 학생들도 손을 잡고 나와야 한다. 손을 잡고 청와대 앞으로, 국회 앞으로. 10만 명, 100만 명이 그 앞에서 손에 손을 잡고 인간 띠를 이어야 한다. 한국군 파병은 우리 국민을 모두 살인자로 만드는 일이다. 당신, 살인자로 살아갈 텐가?
7. 어머니 생일
일요일, 어머니 생일. 형네 식구가 준비한 점심식사 자리에 갔다. 나는 어머니가 쑤어준 죽을 보온병에 담아가지고 갔다. 외가 쪽 친척들이 모여 함께 밥을 먹었다. 나는 한 쪽 구석에서 죽을 떠먹었다. 엄마, 미안해요.
8. 동포 아저씨
그 날, 일요일. 어머니를 모시고 약속한 밥집으로 나가려 하는데 동포 아저씨에게 전화가 왔다. 오전 열 시 쯤. 어디야? 아직 안 나왔어? / 선생님 어딘데요? / 나 여기 왔지. 혜화역 4번 앞에 / 에엑?
선생님, 게시판에 일요일 가운데 한 날 하루 단식에 참여하겠다고 쓴 게 기억났다. 나는 그저 댁에서 세끼를 굶으며 참여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렇게 농성장에 나오리라고까지 생각지 못했다. 선생님은 아홉 시 반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요즘 농성장으로 천막을 치러 나가는 시간은 열한 시가 넘어서인데.
야학 숙소에서 자는 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 이야기를 전했다. 어떻게 하나, 그래도 어머니하고 생일 식사 모임에는 가야 하는데. 친척들과 점심 모임을 하고, 어른들을 모셔다 드리고, 또 이런 저런 일로 지체하다가 저녁 여섯 시 쯤이나 되어서 농성장으로 나갔다. 동포 아저씨에게는 부러 미안해서 전화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만 들어갔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천막 안에 꾸부정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가슴에는 하루 단식자 표찰을 달고. 미안한 마음도 저 만치, 반가웠다. 얼른 들어가 선생님 곁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엊그제 안동 할아버지한테 다녀온 이야기, 요즘 지내는 이야기, 요사이 읽은 책 이야기.
그리고 동포 아저씨는 여덟 시, 천막을 다 거두고, 노래 공연까지 다 끝난 뒤, 그리고 트럭에 짐을 다 쌀 때까지 그 자리를 함께 지켰다. 선생님은 조각달 선생님이 그린 그림 피켓을 들었고, 나는 아기들 손바닥 그림이 있는 피켓을 들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 피켓을 들고 오돌오돌 떨면서 피켓 뒤로 떠들었다. 킥킥, 햇햇.
이 아저씨가 백인이어굶기 하루 단식자로는 아마 최연장자일 거다. 아침에 천막을 치기 전부터 나와 천막을 거둘 때까지, 심심하기는 얼마나 심심했을까. 바쁘기로 치면 한국에서 몇 번째 갈 사람인 걸로 아는데, 가장 성실하게 농성장 이어굶기를 하고 들어가시네. 만나서 술 한 잔 못하고 가려니 왜 그리 아숩고 싱거운지.
9. 일요일, 전체회의
속보로 후세인이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고, 오전에 대통령과 4당 대표 회담의 결과를 들었다. 그리고 대충 앞으로의 정국 일정에 대해 공유했다. 주마다 있는 국무회의, 이번 주 화요일에는 아무래도 각 부처 예산안에 대해 올리지 않겠느냐, 파병에 대해서는 벌써 정당들이 뜻을 모아 놓았으니 그리 서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다음 주 화요일(22일) 쯤 올리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그 때까지 소망의 나무 천막 농성을 계속 가자, 4당 당사 앞으로 가서 1인 시위를 계속 하자, 그러다가 비상국민행동의 국회 앞 농성 일정이 나오면 우리도 그리 결합하자…… 따위의 예측과 계획이 오갔다.
논의는 길지 않았다. 우리의 힘, 외부 조건, 앞으로 정국에 대한 전망 따위를 고려해 앞으로 일정을 정리했다.
1. 우리, 소망의 나무 천막 농성은 이번 주 토요일까지 간다.
2. 토요일 마지막 날에서 나름으로 그 동안 소망의 나무를 정리하는 문화제를 준비해서 치룬다.
3. 그리고 국무회의에서 논의를 거쳐 국회에 안이 상정되면, 그 일정이 공개되면 우리는 그 때부터 표결이 있을 때까지 국회 앞에 가서 밤샘단식농성에 들어간다. (안이 올라가고 표결까지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것이다. 당일 통과시킬 수도 있고, 길어야 2-3일.)
4. 이번 주 토요일(20일)까지는 지금 해오던 것처럼 이어굶기를 해 나가고, 20일 뒤로 이어굶기를 하려고 준비하는 분들에게는 말씀을 드리고 국회에 안이 올라가서 밤샘단식농성을 할 때 함께 해 달라고 말씀을 드리기로 한다 .
5. 토요일(20일) 문화제는 그 동안 한 달 (11월 22일 - 12월 20일)동안 자발적인 시민들의 힘으로 벌여온 우리 활동에 대해, 이 활동을 함께 가꾸어온 사람들이 그 뜻을 되짚고, 성과를 함께 나누면서 스스로 기운을 얻을 수 있는 자리로 가꾼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국회 비준 안이 올라가는 날을 ‘소망나무 집중 행동의 날’이라 정하고 국회 앞으로 가 밤샘 농성할 것을 함께 약속하자고 부탁한다.
6. 국회 앞으로 우리의 소망나무를 가지고 간다. 의사당으로 의원들이 들어가는 그 길목에 파병반대 소망을 이어쓴 사람들의 이름을 모두 모아 바닥에 붙여 놓는다. 우리 이름을 밟고 들어가라고, 우리 이름을 짓밟고 들어가 파병 안을 통과시켜보라고.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모여 마지막으로 밥을 굶으면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이들이 무슨 짓거리를 벌이고 있는지 확인한다. 그이들, 우리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 모두를 살인자로 만드는 데에 표를 던지고 있는 역사의 순간을.
10. 미안해요.
힘이 없었습니다.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까지 힘 빠지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미안해요. 우선 몸에 힘이 없었고, 그리 몸에 힘이 없으니 고민이나 반성 따위도 잘 아 되었습니다. 거기에 혼자 힘든 게 있었을 뿐이에요.
이제 기운을 내려고 합니다. 오늘은 꼬바리 선생님, 주희 선생님이 이어굶기를 하러 농성장에 나오신다 했는데 어서 나가봐야지요. 단식을 풀고 열흘이 지났습니다. 파병반대는 살인자가 되어 살고 싶지 않다는, 아주 절박한 애원입니다. 파 / 병 / 반 /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