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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필명,생몰년) |
출신고향 (나이) |
1922년 이전 활동 |
1922년 이후 활동 |
비 고 |
金判權 (1900 - ? ) |
전남 영암 (23세) |
․일본사회주의동맹 참가(1920) ․효민회(1920) |
․영암공산주의협의회(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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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熙國(仲漢, 1898 - ? ) |
충북 제천 (25세) |
․여명회(1919),효민회(1921) ․코스모구락부 참가(1921) |
․시베리아자치대(1924) ․남경중국정부 근무 |
1923년 10월 귀국 |
元鍾麟(虛無, ? - ? ) |
함북 ( ? ) |
․조선고학생동우회(1920) ․코스모구락부(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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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枓全(若水, 1892-1964) |
경남 동래 (31세) |
․조선고학생동우회(1920) ․《大衆時報》발행(1921) |
․북성회,북풍회집행위원(1924)․조선공산당 중앙위원(1925) |
1923년 4월 귀국 |
林澤龍 ( ? - ? ) |
( ? ) |
․조선고학생동우회(1920) ․흑양회(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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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鍾範 (1892- ? ) |
경남 창원 (31세) |
․조선주조회사 사장(1919) ․조선노동동맹 임시의장(1922) |
․북성회(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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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思國 (1892-1926) |
충남 연산 (31세) |
․서울청년회(1921) ․동경《五一新報》발기(1921) |
․서울파그룹 간도총국(1923) ․고려공산동맹책임비서(1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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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太信(又影, 1892-1923) |
경북 안동 (31세) |
․조선노동공제회(1920) ․《大衆時報》발행(1921) |
․북성회(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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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奉岩 (1899-1959) |
경기 강화 (24세) |
․조선고학생동우회(1920) ․중앙대 정경학부(1921) |
․신사상연구회(1923) ․고려공청 중앙위원(1925) |
1922년 7월 귀국 |
白武(白晩祚, 1900 - ? ) |
경북 대구 (25세) |
․조선고학생동우회(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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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동맹회실행위원(22) ․북성회(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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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燦(洛俊, 1894 - ? ) |
함북 명천 (29세) |
․명치대 법과(1919) ․조선고학생동우회(1920) |
․북성회,고려공청중앙간부(23) ․조공중앙위원,만주총국(1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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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鈺 (1895 - ? ) |
경북 문경 (28세) |
․학우회 |
․조선노동동맹 간부(1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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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準植(朴烈, 1902-1974) |
경북 문경 (21세) |
․조선고학생동우회(1920) ․의혈단,철권단(1921) |
․흑우회,불령사(1923) ․‘대역사건’구속(1923-1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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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弘根 (1900 - ? ) |
? (2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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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우회(1923) ․흑우연맹(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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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鎭裕(鎭祐, 1897-1928) |
충남 논산 (26세) |
․노동자진회(1922) |
․흑우회,불령사(1923) ․서울 흑기연맹(1925) |
1925년 귀국 |
崔圭悰 (1895 - ? ) |
전북 김제 (2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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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우회,불령사(1923) ․흑색청년연맹(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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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相庚 (1901 - ? ) |
충북 충주 (22세) |
․3.1운동 가담후 투옥 ․출옥후 도일(1919) |
․흑우회,불령사(1923) ․서울 흑기연맹(1925) |
1923년 지진후 귀국 |
張祥重(讚壽, 1900-1962) |
경북 울산 (2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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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우회,불령사(1923)․흑색청년연맹,동흥노동동맹(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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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晛相 (1900 - ? ) |
전남 영암 (23세) |
․자유인연맹 참여(1919) ․일본사회주의동맹준비회(1920) |
․흑우회(1923) ․흑색청년연맹(19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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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洪均 (1900 - ? ) |
경북 선산 (23세) |
․명치대 법과(1919) |
․흑우회(1923) ․고려공청 중앙위원(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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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太成(泰星,1901 - ? ) |
함남 단천 (22세) |
․여명회(1919) ․조선고학생동우회(1920) |
․흑우회,불령사(1923) ․흑우연맹(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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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東星 (1895-1941) |
경북 대구 (2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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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우회,불령사(1923) ․대구 진우연맹(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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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각 자료를 살펴보면 黃錫宇 孫奉元,44) 徐相一 李龍基 李命健45) 등과 李允熙,46) 申焰波47), 그리고 河世明 金正根 金亨潤 李弘根,48) 신용우 방한상49) 등이 언급되고 있으나, 정확한 신원을 파악할 수 없어 명시하지 못하였다.
