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혈사의 창살문양을 아십니까?
내소사 대웅전과 성혈사 나한전
김우출(k82115) 기자
내소사 대웅보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관음봉 아래 자락에 안기 듯 자리한 내소사는 진입로 양쪽 전나무 숲이 한껏 풍치를 더하는 가람으로 백제 무왕 34년(633) 혜구두타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 대소래사와 소소래사로 나뉘었고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소래사라고 한다. 예전에 내소사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함께 4대 명찰로 유명했지만 전쟁에 불타 없어져 내소사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소래사가 왜 내소사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성종 17년(1486)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소래사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내소사로 된 것은 그 후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고려 때의 사적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인조11년(1633)에 청민선사가 중건했고 지금의 대웅보전은 그때 지어진 건물이다. 그 후 1902년 관해선사가 중수하고 만허선사가 보수하였으며, 1983년 혜산스님의 중창으로 지금의 대가람을 이루었고, 1986년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일원(一圓)이 문화재보호구역(전라북도 기념물 제 78호)으로 지정되었다. 예전에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함께 변산의 4대 명찰로 꼽혔으나 다른 절들은 전란 통에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내소사만이 남아 있다.
소래사였던 이름이 언제부터 내소사로 바뀌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나당 연합 때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이 절에 들러 시주했기 때문에 소래사가 내소사로 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근거로 삼을 만한 기록은 없다.
내소사가 간직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먼저 대웅보전(보물 제 291호)을 들 수 있는데, 이 건물은 못하나 쓰지 않고 깍은 나무를 모두 끼워 맞춰 지은 것으로 그 노력과 공이 대단한 건물이다. 측면 각3간 다포식 팔작 지붕의 정면 법당으로 내소사를 유서 깊은 사찰로 보는 근거 중의 하나가 된다.
특히 빼어난 단청솜씨와 연꽃을 연속문양으로 조각한 화사한 꽃 문살은 초화문을 투각한 정교한 공법을 사용했고, 내부는 모두 연꽃 봉오리와 구름을 조각하여 운궁이라는 장식적인 형태이다. 국내 제일의 후불벽화인 백의관음보살좌상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이다.
이 밖에도 고려동종(보물 제227호), 법화경 절본사본(보물 제278호), 영산회 괘불탱(보물 제 1268호), 설선당과 요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내소사 3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24호) 등이 있다.
이 절은 바위들이 뾰족뾰족 솟은 능가산을 배경으로 자리잡았다. 대웅보전의 견고한 짜임새도 볼만하지만, 내소사의 진짜 풍경은 이 웅장한 능가산 절벽들과 어우러진 가람 전체의 조화일 것이다. 옛 스님들이 가람의 터를 정하고, 건물들의 위치를 정할 때, 가장 세심하게 고려한 것은 뒤의 배경이 될 산세의 모습이었다. 따라서 뒷산과 가람이 일체화된 내소사의 유장한 모습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내소사 대웅전은 보물 제 29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개암사를 들려 올 경우 두 건물이 쌍둥이가 아닐까 할 정도로 닮았다. 그것은 두 건물 모두 조선 중기 이후 발달한 화려한 다포 양식을 채택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같은 능가산을 사이에 두고 지어진 건물이라 비슷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고려 때 만들어진 삼층석탑이 있다. 생김새는 그리 안정적이지는 못한 것 같다. 사방에서 보았을 때 균형이 잘 맞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오른쪽이 옛날 연못이었던 자리인데 이제는 무설당이 들어서 있고 왼쪽에는 설선당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에 얽힌 전설
청민선사가 이 절을 중건할 때 목수를 불렀는데 그 목수가 3년 동안을 말 한 마디 않고 건물에 들어갈 나무만 깎고 있었나 보다. 법당보살님은 이를 목수가 묵언 수양을 하고 있었고 표현했다. 어찌 되었건간에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나무만 깎고 있으니 사미승이 장난기가 발동했던 모양이다. 목수가 깎고 있는 나무토막 중에 하나를 몰래 숨겨놓고 모른 체 했다.
