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 스님의 능엄경 강해] 3. 마음이 어디 있느냐?
3. 청정한 마음의 본성
〈원문〉 부처님이 아난에게 고하셨다.
“아난아, 너와 나는 동기라. 정의가 천륜과 같으니라. 네가 처음 발심해서 내 법 가운데 무슨 뛰어난 모습을 보았길래 세상의 깊고 무거운 은혜를 한꺼번에 버렸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제가 여래의 32상이 뛰어나게 절묘해서 몸이 맑게 사무치는 것이 유리와 같음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 모습은 욕애(欲愛)로 생긴 것이 아닐 것이니, 왜냐하면 욕애는 거칠고 혼탁해서 비린내 누린내가 서로 얽히고 고름과 피가 뒤섞인 것이어서 능히 뛰어나고 깨끗해 밝기가 이를 데 없는 금빛의 광명을 발생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목마르듯이 우러러 사모해서 부처님을 따라 머리를 깎았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랬구나. 아난아, 잘 알아라. 일체중생이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부터 나고 죽는 생사를 반복해 온 것은 모두 항상 그대로 있는 참된 마음의 자성이 청정한 그 자체를 모르고 온갖 망상을 쓰고 살기 때문이니라. 네가 이제 위없는 보리의 참되고 밝은 성품을 알려면 마땅히 곧은 마음으로 내 묻는 말에 답해보아라. 시방 여래가 똑같은 길에서 생사를 벗어나느니라. 똑같은 길이 바로 곧은 마음이니라. 아난아 네가 처음 여래의 32상을 보고 발심했다 하니 무엇을 보았고 무엇이 좋아했느냐?”
“세존이시여, 제가 32상을 보고 좋아한 것은 제 눈과 마음으로 하였습니다.”
“네가 말 한대로 진실로 보고 좋아한 것은 눈과 마음으로 한 것이니라. 그러나 만약 눈과 마음이 있는 데를 알지 못하면 진로(塵勞)를 항복 받을 수 없느니라. 비유컨대 나라의 왕이 외적의 침략을 받아 군대를 보내 적을 토벌할 때 적병이 어디에 침입해 있는지 있는 곳을 알아야 하는 것과 같으니라. 내가 지금 너에게 묻노니 마음과 눈이 어디 있느냐?”
〈강해〉 대승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신체상 특징이 32가지로 나타난다고 한다. 머리 위의 정수리가 상투처럼 솟아 있는 모습을 한 정상육계상(頂上肉槌相)에서부터 발바닥이 평평한 족하안평상(足下安平相)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몸에만 생기는 몸매의 특이한 모습이 있다는 것이다. 더 세밀하게 말하면 80가지가 있다 하여 80종호(種好) 혹은 80수형호(隨形好)라 한다. 거룩하고 성스러운 몸매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이난이 부처님 몸에 있는 이 상호를 보고 발심하여 출가를 했다고 말하자 부처님은 보는 것은 눈과 마음인데 얼굴에 있는 눈은 두고 마음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예로부터 능엄십의(楞嚴十義)라 하여 각 권의 대의를 요약 10가지로 말해왔다. 1권의 대의가 칠처징심이고 2권은 팔환변견(八還辨見)이라 하여 사물을 보는 진견(眞見)은 명(明), 암(暗), 통(通), 옹(擁), 연(緣), 완허(頑虛), 울발, 제(霽) 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여 참된 견(見)은 사물에 즉한 것도 여읜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한다. 능엄십의의 3은 부석제상(剖析諸相2~3권), 4는 회상귀원(會相歸源4권), 5는 육해일망(六海一亡5권), 6은 선택원통(選擇圓通5~6권), 7은 주심묘용(呪心妙用7권), 8은 지위진수(地位進修8권), 9는 오십종마(五十種魔9권), 10은 오음망상(五陰妄想10권)이다.
‘마음이 어디 있느냐?’ 사실 이 물음은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하나의 공안(公案)이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이 질문을 하게 된 것은 중생이 나고 죽는 생사를 반복하는 청정한 마음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면 생사를 해탈하여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데 이것을 모르고 망상을 쓰고 산다고 하였다. 〈유마경〉에는 직심이 도량이라 하였다. 망상에 시달리는 마음은 반대로 곡심(曲心)이다. 번뇌 망상이 마음을 더럽히는 것을 진로(塵勞)라 한다. 이 진로를 항복시키기 위해서 마음이 있는 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그 외적을 토벌하려면 침입해 온 장소를 알아야 한다는 비유를 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