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1-10
찬송가 481장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두니”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욥(1-10)
욥이 엄청난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고, 자녀들은 모두 죽었으며, 악성 종기가 온몸을 뒤덮어 그의 삶에 온전하게 남은 것을 찾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욥 스스로도, 욥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친구들도, 그 어떤 인생도 원인을 알지 못했지만 욥이 이렇게 모든 것을 잃고 만 배경에는 하늘에서의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목숨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고,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바탕으로 목숨 외에 욥이 가진 모든 것들을 속히 빼앗았던 것입니다.
욥이 지은 죄가 많아서, 모든 것을 빼앗길 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욥은 사탄의 눈에 띌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했습니다. 욥기의 이런 진술들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일을 단순히 인과 관계로만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흠 없는 신자가 극한의 버려짐을 겪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잊고 살기 쉽지만 분명 하늘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원인 모를 환난을 누가 당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환난 앞에서, 타인의 삶을 두고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니라 그저 고통에 빠진 이들과 더불어 머무는 것,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이 당한 고난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구들은 참담한 상황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위로를 주기 위해 왔지만 처참한 지경에 놓인 욥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소리 질러 울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릴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7일 동안 침묵했는데, 7일간의 침묵은 보통 죽은 자를 위한 애도를 의미했습니다. 숨은 붙어 있으나 가족과 재산과 건강을 잃어버린 욥은 산 송장에 불과한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욥에게는 친구들이 위로를 위해 왔으나 그들의 함께함이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은 절대로 욥의 처지에 공감할 수 없었을뿐더러 그 심각함 때문에 어떤 말조차 꺼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함께 있으나 도움이나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욥이 겪었던 외로움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주님께서 느끼셨던 괴로움에 조금이라도 비견될 수 있습니다. 여러 군중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었던 것이나 세 친구가 찾아왔던 것이 조금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입니다.
주님은 욥이 경험한 어두움과 외로움보다 더 큰 어둠과 외로움을 겪으셨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바리셨나이까(막15:33-34)라는 단말마의 외침과 함께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고, 목숨을 잃는 떼까지 나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 부활로 가는 삼일의 기간처럼 욥도 환난 가운데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까지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욥기 3장부터 27장까지는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을 다루는 부분인데, 3장은 서론, 27장은 결론으로 모두 욥의 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은 7일간의 긴 침묵을 깨고,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시를 토로합니다. 3장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부분이 오늘의 본문인 10절까지이고, 이후로는 탄식이 11절부터 19절까지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답하기 어려운 고뇌 가득한 질문이 20절부터 26절까지 이어집니다.
7일간의 긴 침묵이 끝난 다음에 욥이 입을 열었습니다. 일시에, 갑자기 몰아친 재앙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이고, 깊은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보냈던 7일이지난 다음이었습니다.
사탄은 1장 11절에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라고 말했고, 2장 5절에도 거듭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욥의 아내는 2장 9절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절규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두 개가 다르냐라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뜻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스스로에 대해 저주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기 바로 직전까지 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내가 난 날”은 자신이 태어난 날이고,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은 그보다 열 달 앞서 잉태되던 밤입니다. 아예 태어나지도 말고, 잉태되지도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욥의 심정이 드러납니다.
(4-5)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어두움과 관련된 말들을 계속 늘어놓으면서 생일을 저주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기사에서 흑암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셔서 낮과 밤을 만드십니다. 출애굽 맥락에서 하나님은 애굽에 아홉 번째 흑암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아모스 5장 8절에서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실 때,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을 가져다주심으로 인생을 비추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빛이신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지 않았더라면, 반대로 사망의 어두움이, 구름이, 흑암이 자신의 생일을 주관했더라면, 오늘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 거라는 욥의 절규입니다.
