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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책이란 무엇인가. 이 매체는 무척 오래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것이다. 세계 어딜 가도 찾아볼 수 있는 전 지구적
장악력을 자랑한다. 누구나 집에 한 권쯤 가지고 있지만, 집 안의 모든 책을 다 읽은 사람은 드물다. 누군가는 책의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아직 현대인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탈중독 지대, 사색의 공간이다.(*김목인 씨의 노래 「음악가,
음악가란 직업은 무엇인가」 차용.)
문학과지성사 40주년을 맞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깃거리를 고민하던 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한 권쯤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는 책, 혹은 지금 손에 잡고 있는 책, 바로 이런 독자들의 책 읽기가 출판사의 진짜 역사가 아닐까.
그리고 이 개별의 사연들이 모여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우리가 진짜 가야 할 길은 아닐까.
고심 끝에 특별한 기획을 준비했다. 바로 「문지, 단 한 권의 책」. 문학과지성사 40주년을 기념하는 이 공간에서 사회·문화·
예술·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명사분들의 독서 경험을 인터뷰와 서평을 통해 공유하고, 많은 이들이
책의 죽음을 말하는 시대, 우리에게 책은 무엇이고 왜 필요한 것인지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인터뷰 ‧ 정리 편집부
앞으로 「문지, 단 한 권의 책」의 인터뷰어로 활동하며 열 명의 명사들을 만나 그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이끌어내 줄
두 사람, 싱어송라이터 김목인, 문학평론가 김나영 씨를 만났다. 잠깐의 어색함이 무색하게, 시종일관 편안하고
넉넉한 미소를 띤 채 눈을 반짝이며 책에 관한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놓았다.
편집부(이하 ‘편’): 가벼운 질문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소개해주시겠어요?
김목인(이하 ‘목’): 『복종』이라는 미셸 우엘벡의 최근작을 읽었어요.
김나영(이하 ‘나’): 아니 이건 뭔가 준비하신 듯한 답변이잖아요. (웃음) 목인 씨는 평소에 외국 소설을 많이 읽으시나요?
목: 다른 때 같으면 생각이 금방 안 날 텐데 마침 읽은 지 며칠 안 돼서요. 서점에 가서 그때그때 눈에 들어오는 걸 읽는 편인데,
이 작가의 전작들을 읽기도 했고, 약간 논쟁적인 작품이라 궁금해서 읽어봤어요.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충 대답하면 안 되겠죠?
(웃음)
편: 나영 씨는 요새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나: 네, 이성복 시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어서 저는 요즘 이성복의 시집들을 읽고 있어요. 여러 번 반복해서 읽게 되는데,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을 읽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정리가 잘 안 되고요, 저로서는 큰일이죠. (웃음)
편: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책, 다시 말해 어린 시절에 읽은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면? 내가 처음 읽은
책이라고 말할 만한 책은 뭐가 있을까요?
목: 글쎄요, 진짜 최초의 책은 잘 기억이 안 나고, 『꼬마 바이킹』이라고 ‘에이브(ABE) 전집’인가? 그 안에 있었는데, 부모님이
사주셔서 읽었고요, 그중에 약간 코믹하기도 하고 그림도 들어 있던 작품이라 생각이 나요. 진짜 바이킹 얘기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바이킹으로 나오는 『아스테릭스』 같은 느낌의 책이었던 것 같아요.
나: 이 질문을 듣고 바로 여덟 살 무렵에 읽은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가 떠올랐어요. 학급문고에 꽂혀 있던 책이었는데, 인기가
많아서 표지가 너덜너덜했죠. 내용보다는 그런 점이 더 분명하게 기억이 나네요. 그보다 더 어릴 때 봤던 책에 대한 기억은 전집의
형태예요. 어릴 때는 보통 엄마가 사주는 책을 읽잖아요. 저희 부모님은 위인전과 백과사전 전집을 일찍부터 사주셨어요. 백과사전
속의 서사화되지 않은 정보와 사진의 나열이 어린 시절에는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ㄱ” 하면 기역으로 시작하는 ‘가구’‘가루’ 이런
어휘의 사전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용도를 비롯한 설명이 이미지와 함께 줄줄이 이어지는 게 재밌었죠. 위인전을 보면서는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학습이 되었던 것 같고요. 제가 본 건 시대나 국가 구별 없이 인물에 따라 번호가 매겨져 있었고 그 순서대로 책장에
꽂아두었었는데, 저는 그저 그 책등에 적힌 이름들을 보는 걸 좋아했어요. 그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나 국가와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 마을을 그렸던 것 같아요. 역사라는 인식이 없을 때이기도 했지만요.