위 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매우 유동적이나마, 회원 수가 대략 최소 30명에서 최대 35명 가량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또 회원의 연령층은 20대 초반이 주류를 이루지만 20대 후반과 30대 초반도 눈에 띤다. 출신고향 역시 경상, 전라도 등 이남출신이 주축을 이루지만 이북출신들도 드물게 보인다. 이런 분포는 당시 흑도회가 어느 특정 지역이나 명망가에 의해 주도되지 않은, 다양한 연령층과 활동경력을 가진 세력들의 연합체임을 보여준다. 당시 직업적 분포도 분명치는 않으나, 일부 부유한 유학생 출신들을 제외하면 대개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고학생 또는 노동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또 김약수 백무 조봉암 김찬 등 동우회 출신들이 다수 참가하였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회원들의 이후 행적도 대부분 귀국, 또는 장기 체류하면서 사상단체 결성과 신사상 보급 등 사회주의운동에 앞장서고 있음을 볼 때,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흑도회의 비중이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박열 정태성을 비롯해 20대 초반의 노동자 출신들이 대체로 아나계인 黑友會에, 김약수 김종범 등 20대 후반 및 30대 유학생 출신들이 공산계인 北星會에 각각 반수비율로 참여하였음은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Ⅲ. 흑도회의 활동과 이념
1. 흑도회의 활동
흑도회는 구성원의 다양한 성향으로 인해 조직적 활동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동우회 간부진의 참여로 노동문제 및 기관지 발간 등에 높은 의욕을 보였다. 우선 흑도회 활동방향을 알 수 있는 자료로 ‘동우회선언’을 주목할 수 있다. 1922년 2월 4일《朝鮮日報》에 동우회 명의의「전 조선노동자 제군에게 고한다」라는 글에서 이들은 앞으로 “일본의 주요 사상단체와 제휴하여 노동대학 설립, 잡지『同友』의 발행 등 노동운동을 전개하려하며 이제부터는 고학생 및 노동자의 단순한 구제기관이 아니라 직접적인 계급투쟁기관이라는 사실을 선언한다”고 밝혔다.50) 김약수 박열 등 11명이 연서한 이 선언문은 동우회를 친목적 노동단체에서 계급투쟁 기관으로 전환하겠다는 뜻을 표방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연서자인 김약수 김사국 박열 원종린 임택용 황석우 등은 이미 흑도회에 가입한 상태였으며 홍승노 등도 관련인물이다. 이들이 밝힌 사업계획 중 노동대학 설립은 大杉榮의 ‘平民大學’을 염두해 둔 것으로 보이지만, 기관지는 흑도회의『黑濤』지 발간으로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동우회는 내부진통을 거쳐 순수 노동단체로 남아있다가 1923년 5월 제 4차 메이데이행사 이후 자연소멸되었다.51) 때문에 ‘동우회선언’은 동우회 명의로 발표되기는 했지만, 노동단체의 한계를 절감한 간부진들이 흑도회에 가입 후 향후 활동방향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또 조직활동은 아니지만, 일부 회원들의 일본 메이데이행사 참여도 흑도회의 활동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그해 5월 2일 동경에서 열린 제 3차 메이데이행사에 당시 동우회 대표 白武는 동료 4-5인과 함께 참여하였다. ‘최초의 참가 조선인’으로 소개받은 그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조선인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조선인만의 힘으로는 부족하고 일본의 반제세력이나 사회주의자, 수평사운동과 손을 맞잡아야만 조선독립운동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인사말을 했으며 행진 도중 검속되었다고 한다.52)
기관지《黑濤》의 발간 역시 흑도회의 주요 활동으로 꼽을 수 있다. 《흑도》지는 파블로이드판 4면으로 7월 10일자 창간호에 이어 8월 10일자로 2회 발간되었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박열, 발행소 역시 그의 현 주소로 되어있다. 때문에 기관지 간행은 사실상 박열과 그의 일본인 처 金子文子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박열은 애초 8면 발행을 계획하고 6월부터 유지 방문, 광고모집 등에 들어갔다. 그는 광고수입 외에도 각계 유지들을 찾아가 돈을 꾸거나 위협하는 방식으로 발간비용을 조달했다.53) 박열과 金子文子는 낮에 조선인삼 행상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밤에는 함께 편집작업을 도맡았다.《흑도》지는 한 부에 정가 금 5전을 받기로 하였으나, 대부분 회원들과 유지들에게는 무료로 배포하였다.54)
