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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 본지 편집주간 임 애 월
물에 갇힌 섬, 그 은유를 넘어서
양 영 길 시인
꼭 만나고 싶었던 시인,
양영길 선생님을 가을호에서 찾아뵈었다.
선생님의 고향마을인 제주도 애월읍 봉성리
<어도초등학교> 교정은
늦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기는 했지만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선생님의 따뜻한 웃음도 참 편안하게 다가왔다.
임애월 : 선생님, 안녕하세요?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8월도 하순인데 아직도 날씨가 정말 덥네요.
양영길 : 반갑습니다. 열대야 일수가 연일 기록을 갱신하는 더운 날씨에, 제주까지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제주는 피서철 휴가지였잖아요. 그런데 올여름은 휴가지라고 딱히 이야기하기가 좀 그러네요. 기후 위기의 시대를 사는 것 같아요.
임애월 : 정말이지 이 여름은 역대급 더위로 온 산천이 펄펄 끓는 것 같은데…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선생님 요즘 근황이 궁금합니다.
양영길 : 더위는 더위로 이겨라, 이열치열이라고 하는데, 그건 젊은 사람들이 이겨나가는 방법이고, 나이가 들면 철이 드나 봐요. 저는 다른 피서방법을 찾아냈어요.
임애월 : 아, 그러세요? 궁금함이 막 몰려오네요. 어떤 피서방법을 찾으셨는지요?(웃음)
양영길 : 집중할 일거리를 만드는 거지요. 요즘 고향 마을의 역사를 찾아 정리하고 있는데,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이 발견되고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지내고 있습니다.
임애월 : 아, 그렇군요. 지금 이곳이 선생님께서 태어나고 자란 고향, 애월읍 봉성리 사무소이고 지금 《봉성리지》를 발간하시는 총책 편집위원장을 맡으셨다고 들었어요.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실 텐데 고향이야기 좀 해 주세요.
양영길 : 그렇지요, 고향, 부모, 모교는 바꿀 수가 없잖아요. ‘고향’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어머니’고요.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엄마’ , ‘아빠’라는 말을 한 번도 못 해 봤어요. 사실 유아적 어휘잖아요.
고향에 대한 시도 몇 편 있긴 해요. 그 요지는 ‘겨울에도 장미가 피었다’는 내용인데요. 산문 같은데 고향 이야기 많이 하죠. 사실 우리 집 마당에는 겨울에도 장미가 피었었어요.
요즘 젊은이들에게 고향을 물으면 ‘엄마 고향’? ‘아빠 고향’? 이렇게 되묻더라고요. 산업화 이전 세대에게는 고향이 있었는데, 산업화, 도시 집중화되는 시대에 태어난 세대는 ‘고향’이란 단어가 좀 생소한 것 같아요.
임애월 : 점점 아득해지는 느낌은 들지만 그래도 고향을 떠나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향수로 가득한 눈물 나는 말이랍니다.
선생님 생애에 있어서 맨 처음 학교인 어도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겼는데…
와~ 학교가 참 예쁘네요. 한라산이 내려다보고 있고 사철 푸른 어도봉이 감싸 안은 이 운동장에서 뛰놀던 선생님의 유년시절이 궁금해집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 있으시면 들려주세요.
양영길 : 운동회 때는 명절 때보다 더 맛있는 걸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나고요. 교무실 난방을 위해 솔방울을 한 포대씩 가져가야 했던 일도 생각나요. 집하고 학교가 가까워서 학교가 놀이터였지요. 여름철인 것 같은데 소나기가 왔다가 끝날 무렵 무지개가 떴는데, 저쪽에 있는 친구와 동생에게 무지개가 떴다고 소리쳐도 모르더라구요. 그래서 달려가 봤는데 무지개가 안 보였어요. 그래서 모두 데리고 무지개를 볼 수 있는 위치로 와서 보고 또 안 보이는 곳으로 가서 보고 운동장을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무지개를 봤던 추억이 있어요.
임애월 : 무지개의 배신은 역시나군요.(웃음)
양영길 : 김치용 무를 시험 재배했는데, 우리가 볼일 본 그걸 거름으로 퍼다가 키웠는데, 수확하니까 나눠 주면서 먹는 방법을 말해 줬어요. 열무김치 담가 먹으면 된다고. 그런데 우리는 그 당시 대변 검사를 하고 회충약을 먹던 시절이었잖아요. 그 대변을 퍼다 기른 걸 생으로 먹으라니까, 먹으려니까 께름칙했던 그런 일도 있었어요.
임애월 : 하하 그렇게 직설적으로 생각하니까 지금도 좀 찜찜하긴 합니다. ㅎ
중·고등학교는 제주 시내에서 다니신 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 모범생이었을 것 같습니다만…
양영길 : 그 당시 중학교를 제주시로 간 경우는 제가 처음인 것 같아요. 그야말로 유학을 간 거지요. 친구들도 많았어요.
당시에 저는 1주일에 한 번 우체국에 가야 했어요. 아버지께 편지를 써야 했거든요. “아버님 전상서”로 시작하는 편지를 최소한 2주에 한 번 이상은 썼던 것 같아요. 우체국에 가서 봤더니 ‘우표 전시회’ 같은 게 있어서 우표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돈이 많으면 ‘쉬트’라는 걸 사서 모으면 되지만 그건 비싸고,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거기 붙어 있던 우표를 떼어서 모으는 정도였지요. 자연스레 편지를 많이 쓰게 되었지요.
