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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전 1
지함은 송도를 떠나 한양으로 가는 중에도
임꺽정에대한 생각에만 골몰했다.
송도에 잠시 머무는동안에도
지함은 하늘을 거스를 방법이 없을까
온갖술수를 다 짚어 재보았지만
마땅히 쓸 만한 수를찾아내지 못했다.
천기를 거스르는 것, 그것은 인간의영역이 아니었다.
왜 하늘은 행사만 할 뿐
대화를 나눌 생각은 하지않는 것인가?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고
나라의운명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하늘은 왜 그 주체인인간의 의견은
한번도 묻지 않는 것일까?
지함은 고개를 떨구고 땅바닥을 바라보며 힘없이걸었다.
그가 임꺽정에 대한 예의로,
그렇다 그것은예의였다,
병법에 뛰어난 전우치를 군사로 천거하여
임꺽정을 보좌하라고 일러놓기는 했다.
그렇지만사람으로 태어나
천기를 거스를 능력을 가진 이는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고있었다.
사람은 하늘의 뜻을 알 수는 있어도
그 뜻을 바꿀 능력은 없기 때문이었다.
전우치가 아무리사람이 싸우는 병법에는 능하다 하더라도
하늘이개입하여 움직이는 비밀스런 계략에는
당해낼 수 없을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임꺽정은 앞도 보지 않고
돌진만 하는 성격 아닌가.
임꺽정은 성미가 워낙 불 같아서
현실과 거리가너무 멀고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이는 미래쯤은 상관도안 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런 틈새를 놓치지 않고
어느 시점엔가 불쑥 끼어들 것이다.
또 한 가지 지함의 심기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이있었다.
임꺽정이 거사를 일으킨 해는 기미년(己未年,1559).
다음해는 경신년(庚申年, 1560).
즉천간(天干) 경년(庚年).
바로 조선 민족에겐 마(魔)와같은 해였다.
조선은 본래 축인간방(丑寅艮方)에 있는
갑목국(甲木國)이다.
그래서 세세 년년에 십 년마다한번씩
경년(庚年)을 만나면 국기(國基)가시끄러워졌다.
왜냐하면 갑경(甲庚)은
칠살편관(七殺偏官)으로 금극목(金克木)하니
충(沖)이되는 천기의 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지함의 머리 속에서는 경(庚)의 해가 주욱흘러갔다.
가깝게는 경오년(庚午年, 1510년)에 삼포왜란이,
경진년(庚辰年, 1520년)에는 극심한 수해가 있었다.
경자년(庚子年, 1540년)에는 전라도에 민란이 일어나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몹시 할퀴고 지나갔다.
멀리는 이방원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 끝에
정권을탈취한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도
경진년(庚辰年, 1400년)이었다.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여
고려의뿌리를 뽑아내고자
한양으로 천도한 경오년(庚午年,
1390년)도 그렇다.
2020년 경자년도 그래서 이리 시끄러운건가..?
그런 때문인지 임꺽정은 거사 당해에
송도를 비롯한북도(北道)를 휩쓸고,
작년 경신년에는 경금(庚金),신금(申金)이 겹쳐
한양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신유년(辛酉年, 1561)인 올해
약금(弱金)인신(辛)과 유(酉)가 와서
기세가 꺾여가고 있고,
임술년(壬戌年, 1562)인 내년에는
임수(壬水)가 수생목(水生木)하여
갑목(甲木) 국운을 도와
임꺽정은종말을 맞게 될 터였다.
"형님, 지금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송도를 떠나면서부터 지함이 워낙 입을 굳게 다물고있자
정휴가 계속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금기(金氣)를 모으러 가네."
"그래서 오랑캐의 솥단지를 벗지 않으십니까?
이더운 날씨에."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햇볕은 한여름 못지 않게
따가웠다.
내리쬐는 햇살에 솥단지가 달구어졌는지
지함의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땀은 비오듯이흘러내리는데,
지함은 솥단지를 벗지 않았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쑥덕거리면서 지나갔다.
필시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러나 지함은 그런 것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땀을 훔치면서 한양길을 밟아나갔다.
"형님, 금기를 모아서 무엇에 쓰시게요?"
"실은, 돈을 모을 생각이네."
"예? 돈은 벌어서 어디에 쓰시게요?"
"돈이 기 아닌가?
백성에게 직접 가 닿는생기(生氣)는 곧 돈이네.
내가 임꺽정의 일로 마음이불편하긴 하네만
그건 그가 역천(逆天)을 했으니 그런것이고,
나는 하늘의 이치대로 할 것이네."
"과연 금기로 다스려질 일입니까?"
"그건 두고 보세."
세 사람은 더위를 피해 길가의 주막에 잠시 들어가
시원한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일행이 다리를 뻗고 그늘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더벅머리 총각이 헐레벌떡 주막으로 달려들어오더니
지함을 보고는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무슨 일이오?"
지함이 총각을 일으켜세우면서 묻자,
총각은 지함이쓰고 있는 솥단지를 달라고 애원했다.