흑도회 활동 중 가장 주목되는 사업으로 당시 新潟縣 信濃川 댐공사장에서 일어난 조선인노동자 학살사건에 대해 조사단 파견과 항의투쟁을 들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1922년 7월 29일자 《讀賣新聞》에 ‘信濃川에 자주 떠내려오는 조선인의 학살사체’란 제하의 글이 나오면서부터이다. 즉 신석현 지방에서 조선인 노동자 6백명 등 1천2백명이 역사를 하던 중 신농천 강물에 송장이 여러 번 떠내려와 조사하니, 노동학대와 학살에 의해 수명의 조선인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본국의 《東亞日報》도 즉각 8월 1일자 신문에 “학살을 당한 조선사람의 수효가 몇 명이나 되는지 확실치 못하나 도주하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한 자와 병이 들었다고 살해당한 자를 합하면 백 명에 가까운 모양이라”라고 보도하였지만,55) 경찰에 압수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동경 내무성과 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연일 보도가 통제되자, 흑도회원들은 김약수 박열 백무 등으로 실행위원 20명을 선출하고 일본인 高進正道 小牧近江 등의 협력을 얻어 ‘신농천학살사건조사회’를 조직했다.56) 본국에서도 청년연합회와 신생활사 등 50여명이 모여 조사회를 결성, 朴熙道를 집행위원장으로 선정해 羅景錫을 파견하였고,57) 동아일보사도 특파원 李相協을 동행 취재토록했다.58) 특히 이상협은 현지조사 후 8월 23일부터 9월 4일까지 ‘新潟의 殺人境-穴藤踏査記’란 기획물을 총 12회에 걸쳐 연재하여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59) 동경의 실행위원들도 김약수 명의로《조선일보》에 조사경위를 보고하면서,
우리가 이에 관해 대책을 토의하는 것은 결코 이미 죽은 7,8명의 동포를 조의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남은 5백여명의 포로자를 지옥 골짜기에서 해방하여 살길을 인도하는데 있다. 현지조사와 대책연구 자체만이 아니라 사기적 노동계약을 철폐하는데 있다. 16․7시간의 노동시간을 개정하는데 있다.60)
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신문 역시 당국에 압수당하여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자 실행위원들은 일본 내무성에 항의서를 제출하고 9월 7일 동경 YMCA에서 진상보고회를 개최하였다. 흑도회와 학우회 주관 하에 東京 神田美土代町청년회관에서 열린 이 ‘학살규탄 대연설회’는 청중 1천여 명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61) 특히 이날 집회는 17명의 강사 중 堺利彦 大杉榮 小牧近江 등 저명한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또 금 10전의 입장료를 받았는데도, 조선인 청중이 5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62) 이같은 사실로 비추어 이 규탄대회는 국내외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 및 일본의 진보진영과 아나-공산계가 연대한 첫 대중투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대단히 크다. 이런 상황변화에 놀란 경찰서장은 불온하다는 이유로 박열의 연설 도중 강제 해산시켰고, 대회는 시위대와 경찰의 출동으로 수명의 검거사태를 빚었다.
신농천학살사건의 진상조사와 규탄대회, 그리고 《흑도》지의 발간은 흑도회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규탄대회 이후 흑도회 이름하의 활동은 더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정확한 내부사정은 알 수 없으나, 사건조사와 대회개최 과정에서 박열과 김약수-백무 사이의 마찰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63)
박열은 그후 10월 신농천사건을 보고하기 위해, 또 의열단원 金翰을 통해 폭탄을 유입할 목적으로 일시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그는 李康夏 등과 黑勞會를 조직해놓고 다시 동경으로 돌아왔다.64) 박열이 폭탄테러를 구상하고 있던 시기, 김종범 백무 등 일부 신농천학살사건 조사위원들은 ‘재일조선인노동자상황조사회’를 발전시켜 12월 1일 조선노동자동맹을 결성하였다.65) 이같이 각기 다른 활동방향을 찾는 두 세력은 당시 일본 사회운동계의 아나-보르 사상논쟁에 휩쓸려 흑도회 해체에 이르게 되었다.