임애월 : 한때는 우표수집이 유행이 되기도 했었죠. 그래도 그때 그 편지쓰기가 글쓰기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 같네요.
1987년에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셨는데 시를 쓰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양영길 : 예, 83년인가 84년에 《현대시학》 주간을 하시던 전봉건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어요. 그 후 가끔 편지도 올리고, 수석(水石)을 좋아하셔서 수석 사진도 보내 드리고… 그러다가 몇 년 후에 작품을 보내서 추천 부탁드렸는데, ‘신작시 특집’으로 실어버렸어요. 습작 수준이었던 것 같은데…
연락을 드렸더니, “그러냐”고 웃어 넘겨버렸어요. 그래서 정식 등단은 아니었지요. ㅎㅎㅎ
임애월 : 작품이 좋으니까 실으셨겠지요.
양영길 : 전봉건 선생님은 수석을 참 좋아했어요. 수석에 대한 시도 여러 편 쓰셨고요.
임애월 : 네, 이후 199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시조 「유배지에서」가 당선되었네요.
양영길 :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죠. 벌써 35년 세월이 흘렀네요.
1
등짐을 부려놓고 추사관(秋史館)에 들렀었지
한 평 반 토방에선 강물 소리 그득한데
모슬포 매운 바람만
지게문을 흔들고.
세한도(歲寒圖)에 담은 넋을 몇 마디 여쭈었지
소나무 저리 두고 눈 덮인 동산 향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만 내저었지.
2
두 손을 움켜쥐면 수선 하나 피워낼까?
감았던 눈을 뜨고 하현달만 바라보며
내 등에 짐을 지운다.
그 수선 뿌리 같은.
세상의 뒤쪽쯤엔 저 단산(簞山)도 말이 없네
먹을 간다. 가슴을 간다. 바닷물로 산을 간다.
붓매에 머무는 눈매
물소리만 들려라.
3
고개를 끄덕이면 저 달빛은 더 환한데
어인 일로 지지 못해 가지 끝에 걸렸을까?
산자락 저리 휘어도
저 바다는 푸르를까?
돌아서는 내 발길을 하늘만 쳐다보네
뜰 앞 잔설 위를 낙관 찍듯 밟아본다.
오늘밤 나의 발원을
눈송이야 쏟아져라.
- 「유배지에서」 전문 / 199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임애월 : 그때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을 가져와 봤어요.
“먹을 간다. 가슴을 간다. 바닷물로 산을 간다”에서 유배의 참담함이 느껴지네요.
제주도는 변방 유배지라는 생각이 도민들의 집단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가 봅니다.
양영길 : 제주도는 ‘물 막은 섬’ , ‘물에 갇힌 섬’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인지 늘 갇혀 있다는…, 유배의식이 제게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추사 선생님’으로 시작하는 편지 형식의 시가 제 초기 시에는 많이 있습니다.
임애월 : 옛 정서를 담을 때는 왠지 시조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시각적 운율의 단정함 속에 선비정신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고나 할까요.
아잇적 눈으로는 꿈을 안고 크던 바다
어머님 아니리에 해도 뜨던 그 시절을
소나무 휘인 사연에
둥지 틀던 바다새
내 가슴 칠십리에 남은 것은 더 없는데
바다에만 나가면 옷을 벗고 싶어진다
소금기 건져 올려서
널어 말린 세월 위를
하늘에 연(鳶)을 올려 내려 앉힌 먼 수평을
그 세월 현을 골라 맴을 도는 저 바닷새
내 가슴
섬바위 위를
돌아나간 서귀포
- 「서귀포 바다」 전문
이 시의 2행에 “어머님 아니리”는 어머님 가슴 속의 어떤 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군요. “소나무 휘인 사연”이 곱게 삭지 못하고 한 시대를 넘어오는 것 같네요.
양영길 :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 같아요.
작품은 읽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생각해요. 음식 맛하고 비교할 수 있잖아요. 같은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도 그 맛은 조금씩 다르고, 나 스스로도 처음 먹을 때의 맛과 다 먹고 난 다음의 맛이 다르지요.
임애월 : 여기에서 연(鳶)의 이미지는 멀리 내다보고 싶은. 혹은 멀리 달아나고 싶은 그런 열망의 메신저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생님 시집에서 “연” 관련 작품들이 몇 편 더 보이던데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특별한 환경 속에서 살다 보면 가끔 탈출을 꿈꾸기도 할 테니까요.
양영길 : 제 시집을 너무 촘촘히 읽으신 것 같네요. 혹시 틀린 데는 없나 하고 막 찾으신 건 아니죠? (웃음)
그러고 보니 ‘추사 선생님’으로 시작되는 시에도 ‘연’이 등장하네요. 이 시에서는 비바람에 망가져버린 ‘연’이 나오거든요. 또 궁금 바이러스에서는 ‘연을 만들면 꼭 날려야 돼요’하고 반문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 같아요.
임애월 : 가장 높이 떠서 더 멀리까지 내다보고 싶은 심리적 기제가 내재되어 있는 것 같군요.
두 번째 발간하신 시집 가랑이 사이로 굽어보는 세상을 읽다가 그만 「애기 돌무덤 앞에서」 걸려 넘어졌습니다.
