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여는 세상1"에 대한 지난 번 저의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다시금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어 기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87년의 뜨거웠던 가슴을 6.29 항복선언을 이끌어낸 시민 사회의 모습들이
성숙되면서 금직곡에 대한 조정이 시작되었고 나역시 중학생이었던 시절 해금가요 모음곡이라는 테이프을 형을 통해서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장희, 송창식, 김민기, 별들의 고향 주제곡 등이 담겨져있는 테이프를 들으며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 하곤 했습니다. "나 이런 노래도 안다?"
하면서 말입니다. 참 철없는 생각이었죠.
삶의 노래, 진실의 노래, 자유의 노래란 용어조차 몰랐던 어린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간 87년 6월 항쟁 이후, 시민사회의 성숙도는 깊어가고 우리가 말하는
민중가요에 대한 개념들이 되짚어 가 보겠습니다.
87년 이후, "노래를 찾는 사람들(김민기씨가 이름을 지었다고 함)"의 공식
앨범(내가 알기로는 84년도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슴)이 제도권 내에 투입되면서 "기도", "일요일이 다가는 소리", "내 눈길 닿는 곳",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아주 서정적인 그리고 가스펠적인 성격을 가진 노래들이 현실 속에 (선배 자취방의 장판 밑이 아닌)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거기다가, 노노단(노동자 노래단), 민문연(뭐 줄임말인지 기억이 가물가물)과 합쳐져서 "꽃다지(조민하씨 대표: 현재는 누구신지?)"가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이 와중에서도 김창남 교수를 중심으로 무크지 "노래"(이 시점 보다는 이전의 시기)라는 민중가요적 관점에서 보는 노래 이야기의 이론들이
정립되어가기 시작합니다.
무대위에서의 민중가요 노래를 보급하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현장위에서 민중가요 노래를 실천하는 "꽃다지"의 양대 산맥(?)으로 민중가요의 움직임은 일반 대중의 가슴까지는 아니지만 귓가에 머물게는 만들어 갑니다.
노래방에서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불리어 지기가 상상 조차나 했던가? 문대현씨나 안치환씨(물론, "내가 만일" 등의 제도권 음반 챠트에서 상위권을 유지한) 조차도 의외였을 겁니다. 물론 그 당시 저는 기억합니다. 선배, 후배, 동기 들과 노찾사의 개량화된 이러한 현실들을 비판해야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들도 많이 했습니다. 저의 짧은 생각입니다만,
"꽃다지"는 현장 속에서 피어나는 민들레 꽃처럼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어쩌면 담벼락 안에 있지만 많이 볼 수 있는 장미꽃처럼 그 현상을 유지하자는 쌍방인정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오늘도 역시 주절거림에 두서없슴에 고개를 숙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야지.
민중가요를 부르는 노래패들의 내부 속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발생되기 시작합니다. "열사가 전사에게"라는 유명한 곡을 지은 김성민씨를 중심으로
"천지인"이라는 민중Rock 그룹이 만들어 졌고, 서총련 노래패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조국과 청춘", 성남지역을 중심으로 생겨난 백창우씨의 "노래마을"이, 그리고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소래타래", 전남 지역에서는 김종화씨가 "녹슬은 해방구", "지리산2"등 각 노래패들의 태동이 지역적으로 무수히 많게 생겨나기 시작하는 시기였던 걸로 기억납니다.
또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민중가요를 불렀던 스타들이 간헐적이나마
TV 속에서 만나기도 시작합니다. 안치환, 김광석, 권진원 등이 제도권으로
진출하여 민중가요의 의미는 어느 정도 퇴색되었지만 단순 "사랑, 연애
등"의 기본적인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노래만이 대중가요가 아니라는 것을
외치기라도 하듯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민중가요의 제도권 진입, 현장 진입의 행태들이 활동적으로 발생하면서, 우리에게 1집 음반만내고 소위말하는 잠수를 타고 있었던 김민기씨의
연출로 만들어진 "겨레의 노래"음반과 전국 순회 공연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시기가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겠으나 정태춘의 변화가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라는 노래극을 기점으로 그의 변화가 시작되어 갑니다. "촛불",
"시인의 마을", "떠나가는 배"등과 같은 일반적인 대중가요의 가사와는 다른 하지만, 평범한(?) 음악 활동을 하던 그가 사전심의철폐에 도전하는 선봉에 서기 시작합니다.
일반 대중가수의 공식적인 공연장을 금기시 하던 서울대학교에서 "자유"라는 콘서트가 시작됩니다. "사전심의철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기점으로 강산에, 전인권, 김민기, 양희은 등의 거의 활동중단의 가수들의 앨범들이 봇물처럼 레코드 가게에 만연하기 시작합니다.
아니 팔리기 시작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요 (이 운동 전 부터 그들의
앨범들은 나와있었기 때문에).
하여간 이러한 제도권적인 활동 속에서, 아직도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윤민석, 이지상, 김성민, 김가영(저 동아리 선배님이죠 헤헤)씨 등이
여전히 건강하고 힘차게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글 속에 대학가요제와 함께 일어나기 시작한 노래패의 활동을
언급한 적이 있을 겁니다. 그 보단 10년정도의 뒤의 일이지만 전대협 출범(87년 충남대에서 시작)을 기점으로 대학생 중심의 민중 대학 가요제인 "통일노래한마당(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네요)"가 기획되고 실천되어왔고, 노동자가요제도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서 나름대로 제 생각들을 정리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네요 저의 단순한 기억을 더듬어며 짚고 넘어가고 있어서 말입니다.
하여간에 이렇듯 민중가요의 흐름들이 이렇게 물 흐르듯 흘러 왔던 것 만은
아닌것 같습니다. 수많은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고민들과 땀, 피로
이 많은 곡들이 다운로드 받고, 음반을 사고 만들고 하여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 댄스가수들의 랩과 어우러진 민중가요들의 모습이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이 또한 약간의 변화라고 생각하고 기분좋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현장에서 불리워졌던, 80년대 애국가에서 부터, 87년 파업가, 그리고 아름다운 율동(?)과 함께 90년대에 불리워졌던 "바위처럼"같은 노래도
변화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이 모두 합쳐서 기분좋은 변화라고 하면 저의 지나친 비약인가라고 다시금 저에게 물어봅니다.
1919년 3.1운동의 시작으로 시작되었던 민중+시민 운동들의 힘을 가해주었던 민중가요들이 20세기를 뒤로 한 채, 새로운 출발로 도약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백기완 선생님이 말씀하셨던가요? "혁명이 질곡에 빠지면 문화가
앞장서야한다."라는 말을 저는 오래도록 기억이 남습니다. 삶이든, 자유든,
진실이든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항상 변화,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우리의
생활들이 힘이 기울여져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전 세계민들이 볼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에 저의 자취를 남기는 영광의 기분을 뒤로한채, 이렇게 저의 "노래로 여는 세상(2)"을 마무리 할려고 합니다.
지누 올림
첫댓글 "민중 문화 예술 운동연합"이구요 뒤에 노문연 "노동자 문화 예술 운동 연합"으로 단체명을 바꾸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