2.《흑도》에 나타난 이념
흑도회의 이념을 살필 수 있는 것으로《흑도》가 있다. 《흑도》는 이 회의 기관지로서 자금모집부터 편집, 발행까지 박열과 그의 처 金子文子에 의해 발간되었다. 1922년 7월 10일 창간호에 이어 8월 10일 두 차례에 걸쳐 발간된 《흑도》지는 당시 신사상을 수용한 조선인들의 의식수준과 향후 활동방향을 알게 해주는 사상단체의 첫 기관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66)
창간호와 2호는 수 차례 경시청의 검열을 거친 후에야 발간될 수 있었다. 지면 여러 군데에 삭제흔적을 남겼지만, 편집진은 이를 피하기 위해 다소 미온적인 표현을 쓰기도 했다. 창간호는 주로 흑도회 선언문과 함께 일본 및 조선인 투사의 동정, 폭탄파괴나 무장단의 소식, 재판중인 동지의 일정 등에 지면을 할애하였다.
먼저 1면 ‘창간에 즈음하여’라는 머리글에는 “우리들은 인간으로서, 약자로서 절규할 수 밖에 없는 소위 불령선인의 동정과 조선의 내정을 일본의 아직 경직되지 않은 인간미가 있는 많은 일본인에게 소개하고자 창간한다”고 밝혔다. 이어 ‘진정한 일선융합’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국가적 편견도, 민족적 증오도 없는” 세계(즉 사회주의)를 뜻한다고 하여 일본정부의 그것과 분명히 다름을 보여주었다. 이 글은 “우리들의 뜻을 양해하려는 여러분들은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크게 후원해 주시길 기대하는 바이다”라고 끝을 맺었다.67) 이 창간사는 흑도회원이나 조선인을 상대로 쓴 글이 아니라, 일본의 양식있는 지식인에게 창간의 취지와 방향을 설명하고 후원을 호소하고 있다. 일본 지식인, 즉 사회주의자들과의 유대는 加滕末吉의 ‘黑濤’라는 축시68)와 정진회 신우회 등 일본 노동단체들의 창간 축하광고 등에서도 표현되었다.
다음으로 흑도회 결성 당시의「선언문」이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자아에 산다. 일상의 一擧一動이라도 그 출발을 모두 자아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철저한 자아주의자로서 인간은 서로 헐뜯는 것이 아닌 상부상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헐뜯는 것이 아닌 친하게 지내고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69)
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흑도회원들이 스스로 ‘철저한 자아주의자’임을 밝히고 ‘상부상조’를 강조하는 점이 주목된다. 나아가 이들은 “각인의 자아를, 자유를 무시하고 개성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하는 그 어떤 불합리한 인위적 통일에도 끝까지 반대한다”고 밝혔다. 또 자신들의 입장은 “자아의 강한 욕구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들에게 진이고, 선이고, 미이다”라고 분명하게 선언했다. 흑도회원들은 이 글에서 “어떠한 고정된 주의도 없다”고 밝히면서 그 이유로 “인간이 일정한 형틀에 빠지면 퇴락하고 사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70)
이처럼 선언문 주장대로 모든 것을 자아에서 출발하고 자유와 개성의 발전을 저해하는 세력에 반대하여 싸우겠다는 논리는 아나키즘 중에서도 스튀르너의 개인주의적 또는 자아주의적 아나키즘에 속한다.71) 막스 스튀르너는 ‘개인과 자율’ ‘자주인으로서의 개인’에 대해 절대적인 관심사를 가진 아나키스트로서 그의 주저『唯一者와 그의 所有』는 이미 일본에서 널리 읽혔다.72) 흑도회원 黃錫禹에 의하면, 당시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풍미했으나 “몇 사람 외에는 모두 스튀르너계의 개인적 무정부주의 사상이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그의 사상은 일본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73)
또 이들은 철저한 자아주의자이면서 서로 헐뜯지 않는 상호부조를 강조하여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이 경향은 李康夏의 ‘오등의 절규’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우리들 무산계급은 세계도처에서 열혈의 절규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자유와 평등, 빵을 얻기 위한 절규”라고 밝혔다. 때문에 그들은 “이 부자연, 불합리를 타파하여 자유평등을 요구하는 정의의 절규자들”로서 “상호부조가 우리들의 무기다. 이 강력한 무기로 그들 부르조아의 아성을 무너뜨리자”고 주장하였다.74) 즉 그는 자본주의의 불합리한 억압과 횡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산계급의 상호부조가 절대적이며 이를 위해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폭력적 방법으로 투쟁하자고 주장하였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역시 당시 일본사상계 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여러 잡지에 소개되어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75)
