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장 이야기 -조정진.hwp
임계장 이야기
조정진
이제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고령층 비정규직, 그중에서도 은퇴 후 계약직으로 일하게 된 나의 이야기다. 은퇴자의 대부분이 70세까지 일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고, 나 역시 그랬다.
나는 퇴직 후 얻은 일터에서 ‘임계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는 ‘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라는 말의 준말이다. 임계장은 ‘고·다·자’라 불리기도 한다. 고르기도 쉽고, 다루기도 쉽고, 자르기도 쉽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고용주들에게 이 고자다 임계장들은 시급만 계산해 주면 다른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매력적인 노동력이다. 석 줄짜리 구인 광고를 내면 일자리를 원하는 노년의 노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고용주는 이 중에서 “고분고분한 자, 뼈와 근육이 튼튼한 자”를 고르기만 하면 된다.
임계장들의 일터는 매연과 미세 먼지, 그리고 쓰레기 속이었다. 일하다가 병에 걸리면 업무와 관계없는 ‘노환’이라 했고, 치료는커녕 해고 통지 문자가 날아왔다. 내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네 곳의 일터를 전전해야 했던 것도 이처럼 해고가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일터들은 24시간 격일제 근무제가 많았다. 이는 하루 24시간 일하고 다음날 하루를 쉬는 형태의 일자리다. 나는 이 쉬는 날에 또 다른 일터에서 다시 24시간을 근무한 적이 있었다.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한 곳에서 받는 최저임금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용주들이 최저임금이 조금 오르면 업무량은 그대로인데도 인원을 대폭 줄였다. 또 무급 휴게 시간을 계속 늘려 최저 임금이 올라도 시급 노동자는 더 받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시급 노동의 현장이며, 은퇴 후 일터에 뛰어든 단기 비정규직 고령자들의 세상이다. 수십만에 달하는 노인들이 믿기지 않는 비참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만, 노령 노동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은 전혀 없다. 정부, 입법자, 그 누구도 고령 노동자의 이런 현실을 잘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면, 임계장은 내 주변 어디에나 있다. 이제는 이 나라 노동자의 상당수가 60세 이상의 단기 비정규직, 바로 임계장이기 때문이다. 임계장은 내 부모 형제의 이름일 수도 있고, 또 퇴직을 앞둔 많은 분들이 은퇴 후 얻게 될 이름일 수도 있다. 내가 내가 만났던 수많은 임계장들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이제 이 글을 통해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해보고자 한다. 어두운 밤에만 별이 영롱하게 보이는 것처럼, 낮고 힘든 자리에서 일해 보고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들이다. 내 글이 나이 든 시급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모든 아픔을 온전히 풀어내지는 못할지라도, 나와 동료들이 겪었던 고단함만은 진실하게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 나는 베이비부머 세대로 38년간 공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다 2016년, 60세의 나이에 퇴직했다. 직장을 떠날 당시 내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 가족 사항: 전업 주부인 아내와 출가한 장녀, 그리고 장녀와 10살 터울인 대학 3학년 아들이 있다. 당초 아들은 대학 졸업 후 취업할 예정이었으나 내가 퇴직할 무렵에 3년 과정의 전문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어 했다. 아비로서 집안이 어려우니 바로 취업을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미리 구상했던 노후 설계에서 고려하지 못했던 새로운 변수가 생긴 것이다. 나는 퇴직 후에도 3년 이상 고액의 교육비를 감당하며 부양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 재무 사항: 퇴직하기 얼마 전에 딸의 혼사가 있었고, 여기에 저축해 놓은 돈 대부분이 들어갔다. 퇴직금은 오래전에 중간 정산을 통해 미리 받아 집을 마련하는 데 썼다.
○ 부동산: 지방의 중소 도시에 버젓한 내 집이 있었다. 그러나 2010년에 광역시로 발령을 받아 집을 구하려니, 지방 중소 도시와 광역시의 아파트는 억대의 가격 차이가 났다. 나는 큰 도시에 살아본 적이 없어 대도시의 집값을 잘 몰랐다. 중소 도시의 집을 팔아 광역시에 그만 한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부족한 집값은 1억 5천만 원의 주택담보 대출을 받았고, 그러고도 모자라 직장인 신용대출을 받아야 했다.
▣ 내가 살아온 세월들이 화려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시급 노동의 세계에 몸을 맡기고 나서야 지난 세월이 상대적으로 화려한 시절이었음을 알았다.
