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5일 속개된 중공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한반도 출병을 주장하는 펑더화이(서있는 사람). 마오쩌둥이 기록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후일 화가 가오촨(高泉고천)이 참석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 [김명호 제공] |
그날 밤 마오는 중공 동북국 서기 가오강(高崗·고강)을 베이징으로 호출했다. “한국군 제3사단이 북진을 시작했다”는 총참모장 녜룽전(<8076>榮臻·섭영진)의 보고를 접한 직후였다.
가오강은 자타가 공인하는 마오의 후계자였다. 동북 인민정부 주석과 동북군구 사령관까지 겸한 실질적인 동북왕(東北王)이었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동북 변방군 사령관 덩화(鄧華·등화)도 “출동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라”는 마오의 급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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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오후 3시, 중난하이 이넨탕(<9824>年堂·이년당)에 마오쩌둥,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 5대 서기를 비롯해 가오강, 천윈(陳雲·진운), 동비우(董必武·동필무), 린보취(林伯渠·임백거), 장원텐(張聞天·장문천), 린뱌오(林彪·임표),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랴오수스(饒漱石·요수석), 녜룽전, 양상쿤(楊尙昆·양상곤), 후차오무(胡喬木·호교목)가 자리를 잡았다. 이 정도면 전 중국이 모인 거나 다름없었다. 워낙 사안이 사안인지라 죽음을 눈앞에 둔 런비스까지 참석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2주 후에 사망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발언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내심 출병을 반대했다. 펑더화이는 기상관계로 회의 시작 한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펑이 나타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오가 입을 열었다. “조선 출병에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토의하는 자리다. 각자의 견해를 발표하자.” 뭐든지 기록하기를 좋아하는 저우언라이와 녜룽전이 받아 쓸 준비를 하자 “기록도 중요하지만, 하고 싶은 말을 못할 수가 있다”며 제지했다.
린뱌오가 “출병 불가론”을 폈다. “우리는 20년간 전쟁만 해왔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해방전쟁도 끝나지 않았고 해방구의 토지개혁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원기를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과는 힘을 겨뤄본 적이 없다. 일단 출병하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전쟁은 끝이 보여야 한다. 참전보다는 동북의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편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이어서 결론을 내렸다. “조선은 인구가 몇 백만밖에 안 된다. 우리는 5억이다. 몇 백만 명을 구하기 위해 5억이 나선다는 것은 계산상으로 맞지 않는 일이다. 어쩔 수 없다면 몰라도 피하는 게 상책이다.” 다들 수긍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린뱌오는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인구도 잘 몰랐지만, 참석자 모두 그런 건 문제로 치지도 않았다.
다음 날 속개된 회의에서 펑더화이는 한반도 출병을 주장했다. “어차피 미국과는 한판 겨룰 수밖에 없다. 저들이 압록강 변에 포진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온갖 구실을 내세워 국경을 교란시킬 것이 뻔하다. 늦게 싸우는 것은 일찍 싸우는 것만 못하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건설하자.”
소식을 기다리던 스탈린은 저우언라이의 소련 방문을 요청했다. 저우는 회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계속)
마오쩌둥 “조선은 바뀔 수 없는 혈맹” 참전 결정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09>
| 제210호 | 20110320 입력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베이징을 떠나며 노모의 전송을 받는 철도 노동자 웨이즈제(魏志杰·위지걸). [김명호 제공] |
스탈린은 소련의 참전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했다. “우리는 북한에서 병력을 철수한다고 이미 발표해 버렸다. 전쟁터에서 미군과 충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공군을 동원해 엄호하겠다. 그것도 적 후방까지 들어가는 것은 곤란하다. 전투기 추락으로 조종사가 포로가 되거나 시신이 발견되면 국제적으로 파장이 크다.”