한편 박열은 ‘직접행동의 표본’이란 글에서 “평상시 법률 도덕 습관 등을 최고의 도덕적 가치로 삼는 사법관계자들이 직접행동에 의한 힘의 투쟁 앞에 무능하다는 것을 직접 감옥에서 경험하고 오로지 직접적인 투쟁만이 가장 확실한 길”이라며 폭력에 의한 직접행동을 주장하였다.76) 그는 그해 4월 영국 황태자 방문에 따른 경찰의 예비검속으로 보름간 구류에 처해지자, 이를 계기로 직접행동의 당위성을 역설한 것이다. 당시 폭력투쟁 등 직접행동을 촉구하는 분위기는 申焰波가 소개한 ‘친구 집의 벽에서’라는 글에서도 나타난다.77) 이런 경향 역시 당시 풍미했던 바쿠닌류의 직접행동적 아나키즘으로 파악할 수 있다.《흑도》지는 이밖에도 2면에 대전에서 발생한 일본인 폭력을 《동아일보》를 인용, 보도하였고 조선무산자동맹회의 강령, 독립단원의 활동과 체포 및 재판현황 등을 보도하였다.
8월 10일 발간된 2호 역시 창간호와 유사한 경향인데, 일본사회주의자 加藤末吉과 中西伊之助의 기고문을 실었다. 또 이 지면에는 일본정부의 ‘일선융합, 일선동조론’에 대한 박열과 金子文子의 반박논문이 실렸다. 金子文子의 예리한 야유가 돋보이는 이 글에서 그녀는 현 일선융합책이 “조선인을 붉은 피를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기만책이라 평하면서 때문에 “조선인 동화를 말하기 전에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일본인의) 부도덕한 형제애를 없애는 것이 급선무”라고 갈파하였다.78)
한편 광고란을 살펴보면 창간호부터 박열은 大杉榮의『勞動運動』을 비롯해 『加藤一夫著作集』,『自由人』『大衆時報』등 아나키즘계 잡지 및 도서를 실었다. 또「프롤레타리아의 변호사 布施辰治」,「望月桂」,「宮島資夫」등 사회주의 인사들의 저작도 많이 광고해, 그들과 친분이 있던 박열의 의도가 많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흑도》지는 특정이념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주로 反日독립사상을 비롯해 스튀르너의 개인적 아나키즘과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바쿠닌의 직접혁명론 등의 사상을 담고있다. 특히 흑도회원 대부분 공감했을 선언문에는 스튀르너의 개인적 아나키즘과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담고 있다. 또 주요 기고자와 광고를 통해 볼 때, 아나계 인사들의 글과 도서를 소개하는 등 아나키즘의 영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로 미루어 《흑도》지는 흑도회의 기관지임을 내세웠지만, 박열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흑도회의 분열과 해체
흑도회는 일본사상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 사회운동의 운명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일본사회주의동맹의 운명은 곧 흑도회에 투영되었다. 1920년 12월 결성된 일본사회주의동맹은 이후 최대 규모의 볼셰계 단체인 友愛會의 탈퇴로 이미 붕괴조짐을 보였다. 1921년 5월 동맹에 대한 정부의 강제해산과 6월 주간『노동운동』폐간조치를 계기로 두 세력은 책임공방을 표면화하면서 각기 다른 진로를 찾기 시작했다. 즉 볼셰계의 近藤榮藏 高津正道 山川均 등은 비밀결사를 조직한데 이어, 월간잡지『前衛』를 발간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였다. 이에 반해, 아나계의 大杉榮 和田久太郞은 12월부터 세 번째 『勞動運動』을 발간하고 노동조합동맹회를 통해 자유연합주의운동을 강력히 전개하였다.79)
이미 大杉榮은 1920년 12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여 볼셰비키정권의 아나키스트 탄압80)을 목격한 후, 공동전선의 한계를 실감했다.81) 이어 코민테른의 지도와 후원에 힘입어 1922년 7월 15일 일본공산당이 비밀리에 결성되자, 그는 오랜 동료인 山川均과 결별하였다. 山川均은 공산당 창당에 앞서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이란 글을『前衛』1922년 7-8월호에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소수 지식인 중심의 사상투쟁을 지양하고 노동대중의 행동을 중시하고 정치투쟁을 통해 무산계급의 정치권을 옹호하는 노선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여 아나-보르 논쟁을 격화시켰다.82) 두 세력은 9월 30일 大阪에서 열린 일본노동조합연합 창립대회에서 중앙집권제를 옹호하는 총동맹회측(볼셰계)과 자유연합제의 비총동맹회(아나계)가 대립함으로써 결정적으로 결별하였다.83) 계급투쟁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독재와 중앙집권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공산계에 대해 아나계는 단위조합간의 자유연합을 옹호하면서 계급독재를 강력히 비판하였던 것이다.84) 대회는 기율이 잘 갖춰진 강력한 동맹을 원하는 총동맹회 측의 반대로 무산됨에 따라 아나계의 급속한 침체를 가져왔다.85)
