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 두 나라 혹은 여러 나라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조약을 맺고 같이 행동하자고 약속하는 국제 협정을 일컫는다.
‘한미동맹’은 이 같은 약속을 맺은 지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한미동맹은 굳건히 그 약속을 지켜왔다.
한미 양국은 안보를 비롯해 경제, 문화, 과학, 기술 영역으로까지 동맹협력의 범위와 수준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이제 ‘미래로 전진하는 행동하는 동맹’의 시작부터 짚어본다.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로고. (이미지=외교부)
70년 역사의 한미동맹은 6·25전쟁 속에서 태동됐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즉각 유엔안보리 소집을 요청했다.
이후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라 미국 등 16개 참전국을 포함해 총 63개 지원국의 도움에 힘입어 공산군의 침략을 방어했으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당시 한반도의 통일 없는 휴전에 반대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조기 종전을 원했던 미국 정부와의 외교적 협상에 나섰다. 전후 한국의 안보를 보장할 한미 간 방위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양국 간 교섭 끝에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됐다. 이어 같은 해 10월 1일 정식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한미동맹이 공식적으로 출현하게 됐다.
다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4년 7월 한미정상회담을 거쳐 11월 18일 정식 발효됐다.
1953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에 참관, 미국 측 관계자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전문 가운데 제2조에서는 한미 양국이 안보문제에 관해 긴밀히 협의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또 제3조에서는 당사국 일방이 침략을 당할 경우 공동 대처하고 제4조에서는 미군의 한국 주둔을 인정하고 있다.
제6조에서는 이 조약이 1년 전 통고가 없는 한 무기한 유효함을 선언, 한미 양국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양국 간의 우호 동맹관계가 계속될 것임을 천명했다.
이처럼 전문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한국상호방위조약은 한국에 대한 제2의 침략을 막고자하는 목적으로, 지난 70년간 북한의 도발을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 (사진=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1954년 11월 17일에 합의된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 합중국 간의 합의의사록’에서 재확인됐다.
한국군의 최종적 규모와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 등이 규정됐는데, 미국 정부는 한국에 66만 1000명, 해군 2만 7500명, 공군 1만 6500명 등 모두 72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육성할 수 있도록 군사원조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이 결과 1960년대까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군사원조는 매년 3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한국이 사용하는 국방비의 87%에 해당하는 규모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미국의 한국원조는 전쟁의 발발로 경제원조보다 군사원조에 집중됐으나 긴급 구호와 전쟁 복구의 각종 활동도 포함됐다.
이는 전쟁에서 연합작전을 수행하는 차원을 넘어 정전 이후 한미동맹을 보다 굳건하게 유지·발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는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특히 리차드 위트컴 미 장군은 한미동맹이 군사동맹을 넘어서 교육, 복지, 문화 등 다방면으로 확대·발전하는 데 있어 상징적인 인물로 꼽힌다.
리차드 위트컴 장군 모습(위) 및 고아원에서 장학증서를 전달하고 있는 위트컴 장군. (사진=유엔평화기념관)
1953년 6·25전쟁 당시 부산 미2군수기지사령관에 부임해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위트컴 장군은 전후 한국 재건사업을 위해 헌신했다.
위트컴 장군은 1953년 11월 일어난 부산대화재 당시 3만여 명의 이재민에게 군수물자를 열어 천막과 먹을 것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미 의회 청문회에 소환됐으나 위트컴 장군은 “전쟁은 총과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말을 남기며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전후 한국의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개선의 필요성을 느낀 위트컴 장군은 여러 의료기관을 건립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미군원조처의 기금을 조달하기 위해 애쓰는 한편, 병원 건립을 위해 각 부대원과 함께 월급의 1%를 헌금하는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위트컴 장군은 교육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컸다. 부산대학교 초대 윤인구 총장의 부산대 건립을 위한 도움 요청을 수락, 한국정부를 설득해 장전동 부지 50만평을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대학건설비용 25만불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4년 장군으로 퇴역한 위트컴 장군은 한국에 남아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 고문을 역임하면서 한미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죽어서도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남긴 위트컴 장군은 유엔기념공원에 장군으로는 유일하게 안장돼 있다.
한복을 입고 모금운동을 하고 있는 리차드 위트컴 장군(위) 및 이승만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유엔평화기념관)
한미상호방위조약 그리고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꼽히는 주한미군은 서울 북방에 배치돼 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북한의 재침략을 억제하고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안보상황에 따른 미국의 전략변화 등으로 주한미군의 주둔 규모는 변화돼 왔다.
1969년 당시 미국 닉슨 행정부의 닉슨독트린 채택 이후 주한미군 감축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1960년대 말까지 약 6만 2000명이었던 주한미군 병력은 약 4만 1000명 수준으로 감소했다.
이후 카터 미 대통령도 주한미군의 감축과 단계적 철수를 내세웠으나 1979년 한국방문을 계기로 주한미군 감축이 중단됐다.
이 가운데 주한미군의 부분 철수에 따른 군사적 공백을 보완하고 한국 내 불안을 해소, 효율적인 한미 연합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1978년 11월 7일 한미연합군사령부(CFC)가 창설됐다.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감축 계획이 한미연합사 창설의 배경이 됐으나 한미 양국의 군사력을 통합 운영할 수 있는 연합방위체제가 구축됨으로써 한미동맹이 제도적으로 공고화됐다는 데서 창설의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고도의 과학 장비 운용과 체계적인 조직관리기법도 공유하게 됨으로써 한국군의 정보분석, 지휘체제 발전, 작전수행능력 등에 도움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도 잇따른다.
한미 연합군사령부(CFC) 창설 경축식 현장. (사진=국방백서)
한미연합사는 창설 이래 44년 동안 서울 용산기지에 주둔해오다가 지난해 10월부로 평택기지 이전을 완료했다.
앞서 한미 국방부는 2019년 6월 국방장관회담에서 연합사의 평택 이전에 합의, 2021년 12월 열린 제53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 당시 ‘2022년 내 연합사 이전 완료’를 선언한 바 있다.
한편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캠프 험프리스에서 열린 한미연합사 창설 44주년 및 이전 완료 기념행사에 보낸 축전을 통해 “연합사는 한미동맹의 심장이자 연합방위태세의 핵심으로 지난 44년간 북한의 침략과 도발 위협에 맞서 대한민국 방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한미동맹 70년 역사는 북한의 도발을 막고 한반도의 안전 보장을 위해 시작됐다.
수많은 변화 속에서 여러 형태의 전략적 동맹 관계를 이어가며 협력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한미 양국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동맹의 목적, 군사 안보를 위한 한미연합연습 및 훈련은 한미동맹의 공고함을 대표한다.
이에 다음 편에서는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동맹 모델 중 하나로 평가받는 한미동맹이 되기까지 주요한 역할을 한 한미연합연습 및 훈련의 변천에 대해 조명해본다.
<자료출처=정책브리핑 www.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