"아버님이 병석에 누운 지 삼 년이 지났건만
차도가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아버님 꿈에
솥단지를 쓰고지나가는 사람이 주막거리에 들를 터이니,
그 솥에다밤과 대추를 넣은 약밥을 지어 먹으면
효험이있으리라고 누가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믿지못하고 있는데,
선비님이 마침 주막에 계시다는이야기를 듣고
염치 불구 달려왔습니다."
그러면서 총각은 가지고 온 새 갓을
지함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지함이 껄껄 웃으면서 솥단지를벗어
총각에게 건네주었다.
"부친의 병은 틀림없이 낫게 되네.
서둘러 가지고가서 약밥을 지어 드리게."
지함은 총각이 가져온 갓을 쓰고는 다시 한양길에올랐다.
지함 일행이 한양에 이른 것은 벌써 더위가 한풀꺾여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 때였다.
한가위가 얼마 남지 않아서 한양으로 이르는 길가마다
누렇게 넘실대는 나락이 풍성했다.
임꺽정에게는
군량으로 쓸 양식이 잘 익어가니 반가울 테고,
조정에서는 조정대로 몇 년 동안 기근과 질병이
쓸고지나간 뒤에 찾아온 풍년이니 반가울 것이었다.
지번의 가회동 집은 지함의 처와 아들 산휘가
지키고 있었다.
형 지번은 일가를 이끌고 임지로 떠나있었다.
지함은 오랜만에 부인 이 씨를 따뜻하게 대했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이불 속에서 지낸 날을 손꼽으면
몇 날 되지 않았다.
지함은 그걸 속죄라도 하듯
부지런히 집을 고치고 아들 산휘를 말동무 삼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지함은 며칠 동안 방안에만 틀어박혀
일체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남궁두도 조용한 방에 들어가 책을 읽었다.
책조차 손에 잡히지 않는 정휴만이
심심한 마음에 소일거리를 찾아다녔다.
정휴는 한강 넘어 봉은사로 몇 차례 바람을 쐬고오기도 했다.
절은 낙엽이 굴러다녀도 쓸어줄 사미승 하나없었다.
늙은 중 몇몇이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경전을 외는 건지 염불을 하는 건지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가을을 알리는 소슬바람이 서쪽에서부터 조금씩
불어오기 시작하였다.
그제서야 지함은 방에서 나와 남대문 거리를 몇차례 나갔다 왔다.
그러면서도 정휴와 남궁두에게
동행하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지함은 거의 매일남대문 거리로 나가
하루종일 있다가 돌아오면서도
무엇 하나 사들고 오는 법이 없었다.
정휴나 남궁두는 지함이 하는 일이 궁금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는 않았다.
정휴는지함이 남대문을 나다니는 동안
고려 말진각(眞覺)국사 혜심(慧諶)이 편찬한
<선문염송>을펼쳐놓고
선사들의 옛 시절을 감상하였고,
남궁두는풍수지리서인 <청오경(靑烏經)>을 꺼내놓고
파고들었다.
아무 일도 없이 무료한 하루하루가 지난 십수 일뒤,
드디어 지함이 괴나리 봇짐을 쌌다.
그러나 그에대해 이렇다 저렇다 설명은 없었다.
정휴와 남궁두는
지함이 하는 양을 보고 따라 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일 떠나세."
지함이 두 사람에게도 짐을 꾸리라고 했다.
"형님, 지금 떠나야 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임꺽정이 송도까지 완전히 점령했다네."
"추이를 더 보시지요."
"그런 뒤에는 늦네. 양기가 가장 승한 하지에
겨울의 음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음기가 가장승한 동지에
여름의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네."
"그러면 임꺽정은 패망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까?"
"두고 보세."
가을 바람이 제법 쌀쌀해져,
간혹 찬 북풍이밀려오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큰사랑과 내별당사이에 서 있는
나무 몇 그루가 붉고 누런 잎을 우수수 떨구었다.
큰사랑의 문마다 붉은 단풍빛이 번져올랐다.
"그동안 여러 모로 생각을 해보았네.
임꺽정,
송도를 떠나오면서 내내
그가 머지 않아 망나니의칼을 받고야 말리라는 예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단말일세.
그이 한 사람이 죽고 사는 것 때문에
내가이렇게 소동을 피우는 것은 아닐세.
이 나라 백성을질병과 가난과 무지에서 건져내지 못하고
허무하게떠나버릴 민중의 영웅호걸이 아쉬워서 그렇다네.
그는 가더라도 누군가 그 일을 이어야 옳지않겠는가.
조선 백성은 조선 백성이 살려내야 한다네.
일찍이 북창 선생께서 이웃 중국과 일본을 드나들면서
외국의 문물을 많이 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끝에 '불쌍한 것은 조선 백성일 뿐'이라고 하셨다네.
질병이 휩쓸고 간 자리에 의원은 보이지 않고
탐관오리가 남아 때 아닌 주색잡기나 즐기고,
관리들은 훈구파니 사림파니 하면서 당파 싸움에만몰두해
백성이 굶어죽는지 얼어죽는지 거들떠보지도않네.