편: 이순신 옆집에 헬렌 켈러 살고 그렇게 말이죠. (웃음)
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렇게 위인전이랑 백과사전을 봤던 경험이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더라고요. 어렸을 때의 독서
체험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경우에는 위인전으로 공포감 같은 걸 습득한 것 같아요. 유관순이 몸이 꽉 끼일
정도로 좁고 사방에 바늘이 난 곳에서 고문당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신체적 고통에 대한 공감보다 그것을 능가하는 정신적
고통 같은 것을 제가 저절로 짐작하게 되어서 무서웠어요.
목: 저는 잔 다르크.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항상 그렇게 나오잖아요. (웃음)
나: 어릴 때 읽은 ‘세계동화전집’ 중에 안데르센 동화도 있었어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는데, 가족에게 버림받고
어떤 아주머니에게 얹혀사는 아이가 주인공이었던 이야기예요. 그 아주머니는 치통이 너무 심해서 이를 다 뽑고 틀니를 했는데요,
아주머니가 아이를 예뻐하며 그 표시로 사탕을 주는데, 아이는 그것을 받아먹고 나중에는 극심한 치통을 겪어요. 어릴 때는
그 이야기가 무작정 쓸쓸하고 아프게 느껴졌는데, 커서는 그게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사랑과 통증에 관해, 저마다의 고통과 고독을
겪는 인간에 관해 생각하게 될 때마다요.
편: 본인이 책을 선택하는 경로, 혹은 책 읽는 스타일은? 이를테면 추천을 받는다거나 서점에 가서 맨 처음 눈에 띄는
걸 산다거나, 앞이랑 뒤를 먼저 읽는다거나,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은데요.
목: 습성 같은 거요? 너무 동물 같은가. (웃음) 전 신간 소개 같은 건 잘 안 보는 편이고, 옷 사는 거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심심할 때마다 서점에 가서 한 바퀴 돌면 뭐가 새로 나왔는지 알게 되잖아요. 고르는 기준은 정말 그날 기분에 따라서?
그리고 책을 사면 산 날짜를 적어놓는 편이에요. 어디에서 샀는지도 적어놓고. 이 책(『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날짜만
써놓았네요(하지만 맨 뒷장의 가격표에 ‘충주 문학사’라는 서점명이 붙어 있었다). 읽을 때는 보통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편인데,
무조건 앞에서부터 뒤로 읽으며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를 해놔요. 안 그러면 읽은 데 또 읽고 그러거든요. 책을 동시에 읽으면
단점이, 가끔 읽고 있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지방 갈 때 평소와 다른 가방에 담아 갔다가 짐을 안 풀면 종종
그렇게 되더라고요. (웃음) 또 표지 보고 고르는 경우도 많은 것 같고, 호기심 때문에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나: 저는 동시에 여러 권을 보는 건 잘 못하고요, 한 권을 집어 들면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그것만 읽어요. 그걸 다 읽어야 다른 책
읽기를 시작할 수 있고요. 요즘은 거의 직접적인 필요에 의해서 책을 선택하고 구입하는 편이지만, 학창 시절에는 책을 좋아하는
친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책을 엄청 많이 읽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좋다고 하는 책은 꼭 사서 읽었어요. 읽고 같이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편: 김목인 씨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김나영 씨는 『입 속의 검은 잎』을 가장 인상 깊은 문지의 책으로
꼽아주셨어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읽는,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도 접한 책들인데 딱 집어 그 책을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목: 사실 문지에서 어떤 책들이 나왔는지 잘 몰랐는데, 목록을 보니 ‘대산세계문학총서’ 중에 재미있게 읽은 책들이 좀
있더라고요. 『발칸의 전설』 같은 책이요. 그런데 막상 할 말은 많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문지스펙트럼’ 시리즈를 보고,
예전에 1999년에서 2001년도 사이에 이 책들을 본 기억이 나더라고요. 서점에 가면 살까 말까 항상 만져보던 시리즈 중에
하나였던 것 같고, 듀나가 거기 나왔던 게 그때는 새로웠던 것 같아요. 그 전에 영화 잡지에서 많이 보던 분이었기 때문에
이런 분도 이런 데서 책을 내시는구나 신기하기도 했구요. 그래서 구입했던 ‘문지스펙트럼’ 시리즈 중에 하나를 골랐어요.
