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또 다른 사랑
임 해량
수연은 점숙에게 끌려가듯이 역전 다방 안으로 들어갔다.
수연은 다방안으로 들어가서 점숙이가 앉으라는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는데
다방 곳곳에 남자 손님들이 마담인지 레지인가 하는 아가씨들과 얼굴을 맞대고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연은 다방 안이 조명에 약간 어두웠지만, 그래도 부끄러워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데 점숙이가 차를 시키러 간다고 일어섰다.
"언니 커피 마실 거지, 나도 커피 시킬래, 언니 차 시키고 올 게 "
점숙이 막 커피를 시키려 일어서 나가려 하는데 한 청년이 아는 체를 했다.
" 아니 점숙아 여기 웬일이냐?
아, 수연씨도 오셨네요 "
점숙은 경호를 보고는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 아니 경호 오빠 아니세요. 여긴 웬일이세요. 저는 수연 언니와 커피 마시러 왔어요."
경호가 반갑다고 눈을 맞추며
" 점숙아, 나 친구 만나러 왔는데 갑자기 친구가 일이 생겼다고 못 나온다고 해서, 혼자 차 한잔 마시려던 참이었어, 그런데 잘됐다 커피는 내가 살게, 수연씨도 괜찮지요."
수연은 경호를 보니 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아, 네~ "
수연이 겨우 대답 하는데 검은 양복바지에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경호의 의젓하고 멋진 모습이 그녀의 눈에 어른거렸다.
점숙은 무엇이 좋은지 경호를 보자 싱글벙글 입이 벌어졌다.
" 수연 언니, 경호 오빠 멋지지?
경호 오빠는 언니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언니는 어때?"
수연은 달아오르던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 애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경호 씨를 얼마나 보았다고,"
경호가 차를 주문하고 오다가 수연의 얘기를 듣고는 그녀의 바로 앞 좌석에 앉으며 수연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 수연씨, 수연씨는 저를 몇 번 안 보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수연씨를 여러 번 봤답니다.
제가 재수하다 두 번이나 떨어지자 좌절해서 방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가
너무 답답해서라 방문을 조금 열었는데 수돗가에 손을 씻고 있는 몸은 깡마르고 눈이 까만 긴 머리의 소녀를 보았었지요.
저는 다리가 불편한 수연씨를 봤는데요.
그 모습이 너무 밝고 순수해서 반하고 말았지 뭐예요."
수연은 경호의 고백을 듣자 또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레지 아가씨가 시킨 커피를 가져왔다.
경호는 가져온 커피를 수연의 것과 점숙이 것에 설탕을 넣고 수저로 저었다.
" 수연씨와 점숙 양 커피에 설탕 탔으니 맛있게 드세요."
점숙은,
"경호 오빠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수연 언니도 어서 마셔요."
수연은 숙였던 고개를 겨우 들고는 커피잔을 드는데 손이 떨렸다.
" 응 그래 너도 마셔, 경호 씨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경호는 수연이 고맙다고 하자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 아니 뭐 차 한잔 가지고요. 나중엔 맛있는 것 사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커피를 홀짝홀짝 아껴 마시던 점숙이가 너무 좋아하는 거였다.
" 경호 오빠 진짠가, 오빠네 짜장면과 탕수육보다 더 맛난 것도 있당가 "
수연과 점숙은 서울말을 배워서 쓰고 있었는데, 점숙이가 흥분해서 순간적으로 사투리가 나온 것이었다.
경호는 점숙이 사투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 그때 수연씨를 본 순간 마음을 다져 먹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저는 이 기쁜 소식을 수연씨께 전해주려고 돌산으로 갔지만 조선서 앞 바닷가에서 수연씨를 그리다가 그냥 왔지요.
언젠가 꼭 만나리라는 희망을 품고 돌아섰지만, 하루도 수연씨를 잊은 적이 없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수연씨를 만나다니요. 흑흑흑~^^"
경호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퍽퍽 울었다.
수연은 경호라는 청년이 그녀 앞에서 눈물을 보이자 왠지 마음이 아팠다.
다방 손님들은 허우대가 멀쩡하고 얼굴도 잘생긴 청년이 두 여자 앞에서 흐느끼니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다.
