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 속의 대봉산(천왕봉·계관봉) 정복기
♧ 날자 2026년 7월 1일 (수요일) 날씨 장마전선 북상 강우
♧ 동반자 현보 강덕희, 다운 정재건
1. 장마 전선을 뚫고 기어이 나선 길
'오르GO 함양 15봉 완등 계획'을 세우고 기세 좋게 5개 봉우리를 접수할 때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5월과 6월, 두 달간 지방선거라는 큰일을 치르며 산행은 잠시 멈췄다.
6월 3일 선거가 끝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보려 친구 셋이 뭉치려 무던히도 애를 썼건만, 두 달이라는 공백은 무서웠다. 식어버린 열정에 다시 불을 지피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고암 친구가 개인적인 일로 바빠 중도 하차하게 되었다. 못내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컸다.
어렵게 일정을 조정한 끝에 현보 덕희와 나, 둘이서 7월 1일 수요일을 산행 날짜로 잡았다. 그런데 참 심술궂게도, 사라졌던 장마전선이 갑자기 남부지방으로 북상한다는 속보가 들려왔다.
"장마 온다고 쉬고, 이것저것 다 따지며 쉬면 15봉은 언제 다 가겠노!"
비가 와도 강행하자는 쪽으로 번개처럼 의견이 일치했다.
산대장인 나보고 코스를 짜라기에, 비 오는 날씨를 고려해 살짝 '꼼수'를 부리기로 했다. 낙점된 곳은 대봉산과 도숭산. 대봉산 천왕봉까지는 모노레일을 타고 편하게 올라간 뒤, 능선을 타고 도숭산(왕복 3km)을 다녀오고, 다시 대봉산 계관봉(3km)까지 총 6km의 능선 산행을 하면 힘 안 들이고 두 봉우리를 정복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두 달간 쉰 근육에 무리를 주지 않으려는 산대장의 꼼수. 몀품(?) 계획이었다.
얼른 대봉산 스카이랜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경로우대 모노레일 9시 45분 첫차 두 장을 예매했다.
출발 당일 아침, 시시각각 변하는 일기예보를 검색하니 오전 9시쯤이면 함양 지역 강수량이 '0'으로 뜬다. 비가 그칠 조짐이었다. "충분히 가능하겠다!" 판단하고 아침 7시 30분, 진영에서 힘차게 출발했다.
차 안에서 현보가 "비 오면 모노레일 운행 안 한다던데…"라며 우려 섞인 말을 던지기에 곧바로 대봉산 스카이랜드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비가 와도 운행한다는 확답을 받았다.
"좋아, 가자!" 신나게 달려 함양 대봉산 자락에 도착하니 시곗바늘이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 황당한 소동과 '10일 전'의 문이 열리다
그런데 매표소에 도착하자마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도착한 '대봉산 스카이랜드'는 '오르GO 함양' 방문 인증 지점이 아니란다. 인증을 받으려면 차로 30분 거리인 '대봉산 캠핑랜드 주차장'까지 가야 했다.
탑승 시간은 코앞인데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급히 사정을 설명하고 모노레일 탑승 시간을 30분 연장 승인받은 뒤, 캠핑랜드로 쏜살같이 달려가 우여곡절 끝에 방문 인증을 받아왔다.
겨우 숨을 돌리고 탑승장에 서자, 이번엔 여직원 두 명이 앞을 막아섰다.
등산객은 탑승할 수 없으며, 등산 배낭과 스틱은 가지고 탈 수 없으니 보관소에 맡겨두라는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절망감이 엄습했지만,
이미 예매한 모노레일이니 정상 구경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배낭과 스틱을 맡겼다. 손가방에 간식거리와 음료만 대충 쑤셔 넣고 10시 10분, 드디어 모노레일에 몸을 실었다.
"국내 최장 3.95km 모노레일입니다."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경사가 장난이 아니었다. 거의 80도는 족히 되어 보이는 급경사 구간에서는 온몸이 의자 등받이에 찰싹 밀착되었다. 뒤로 넘어질 것 같은 아찔한 급경사가 몇 번이고 반복된 끝에 마침내 정상 정류소에 도착했다.
정상에 내리니 가랑비가 흩뿌리고 있었고, 짙은 안개 탓에 10m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정상은 봐야지 싶어 소원 바위(기도바위)에서 사진을 찍고 드디어 봉황이 내려앉았다는 대봉산 천왕봉(1,228m) 정상석 앞에 섰다.