또 제가 요즘 새로 노래를 쓰는 과정에서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고 할까요? 주인공이 한숨 쉬고서 집에서 나와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그런 이야기잖아요. 저도 그런 노래를 쓰고 있어서 이걸 한번 골라봤습니다.
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구보씨가 ‘경성의 만보계’랄까? 늘 외부자적인 시선으로 주변부를 배회하는
느낌인데, 목인 씨 분위기와 약간 겹치는 부분이 있어요. 노랫말도 그렇고,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목: 저랑 비슷한 점이 있기도 해요. 전 노래를 만들 때 어떤 류의 캐릭터를 빌려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몇 년 전 같으면
이런 ‘구보’ 같은 캐릭터가 안 어울릴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한심하고 답답한 느낌이 들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최근 몇 년간의 미묘한 것들을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캐릭터랄까, 그렇게 다가오더라고요. 사실 전 이 책에서 「방란장
주인」이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아서 이 책을 고르기도 했어요. 작품이 한 문장으로 씌어져 있었는데, 처음에 봤을 땐 신기
했죠. 첫머리를 읽고서 이게 한 문장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총 몇 장인지 세어보게 되더라고요. 이 사람이 끝까지 이렇게
썼을 텐데 몇 장을 썼을까, 하면서.
나: 저도 「방란장 주인」에서 단 하나뿐인 마침표가 마침내 딱 찍힐 때 전율을 느꼈어요.(웃음) “고독을 느꼈다”는 문장으로
이야기가 끝나는데 진짜 ‘고독’을 표현할 수 있는 게 이 바로 이 마침표구나 싶었어요.
편: 구보씨가 순간순간 딱 자각하거나 각성하는 어떤 순간들이 있는데 그걸 그냥 넘기면서 계속 걸어 다녀요.
삶을 면밀하게 각성하면서도 한편으론 그것에서 약간 거리를 둬서, 생각하는 게 더 많아지고, 이런 것들이
목인 씨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던 것 같아요.
목: 사람들은 한쪽을 명확히 얘기해주는 걸 좋아하고, 이쪽도 저쪽도 아닌 걸 싫어한단 말이죠. 그렇지만 그런 모호함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되게 도발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율리시스』 같은 책도 그렇고, 그래서
작가들이 계속 ‘배회하는 사람’에 대한 글을 쓰나 보다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나도 그런 걸 해볼까 하는데, 한 꺼풀 차이로
뭐 이런 걸 노래로 썼어, 그럴 수도 있는 소재인 것 같아서 이런 작품 쓰는 게 쉽지 않은 거구나 생각도 들더라고요. 쉬워
보일 수 있는 소재를 박태원의 솜씨로 계속 해결하면서 쓴 거잖아요.
나: 이런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되게 사소해보이고, 그러니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잖아요. 하지만 이 시대에만 비추어
봐도 이게 흔치 않은 이야기인 게 분명해지죠. 지금은 뭔가에 대해 여유를 갖고 오래 생각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시대고요.
뭐든 동시다발적으로 빠르게 처리하는 게 당연해져서. 목인 씨 노래는 사람들이 바쁘게 살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들을 다루는 듯해요. 나에게 행복이 뭘까, 하는 사소해보이지만 어쩌면 사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하지만 이제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그것들을 말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목인 씨와 구보 씨가 닮아 있는 것 같아요.
