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한국의 기도 도량 / 삼성산 삼막사
중생들 손 때 묻어 까맣게 변한 석불 자비 쌓였음이라
원효·의상·윤필 스님 정진한
한양 남쪽의 관음기도도량
칠보전 마애삼존불 칠석기도
새 생명 점지하는 영험 보여
▲육관음전에서 종무소로 난 길을 따라가니 관세음보살이 마중을 나왔다.
돌로 싼 축대 앞에 모셔진 관음보살 보단
좌우로 놓인 수많은 작은 부처님에게 마음을 뺏겼다.
하나씩 찬찬히 바라보니 모두 표정이 달랐다. 자비롭거나 진중하면서도 익살스럽기까지 했다.
비는 봄을 재촉하고 있었다.
겨우내 건조했던 안양 삼성산은 간만에 몸을 적셨지만
저물어가는 겨울은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산골짜기, 능선마다 눈을 품고 있었다.
시샘하듯 청명한 하늘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어쩌랴. 하루하루 봄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건만.
2월말, 겨울은 삼성산에서 봄과 살을 맞대고 있었다.
저 멀리 능선과 골짜기는 안개 속에 묻혔지만 오히려 안개 속에 있는 사물은 또렷했다.
어디선가 향냄새가 풍겼다. 누군가가 부처님께 올린 향공양이었다.
향 사르며 부처님께 공양 올린 누군가의 마음을 따라 자연석을 깎아 만든 돌계단에 발을 걸쳤다.
하늘로 기지개 켠 굵은 나무들이 도량 곳곳에 서 있었고,
찬바람 아랑곳하지 않고 초록빛 뽐내는 소나무들이 세월을 무색케 했다.
돌계단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계단을 좇다보니
범종각이 삼성산 삼막사(주지 성무 스님)의 입구에 버티고 섰다.
피부로 느끼진 못했다. 범종각에 매달린 법고가 소리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바람이 일었나?
줄 두 개에 온몸 실었으니 바람 앞에 속절없었다.
범종과 목어, 운판 등 다른 사물은 미동도 없었다.
혜능 스님의 일화가 떠올랐다.
바람 불어 깃발이 흔들리는지, 아니면 깃발이 흔들려 바람이 부는 건지….
선사는 “네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일갈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다 마음속에 자리한 108번뇌가 방문을 박차고 나옴을 경계했음이리라.
기억을 더듬다 다시 바라본 법고는 여전히 흔들거렸다.
애써 시선을 돌려 마당으로 들어섰다. 특이하게도 마당은 나무판자들로 엮여있었다.
삼막사 본전인 육관음전과 명왕전, 망해루, 종무소로 사용 중인 건물이
‘ㅁ’ 모양으로 옹기종기 처마 끝을 맞댔다. 전각 배치가 정갈했고 경내는 아담했다.
그만큼 속이 그득했다. 곳곳에 부처님 향기가 배어있었다.
망해루 앞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청명한 날 이곳에 앉아 해 지는 서쪽을 바라보면 서해가 보인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 망해루란다.
서해는 안개로 몸을 가렸다. 절경은 인연이 아니었다.
허나 기막힌 장면과 마주하면서 멎었던 생각이 길을 나섰다.
망해루 지붕 위에 쌓였던 눈이 땅으로 흘러내렸다.
수없이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나무마당에 부딪히며 둥근 그 모양을 산산이 해체했다.
물은 수천 년 전부터 그랬다. 태고부터 이어져온 오래된 진리였다.
물은 수증기로, 수증기는 구름으로, 구름은 비를 내렸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됐다.
형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끝없이 돌고 돌았다. 필연이다.
부처님이 걸림 없는 ‘참나’를 발견하던 인류 최대의 사건은 순리였을지도 모른다.
필연이었으리라.
끝없이 윤회하며 세세생생 공덕을 쌓아왔던 선근 인연이 그를 깨달음에 이르게 했을지도.
후대인들이 생을 돌고 돌면서도 지치지 않고 부처님을 좇으며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이
어찌 헛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효, 의상, 윤필 스님은 어땠을까.? 과연 돌고 도는 고리를 끊으셨나.
원효, 의상, 윤필 스님은 1300여년 전인 신라 문무왕 17년(677) 이곳에서 움막을 쳤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지명과 삼막사(三幕寺)란 절 이름의 유래가
바로 죽기 전 한 소식 하겠다는 스님 세 명의 크나큰 원력에서 비롯됐던 게다.
이후 삼막사는 도선국사가 관음보살상을 모셔와 관음사로 불렸다.
고려 충목왕 4년(1348) 나옹대사와 인도의 지공 스님이 이곳으로 오니 선풍이 크게 일었고
조선조 무학대사에 의해 동쪽에 불암사, 서쪽에 진관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한양 남쪽의 비보 사찰로 그 역할을 다했다.
▲육관음전과 명왕전, 망해루, 종무소로 사용 중인 건물이
‘ㅁ’ 모양으로 옹기종기 처마 끝을 맞댔다.
삼막사의 유래를 설명한 푯말을 읽고 나니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지금의 형태야 이렇다지만
예부터 뜨거웠던 구도 열기는 천년 넘게 이곳을 달궈왔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육관음전에 들었다. 노보살 한 분이 염불 중이었다.
조용히 삼배를 올리고 관세음보살상을 촬영했다. “부처님은 사진 찍는 게 아닙니다.”