이러한 일본 사상계의 흐름은 곧장 조선인 단체에 영향을 끼쳤다. 조봉암은 당시 흑도회에 참가한 일을 회고하길, “우리들은 실제에 있어서 관념적 유희에 만족했을 뿐이고 아무 일도 하려고도 못했다”고 하면서 “그저 모든 면에 있어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언론에 시종했다”며 박열 주도의 언론활동을 비판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의 관념적인 유희에는 만족할 수 없어” 조직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볼셰비즘으로 기울었다고 술회하였다.86) 송봉우도 당시 흑도회가 “머릿자의 그것과 같이 A색채(=아나키즘)를 가진 회”였기 때문에 자신은 참가하지 않았고 코스모구락부에서 만난 B색채(=공산주의) 성향의 조선 일본 중국 인도인 등 30여명과 몇차례 회합, 의기투합하여 北星會를 결성했다고 회고하였다.87) 특히 흑도회가 박열 중심으로 점차 무정부 공산주의 색채를 띠기 시작하자,88) 김약수 백무 조봉암 송봉우 등 대중적 노동조합과 중앙집권적 조직론을 옹호하는 공산계는 이에 강력히 반발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사상단체의 이념을 둘러싼 대립으로 흑도회는 결성 1년만인 1922년 12월경 공산계인 北星會와 아나계인 黑友會로 분화되었다. 정확히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해체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89) 다만 북성회가 1923년 1월, 흑우회가 2월경 설립총회를 각각 가진 것으로 보아, 또 박열의 언론 및 테러 중심 활동에 공산계가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 공산계가 먼저 탈퇴해 새 조직 구성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각 단체에 참여한 인원도 정확치는 않으나, 한 일본인 아나키스트는 해체 당시 흑우회에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보았다.90) 또 북성회에는 대체로 학생 출신들이, 흑우회에는 노동자 출신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견해도 있다.91)
아무튼 김약수 김종범 변희용 등은 12월 흑도회 탈퇴후 宋奉瑀 金章鉉 李如星 등 공산주의 성향 60여명과 함께 1923년 1월 15일 북성회 설립총회를 가졌다.92) 이보다 앞서 김종범 백무 등은 11월과 12월 東京과 大阪에서 각각 조선노동동맹회를 결성하고 무산자의 이익획득을 표방하며 본격적인 조합운동을 시작했다.93) 북성회는 이 노동단체들을 지원하는 한편, 기관지『斥候隊』를 발간하였고94) 국내에 들어와 사회주의사상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때 일본인 변호사 布施辰治와 사회주의자 北原龍雄도 함께 1923년 8월 1일부터 7일간 서울을 비롯한 평양 광주 등지에서 순회강연을 가졌다.95) 북성회는 山川均 片山潛96)의 볼세비즘노선을 쫒아 일본 사회주의단체인 ‘무산자동맹회’에 참가하는 등 국제연대를 도모하기도 했다. 이들은 1923년 10월 서울에서 김약수 김종범 마명 이헌 등 160명으로 하여금 건설사를 조직한데 이어,97) 1924년 11월 북풍회로 확대발전하는 등 본격적인 공산주의운동을 주도했다.98)
다른 한편 박열 홍진우 정태성 등은 1922년 12월 風雷會를 조직하였으며 이듬해 2월 이를 黑友會로 개칭하였다.99) 박열은 흑우회에서 종래의 기관지『黑濤』를 『太い鮮人』(일본어로는 ‘굵은 조선인’이나 발음으로는 ‘불온한 조선인’의 뜻)으로 바꿔 발행하고100) 4월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흑우회는 大杉榮 岩左作太郞의 노선을 쫓아 순수아나키즘을 표방했으나,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이후 군부에 의한 大杉榮 암살101)과 대대적인 검거선풍으로 침체되었다. 특히 일왕폭살을 기도한 ‘박열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흑우회는 폭력테러과 직접행동을 추구하는 등 1920년대의 본격적인 아나키즘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같은 흑도회 해체 이후 두 단체의 구성과 성격을 비교하면, 대체로 《표 2》로 정리할 수 있겠다.