▣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회사의 보급이 전혀 없는 병사들과 같았다. 보급품이 필요하면 자신의 시급을 털어 넣어 조달해야 한다. 시급 일터는 다 그랬다.
▣ 호칭은 바뀌지 않았다. 계속 듣게 되니 이제 남은 삶은 온전히 임계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이들면 온화한 눈빛으로 살아가고 싶었는데 백발이 되어서도 핏발 선 눈으로 거친 생계를 이어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문득 터미널을 둘러봤다. 구석구석을 쓸고 있는 등이 굽은 할아버지들과 늦은 오후 영화관으로 출근하는 할머니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터미널만 봐도 인력의 80퍼센트가 비정규직이고 그중 많은 수가 임계장들이었다.
▣ 내가 떠나는 날, 사부님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자네 억울한 건 내가 잘 아네. 자네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그렇게 몸 바쳐 일할 필요 없었는데 의욕이 하도 강해서 말리지 못했어. 그게 후회스럽네. 다시는 이런 곳에서 일할 생각하지 말게.”
▣ 경비원을 괴롭히는 재미로 살아가는 소수가 있었다. 김갑두 같은 사람이다. 그들이 보기에 경비원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경비원은 제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스위치 같았다. 내가 관리하는 210세대 가운데 이런 이들은 5퍼센트 정도였던 것 같다. 소수라 해도 이들의 괴롭힘은 진한 후유증을 남겼다.
▣ 실제로 아파트 경비원은 말 한마디면 자를 수 있는 직업이었다. 입사할 때 쓴 근로계약서에는 “사회 통념상 근로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라는 조항이 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 통념’이란 자치회장이나 관리소장의 즉흥적인 기분에 따라 정해진다.
▣ 아파트에서는 가장 반가운 날은 비 오는 날, 빌딩에서는 예식 없는 날이다. 이런 날, 지친 몸은 생기를 되찾는다. 비가 오니 공동 작업도 없을 것이다. 밤까지 비가 오면 주차 단속이 면제 된다. 불법 주정차 차량에 스티커를 붙이지 않아도 된다. 스티커 때문에 차량 주인에게 멱살을 잡히고 욕설을 듣는 곤혹을 피할 수 있다. 비가 내리는 날은 폐기물을 몰래 내다 버리는 주민도 드물고, 쓰레기 양 자체도 많이 줄어든다. 잠시 라디오를 켜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도 비가 내려 주는 축복이다.
▣ 사실 경비원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중 반가운 것은 빗방울뿐이다. 눈이며, 꽃잎이며, 낙엽이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들은 다 쓰레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여기서도 시말서 세 번이면 해고다. 빌딩에서도 난 목숨이 간당간당한 신세가 되었다.
▣ 며칠 같이 공부를 해보니, 할머니가 하는 방법으로는 쉽게 합격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욕심이 생겼다. “할머니, 시험을 잘 치려면 기출문제집을 구해서 풀어 보는 게 제일 좋아요.” 그 이후 기출문제집을 함께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내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근데 문제만 푸니까 재미가 없네. 그냥 교과서로 공부하면 안 될까?” 할머니는 국어책에 나오는 시를 사랑했고, 새로 외우는 영어 단어들, 그리고 역사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좋아했던 것이다. 내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공부도, 인생살이도, 주어진 문제 풀이가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나는 할머니께 더 이상 문제 풀이를 권하지 않았다. 대신 혼자 기출 문제집을 풀어 보고 관련된 부분을 교과서에서 찾아 짚어 드렸다. 하루 3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여섯 달을 그렇게 함께했다. 택배가 갑자기 몰려 점심을 거른 날도 공부는 거르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랍고 행복했다.
▣ 요셉 형님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이렇게 큰돈을 가져 본 것은 처음이라며 좋아했다. 그러고는 내가 더 가져가야 한다면서 5만 원을 얹어 줬다. 나는 같이 고생했으니 나눠야 한다고 다시 드렸다. 그날 저녁 형님은 통닭과 꼬치를 한 아름 사들고 왔다. 그날 우리 B조 경비원 넷은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 이것이 감시 일지에 빼곡하게 적힌 내용들이었다. 손글씨로 참 많이도 써놨다. 나를 24시간 감시해 온 것은 바로 주임이었다. 감시를 하고 그것을 적어 내게 하는 데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어 보였다. 용역 회사는 재계약 때마다 잘못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이른바 ‘본보기’로 꼭 한 두명을 자른다. 그래야 다른 경비원들이 정신 차리고 일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본보기로 자를 사람을 가려내기 위해 관리소장이 아니라 용역 회사에서 주임을 시켜 감시 기록을 쓰게 한다는 것을 나중에 다른 동료로부터 들었다.