북촌 마을에 가면
제주 4·3 때 군인 한두 명 다쳤다고
마을 사람 모두 불러모아
무차별 난사를 했던 총부리의 서슬이
아직도 남아 있는
조천면 북촌 마을에 가면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흙 한 줌 없는 언덕빼기에
돌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들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들이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흙 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나의 눈에는
너무 낯선 이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누가 이 주검을 위해
흙 한 줌을 허락해 주지 않았을까
누가 이 아기의 무덤에
흙 한 줌 뿌릴 시간마저 빼앗아 갔을까
뺏고 빼앗기는 시대였을까
돌무더기 속에서 곱게 삭아내렸을
그 어린 영혼
구천을 떠도는 어린 영혼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용서를 빈다
제발 이 살아 있는 자들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빌고
또 빈다
- 「애기 돌무덤 앞에서」전문
이 시는 <너븐숭이 4·3유적지>에 있는 아기 돌무덤 앞에 누운 시비로 새겨져 있더군요. “제발 이 살아 있는 자들을 용서하소서” ……에서는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사실 4·3 당시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이나 그 2세들은 4·3에 희생된 분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죄의식으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양영길 : 시비를 세우겠다는 연락이 있어서 한사코 사양했는데, 굳이 세우겠다고 하길래 많이 망설였지요. 세우지 않고 눕히면 어떻겠냐는 제안에 ‘좋다고’ 했어요. 눕혀놓으니까, 어린이들이 장난감이나 작은 과일들을 놓고 가기도 하고 스티커를 붙이기도 하고, 편지를 써 놓기도 해서 볼 때마다 짠~했어요.
2018년 어느 날 지나던 길에 잠깐 들렀더니, 아이들이 이렇게 종이옷을 만들고 와서 입혀 주고 편지를 붙여놓기도 했네요.
임애월 : 아… 정말 가슴이 정말 미어집니다.
무슨 죄나 지은 것처럼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4·3의 아픈 과거들을 하나 둘 드러내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가요?
양영길 : 1990년대 들어 4·3에 대한 시민의식이 크게 깨어나기 시작했죠. 2000년 6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면서는 통일에 대한 꿈도 컸었지요. 통일을 위해서는 분단의 비극을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가 또 큰 과제이기도 했지요.
임애월 : 맞아요. 당시에는 정말 통일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막 뛰었더랬습니다.
양영길 : 제주에서 4·3문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어요. 4·3문학에 대한 저의 논문도 몇 편 있습니다.
임애월 : 네, 「애기 돌무덤 앞에서」… 이 시를 읽으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상상하는 것조차 힘이 들어서 정말 유구무언입니다.
양영길 : 너븐숭이 아기 돌무덤을 찾아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말로만 듣던 그런 무덤이 아니었어요. 한참 멍하니 쳐다만 보다가 왔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아기 돌무덤에 대해서 한 줄의 글도 쓸 수가 없었어요. 한 1년쯤 지나 다시 가면서 몇 줄 써놓고 갔지요. 그제서야 내가 이 참혹한 역사에 한 줄의 글이라도 써야 한다는… 임 시인님이 말하는 부채의식이랄까, 모르겠어요… 4·3 관련 시들이 시집마다 조금씩 있는데, ‘한 권의 시집으로 엮어내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임애월 : “흙 한 줌 허락해 주지 않”았던, 너무나 큰 상처로 남은 비극적 사건 후유증이 집단무의식으로 도민들의 가슴을 아직도 짓누르고 있지요. 이곳 봉성리도 예외는 아니었겠지요? 당시에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였나요?
양영길 : 봉성리에도 피해가 컸어요. 소개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성을 쌓아야 했어요. 봉성리 마을 전체를 한 달만에 성담을 둘러야 했어요. 총을 든 사람들의 명령으로. 밭담, 산담을 다 가져다 쌓고 보초를 서야 했지요.
구몰동 초가집이 전부 불탔고, 초등학교도 불타서 일시 폐교가 되었고요. 4·3평화공원 각명비에는 135명의 희생자 이름이 있는데… 10대도 많아요.
임애월 : 네, 요번에 저도 찾아 읽으면서도 너무 무거워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선생님 댁에는 피해가 없었는지요?
양영길 : 제 선친은 끌려갔었는데 겨우 목숨만 건졌지요.
제가 금강산에 갔을 때 어느 접대원 동무가 4·3 이야기를 하더군요. 아버지가 살아생전 꼭 한 번 금강산을 가 보고 싶어 했었는데… 「접대원 동무」라는 시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임애월 : 4·3 이야기를 하다보니 2021년에 출간하신 시집 『꿔다 놓은 보릿자루』에 실린 「4월에 피는 꽃은」이란 작품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관련해서 한번 읽어보도록 할게요.
제주의 4월은
무자년 제주
꽃 피는 4월은
3만 명이 넘는 꽃다운 우리들 목숨 소지(燒紙)처럼 날아가고
300 마을이 넘게 잿더미 되어
바람만 스치고 지나갔다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간 사람도 있었다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만으로
짓밟힌 사람들도 있었다
제주의 4월에 피는 꽃은
더 가슴 가까이 피어난다
겨우내 불어대던 그 세찬 바람 때문일까
수평선 멀리 보이는 무덤가에 피는 꽃들
바다가 푸르다는 그 눈부신 역사 속에
4월의 제주바람
꽃으로 피어날 때
무자년 그 무자비한 4월은
비명소리뿐이었다
바람 소리
바람 소리
낮아지는 초가집들
바람이었다
다 바람이었다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더 납작 엎드렸다
바다 건너 고을 건너
외진 땅
제주의 4월은
- 「4월에 피는 꽃은」 전문
지은 죄도 없이, 죽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수많은 목숨들이, 4월이 오면 이 섬 여기저기에서 꽃으로 터지며 아프다고,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습니다. 지천에 꽃은 피어나지만 제주의 4월이 유독 아픈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겠네요.
