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모든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것 또한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것이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면 연기적 관계인 것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저 한 그루 나무에서의 잎과 뿌리의 일처럼 동시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원인이 곧 결과이고 결과가 곧 원인이다. 그러므로 나타난 현상을 보면서 그 원인을 함께 보지 못하면 오해와 불통을 생산해내게 된다. 어쩌면 인간세상의 모든 분열과 갈등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문제 삼아 북한이 막말 위협을 하고 있다.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언사가 마치 저잣거리의 싸움꾼처럼 무지막지해 보인다. 넘어져 코가 깨진 사람에게는 훈계나 힐난이나 경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은커녕 큰싸움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 현명함이란 단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덕목이 아니다. 집단과 집단 간의 화목, 국가와 국가 간의 평화에도 현명함이 요구된다. 지도자에게는 그래서 특히 그것이 더 필요하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무기 개발을 결코 긍정하고 묵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북한이 저렇게 막말과 자충수를 둘 수밖에 없는 원인을 이제 드러내놓고 함께 이야기 해보자는 것이다. 훈계하거나 약을 올리거나 비웃기보다 조금 더 이해하고 인내하면서 화해의 접점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나아가 상대를 탓하기 전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대의 입장을 한번 헤아려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증오보다는 화해가, 전쟁보다는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견해를 표출하는 사람이 드물다. 왜냐하면 아직도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나 냉전시대의 유물인 녹슨 이념의 칼날을 여전히 보검인 양 휘두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걸핏하면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면서 건전한 논점과 논쟁 자체를 막아버린다. 증오는 쉽고 이해는 어렵다. 시대는 빠르게 바뀌어 가는데 극단적인 증오심과 이분법적 관념은 바뀔 줄 모른다. 누군가 극단으로 기울어진 추를 중간에다 맞추기 위해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발언을 하거나 하면 ‘북한 비위맞추기’니 ‘북한퍼주기’니 하는 말을 함부로 하면서 폄하한다. ‘비위맞추기’는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에게, ‘퍼주기’는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하는 말이나 행위이므로 자신의 말 속에 숨어 있는 그러한 못된 차별상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진정 평등한 자리에서 진실된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면 그런 말은 결코 나올 수가 없다.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쥐는 고양이를 물려고 대든다고 했던가. 북한은 또다시 핵실험을 하겠다고 한다. 북한의 저러한 행동은 정상이 아닌 듯 보인다. 두려움과 좌절감 때문에 과잉반응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북한은 그것이 과잉반응인지도 모를 만큼 병증이 깊어보인다.
핵위협은 북한을 심리적으로 오랫동안 좌절과 두려움에 떨게 하였을 것이다. 예컨대 한반도에서 미국의 핵위협이라는 실제적 원인이 핵무기개발에 대한 북한의 저 광신적인 집착을 불러왔을 거라는 예측을 할 수 있다. 원인과 결과가 분리되지 않는 거라면, 미국의 핵위협과 북한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강박증은 결코 따로 생각할 수 없단 얘기다.
전후 60여년 동안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방어이미지는 핵무기에 치우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미연합훈련 때에는 핵탄두를 장착한 전투기를 띄우기도 했다. 김일성이 가장 무서워 한 것은 미국의 ‘핵 배낭’이었다고 한다. 1991년 부시 행정부의 ‘핵무기 감축선언’에 따라 한반도에 배치되었던 핵무기가 철수되기 전까지 남한에는 2천여기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김일성은 잠 한번 마음 놓고 잘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로도 미국의 ‘핵우산정책’이 지속됨에 따라 북한은 핵무기의 위협에서 결코 한번도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핵무기는 북한의 도발야욕을 억제하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북한에게 기어코 핵무기를 가져야겠다는 저 무서운 집착병을 유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 만약 남한이 북한의 처지라면 어떻게 했을까? 국민을 먹여 살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핵무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정부도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혈안이 되지 않았을까? 그것이 60년이나 계속된다면 그 두려움은 병적으로 강화되고 체질화되어 우리 정부도 혹시 지금의 북한처럼 군사력만 기형적으로 키우게 되지 않았을까? 결코 북한을 편들자는 게 아니다. 저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북한을 일단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해결점을 찾기 위해선 이해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북한은 핵에 대한 두려움을 그동안 강박적으로 꾸준히 표출해왔다. 미국 핵무기에 대한 두려움은 수많은 지하터널을 파게 했고 급기야 전국토를 지하요새로 만들어버렸다. 수많은 인민을 아사지경으로 내몰면서도 핵보유국만이 체제유지와 살길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김일성과 김정일은 '강성대국'을 외치면서 핵무기 개발에만 혈안이 되어 살다가 갔다. 이성마저 상실한 두려움은 저렇듯 무섭고 질기다.
어찌 북한만 탓할 것인가. 남한도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만이 살길이라는 위험천만한 꿈에서 헤매고 있듯 남한 또한 핵발전소를 더 지어서 경제성장을 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허황한 꿈에서 깨어날 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북한의 핵무기가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면, 남한의 핵발전소는 경제성장이라는 ‘탐욕’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 또한 두려움이 낳은 자식이다. 자기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더 많이, 더 빨리 축적하려는 것이 탐욕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에 ‘악’이란 게 존재한다면 ‘두려움’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부정적 에너지인 두려움은 언제나 파괴와 재앙을 몰고 온다. 핵도 전쟁도 두려움에서 나왔다. 핵은 인간 마음 속의 두려움과 정확히 상응하는 물질이다. 그러므로 핵이야말로 인간 세상에서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애물단지’다. 그 애물단지를 어떻게 해체하고 없앨 것인가, 그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러나 굉장히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온 근원, 즉 인간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제거해야 하니까.
그런 이치라면, 북한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저 집요한 의지는 그 어떤 물리적인 제재로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에게 그 오래된 핵위협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위험천만한 핵발전을 확대하려는 우리정부나 관료들은 국민들이 아무리 말려도 그것을 쉽게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경제성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체질화된 강박적 두려움에서 먼저 벗어나야만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은 크고 작은 두려움들을 언제나 옷처럼 껴입고 산다. 개인이든 국가든 그 두려움을 벗지 못하는 한 우리는 불행에서, 세상은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그 두려움을 벗지 못하는 한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서로를 죽이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 두려움을 벗지 못하는 한 '핵'은 인간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하여 언젠가 그것은 세상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날려버리거나 대기와 대양과 대지의 혈관속에 방사능이라는 독극물을 서서히 주입하여 이곳의 모든 생명들을 고통으로 말려죽이고 말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적은 북한도 아니고 가난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 것 같다. 진짜 물리쳐야 할 적은 우리들 속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저 형체없는 온갖 '두려움'이 아닐까? 복사꽃 살구꽃 흐드러지는 이 화창한 봄날에 나는 왜 이렇듯 섬뜩한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가. 이 또한 두려움 때문일까? 두려움은, 남녘에서 북녘까지 봄꽃이 피어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전이되나 보다. 내가 발 디딘 대지의 북쪽 땅 곳곳에서도 며칠 후면 화사한 봄꽃들이 만발할 것이다. 이제 곧 경천동지할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날 어느 산하의 땅 아래선,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도 얼마나 많은 뿌리들이 꽃잎을 피우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