▣ “경비원들이 낸 항변 이유서를 살펴보니 징계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만한 일로 징계한다면 경비원들이 억울하지 않을까요?”, “회장님 말대로 정직이나 감봉을 시킬 수는 있겠죠. 근데 경비원을 정직시켜 버리면 아파트 일은 누가 합니까? 또 감봉을 하면 임금이 최저임금도 안 될 텐데 그건 위법 아닙니까.”
▣ 올해 터미널은 한국산업 서비스품질지수(KSQI)에서 9년 연속 1위를 했다며 커다란 현수막을 걸어 자랑하고 있다. 이런 현수막을 걸 수 있는 것은, 승객들에게 성심성의껏 응대한 경비원의 수고도 분명히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마 타는 사람은 가마 메는 사람의 수고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 나는 38년 직장 생활을 통해 조직과 상사에 충성을 다하도록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퇴직 후 경비원을 시작하고 제일 처음 한 일이 스마트폰을 없애고 통화만 가능한 핸드폰으로 바꾼 것이었다. 경비 업무를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취침 시간에도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경비복은 항상 입고 잤다. 터미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터미널고속의 한 식구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런 자긍심이 없으면 견뎌 내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격무였다. 손님이 없어 고속버스가 텅 비어 들어오는 것을 보면 회사를 걱정하며 어떻게 하면 버스를 많이 타게 할 수 있을까 궁리했다. 타지에서 올라와 고속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이 최종 목적지로 가는 시내버스 노선을 경비원에게 자주 물었는데, 나는 승객들에게 대답해 주기 위해 이 도시의 시내버스 노선을 모두 외웠다. 터미널 문화관에서 하는 공연 스케줄과 갤러리의 미술전시회 내용도 미리 숙지해 뒀다 답해 줬고, 주차장의 주차 요금표도 외웠다. 외국인들을 대하기 위해 자주 물어 오는 것들을 러시아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정리해 익혔다. 터미널에서 근무하는 동안 월급 값은 하고도 남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터미널고속에게 나는 언제든지 새로 구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 서울 콜센터 소식 들었지? 거기는 200명이나 되는 상담원들이 닭장 같은 방에서 하루 종일 다닥다닥 붙어 앉아 일한다지 않아? 조류독감 때 양계장 닭들이 떼죽음 당한 것과 뭐가 달라? 하루 10시간을 계속 말해야 하는데, 30분 말하고 나면 마스크가 침에 흠뻑 젖는다고 하대. 그런 사람들이 전국에 40만 명이라네, 거기에 비하면 우리는 좀 낫잖아?
▣ 그때는 나도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노동을 하는 줄 알았고 그래서 삶이 더욱 고단했다. 그러나 이 책의 편집자를 만난 후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 작년 8월, 그는 내게 후마니타스에서 펴낸 네 권의 책을 건넸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현대조선 잔혹사』, 광부, 에어컨 수리 기사, 알바생, 대부 업체 콜센터 직원, 이주 노동자 등이 나오는 『웅크린 말들』, 김진숙 지도위원의 『소금꽃 나무』, 그리고 쌍용차 노동자들의 이야기 『그의 슬픔과 기쁨』이었다. 나는 그 책에서 생명이 위협받는 엄혹한 여건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났다. 힘들다고 생각했던 나의 노동은 한낱 응석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부끄러웠다. 나보다 훨씬 힘들고 비참한 노동환경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일하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내 노동의 강도와 환경은 그대로지만, 이런 깨달음 덕분에 이젠 덜 힘들다. 이 점이 더욱 감사하다. 그리고 이 네 권 책을 써준 저자들에게도 같은 이유로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
▣ 가족에게 부탁이 있다. 이 글은 이 땅의 늙은 어머니·아버지들, 수많은 임계장들의 이야기를 나의 노동 일지로 대신 전해 보고자 써낸 것이니 책을 읽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더라도 마음 아파하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