(6-8)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여기에서의 밤은 태어난 날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자신이 모태에서 잉태되던 날의 밤입니다. 그 밤은 한 생명이 잉태되는 시간이었고, 부모에게는 성적인 즐거움이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랬던 밤이 아예 캄캄한 어둠에 잡혀서 어떤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예 날 수에서 빠졌더라면, 부모의 즐거움이 없어 잉태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8절의 리워야단은 하나님의 창조세계 일부를 훼손하고 파괴할 힘을 가졌다고 여겨졌던 초자연적인 괴물입니다. 욥은 리워야단을 부릴 수 있는 천상존재들이 자신이 잉태되던 그 밤을 저주했더라면, 오늘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어도 되었다는 처절한 절규입니다. 그러나 과거일 뿐입니다. 바꿀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9-10)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임신했다고 하는 것만큼 기쁨을 가져다주는 소식이 없습니다. 새 생명이 잉태되어 우리 곁으로 온다는 것만큼 좋은 일이 없고, 희망을 주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욥에게는 정반대입니다. 그 날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환난을 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으로서는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에 대한 것도 고통이었겠지만 앞으로 남은 날들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 할는지에 대한 물음도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숨이 붙어있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 내일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배우자와의 이별하신 분들이 극도의 상실감과 무력감을 호소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그 자녀와 추억을 쌓았던 장소에 다시 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기둥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동안 그려왔던 여러 청사진들도 무의미해집니다. 욥이 느꼈던 무력감과 고립감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외에도 내일을 기대하기 어려운 인생이 되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력감과 고립감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를 주님께서 그냥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 예전에 우리가 보던 개역한글 번역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우리 주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육체로서 이 땅 가운데 계시면서 모든 것을 그의 몸으로 직접 겪으셨기 때문에 다 아신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기 때문에,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비로소 소생할 은혜를 얻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욥이 잿더미 위에 주저앉아 처절하게 부르짖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이 밤처럼 어두워진 욥의 마음에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섣불리 고난의 원인으로 자기를 탓하고,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고난 앞에서 괜찮은 척 할 필요도 없지만 재빨리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가상으로 떠올리고 거짓으로 회개할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저 당면한 고난 앞에서, 묵묵히 견디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도 인과 관계로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 또한 인생의 한 때를 이렇게 보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롬5:3-4, 새번역)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앞에서 환난을 견뎌내는 하루하루가 모여 단련된 인격을 갖게 됩니다. 고난을 깊이 통과한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깊음과 넓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데, 왜 사람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느냐는 근원적 물음 앞에서 고통의 정중앙을 통과하는 것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욥의 자녀들이 창졸간에 당한 어이없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느냐는 물음 앞에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인생을 하나님이 모르시지 않다는 것, 하나님께서 그 모두의 창조주이자 궁극적인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다는 것만 말씀을 통해 깨달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아들의 생명을 아낌 없이 내어주신 분이라는 것을 기반하여,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절망적 상황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 가운데서도 하루하루 인내하다보면, 어느샌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는 순간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도래하기까지 사람들의 값싼 위로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아들을 내어주시고, 오늘도 가장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을 위로와 소망 삼고 믿음으로 인내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깊은 밤 같은 어두움의 시간을 보낸 욥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말씀을 통해서 그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타인이 가늠하기 어려운 것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또한 누구도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아픔의 심연을 통과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하나님을 향한 더 깊고 넓은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원인 모를 고통 가운데 놓여져 있다면, 우리를 향해 선한 뜻 펼치시기를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어 하루를 살아갈 힘을 간구하며, 그 은혜를 의지하면서 하루를 지나게 해주시옵소서. 또한 당면한 고난을 회피하거나 고난의 이유를 섣부르게 자기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서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손가락질과 판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여 어려운 시기를 이기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것과 하나님과는 어떻게 연결될까요?
2. 욥은 자신의 생일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눠서 저주합니까?
3. 본문 속에서 리워야단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리워야단을 통제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요?
4. 원인 모를 고난 앞에서 내가 해보았던 부정적인 생각은 어떤 것들입니까?
(작성: 이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