조정 대신이라는 사람들은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이니 이발기발(理發氣發)이니
하면서 정사는 돌보지 않고 공론만 일삼고 있네.
이토록 불쌍한 백성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양반이란 사람들은 저희만 고고하고 잘 나서
평민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천민 대하기를 짐승처럼 다루니...
양반이라고 해서 신분이 보장되는것도 아닐세.
힘께나 쓰는 자의 눈에 나면
오늘까지양반이었던 사람도
내일에는 뉘집 종이 되어 삽사리신세가 되고 만다네."
정휴가 고개를 뚝 떨구면서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정휴의 가슴에 젖어 있던 고뇌를 지함이 대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임꺽정이 앞장서서 뜯어고치겠다고
목숨걸고 일어났던 것인데
시운(時運)이 좋지 않네.
뿐만아니라 하늘의 도수(度數)에도 나와 있질 않으니
도대체 하늘은 누구의 편이란 말인가.
하늘이 하는일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나는 하늘이 정의롭지않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네.
내 공부가 하늘의 높은 뜻을 알기에는 부족한듯하이.
어쨌거나 나는 저 불공평한 하늘을 향해
벌떡일어서기로 했다네
내게서 친구를 앗아가고,
사랑하는 이도 앗아가는 운명을 짜놓은
저 가혹하고냉엄한 하늘을 크게 거스르기로 했네."
정휴와 남궁두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문 밖에서는 벌써 열세 살이 된 아들 산휘가
노래를부르면서 지함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어나고몇 해 뒤에나 겨우 아버지 얼굴을 대하고,
몇 해 걸러 한번씩 찾아오는 아버지였건만
산휘는 무던히도지함을 따랐다.
산휘는 큰사랑 옆 돌화단을 오르내리며
노랗게 물든버드나무잎을 주르르 훑어 땅바닥에 흩뿌렸다.
"형님, 그래서 어떻게 일을 도모하실 겁니까?"
정휴가 궁금하여 물었다.
지함은 천정을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자신에 찬 얼굴이었다.
"집에 돌아온 후 천문도 살피고,
앞으로 이삼 년간국운을 쭉 뽑아보니
할 만한 일이 하나 생겼다네.
내가 하늘을 직접 쓸 것이네."
"선생님, 무슨 말씀인지 얼른 알아들을 수가없습니다.
하늘을 직접 쓰시다니요?"
남궁두가 물었다.
그러자 지함은 나지막한 소리로두 사람에게 말했다.
마치 역적 모의를 하는 두목이
계책을 발표하는 것처럼 은밀하고 조심스런목소리였다.
"천기는 가슴 속에만 묻어두어야지 입으로 발설하면
그만 힘을 잃고 만다네.
내가 하는 일을 가만히지켜보기만 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 나를 도와주기만하면 되네.
자네들이 저절로 내 뜻을 훔치게 되더라도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말게.
무슨 말인지아시겠는가?"
"예. 명심하겠습니다."
정휴와 남궁두는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정휴는 지함의 계획이 뭔가 짐작은 할 수있었다.
지함, 그가 꾀하는 일은 자신의 명리를 위한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부귀도 아니었다.
임꺽정,
그가 하던 일을 잇는다고 했을 때 벌써
무슨 일을 어떻게 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함의 발걸음은 수원을 지나용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들 산휘의 부름도뒤돌아보지 않고,
멀리서 눈물 훔치는 부인 이 씨도돌아보지 않고
지함은 그저 구름이 흘러가듯 한양을빠져나갔다.
정휴는 지함이 안 진사라는 사람을
찾아가는것이리라고짐작했다.
정휴는 한번도 안 진사를만나본 적이 없었지만
지함에게서 자주 얘기를 들어
안 진사란 이름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지함은 안 진사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상공업을 일으켜야한다고
목청을 높이곤 했다.
"상공업은 백성의 피를 힘차게 돌게 할 수 있는
핏줄일세.
피가 잘 돌아야 사람도 건강하듯이
나라살림도 백성의 살림도
상공업이 번성해야 튼튼해지는것이라네."
용인으로 가는 길의 들판에서는
농민들이 가을추수로 바쁜 일손을 놀리고 있었다
논두렁마다볏단이 줄지어 쌓이고,
어린아이에서부터 허리가꼬부라진 늙은이까지
들에 나서서 벼포기를 붙들고씨름을 하고 있었다.
가을철에는 죽은 송장도꿈지럭한다더니
정말 바쁜 모양이었다.
해마다 뿌리고 가꾸고 거두고 먹고,
다시 뿌리고가꾸고 거두고 먹고,
그러면서 나이를 먹고,
때가되면 다시 온 곳으로 돌아가는 백성들.
정휴는
지칠줄 모르고 서로 맞서는하늘과 인간의 싸움이
저토록치열한 것인가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들녘을지났다.
안 진사는 반색을 하며 지함 일행을 맞이했다
꼭10년 만의 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