편: 잭 케루악을 좋아하고 직접 번역한 책도 출간된다고 들었어요. 간단히 소개를 해주신다면?
목: 잭 케루악의 『다르마 행려The Dharma Bums』라는 책을 번역하고 있어요. 옛날에 음반 속지 같은 데에 잭 케루악과
비트 세대에 대한 글이 가끔 나와서 궁금했는데, 그때 처음 『길 위에서』의 원서를 사서 읽어 봤어요. 내가 원서를 읽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어쩌다 빠져들어 끝까지 읽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맨날 책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러면서 꼭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밴드 시작할 때쯤에 집에서 계속 재미 삼아 번역을 하다 한 권을
다 옮기고 나니 출판사에 보내면 내줄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책을 통째로 번역했으니까 기특하잖아요,
스스로. 그래서 출판사에 그대로 보냈어요. 답이 없는 데도 있었고 거절한 데도 있었고 검토해보겠다고 만났다가 무산된
경우도 있었고. 그러다 다른 출판사에 계약이 돼 있는 책이라는 걸 알고 상처를 받았죠. 2년 정도 기다려도 책이 안 나와서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책방에 갔더니 그 책이 나왔더라고요. 그래서 그만 생각하기로 하고, 내가 할 일이 아닌가보다
하고 그만뒀는데, 이상하게 또 인연이 생겨서 다른 주요 작품을 번역하게 된 거예요.
나: 종교적인 이야긴가요?
목: 다르마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 법 같은 건데, 사실 불교에 대한 내용만은 아니에요. 미국에 불교가 아직 널리 안 알려져서
몇몇 사람들만 관심 있었을 때, 그때가 배경이라서 서양인들이 참선 같은 걸 해보는 내용들이 나와요. 히피 세대가 나오기 전의
이야기.
편: 나영 씨는 『입 속의 검은 잎』을 고르셨는데, 이 책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나: 우선 ‘문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제게는 시선이었어요. 문지 하면 뭐가 생각나냐 하고 물으면 하나는 시집이고
다른 하나는 책등에 둘러진 빨간 띠인데요.(웃음) 『입 속의 검은 잎』을 처음 본 건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제가 좋아하던
친구가 이 시집에 수록된 시를 손으로 옮겨 적고 그걸 코팅까지 해서 지갑에 넣고 다녔거든요. 우연히 그걸 보고 기형도라는
시인과 그 시가 실린 시집을 알게 된 거죠. 그게 발단이 되어서 시집을 사고 읽고 수집하고, 저로서는 시라는 걸 만나게 되었죠.
편: 교과서에서 시를 처음 만난 게 아니었네요.
나: 이상하게 교과서에서 본 시들은 기억이 잘 안나요. 밑줄 치고 그게 어떤 비유고 무엇을 상징하는지 암기했던 시들은 시로서
읽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언어 영역의 일환으로 학습했던 거라 그런가 봐요. 이 시집을 읽고 나서 문학이라는 세계를 알게 된 것
같아요. 중학생 때, 말하자면 감수성이 폭발하려던 그 시기에 기형도의 시들이 촉매가 되어준 거죠. 내 것, 내 세계에 대한
욕망이 끓어오르던 당시에는 이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청춘, 후회, 질투 이런 단어들이 엄청 날카롭게 제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시집 속지에 편지를 써서 좋아하는 친구들 생일에 선물하기도 많이 했죠.
편: 목인 씨도 기형도 시를 좋아하시나요?
목: 저도 고등학교 때 친구가 추천해줘서 읽었어요. 그 친구가 특히 「전문가」가 좋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편: 그 친구는 뭐 할까요, 지금?
목: 그 친구 공무원이에요. (웃음)
나: 저에게 그 시집을 알려준 친구는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겉으로는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삶을 사는 걸 보고
괜히 배신감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웃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살면서 누군가가 제게 기형도나 시나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질문을 할 때도 제가 이 시집의 이미지를 차용해서 대답할 때가 종종 있어요. 의식적인 게 아니라, 나중에 따지고 보니 그래요.