놀란 가슴은 섭섭함보다 고마움이 크게 일었다.
예경해야할 부처님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은 노보살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노보살의 지극한 예경심이 전해졌다. 그 신심이 외려 고마웠다.
육관음전 오른쪽에 위치한 명왕전(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60호)은 지장보살이 주불이었다.
다른 절과 달리 명부전이나 시왕전, 지장전으로 편액하지 않았다.
발을 들이자 섬뜩한 기운이 끼쳤다. 중생 제도가 이뤄지지 않으면 혼자서 성불하지 않겠단
지장보살의 편안한 미소를 보고나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지장보살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그 옆으로 시왕(十王)이 자리했다.
죽고 나면 시왕에게 10번의 심판을 받는데, 지장보살이 있어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삼배다.
▲삼막사 삼층석탑.
칠보전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육관음전에서 종무소로 난 길을 따라가니 관세음보살이 마중을 나왔다.
돌로 싼 축대 앞에 모셔진 관음보살 보단 좌우로 놓인 수많은 작은 부처님에게 마음을 뺏겼다.
하나씩 찬찬히 바라보니 모두 표정이 달랐다. 자비롭거나 진중하면서도 익살스럽기까지 했다.
그 뒤로는 삼층석탑이 홀로 섰다. 일명 살례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호)이란다.
삼막사 스님인 김윤후가 여몽전쟁 시 용인 처인성 전투(1232년)에서
몽고군 원수 살리타이를 없앤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탑으로 전해진다.
나라에서 상장군 지위를 내렸으나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며 끝내 받지 않았다고 한다.
탑 뒤에 일렬로 줄지어 있는 소나무가 유난히 푸르렀다.
천연바위에 조성한 산신각과 천불전을 지났다.
원효 스님이 수행했다는 천불전 뒤 토굴은 녹지 않은 눈으로 길이 통제돼 인연이 닿지 않았다.
아쉬움은 희귀한 글자 앞에서 무력해졌다.
‘거북 귀(龜)’자를 전서체 등 3가지 형태로 써 놓은 ‘삼귀자(三龜字)’ 암각이다.
조선말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이 여기에 백련암을 짓고 은거할 때 쓴 글씨라고 했다.
당시 그는 꿈에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벅차오르는 환희심으로 글씨를 새겼단다.
오른쪽 각자 머리에 ‘관음몽수장수 영자(觀音夢授長壽 靈字)’라 해서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에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순간, 삼막사가 관음기도도량이라는 전체 퍼즐에 마지막 조각이 맞춰졌다.
2006년 성무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부터
매월 관음재일엔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정진을 하는 것이 순리처럼 다가왔다.
육관음전과 삼귀자, 육관음전 옆 관음보살상, 다라니 정진이 서로 한 몸이었다.
칠보전으로 난 돌계단을 10분쯤 올랐다. 정비된 길 왼쪽에 놓인 많은 돌탑을 지나쳤다.
기도객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치성을 드렸는지 노보살 한 분은 턱까지 찬 숨을 가라앉힌 뒤에야 계단을 내려왔다.
칠보전 마애삼존불상보다 남녀근석을 먼저 만났다.
어찌 그리 꼭 같은지 시선 둘 곳을 찾기 어려웠다.
이 바위를 만지면 순조롭게 자식을 얻는단다. 해서
부처님오신날이나 칠석 땐 많은 이들이 촛불과 과일을 차려놓고 정성 다해 기도한다고.
▲마애삼존불을 올려다봤다.
칠성광여래불 좌우를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었다.
남녀근석 옆에 자리한 칠보전에 가만히 앉아 마애삼존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을 올려다봤다.
부처님은 조선 영조 39년(1763)부터 쭉 이 자리였다.
칠성광여래불(북극성을 부처로 바꿔 부르는 이름) 좌우를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가 닳아 없어졌다. 갈아서 마시면 생명을 잉태한다는 민간신앙이 낳은 결과라고 했다.
얼마나 간절했는지 가늠할 길 없다.
작은 옥불에 켜져 있는 수많은 인등이 삼존불을 환희 밝히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 손 때 묻은 곳곳이 그을린 것처럼 검었다. 자식 욕심이 집착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검을까. 아니리라. 자식 없어 까맣게 탄 속을 부처님이 대신 달래준 게다.
종무소에서 8년간 근무하던 보살의 얘기가 귓가를 맴돌았다.
20대에 열여섯 위인 남자를 지아비로 모신 한 보살은 아이가 없었다.
시험관 아기를 시도했지만 좌절감만 더했다.
보살은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삼막사와 인연을 맺었다.
칠보전 기도에 열과 성을 다했다. 21일간 칠석기도를 이끌어왔던 주지 스님도 마음을 더했다.
새 생명은 보살에게 찾아왔고, 보살과 남편은 수차례 고마움을 표했다고.
부처님은 눈을 감고 계시는 듯 했다.
허나, 좌복 위에 앉아 올려다보니 지그시 눈을 뜨고 내려다보고 계셨다.
‘네 맘 다 안다. 여기 내려놓고 가거라.’
비워야 채운다. 칠보전 마애삼존불에 까만 속 덜어낸다.
싫지도 않은지. 부처님, 그래도 웃는다. 비는 그쳤고 흔들리던 법고가 가만하다.
2013. 03. 06
최호승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