양영길 :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특히 제주 4·3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 선인들의 삶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봐요. 살아서 살아남은 거지요.
임애월 : 사실 제가 요번에 처음으로 4·3평화공원을 다녀왔어요. 다녀오고 나서 마음이 너무 무거워 한 이틀 어지럼증 때문에 멍하게 누워있었답니다. 특히 억울한 영령들의 이름을 새겨넣은 3만여 각명비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정말 한 걸음 내딛는 게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멀리 산다는 핑계로 말로만 어설프게 전해 듣다가, 비록 영상이긴 하지만 눈으로 확인한 당시 현장이 너무 충격적이었고, 뼈아픈 역사적 사실을 개인적으로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두루두루 잊으며 살아온 죄의식 때문이었을 겁니다.
양영길 : 제가 너븐숭이 4·3유적지에서 ‘애기 돌무덤’을 처음 마주쳤을 때가 생각나네요.
어느 문학 교과서에 6·25전쟁 관련 시를 싣고 그 아래 여백에 곱게 봉분을 하고 비석까지 세워진 산소 그림을 넣었는데, 저는 학생들에게 ‘대단히 비사실적이다. 전쟁통에 전우가 죽으면 이렇게 곱게 단장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 전우의 시체를 그냥 놔두지는 못한다. 이유는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급한 대로 주위에 있는 돌을 쌓아서 들짐승들이 파먹지 못하게 하고 나뭇가지로 표시해 둔다’고 설명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너븐숭이에 가 봤더니…
지금까지 ‘애기 돌무덤’이 그냥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부모마저 그 당시 희생됐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니까, 더 가슴이 먹먹했지요. 살아 있는 우리가 아무거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그래서 우선 ‘용서를 빈다’는…
임애월 : 네, 용서라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천의 북촌을 지날 때는 제 심장도 터질 것 같았습니다.
아, 너무 무거워서 이제 화제를 전환해야겠네요. 2014년으로 돌아갈게요. 세 번째 시집 궁금 바이러스는 “청소년이 주체가 되는 시”를 모아 엮으셨는데 청소년을 위한 시집이 맞나요? “엉성하고 어설픈 것, 그러나 뻔하지 않는 것을 고민했”다고요?
양영길 : 《창비》 자회사 <창비교육>이 출발하면서 ‘청소년 시’에 관심을 갖고 청소년 시집을 엮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첫 두 권은 7~8명 시인의 작품을 모아 “창비 청소년 시선”으로 나갔고, 세 번째부터는 시인들의 작품을 공모하듯이 받아서 심사 후 출판을 이어나가게 됐지요. 『궁금 바이러스』는 일곱 번째로 나왔고, 2017년인 것 같아요. 지금은 ‘48’까지 나왔네요.
임애월 : 교육현장에 오래 계셨으니 청소년들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그래도 좀 나으셨을 텐데… 역시 아이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것처럼, 재미있고도 통통 튀는, 궁금한 이야기들이 많네요. 학생들과 소통이 잘 되는 선생님이셨나 봅니다.(웃음)
양영길 : 독자가 없는 시들이 많잖아요. 그 이유는 언어와 정서의 문제겠지요. 서로 소통되지 않는 시가 되다 보니…
요즘은 더 그렇지만, 연령층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잖아요. 타깃 독자층을 정하면 그에 맞는 소통 방법을 찾지 않으면 소통이 원활하지 않겠지요.
임애월 : 이 시집이 꽤 많이 팔렸다고 들었어요.
양영길 : 네, 초판을 3천 부를 찍었고요, 2쇄부터는 1천 부씩… 5쇄 제안이 왔었는데 ‘코로나19’로 멈춰 버렸지요. 청소년 시집이 팔리고 인세도 좀 받으니까, 욕심이 생기잖아요. 그래서 또 한 권의 시집을 써서 도전했는데 심의에서 떨어졌어요.
임애월 : 욕심이 너무 많으셨나요…(웃음)
이 시집 출판 관련 기사를 읽다가 “청소년기를 말더듬이로 지냈다. 더듬는 게 싫을 땐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읽었어요. 사실이었나요?
양영길 : 네, 말더듬이를 심하게 앓았어요. 보통은 말을 하려고 더듬거리지만, 저는 말문이 꽉 막혀 버리더라구요. 말문이 막혀버리면 입술만 실룩거리면서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어요.
보통은 ‘말문이 막히다’라고 하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당황하다’라고 하지만 저는 대답할 말이 있는데도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출석을 부르는데 제 이름이나 번호가 가까이 다가오면 얼굴 근육이 굳어버려서 ‘예’라는 대답을 제때 못하는 거예요.
임애월 : 아, 정말 심하셨군요. 가장 예민한 시기인데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양영길 : 우리 때는 ‘국민교육헌장’도 외어야 하고, 남자들은 군에 가면 ‘군인의 길’도 외어야 했어요. 그럴 때마다 ‘차렷’ 자세만 나오면 그런 곤혹스런 일들을 겪었죠. 첫 소리만 나오면 다음은 풀리는데…,
군에서는 국문과 출신이라고 각종 원고를 도맡아 썼는데, 한 번은 ‘웅변 원고’를 쓰라는 거예요. 그래서 썼더니 웅변대회에 나가라는 거예요. 아니 말 더듬는 걸 다 알면서 그러는 거예요.