중국은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중국인과 조선인은 머리 색깔이 똑같고 생긴 게 비슷하다. 구분하기가 힘들다. 중국과 미국은 외교관계가 없다. 뭘 하건 행동이 자유롭다.” 이어서 “중국이 출병하면 소련은 의무를 다하겠다. 치타와 남부 지역에 비행기·대포·탱크·차량·총기·탄약 등을 운반해 놨다. 당장 동북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며 종목, 수량, 전달 방법까지 설명했다. 통역을 위해 배석했던 스저(師哲·사철·마오쩌둥의 4대 비서 중 한 사람. 소련과의 연락을 도맡아 했다)는 후일 회고록에서 “스탈린은 소련과 북한 사이에 합의가 끝난 사항을 중국이 받아들이기만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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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시종 냉정하고 침착했다. “중국이 출병을 안 하면 북한은 길어야 5일에서 일주일밖에 버티지 못한다. 전몰당하느니 하루라도 빨리 철수시켜 후일을 기약하는 게 낫다. 소련은 북한과 접해 있는 구간이 짧다. 철수 병력 대부분이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적들이 한반도를 점령하면 미군이 압록강 변에 포진한다. 공중에서 폭탄을 퍼부어대면 내륙은 그렇다 치더라도 동북은 편할 날이 하루도 없다. 그런 와중에 건설이 가능할지 의문”이라며 북한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문제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주력 부대와 무기, 물자, 간부들을 일단 동북으로 철수시키면 기회를 봐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에 유리하다. 노약자와 부상병들은 소련 경내로 들어오게 하자.” 린뱌오는 유격전에 관심이 많았다. 북한군을 한국의 산악지대에 분산시키자고 했다. 스탈린은 “폭이 좁고 길쭉한 지역이라 활동에 한계가 있다. 한 차례만 수색해도 소멸된다”며 묵살했다. 오후에 시작한 회의는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상대방의 의중을 탐색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저우언라이가 소련으로 출발한 이틀 후 마오쩌둥은 참전을 결정했다. “많은 동지들이 출병을 반대한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치르는 동안 조선 인민과 당의 동지들은 우리의 혁명을 위해 피를 흘렸다. 조선은 수백, 수천 가지 이유를 들이대도 바뀔 수 없는 혈맹이다. 미국은 우리보다 대포가 많다. 그러나 역사는 대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저들이 원자탄을 쓰면 우리는 수류탄으로 맞서자. 우리가 모른 체하면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길로 미국이 들어온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주먹 한 방 날려서 백 개가 날아오는 것을 면하자.” (계속)
“조선 출신 해방군 보내달라”…김일성, 남침 직전 요청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0>
| 제211호 | 20110327 입력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血)는 피로 갚아야 한다’는 등 출병을 요청하는 벽보가 도시·농촌 할 것 없이 난무했다. 1950년 겨울 베이징 교외 난위안쩐(南苑鎭). [김명호 제공] |
김일성은 스탈린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같은 해 5월 초, 마오쩌둥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노동당 중앙위원 김일(金一)을 비밀리에 베이핑(北平·10월 1일 신중국 선포 후에 베이징으로 개명)으로 파견했다. 김일을 만난 마오는 김일성의 구상을 반대하지 않았지만 동의하지도 않았다. 남한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북한은 상대가 안 됐다.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것이 뻔했다. 내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관심 가질 겨를도 없었다. 대만과 티베트 문제, 서남지역의 국민당 잔존 세력과 토비(土匪) 토벌, 토지개혁 등 생각만 해도 골이 지끈지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오가 말했다. “해방군 주력의 대부분이 남쪽에 있다. 미국이 개입했을 경우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하다.” 간단한 대화였지만 여건만 되면 지원을 고려해 보겠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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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나라 땅에서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공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전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조국땅을 밟았다. 몇 개월 후 동족상잔의 비극에 투입되리라는 것을 과연 알기나 했을지 궁금하다. 한국전쟁 초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들의 귀국은 남침 2개월 전인 이듬해 4월 중순, 마지막 병력이 원산항에 도착하는 날까지 계속됐다. 3개 사단을 꾸릴 수 있는 규모였다.
중국과 소련은 9월 말에도 무력통일을 지지해 달라는 북한의 요청을 받았다. 양측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거절했다. 1950년 1월 모스크바에서 ‘중·소동맹호조조약’ 체결을 위한 회담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중국과의 신조약이 체결되면 소련은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누리던 권익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의 시선이 한반도를 향했다.