수연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경호의 눈을 바라보았다.
경호의 큰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서 몹시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경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부끄러움만 타던 수연의 행동에 경호는 물론 점숙이까지 속으로 몹시 놀랐다.
경호는 수연이 예쁜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니 어느새 눈물이 뚝 그쳤다.
수연은 집에서 오빠 밑으로 큰딸로 자라서 동생들이 울 때 눈물 콧물을 흘리면 수연은 손수건으로 닦아 주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경호라는 청년의 얘기가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에 와닿았던 것이었다.
그녀가 소녀 시절부터 지금까지 굴 같은 침침한 방에 처박혀서 소설책에서 주인공들의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 얘기를 읽으며 울었던 그때를 생각한 것이었다.
그녀는 왠지 경호가 소설 속 주인공 같이 느껴져서 안쓰러워 서슴없이 경호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것이었다.
점숙은 이때다 하고선 커피를 홀짝 비우고 화장실 간다고 하고선 다방을 빠져나왔다.
점숙은 수연 언니와 경호 오빠가 잘되길 간절히 빌었다.
" 수연 언니와 경호 오빠가 잘되어야 해, 그래야 정민 오빠가 내 차지가 되지. 수연 언니는 왜 양장 점에 와서 우리 정민 씨 마음을 흔들고 있으니, 기회 봐서 내가 먼저 고백해야겠어, 좋아한다고~^^"
점숙은 수연 언니와 경호 오빠와 잘 되기를 모든 신들께 두 손까지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수연은 커피를 다 마시고 났는데도 점숙이 들어 오지 않아서 계속 문 쪽만 바라보고 있는데 경호가 수연의 마음을 읽듯이 말을 꺼냈다.
"수연씨 점숙이 기다리시나요.
조금 전 제가 화장실 갔을 때 다방 아가씨가 그러는데요. 점숙이가 바쁜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한다고 전해달라 했다더군요."
수연은 안심하는 눈빛을 하며, 경호에게
" 경호 씨 차도 다 마셨는데요. 우리도 인제 그만 가요 "
경호는 수연과 더 있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 네 수연씨, 그럼 우리 일어나지요."
경호가 일어나는 수연을 부축하자 경호의 손이 수연의 팔에 부딪혔다.
수연은 경호의 손이 닿자 온몸이 전기가 통하듯 찌릿해지는 걸 느꼈다.
수연은 경호의 친절이 부담스러워 거절했는데도 경호의 좋은 마음을 더 거절할 수 없어서 경호의 부축을 받으며 지하 다방 층계를 올라와 경호에게서 떨어져 걸었다.
수연은 경호가 자기 팔을 잡았을 때 전해지는 전율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 정말 왜 이러지? 정민이 손을 잡았을 때는 그리 편하고 따뜻했는데 경호 씨가 잡아주면 왜 이리 기분이 이상하지,"
경호는 수연이 자기와 떨어져 걸으며 무슨 생각에 잠긴 듯 해서 한편 걱정이 되기도 했다.
" 수연씨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요. 말도 없이 떨어져 걷고요.
참 수연씨, 돌아오는 일요일 날 양장점 쉬는 날이지요. 그때 수연씨 사는 곳 바다에 가고 싶은데요."
경호가 만나자고 하니까 수연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 죄송해요. 그날 갈 데가 있어요. 오후나 집에 갈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만나면 안되는데요."
경호가 수연의 거절에 안달이나 다시 물었다.
" 그럼 수연씨, 돌산도 대개 넓던데요. 수연씨 집에 갔다가 저녁에 만나요. 저는 막배 타고 오면 되니까요. 수연씨, 우리 만나요! 네~^^ "
수연은 마음이 약해서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경호가 계속 매달리자 수연이 그만 허락하고 말았다.
" 네 그럼 그렇게 해요. 우리 동네에서 떨어진 진목 바닷가에서 여섯시에 만나요."
경호는 너무 좋아서 "야호" 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다.
수연과 경호는 양장점 가까이 오자 이웃의 눈에 띌 까봐 멀찍이서 잘 자라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경호와 수연은 긴장되어 내온 쌓인 사이로 하늘의 달님이 환하게 웃고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