임애월 : 고쳐주려고 일부러 그런 걸까요?
양영길 : 글쎄요? 저는 차라리 웅변을 가르치겠다고 했지요. 많은 사람 앞에서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서… 그래서 후임을 가르쳤는데, 제가 더 배우는 계기가 됐어요. 그 과정에서 긴장을 푸는 안면 근육 마사지 방법을 알게 되었지요.
제자들 중에는 말 더듬는 학생들이 가끔 있었어요. 이들에게 제 경험이 많은 자신감을 살려준 것 같기도 해요.
임애월 :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면 좋은(?) 경험으로 남는 것들이 있지요.
약간 뜬금없는 질문 하나 드릴게요. 바야흐로 AI 시대가 도래하고 있잖아요? 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던 AI들이 사람을 대신하여 여러 가지 일을 실제로 하고 있기도 하죠. 그런데 예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라고 합니다. 예술은 인간의 감정 영역이잖아요. 그런데 AI가 시인보다 더 멋지고 감동적인 시를 쓴다고 가정할 때,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혹 그 정도가 되면 AI를 새로운 인격체로 인정하게 될까요?
양영길 : 예, 저도 챗GPT를 빌어 몇 번 시도해 봤어요. AI가 사람보다 학습력이 좋아서 훈련을 시킬 만했어요. 그런데 훈련이 되면 일반화시켜버려서 개성 있는 글, 양영길다운 양영길에게만 있는 그런 문체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개성 있는 문체를 보편적인 문체로 윤문해버리는 그런 안타까움이 있죠.
앞으로는 개성 있는 문체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요… 디테일도 그 중 하나겠지요. 잘못하면, 누가 가장 먼저 썼느냐의 싸움이 되기도 하겠죠.
‘엄마’ , ‘누나’를 가장 먼저 시에 쓴 시인은 김소월이구요, ‘키스’를 가장 먼저 쓴 시인은 한용운이잖아요. 제주어를 가장 먼저 시 속에 가져온 시인은 김광협이구요. 또 제주 4·3의 실상을 제대로 소설화한 작품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구요.
AI는 이렇게 누군가가 시작하면 그것을 학습해서 ‘따라쟁이’는 하겠죠.
임애월 : AI에게 ‘양영길다운’ 정보만 입력시키면 ‘양영길다운 시’가 나오지 않을까요?
양영길 : 그러게요. 문학가들은 이를 이용하여 내 걸로 만드는 방법 모색을 할 수도 있다고 봐요. 이용하고 부려서 내 글을 살찌우면 되는데, 그런 마인드를 키우는 게 관건이 되겠지요. 독자가 있고 팔리는 작품이 우선이니까요.
임애월 : 멀지 않은 미래에 다가올 상황 같아서 정말 궁금했답니다.(웃음)
금년 7월에 시집 『꼰대론』을 출간하셨네요.
“꼰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발버둥칠 때마다 점점 꼰대가 되어가고 있었다. 차라리 꼰대가 돼 버리자, 남다른 찐꼰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고 「시인의 변명」에서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꼰대’라는 말 속의 의미는 단순하게 세대 간의 불통만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낮은 지적겸손도가 그 대표적인 원인이라는데, 나이나 경험치가 많다는 자부심으로 자기 방식이 다 옳았다는 선택적 기억이나 확증 편향에 빠진 어른들이 의외로 점점 많아지는 이유는 뭘까요? 살아온 시간에 대한 자기보상심리일까요?
양영길 : ‘꼰대’라고 하면 새로운 것을 얼른 받아들이는 걸 경계하는 스탠스잖아요. 하나의 방법론이지요. 예를 들어 직장이 있어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 출퇴근 길이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데, 처음 몇 차례 이길 저길 다녀보고 난 다음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으레 같은 길만 고집하게 되거든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걸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고정되어 버리죠. 일하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도 비슷하게 되지요. 여러 방법이 있는데, 잘 처리되었던 방법에 고정되어서 다른 방법을 시도하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그래서 ‘내가 해 봤는데’가 나오면, 다들 ‘꼰대’라고 하잖아요. ㅎㅎ
몰랐다
‘저 새끼 완전 꼰대’라고 혼자 중얼거릴 때
나도 꼰대가 되고 있었다
어이없는 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놈이라고
씨부렁거리며 걷던 길에서
나도
어이가 없는 사람이란 걸
어림 반 푼어치도 안된다는 걸
진짜 모르고 있었다
모르겠다
나의 입에서 꼰대 냄새가 났다
김칫국으로 양치라도 해야 할까 보다
핑계를 찾아야 했다
모른 척 해야 했다
아니, 소릴 질러야겠다
‘어딜 감히’
‘내가 누군지 알아’
글쎄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이야기로
시작한 고민
꼰대라도 젊은 꼰대가 되어야겠다
꼰대 진단 테스트를 했다
‘꼰대 꿈나무“라는 진단이 나왔다
어쩌다 꿈나무가 되었다
어영부영 호구가 되었다
- 「어쩌다 꼰대/꼰대론 3」 전문
임애월 : 사실 꼰대 아닌 어른 찾기가 더 힘들어진 요즘입니다. 이 시집에서는 ‘꼰대’를 앞세워 진짜 꼰대들을 은근히 풍자하고 있는 게 느껴집니다. “어딜 감히”나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하는 꼰대들이 우리 주변에 생각 외로 정말 많거든요.