예를 들어 인생이 뭘까 하는 질문에 저는 괜히 쟁반 같은 큰 그릇과 거기 놓인 포도 한 송이를 떠올렸는데, 왜 하필 포도냐, 하고
자문하다 보니 이 시집에 실린 「포도밭 묘지」가 생각났어요. 아무튼 저에게 있어 최고의 시인이 기형도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제 독서 체험의 중요한 축을 이 시집이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이 시집을 통해서 시를 만나고 문지를 알게
되었기에 새삼 이것이 제 인생의 시집이란 생각이 드네요.(웃음)
편: 나영 씨 평론을 읽다 보면 작품에 대한 인상과 애정이 많이 드러나면서도, 한편으론 조심스러워 한다는 느낌도
받곤 해요. 평론이 좀 냉철하고 꽉 짜인 글이 많은 장르인데, 왜 평론을 선택했는지 궁금했어요.
나: 장래희망이 평론가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냥 책 읽는 걸 좋아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웃음) 소설이나 시를 쓸 깜냥은
없었고, 그저 읽는 걸 좋아했는데, 평론 형식의 글을 써보자 싶었던 건 김현 평론을 읽으면서였어요. 특히 거의 에세이와 비평의
중간 지점에 놓인 것 같은 류의 글을 읽고 나도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거죠.
평론을 쓰고 한참 지나서, 평론이라는 것도 평론가라는 가면을 쓰고 말하는 장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령 어떤 소설에 대해
말할 때 개인적인 감상을 가급적이면 감추고 그 작품이 한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른 작품들과 견주어 어떤 위치를
점유할 만한지를 기본적으로 제시해줄 사람이 평론가에 적합하다는 생각. 그런데 저는 제가 읽은 작품이 왜 좋은지를 설명하려고
애를 쓰는 일로 평론을 해왔던 것 같아요. 지금 개인적인 일로 평론 쓰는 일을 잠깐 쉬고 있는데, 그러면서 평론에 대한 입장이랄까
그런 게 조금 바뀐 것도 같아요. 앞으로 평론을 계속하게 된다면 제 글은 평론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자문자답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또 생각이 계속 바뀔 수 있겠지만, 지금 생각은 그래요.
편: 책을 좋아해서 편집자가 되었지만 직업적으로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오히려 읽기 싫어지기도 해요. 좋아하던 일이
직업이 되면 힘든 부분이 있는데, 아직도 책 읽기가 재미있으신지?
나: 책 읽는 건 재미있어요. 마감에 쫓길 때만 아니면. (웃음) 같이 글 쓰는 친구들이 모이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읽고 싶은 책이
쌓여가는데 읽을 책도 쌓여간다고. “요즘 뭐 읽어?” 이렇게 묻는 건 “요즘 뭐 써?” 하고 묻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더라고요.
평론을 쓰고 나서부터는 어떤 책을 읽더라도 저도 모르게 분석하고 메모할 때가 있는데, 그게 참 그래요. 요즘 말로 웃픈 일이라고
할 만하죠. 순수하게 느끼고 그 느낌을 이어가는 독서가 불가능해진 것 같아요. 그 구절에 밑줄을 긋지 않으면 넘어가지지 않는
이상한 강박에 사로잡힌 독서를 저도 모르게 하고 있어요.
편: 앞으로 각자 다섯 명의 인터뷰어를 만나게 될 텐데, 가장 기대되는 점이나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나: 제가 제일 궁금한 건 그분들이 어떤 책이 좋다고 고르셨을 때 왜 하필 그 책이냐 하는 거거든요. 그 책과 관련된 독서 경험
이라든가 습관이라든가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책과의 관계 같은 거요.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특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너무
상투적으로 느낄 수 있을 법한 화제이기도 해서 누구하고나 비슷비슷한 대화를 나누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이에요.
목: 전 인터뷰라는 걸 인터뷰어 입장에서는 거의 처음 해보는 거여서 잘할 수 있을까 싶어요. 또 인터뷰이 목록을 보니 제가
아는 분들이 제 담당으로 되어 있더라고요. 정바비 씨랑 윤성호 씨랑.