[대봉산 정복] -> 6번째 봉우리 완등 완료!
주변은 그야말로 십미터 무중(十米霧中)이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도숭산으로 향하는 길을 보니 목책으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고개를 돌려 대봉산 계관봉 쪽을 바라보니 거기도 '출입통제' 팻말이 서 있었다.
그런데 팻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내 눈에 반가운 글귀가 들어왔다. 함양군수가 고시한 시행 일자가 '7월 11일부터'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어길 시 과태료 20만 원이라는 무시무시한 문구와 함께.
"현보야, 잘 봐라! 11일부터 아이가. 오늘이 1일이니까 아직 시행 10일 전이다!"
"가보자! 우리가 법을 어기는 것도 아이잖아."
주저하던 현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도시락과 음료수도 챙겨왔으니, 비록 도숭산은 포기하더라도 대봉산 계관봉은 가기로 합의하고 수풀 사이 작은 틈으로 발을 디뎠다.
3. 안개 덮인 산정(山頂)에서 신선이 되다
빗길이라 미끄러운 바위와 흙탕물을 조심하며 먼저 대봉산 정상으로 향했다. 스마트폰 GPS 위성 지도를 켜고 탐색하는데, 신기하게도 대봉산 산봉우리 표식이 뜨지 않았다. 잡목 우거진 숲길을 지나쳤다 돌아오기를 두어 차례 반복한 지 10여 분.
수풀 속에 통신 안테나가 덩그러니 서 있는 지점이 바로 대봉산 정상(1,252m)이었다. 잡목에 뒤덮여 도저히 정상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인증 지점이 아니었다. 다시 확인해 보니 진짜 인증 지점은 150m 더 떨어진 "계관봉(1,253m)"이었다. 닭벼슬을 닮았다는 웅장한 바위 군락을 보고 싶었지만, 사방을 꽉 채운 곰탕 같은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마침내 계관봉 정상석을 터치하며 오늘 두 번째 봉우리 인증을 무사히 마쳤다.
배낭 대신 가져온 손가방에서 점심 도시락을 꺼내놓고, 챙겨온 매실주 한 병을 땄다. 먼저 대봉산 산신령께 안전 산행을 기원하며 고개 숙여 고천배(告天杯)를 올렸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한 잔, 두 잔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안개구름이 발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산꼭대기에서 오직 우리 둘만의 만찬이 펼쳐졌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바람을 쌩쌩불고 안개와 나무들은 흔들리는데 우리가 앉은 자리는. 바람 한점 들어오지 않는데, "참 희얀하네 이자리가 완전 명당인가 보다, 바람한점 않들어온다"
"현보 신선, 한잔 드시게나."
"다운 신선도 한잔 받으시게."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다음에는 바둑판을 들고 와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놀다 가자는 싱거운 소리를 해가며 꿀맛 같은 점심을 즐겼다.
하산하는 길에는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온갖 야생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봉산 자락에는 목수국을 닮은 누렇고 하얀 꽃나무가 유독 많았는데, 휴대폰으로 찾아보니 '미역줄나무 꽃'이라고 한다. 새순이 마치 미역줄기처럼 1미터 이상 덩굴져 손을 내미는 모양새가 참 재미있었다.
그 곁으로 붉은 산나리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고,
우아한 산목련도 이제 막 흐드러지게 만개해 가고 있었다. 도숭산에 가지 못한 아쉬움은 이미 안개 너머로 씻겨 내려간 지 오래였다.
4. 눈살을 찌푸리게 한 뜻밖의 불친절
다시 모노레일을 타고 하부 정류장으로 내려왔다. 정상 정류소에 있던 안전요원 두 명은 "산행 잘 다녀오셨냐"며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는데, 하부에 도착하니 상황이 180도 달랐다.
아직 입산 통제 고시 기간이 10일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배낭과 지팡이까지 빼앗아가며 등산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매표원 여직원 둘이 우리를 투명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들 말을 안 듣고 산행을 감행하고 온 것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정상에서 느낀 행복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그냥 씩 웃어 넘기며 "통제 기간이 열흘이나 남았더구먼요" 한마디 툭 던지고 지나쳤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젖은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있을 때였다. 덩치 큰 여직원 한 명이 다짜고짜 다가오더니 퉁명스러운 어조로 명령조로 말했다.