양영길 : 저도 분명 ‘꼰대’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하하하
임애월 : (웃음) 이 작품을 읽다가 “‘꼰대 꿈나무’라는 진단이 나왔다”는 대목에서 혼자 빵 터졌습니다. 꼰대에도 꿈나무가 있구나… 기발한 발상이고 통쾌한 풍자입니다.
양영길 : ‘기발한 발상이고 통쾌한 풍자’라… 칭찬 맞죠, 찐꼰대가 맞네요 ㅎㅎ
찌그러진 냄비에
라면을 끓였다
체면과 품위를 넥타이 풀듯 벗어놓고
내 성질머리와 처지를 닮은 양은 냄비에
라면이라도 먹으려고
끓였다
금방 뜨거워졌다가 금방 식는다고 나무라지만
내 성질 숨김없이 그대로 보여줄 줄 아는
솔직함이 귀한 시대에
찌그러진 만큼 상처 많은 양은 냄비에
청양고추를 썰어놓고 끓였다
화끈할 때를 알아 뜨거워짐을 주저하지 않고
뒤끝 없이 식을 때를 알아 금방 식어버릴 줄 아는
나의 양은 냄비
그 뜨거운 맛
아, 매운 맛
기분 좋은 땀이 흘렀다
내일은 바람이라도 좀 불었으면
- 「냄비 근성」 전문
임애월: 뭐든 빠르게 받아들이고 자기화하는 한국인의 특성 때문에 특히 IT나 기술 분야에 있어서는 대단한 발전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솔직함이 귀한 시대”에 금방 식을지라도 양은 냄비 같은 뜨거움이 앞으로는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네요. 양은 냄비에 끓인 라면이 제일 맛있다는 얘기도 있으니까요. ㅎㅎ 금방 식는 건 아무래도 “상처” 가 많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야 사니까요. 이 시를 읽고 나니 “냄비 근성”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양영길 : 모든 걸 ‘결과’ 중심으로 인식하는 사회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모든 게 ‘결과’와 ‘성과’로 판단하는 사회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과정’이 더 중요하잖아요. ‘과정’은 개무시당하고 오직 ‘성과’에 눈멀어야 살아갈 수 있는 ‘개바쁜’ 사회, 누군가는 ‘첨단에 걸신들린 사회’라고 하기도 하더라구요…
임애월 : 아하, 제가 시를 잘못 이해했군요. 그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ㅎ
등단하신 지가 40년이 다 되어가는데 시집이 5권이면 너무 게으르신 것 같네요?(웃음)
양영길 : 40년이면 4년에 한 권씩 10권은 내야 정상이라는 건가요? 하하하
사실 그렇게 하고 싶지요. 그런데 샛길로 빠지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우뇌적 글쓰기가 아닌 좌뇌적 활동을 많이 했어요. 『한국문학사 인식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학사 인식 방법론’도 있고요 『지역문학과 문학사 인식』, 또 『이론을 뛰어넘는 문학 이야기』 등의 연구와 저술 활동을 했어요, 또 창비에서 나온 『선생님과 함께 하는 문학 답사』에 공동 저자로도 참가했고요. 그럭저럭 문학 관련 크고 작은 글들을 많이 쓰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임애월 : 아… 네, 문학이론 쪽을 연구하시느라 그러시군요.
텃밭 가꾸기 말고 혹시 취미로 하시는 일이 있으신지요? 글 쓰는 일 외에 혹시 계획(앞으로)이 있으시면 살짝 알려주세요.
양영길 : 사진 촬영, 수석 감상 이런 취미가 있어요.
제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73년부터일 것 같아요. 이번 고향의 향토지 작업하면서 살펴봤더니 1974년에 찍은 고향 관련 필름도 있었어요.
앞으로의 계획이라면…
지역문학, 지역사에 관심을 갖다보니 제주에는 증발되어 버린 역사들이 좀 있어요, 잘못 전해지는 역사도 많고요. 찾아서 보듬고 바로잡고 그런 막연한 쓸거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임애월 : 50년 전 고향의 사진이라면 정말 대단한 보물을 찾아내셨네요.(웃음)
제주 사랑도 남다르십니다.
후학들을 위해 시창작 강의를 하신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문단에 제자분들이 많으시겠어요.
양영길 : 아, 제주대학교에 시간강사를 시작할 때부터 ‘시창작론’을 강의하게 되었어요. 신춘문예 당선 이듬해부터인가였어요. 그때는 강사 자리를 얻은 것에 급급해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큰 고민 없이 가르치게 되었죠.
그냥 시론 책을 교재로 정해서 가르치게 되었지요.
사실은 제가 1983년에 부산대학교에서 김준오 교수의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어요. 두어 달이었지만, 그때 김준오 교수가 『시론』이라는 저서를 금방 냈을 때였지요. 진짜 따끈따끈한 책이었지요. 사실 ‘시론’ 강의를 책으로 받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소설창작론’은 많이 나와 있어서 강의도 받고 혼자 공부도 했었지만…,
그렇잖아요. 처음 대하는 것은 모든 게 새롭잖아요. 그때 양왕용 시인 강의도 들었구요. 그때는 시를 쓰겠다는 생각으로 강의를 들었는데, 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배운 느낌이었지요.