편: 많이 부담 되시나요?
목: 그렇진 않은데, 그분들을 오랜만에 뵙거나 혹은 처음으로 긴 대화를 해보는 입장이어서 그분들과의 만남이 어떨까 긴장돼요.
윤성호 씨 같은 경우엔, 아주 예전에 제가 집에 갔던 적이 있었어요. 저한테 책을 하나 읽어보라고 줬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안 읽었어요. (웃음)
편: 어떤 책인가요?
목: 『파괴된 사나이』라는 SF인데 제가 그걸 읽었으면 할 얘기가 좀더 있을 텐데, 이런 생각도 들고 또 제 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뷰이들이 말씀을 약간 신랄하거나 날카롭게 하시는 편이에요. 어떤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게 좋을까 싶죠.
나: 뭘 이야기하면 좋을까 이것저것 적어왔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제가 궁금했던 게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아요.
편: 마지막 질문입니다. 책을 왜 읽어야 할까요. 너무 다양한 매체 속에서 책 또한 그 존재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는 것 같아요.
목: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최근에 그런 걸 느낀 적이 있어요. 집에 돌아와서 방에 들어와 책부터 읽고
있으니 저녁엔 이런 이런 일들을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더라고요. 그런데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면 그런 생각이
안 들거든요. 다른 걸 잊어버리고 계속 들어가잖아요. 책이라는 게 중독적이지 않은 무언가란 걸 처음 느꼈어요.
정말 다르구나 싶고,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책에 그냥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책에 있는 것들이 웹이나
다른 데에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책으로 읽어야 얻게 되는 게 있다는 걸 느끼게 되어서예요.
나: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요, 제 경우에 비추어서 이야기하자면 TV를 본다거나 사람을 만난다거나 이런 때와는 다르게 책을
읽을 때만 갖게 되는 사색의 시간 같은 게 있어요. 완전히 생각에 몰입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 멍한 채로 단순히 생각하기에 빠져드는 상태라고 할까요. 목인 씨도 컴퓨터 할 때와 비교해서 이야기하셨지만, 다른 일을
할 때는 그것이 주는 어떤 표현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책을 마주하고 읽는 건 어떻게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다시 생각을 더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주도적으로 존재하는 일인 것 같아요. 행간의 시간을 사는 일이라고
해야 할까요.
목: 가끔 그런 생각도 해봐요.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들은 책처럼 그냥, 우리가 책 읽듯이 그런 것들을 편하게 읽나, 행간에서
사색을 하면서 인터넷을 하나…… (웃음)
나: 매체의 변화로 인한 것이겠지만, 종이책으로 대표되는 그 책이라는 게 과연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 앞에서는
괜히 제 자신이 고루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좀더 깊이 있게 이야기해야 하는 문제겠지만, 저는 책과 관련한 우리의 사소한
행위들이 소중하지 않나 하는 말을 덧붙여두고 싶어요. 귀퉁이를 접어두고, 밑줄을 긋고, 여백에 메모를 끄적이며 그때
발생하는 종이와 펜의 마찰음으로 제 독서의 일단을 확인하는 그 감각이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 같아요.
왠지 모르게 두 사람에게서 천천히 음미하며 두고두고 아껴 읽고 싶은 책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음악가와 평론가,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같은 고민의 흔적을 엿보기도 했던, 책과 독서의 또 다른 매력을 느끼게 해준 시간이었다.
앞으로 이들이 열 명의 인터뷰이들을 만나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줄지 기대해본다.
김나영 문학평론가.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였다.
김목인 싱어송라이터. 2002년 연주곡 「장기입원환자의 꿈」
으로 데뷔했고, 『음악가 자신의 노래』 『한 다발의 시선』
등의 앨범을 발표했다. 밴드 캐비넷 싱얼롱즈와 집시앤피쉬
오케스트라의 멤버로도 활동해왔다.
김나영이 고른 문지의 책
『입속의 검은 입』
김목인이 고른 문지의 책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http://moonji.com/40years/98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