"손님들 올라올 거니까 거기 앉아 있지 말고 빨리 내려가세요!"
순간 울컥 화가 치밀었다. 대합실 의자는 50여 석이나 되었고,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우리 둘뿐이었다.
"사람도 없는데 와 그랍니까? 신발 끈만 매고 바로 나갈 겁니다."
최대한 좋게 얘기했건만, 그 직원은 요지경으로 계속 빨리 나가라고 재촉을 해댔다.
참다못한 현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신발 끈 매는 거 안 보입니까! 곧 내려갈 테니 재촉하지 마이소!"
그러자 그 직원은 큰소리를 친다며 되레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불친절을 넘어선 안하무인 격 갑질이었다.
목소리를 높여 맞대응하자 2층에 있던 직원들까지 떼거리로 몰려 내려왔다. 좋은 날, 좋은 기분을 이런 몰상식한 대우 때문에 다 망치고 싶지 않아 내가 현보를 꾹 누르며 달래서 밖으로 나왔다.
나오면서도 화가 가시지 않아 현보가 씩씩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다른 등산객이 다가와 우리를 위로했다.
"아이고, 저 사람들 갑질이 대단하네. 함양군청에 꼭 고발하소. 저러면 안 되지!"
마침 안내판을 보니 관리 주체가 '함양군청 산삼항노화과'라고 적혀 있었다. 조만간 군청 홈페이지에 정식으로 불친절 신고를 하리라 다짐하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5. 고향 친구와 함께한 지리산 흑돼지 만찬
오늘 계획했던 두 개 봉우리 중 도숭산은 놓쳤지만, 이대로 진영으로 돌아가긴 아쉬웠다. 결국 오늘 밤은 함양 현보 고향 집에서 자고, 내일 한 봉우리를 더 정복하기로 현보와 전격 합의했다.
마음이 정해지자마자 고향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친구 강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호야, 니 보고 싶어서 함양 왔다! 저녁에 소주 한잔하자."
친구는 단박에 흔쾌히 오케이를 외쳤다. 한호에게 고향 집(국계)으로 들어가는 길에 맛좋은 팔선주(八仙酒) 한 병을 사 오라고 이르고, 나와 현보는 읍내에서 식육점을 하는 현보 동생 충희의 가게로 향했다. 지리산 흑돼지 삼겹살과 입에서 살살 녹는 소고기 낙엽살(부채살)을 세 명이 서 배불리 먹을 만큼 넉넉히 끊어 국계 현보 집으로 향했다.
집을 간단히 청소하고 고기 구울 준비를 마칠 때쯤, 한호가 귀한 팔선주 한 병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현보, 한호, 그리고 나. 고향 친구 셋이 오랜만에 의기투합했다. 텃밭에서 갓 딴 싱싱한 야채와 술상이 완벽히 세팅되어 즐겁게 먹을 일만 남았는데, 한호가 차 트렁크를 열라며 큼지막한 양파 두 망을 쿵 내려놓았다. 알이 어찌나 굵은지 내 주먹보다 컸다. 그야말로 최고 등급의 특상품 양파였다.
"고맙다 친구야! 근데 올해 양파 농사는 잘 지었나?" 물으니, 한호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말도 마라, 작년보다 포대당 천 원씩 떨어져서 올해 한 1,400만 원 손해 봤다 아이가."
포대당 천 원씩 떨어져서 1,400만 원 손해라면, 도대체 몇 포대를 수확했다는 말인가? 계산해 보니 무려 1만 4천 포대였다! 종자 대금에 인건비를 싹 공제하고도 순수입만 8,000만 원이 훌쩍 넘게 남았다는 소리였다.
"야 이 사람아, 매년 한 포대씩 공짜로 얻어먹어도 되겠네! 잘 먹을게!"
5개월 땀 흘려 농사짓고 억대 매출을 올렸으니 대성공이 아닌가. 친구의 풍년을 축하하며 잔을 부딪쳤다.
"부어라, 마셔라!"
정겨운 고향 사투리와 흘러간 옛이야기 속에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내일 또 한 번의 당찬 산행을 위하여, 아쉬움을 뒤로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큰소리치며 행복했던 함양의 밤을 기분 좋게 마무리했다.
대봉산 -도숭산 안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