1월 19일 스탈린은 “김일성이 무력으로 조국통일을 실현하겠다며 스탈린 동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의 전보를 받았다. 11일 후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승인하면서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렀다. 한반도에 대한 전략을 공격으로 전환하겠다며 당부를 반복했다. “직접 만나보니 마오쩌둥은 동북아 문제에 정통한 사람이다. 그의 의견을 구해라. 중공의 동의가 없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만일 미국이 간여한다면 소련은 조선을 도울 수 없다. 중국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 마오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해라.”
3월 중순 김일성은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 이주연(李周淵)을 통해 마오쩌둥 면담을 요청했다. 마오도 집히는 게 있었던지 이주연에게 구두로 전달했다. “통일에 관해 의논할 문제가 있으면 극비리에 와라.”
마오쩌둥은 대국의 최고 지도자답게 의심이 많았다. 중난하이(中南海)에 거주하는 소련어 통역을 일주일간 톈진(天津)으로 놀러 보낸 후 김일성을 만났다. (계속)
마오쩌둥, 외신 통해 북한 남침 사실 알아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1>
| 제212호 | 20110403 입력
1951년 4월, 중국인민부조위문단(中國人民赴朝慰問團) 단장 랴오청즈(廖承志왼쪽 첫째당시 통전부 부부장 겸 신화사 사장)와 부단장 마오둔(茅盾오른쪽 첫째당시 국무원 문화부장) 일행을 북한군 총사령부로 초청한 김일성과 박정애. [김명호 제공] |
이튿날 소련 측에서 답변이 왔다. “조선 동지들과의 회담에서 빌리프(스탈린) 동지와 그의 친구들은 조선인들의 계획에 동의했다”면서 중국을 난처하게 만들고도 남을 내용을 첨가했다. “이 문제는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한다.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토론을 통해 해결 방법을 찾아라. 상세한 내용은 조선 동지들을 통해 듣도록 해라.”
마오는 그동안 자신을 따돌린 스탈린의 처사가 괘씸하고 불쾌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5월 15일 김일성과 다시 만난 자리에서 “속전속결로 끝내라. 생산시설만 집중적으로 파괴하면 된다. 대도시를 점령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충고했다. “미국이 참전하면 우리도 군대를 보내 돕겠다”며 김의 자존심을 슬쩍 건드렸다. 마오 몰래 소련으로부터 전쟁물자를 공급받은 김은 “동의한 것만으로 족하다”며 자리를 떴다.
김일성이 베이징을 떠난 다음 날 마오는 스탈린이 보낸 전보를 받았다. 의견을 구한다며 단둥(丹東)에서 선양(瀋陽)까지 인민해방군 몇 개 사단을 배치해 주기를 희망했다. 마오는 그날로 답전을 보냈다. “해방군의 동북 투입은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그간 전쟁을 치르느라 소모가 컸다. 소련 측에서 장비와 무기만 제공한다면 병력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스탈린도 “장비는 우리가 해결하겠다. 단, 하루라도 빨리 부대를 동북의 동남지구에 배치하기 바란다”고 화답했다.
6월 25일, 마오는 오후가 되어서야 프랑스 통신사를 통해 북한군의 남침 소식을 들었다. 김일성의 정식 통보는 사흘 후, 그것도 베이징 주재 북한 무관을 통해서였다. 같은 날, 스탈린이 보낸 전보도 받았다. “김일성은 용기가 대단한 사람이다. 그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결심과 믿음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중공 총서기였던 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은 당시 마오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를 회고록에 남겼다. “주석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수염을 깎았다.”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소식을 접한 마오쩌둥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인근에 사는 비서 스쩌(師哲)에게 심경을 토로했다. “김은 전략과 책략이 틀려먹었다. 성질이 급하다 보니 출병 시기도 잘못 잡았다. 기반이 없는 남쪽으로 더 내려갈까 봐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인천 쪽은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제주도도 마찬가지다. 미군이 서쪽으로 상륙하면 북한군은 허리가 잘린다. 그러면 아주 위험해진다.”
마오는 김일성에게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공격하는 것이 현명하다”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라고 건의했다. 김은 마오의 말을 듣는 듯했지만 결국은 무시했다.
북한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자 마오쩌둥도 서서히 참전 준비에 착수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