마침내 모든 나무를 다 깎았다고 생각한 목수는 드디어 나무를 헤아렸고 부족한 것을 안 목수는 자신의 수양이 아직 부족한 것으로 생각해 청민선사에게 절을 지을 수 없다고 했단다. 그러자 선사가 그 부족한 한 토막은 이 절과 인연이 없는 것 같으니 그만 생각을 바꾸어서 절을 달리 지어달라고 사정했다. 목수가 할 수 없이 남은 토막만 가지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법당 안에 오른쪽 윗부분 내 5출목의 한 부분이 비어있다. 그 옆에도 빈 부분이 있는데 단청의 유무를 가지고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원래 지을 때부터 없던 곳은 단청이 칠해져 있고 후에 빠진 부분은 단청도 빠져있다. 절을 지었으니 단청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느 날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해주겠다고 선사에게 이야기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100일 동안 누구도 건물 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래 선사와 목수는 교대로 그 건물 앞에서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게 지켰다. 99일이 지나도록 인기척도 없고 먹을 것도 들어가지 않으니 사미승이 얼마나 궁금했겠는가? 그래 목수가 지키고 있을 때 사미승은 주지스님이 부른다고 거짓말을 하고 기어이 들여다보고야 말았다.
그러자 하얀색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개짓을 해서는 화려한 물감을 만들어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이에 너무 놀란 사미승은 자세히 보고자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삐걱하는 소리가 나고 놀란 새는 그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단청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 안에 좌우 한 쌍으로 그려져야 할 그림이 좌측 창방위는 바탕면만 그려져 있고 내용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 새를 사찰에서는 관음조라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에 새울음소리가 나는데 그 새가 관음조라고 한다. 목수나 관음조나 모두 관음보살께서 현신하신 것이라는 설명이다.
성혈사(聖穴寺) 나한전(羅漢殿)
소백산 일원에서 유명한 사찰이라면 희방사, 비로사, 초암사 정도만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소백산 산자락에 유서깊은 천년고찰 성혈사(聖穴寺)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성혈사는 1:50,000 지형도에 조차 매우 작은 글씨로 기존 등산로와 동떨어진 위치에 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백산 국망봉 남쪽 초암사 갈림길에서 백두대간을 떠나 남동쪽 963m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초암사계곡과 복간터골 사이)에 있다.
성혈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의상대사가 초암사 에서 수도하던 중, 장소가 불편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성혈사'라는 이름은 절 아래 300m 쯤 성인이 나온 암굴이 있어 성혈사라 명명하였다. 다시 한번 말한다. 성혈사는 영주시 순흥면 덕현리에 있다. 순흥초등학교 배점분교를 지나 주차장에서 초암사 가는 길과 갈라진다. 소백산 자락이라 가파른 길이지만 꼭 한번 찾아 볼 만한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중창된 것이지만 고색창연함은 그 어느 사찰에도 뒤지지 않는다. 보물 제 832호인 나한전(羅漢殿)이 이 사찰의 소중하고도 볼 만한 유적이다.
이 나한전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의 단층 맞배 기와집으로 공포를 기둥과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 얹은 다포식(多包式)건물이다. 임진왜란 이후 중창되었다. 정면 3칸의 창호를 꽃살 창호로 장식했다. 특히 창호의 어칸 부분은 연못에 게, 물고기, 동자상, 여의주, 기러기 등을 조각하여 진풍경을 이루고 있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약칭이다. 잘 알고 계시다시피 성자의 자격을 지닌 사람을 나한이라 부른다. 이것은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한전을 응진전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절집은 상징으로 가득찬 장엄의 세계인 것이다. 그 상징을 다 읽지는 못하지만 눈에 그 모습을 담아 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대웅전 뒤뜰에 부채살처럼 가지를 펼친 노송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이 절에 와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할 것은 산신각 뒷산 만지송, 나한전 앞 석등, 석조비로자나불, 16나한, 나한전 공포벽화불, 내출목과 대량의 단청, 우물반자의 우화(雨花) 무늬, 꽃 창살 무늬 중 연꽃 가지를 잡고 있는 동자, 학, 개구리, 물고기, 꺾어진 모란 잎 등이다.