임애월 : 방송대학교에서도 강의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양영길 : 방송대 외래교수를 하면서도 ‘시창작론’을 가르치게 되었어요. 방송대는 따로 교재가 있어요. 처음에 그냥 주어진 것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가르치면서 계속 고민이 생기는 거예요.
‘공부시켜서 시험을 잘 보게 가르칠 것인가’ , ‘한 줄이라도 쓰고 싶은 에너지를 충전시켜 줄 수는 없을까’ 이런 고민이 생기는 거죠.
몸을 움직이는 체육하고 머리를 움직이는 문학하고 다르겠지만, ‘자전거 타기’를 공부하는 데는 이론은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수영’도 마찬가지고요. 준비운동과 안전사고 예방 교육을 간단히 하고 바로 물에 몸을 담그는 데서부터 ‘수영’ 공부는 시작되잖아요. 그런데 ‘시창작론’은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걸 구경하면서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이론만 가르치는 그런 스탠스였거든요.
임애월 : 이론 중심 강의에 불만이 많으셨나 봅니다.(웃음)
양영길 : 한라대학에도 ‘보따리 장사’ (시간 강사를 이렇게 이야기해요)를 했었는데, 학장님께 건의했죠. ‘문예창작과’를 개설해 주십시오, 하고.
그때, 문예창작과가 있는 대학의 커리큘럼을 파악하고 문창과에서는 어떤 실습을 시키는가에 대해 직접 찾아다니게 되었지요.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얻은 것이 있었어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은유’ , ‘상징’을 몰라도 시를 쓰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였지요. 시험을 치르는 데는 아주 불리하겠지만…
그래서 평생교육원이나 도서관 등에서 어른들에게 강의할 때는 ‘워크 페이퍼’를 바로 들이밀었죠. 처음에는 많이 당황하는데 두세 번 하니까 즐기더라구요.
결론은 “‘내용’은 잘못 가르쳐도 A/S가 가능하지만, ‘방법’이 잘못된 것은 되돌리기가 어렵다.”입니다.
지금도 시창작 교실을 가끔씩 열거든요. 그때마다 저를 소개할 때 그냥 ‘시창작 전문 강사’라고 할 때도 있지만 첨언해서 ‘과정 중심 시창작 전문 강사’라고 꼭 ‘과정 중심’을 강조해요.
시는 열심히 공부해서 잘 쓸 수 있지요. 하지만, 연습이 뒷받침이 안 되면 늘 아쉽고 부족하잖아요. 연습 위주의 강의를 하면서 개개인의 개성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아무리 붓글씨에 대한 식견이 풍부해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글씨를 잘 못 쓰잖아요. 자기 필체도 세우지 못하고. 시도 그런 것 같아요. 연습을 통해서 자기만의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임애월 : 네, 맞는 말씀이십니다. 문학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갖고 계시네요.
선생님께서 발행하시는 《돌과바람문학》도 읽어봤답니다.
양영길 : 2007년엔가 문학동인으로 출발하여 7~8년 전에 ‘돌과바람문학회’로 개칭하고 엔솔로지는 연 2회 발행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작품들도 더러 있지만 그 작품들이 자라서 훌륭한 작품의 밑거름이 될 거라 믿거든요.
회원들이 50여 명 되는데 아주 열정적이에요. 원고가 넘쳐서 양해를 얻으면서 조정해야 할 정도거든요. 모임도 1년이면 6회를 계획하고 만나죠, 그냥 단순하게 모여 먹고 노는 게 아니에요. 답사, 야외 강의 등 모임으로 문학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있지요.
임애월 : 네, 앞으로도 한국문학을 위해 계속 애써주시리라 믿습니다. 바쁘실 텐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양영길 : 멀리까지 찾아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한국시학》이 더욱 큰 발전 이루시길 기원드립니다.
청소년기를 말더듬이로 지내셨다는 양영길 선생님
‘꼰대’ 같지 않은, 깨어있는 시대정신에
존경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물에 막힌 섬, 물에 갇힌 섬
제주의 바람은 그 한계를 넘어서 분다.