<표 2> 북성회와 흑우회 비교102)
구 분 |
북성회 |
흑우회 |
비고 |
결성시기 |
1923. 1. 15 |
1923. 2월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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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인물 |
김약수,김종범,변희용,백무 등 |
박열,정태성,장상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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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원 수 |
약 60명 |
약 30명 |
1924년 기준 |
기 관 지 |
《斥候隊》(23.4월) |
《太い鮮人》《現社會》 《民衆運動》(23.3-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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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후원인 |
山川均,片山潛 |
大杉榮,岩左作太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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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노선 |
중앙집권주의 (대중조직 중심) |
자유연합주의 (비밀결사 중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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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노선 |
의회 등 정치투쟁 병행 |
테러 등 직접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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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에서 알 수 있듯이, 두 단체의 가장 큰 이념차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옹호하는가, 배격하는가에 따라 극명하게 대립된다. 또 조직노선상에서도 러시아 볼셰비키당과 같은 직업혁명가에 의한 대중조직과 중앙집권주의를 추구하는 공산계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연합, 민중에 의한 직접행동을 옹호하는 아나키즘과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치열하게 전개된 아나-보르논쟁에 대해 흑도회원이었던 黃錫禹는 1923년 4월 조선의 한 잡지에 공산계와 아나계의 상호관을 소개하였다. 그는 중앙집권적 조직에 대해 “그것은 저 일부 직업적 주의자의 일종의 정치적 음모이니, 이것은 결국 일종의 새로운 治者․지배자를 낳는 운동에 불과하다”는 아나계의 견해를 실었다. 때문에 중앙집권적 대사회의 출현은 “금일의 국가라는 지배자에 대한 일종의 새로운 지배자의 創定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103) 또 같은 흑도회원이던 元鍾麟도 논쟁에 대해 비평하기를, 공산계와 아나계 모두 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나, 맑시즘은 사회주의 실현 후 스스로 종말하며 그때까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독재가 대체해야한다고 보는 반면, 아나키즘은 국가의 즉각적 폐지와 혁명적 독재를 부인하는데 큰 차이가 있다고 분석하였다.104)
이처럼 당시 민족운동계에 번진 아나-보르논쟁은 일본과 조선에서 이념적․실천적으로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두 진영은 1922년 7월 일본공산당 창당과 9월 총동맹-비총동맹 분열로 대립하다가, 12월 흑도회의 해체와 1923년 1월 흑우회-북성회 결성으로 분화하였다. 이는 이후 전개될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사의 커다란 두 흐름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Ⅴ. 맺음말
1919년 이후 급격히 고조된 일본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은 의열투쟁과 신사상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재일 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유학생들을 비롯한 일부 한인들은 워싱턴 독립청원의 좌절 이후 점차 ‘일본혁명을 통한 조선독립’을 기대하며 사회주의자와의 유대를 꾀하기위해 그들의 사상단체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였다. 특히 일본의 메이데이 행사와 사회주의동맹의 결성을 지켜본 고학생과 노동자들은 그들과의 유대를 통해 자연스럽게 반제, 반자본, 반권력 이념인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들은 학우회와 동우회 등 1910년대에 결성된 상호부조적 노동단체의 한계를 절감한 뒤, 재일한인들의 인권과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조직적인 사상운동을 펼치기 위해 단체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1921년 11월 결성된 흑도회는 이처럼 일본 사상단체에 참여했던 유학생들과 동우회 출신 노동자들의 제휴로 통합된 단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자료의 누락과 혼선으로 정확치는 않으나, 회원 수는 유동인원을 포함해 대략 30명~35명 가량으로 파악되어 기존 연구보다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회원의 연령도 대개 2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이며 이남 출신 위주이나 대체로 고른 분포로 보아, 이 단체가 어느 특정 명망가 중심이 아닌 다양한 성향을 가진 인물들의 연합체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중 단체결성을 주도한 유학생들이 이후 활동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동우회 출신 노동자들은 사상단체로서의 역할을 적극 수행코자 하였다.