주변에 더 들릴 만 한 곳으로는 부석사, 소수서원,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 석교리 석불상, 봉서루, 초암사, 비로사, 등이 있다.
전북 부안에 위치한 내소사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는 절이다. 특히 그 곳에는 대웅전의 창살을 조각한 꽃문양이 기가 막힌다. 그런데 경북 영주 순흥면 배점리에 있는 성혈사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절이다. 하지만 이 성혈사의 나한전에도 창살에 조각해놓은 문양은 내소사 대웅전에 못지 않은 문화재이다. 내소사에 비하면 그 보존상태가 양호하지 못해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이 글로 널리 알리고자 한다. 손상된 곳에다 베니어판을 오려 끼워 놓은 것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다.
▣꽃살문 (供花)
법당은 진리로써 가득 채워져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법 즉, 진리를 깨우치는 전각이요
특정한 부처님의 세계를 그 작은 공간 속으로 옮겨 함축성 있게 묘사한 건물이다.
법당, 그 곳엔 꽃 비 날리고 그지 없는 향, 용들이 여의주를 나투며, 학과 봉황이 노닐며
천인들이 공후와 생황으로 공양을 올리며, 동 식물, 물고기,곤충, 어패류 들이 모여 한가로이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법당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것도 속세에 베풀 극락 정토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법당 문, 이문은 색계와 무색계와의 경계의 지점, 즉 이문을 지나는 사람들은 탐욕과 번뇌를 털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법당 문 중 에서도 꽃살문 ,이 문은 불전에 바치는 공화 (供花)의 마음을 담고 있다. 단순히 여닫는 일상 수단의 문인 동시에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법당 꽃살문의 무늬는 연꽃, 모란, 매화, 장미, 국화, 무궁화 등 모양이 다양하다. 굴마라(봉오리),분타리( 만개),연 잎, 동자상, 학 ,물총새, 개구리, 자라,게, 소라, 나비 ,물고기 등이 조각되어 더욱 극치를 이루고 있다. 꽃살문의 꽃은 대개 3개의 크고 작은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원은 시간(三世)을, 꽃과 꽃을 이어주는 대각선은 공간(十方)을 뜻한다. 시공을 넘어 끝도 없이 회전 하면서 연기(緣起)의 세계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정교하게 빚은 꽃살문의 형태와 빛깔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는 저~화엄의 세계, 만다라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만다라의 세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이문을 열고 들어 가는 것 자체가 이미 부처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이 법당 문짝에 꽃문늬을 새기는 것은 부처님을 찬미하고 공경하는 애틋한 정을 바치는 마음의 발로인데, 생화는 곧 시들고 종이로 만든 꽃은 쉽게 변하지만, 나무로 꽃살문을 만들어 법당 문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 불교 건축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우리 특유의 목공 예술이며, 우리 민족의 훌륭한 문화 유산이다.
※ 門
◈어간. 협간. 툇간 (四합. 三합.분합. 외짝문), 교창
◈띠살. 정자살. 빗살. 소슬빗살. 살창. 귀갑문양 . 卍字문양.
◈연꽃 , 잎. 줄기. 소용돌이형. 모란. 장미. 국화. 무궁화. 매화. 난초. 금강저
※사찰의 주요 꽃살문
마니산 정수사, 소백산 성혈사, 작봉산 쌍계사, 능가산 내소사, 설악산 신흥사,
조계산 선암사, 팔공산 동화사, 공산 북지장사, 영축산 통도사 , 노악산 남장사,
금정산 범어사, 함월산 기림사, 사불산 대승사, 무등산 증심사, 모악산 불갑사.
방장산 실상사, 모악산 금산사, 두륜산 대흥사, 영축산 옥련암, 천성산 미타암.
2002-02-1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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