■□ 시인의 자선시
토끼 한 마리 키우기 외 4편
양 영 길
내 안에 토끼 한 마리 키워볼 일이다
길고 큰 귀 곧추 세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다 듣다가도
두 귀 한 손에 잡혀 그네 타듯 공중에 매달리면
아무렇지도 않게 두 손 모아 고른 숨소리로
두 눈만 껌뻑이는 순종에 길들여진 토끼
그런 토끼 한 마리 키워 볼 일이다
쓸개 빠진 일을 할 때나
간뎅이 부은 일을 해야 할 때에도
그 간뎅이나 쓸개
윗물이 맑게 흐르는 언덕 위
바위 밑에 꼭꼭 숨겨두는 토끼처럼
내 안에 토끼 한 마리 키워볼 일이다
사람이 귀신보다 더 무서운 세상
사람보다도 카메라가 눈 흘기며 지켜보는 세상
지나온 발자국 몇 개인지
어느 골목길 돌아 비틀거리면서 나왔는지
필름 끊겨 잃어버린 기억 몰래 보관하듯
나보다 더 잘 새겨 넣어두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그 알량한 자존심 하나 잠시 접어두듯이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집구석에 처박아 두고 다녀도 좋은 걸
괜히 가지고 다니지 말 일이다
쓸개 빠진 소리한다고
부은 간뎅이보다 더 아픈 말 한 마디로
멀쩡한 사람
바지저고리로 만들어 버리는 말의 성찬을
웃으면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세상에서
간뎅이 숨겨두고 다니는 토끼처럼
잠시 잠깐이라도
간이랑 쓸개랑 집에 두고 다니는 토끼 한 마리
내 가슴 초록 풀밭에 풀어놓아 볼 일이다
패랭이꽃이었을 거야
패랭이꽃이었을 거야
바람은 없었고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던가
샘물 소리가 들리는 듯했어
아니 노래 소리였는지도 몰라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어
내가 그녀의 심장소리를 엿듣고 있을 때
샘물은 아무도 모르게 나무를 타고 올라
꽃망울로 터져 나오고 있었어
나는 그 때 수영을 하고 싶었을 거야
강을 건너고 싶었을까
패랭이꽃이 물위를 떠돌고 있었어
죽은 물고기도 떠돌고 있었어
멀리 바다가 보이는 길을
고개 숙여 걸을 때였던가
바람이 말을 걸었어
그건 말이야 앉은뱅이꽃인지도 몰라
그래, 내가 앉은자리가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는지도 몰라
보리가 고개를 세우다
물 좋은 곳에서 자라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지만
내가 사는 목마른 땅
겨울 칼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푸른 기운 하나로 버티고 자라는 보리는
익을수록 고개를
세운다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듯
세상 일 함부로 거스를 수 없다며
까끄라기 날을 벼리고 빳빳이
고개를 세운다
그러다가도
애태우던 비 한 번 실컷 맞거나
겨울바람보다 훗훗한
봄과 여름 사이 샛마파람 한 번 정신없이 맞으면
고개 숙일 겨를도 없이
그냥 정신을 놓고
혼절하듯 뿌리 채
무너져 버린다
쌀처럼 하얗게 변질되기를 한사코 거부하며
밀가루처럼 표백되지 않는 고집 하나로
칼바람 메마른 땅
긴긴 겨울 속에서도
청청하게 자라는 푸른 기운
그 기운 한 잔 술에 담겨 세상사는 일로 흔들리면
물 좋은 곳에 다시 태어나
눈보라치듯 하얀 거품 토해내며
이번에는 사람들의 고개를
빳빳이 세운다
상사화 꽃이 피었습니다
미쳐버렸어
그 해 여름 무더위 끝에
이파리 모두 말라죽자
그냥 미쳐버렸어
그렇게 상사화는 피어났어
바다를 사랑하고 싶었을 거야
벼랑 위에 서서
가녀리게 몸을 태우며 몸부림치는 촛불처럼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바다의 절규가 가슴을 뒤흔들 때
상사화는 꽃으로 피어났어
바다에게 물어 봐
눈부시게 꽃을 피우는 것보다
소문만 무성한 이야기의 남의 풀잎 사이에서
숨죽이며 피어나
어리석고 비겁한 다수가
불의에 타협하며 짓밟은 나의 진실을
이를 갈며 토해내겠어
짧은 생명의
붉은 울음으로 토해내겠어
지쳐버렸어
장마철 물난리 겪으면서 흘린 눈물 모두 말라
불더위 속에
내 사랑이 다 말라버렸어
꽃잎도 이슬처럼 잠깐 피었다가 말라 버리고
영원한 나의 생명
그 땅 속으로 숨어 들어가
나뭇잎이 물들어가는
숨소리를 들어보겠어
노을이 물 드는 이유에 귀기울여 보겠어
이제 가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겠어
그림 그리기
그 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
그림이랄 것도 없는 그런 그림이었어
새도 아니고 말도 아닌 그런 그림이었어
붉은 갈기도 그려 넣고
초록 날개도 그려 넣고
닭의 볏도 그려 넣고
눈은 하나였던가
아니 둘이었을 거야
하나였다면 나는 내가 그린 그림에
무서워서 잠도 못 잤을 테니까
그림을 그리고 나서 단잠을 잘 수 있었던 건
꿈을 꾸고 싶었기 때문일 거야
그 그림이랄 것도 없는 것을 타고
아무 곳이든 가고 싶었었거든
꿈이랄 것도 없는 그런 꿈이었어
새도 아니고 말도 아닌 것이
붉은 갈기를 세우고
초록 날개를 파닥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어
눈이 두 개였는지 하나였는지
그건 모르겠어
닭의 볏이 유난히 빨갛다고만 생각했었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는데
후에 안 일이지만
그녀의 입술이 빨갛게 반짝이는 걸 볼 때마다
그 때 그 그림인가 꿈인가가
나를 찾아왔었어
나의 어둠을 밝히며 나를 흔들고 있었어
양영길 시인 약력
제주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9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바람의 땅에 서서』 『가랑이 사이로 바라보는 세상』
『궁금 바이러스』 『꿔다놓은 보릿자루』 『꼰대론』
저서 『한국문학사 인식 어떻게 할 것인가』 『지역문학과 문학사 인식』
『이론을 뛰어넘는 84가지 문학 이야기』 『선생님과 함께 떠나는 문학답사』 『열정과 통찰』
중등 교장 역임, 제주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한국방송통신대학 제주지역학습관 외래교수 역임
영주어문연구회 회장 역임, 제주독서교육연구회 회장 역임
(사)제주문화포럼 이사장 역임. 현재 <돌과바람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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