한편 눈에 띄는 조직적 활동은 많지 않으나, 대부분의 회원들은 당시 한인들의 열악한 인권과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기관지 발간하려는데 높은 의욕을 보였다. 이들은 ‘동우회선언’에 대거 참여해 노동대학 설립과 기관지 발간 등 향후 활동방향을 밝혔으며, 일부는 제 3차 메이데이행사에도 참여하였다. 또 박열을 중심으로 7월과 8월 기관지《흑도》를 2차에 걸쳐 발간했으며 신석현 조선노동자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진상조사단을 파견, 규탄대회를 전개했다. 특히 진상조사와 규탄대회는 조선 및 일본 지식인들의 높은 관심과 참여 속에 진행되었으며 아나-공산계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첫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이같은 점에서 흑도회는 이전 고학생 및 노동단체의 친목도모적 한계를 극복하고 조직적인 사상단체를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발행한 기관지《흑도》를 통해 볼 때, 당시 흑도회의 이념은 반일사상을 비롯해 스튀르너의 개인적 아나키즘과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바쿠닌의 직접혁명론 등이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 회원이 참여했을 창간사와 선언문에서는 스스로 ‘철저한 자아주의자들’임을 밝힌 동시에 ‘상호부조’를 강조하였다. 또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관심과 유대를 호소하면서 기고와 광고를 통해 이를 적극 반영하였다.
그러나 흑도회는 1922년 9월부터 불기 시작한 일본 사상계의 아나-보르 논쟁을 계기로 해체의 진통을 겪게 된다. 이미 ‘사회주의동맹’ 당시부터 조성된 아나-보르 대립은 1922년 7월 일본공산당 창당과 9월 일본노동조합 총연합대회의 결렬로 첨예화되었다. 일본 사상계의 이러한 흐름은 흑도회에도 곧 영향을 미쳐 조직노선과 활동방향을 둘러싼 내부 대립을 심화시켰다. 먼저 박열의 언론 및 테러지향 활동에 비판적이었던 김약수 백무 등은 12월 경 대중운동과 계급독재, 중앙집권 조직을 주장하며 흑도회를 탈퇴하였다. 이들은 곧 조선노동동맹회를 조직한데 이어 이듬해 1월 북성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인 공산주의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 박열 정태성 등도 비밀결사를 통한 직접행동과 자유연합을 주창하며 풍뢰회에 이어 흑우회를 결성, 아나키즘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와 국가의 폐지문제, 중앙집권적 대중조직과 자유연합주의 등이 대립한 아나-보르 논쟁은 일본과 조선에서 이념적․실천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1920년대 후반 민족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처럼 흑도회는 1910년대 재일한인 노동단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조직된 최초의 사상단체인 동시에 본격적인 아나키즘 및 공산주의운동의 전사를 이루고 있다. 흑도회는 범사회주의세력의 연합시기인 1920-21년 기간 중 결성된 일본의 ‘사회주의동맹’과 중국의 ‘사회주의자동맹’과 비견되는, 한인 아나-공산 진영간 최초의 연합단체이었다. 때문에 모호한 성격과 미진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흑도회가 1920년대 초기 민족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된다.
☞ 출처 : < http://wednes.netian.com >
원문 : http://wednes.netian.com/archives/mskim01.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