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부 이신득의에 대한 변호 (1:1~2:21) | |||
1. 서론 |
① 인사: 은혜의 근거 |
1:1~5 | |
② 상황: 은혜로부터의 이탈 |
1:6~9 | ||
2. 계시를 통해서 주어짐 |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받은 것도 아님 |
1:10~24 | |
3.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승인됨 |
야고보, 게바, 요한 |
2:1~10 | |
4. 베드로를 책망하는 데서 나타남 |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 |
2:11~21 | |
제2부 이신 득의에 대한 설명 (3:1~4:31) | |||
1. 믿음에 근거하여 |
율법의 행위가 아닌 듣고 믿음에서 임 |
3:1~5 | |
2.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
그가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심 |
3:6~9 | |
3. 율법을 통하여 |
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심. |
3:10~14 | |
② 언약이 율법보다 앞섬. |
3:15~18 | ||
③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하여 진 것.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
3:19~22 | ||
④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믿음이 온 후로는 더 이상 그 아래에 있지 않음. |
3:23~4:11 | ||
4. 개인적인 간증을 통하여 |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
4:12~20 | |
5. 비유를 통하여 |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 비유 |
4:21~31 | |
제3부 이신득의의 적용 (5:1~6:10) | |||
1.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5:1~12 | |
2. 자유와 사랑에 관하여 |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
5:13~15 | |
3. 육체와 성령에 관하여 |
① 성령과 육체의 싸움 |
5:16~26 | |
② 육체의 15가지 열매 |
5:19~26 | ||
③ 성령의 9가지 열매 |
5:22~26 | ||
4. 구체적인 실천 강령 2가지 |
① 짐을 서로 지라 |
6:1~5 | |
②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
6:6~10 | ||
제4부 결론 : 할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6:11~18) | |||
할례 문제 에 관하여 |
율법주의자들 |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며, 또한 그 육체로 자랑하려 함. 환난과 핍박 대신 안일과 타협함. |
6:11~13 |
사도 바울 |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을 것임. |
6:14~18 |
* 사도 바울이 결론부에서 다시 한 번 할례문제를 다룬 점으로 보아, 이 할례 문제가 갈라디아 교회 내의 주된 쟁점이었음을 알 수 있음.
<핵심 내용 및 구절, 단어 연구>
제1부 이신득의에 대한 변호(1:1~2:21)
하나님으로부터 사도직을 받은 바울은(1:1~5) 여기서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된 진리를 바로잡기 위해(1:6~10)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참된 복음의 진리를 개인적인 체험에 접목시켜(1:11~24) 변호하는 한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2:1~10)과 베드로에 의해서도 이 같은 복음의 진리가 인정받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2:11~21).
1. 서론 |
① 인사: 은혜의 근거 |
1:1~5 |
② 상황: 은혜로부터의 이탈 |
1:6~9 | |
2. 계시를 통해서 주어짐 |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받은 것도 아님 |
1:10~24 |
3.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승인됨 |
야고보, 게바, 요한 |
2:1~10 |
4. 베드로를 책망하는 데서 나타남 |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 |
2:11~21 |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자신을 거짓 사도들과 구별하는 한편,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12사도와 동일한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1:1 하)
한편, 성경에는 12사도 외에도 여러 사도들이 더 존재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바울과 바나바 등입니다.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행1:26)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행13:43)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참고로, 행1:21,22에 의하면 사도직의 자격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분과 동행하면서 그 생생한 육성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그분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는 자라야 했습니다. “...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어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함께 다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부분은 어찌 봐야 하겠습니까? 갈 2:8,9 등으로 비춰볼 때 결국 12사도는 주로 이스라엘 12지파를 대상으로 하는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 등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방인의 사도’로 각각 부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12라는 수자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암시하고 있으므로 이방의 사도였던 바울은 12사도와는 어느 정도 구별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음).
할례자의 사도 (유대인의 사도) |
주로 이스라엘 12지파를 대상으로 사역함 (12라는 수자는 이스라엘 12지파와 관련) |
12사도(맛디아를 포함) |
이방인의 사도 |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함 |
바울, 바나바 등 |
* 공통점 : 이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직을 부여 받았음. |
1:6~10 본서의 저술 동기: 바울은 문안에 이어 본문에서 본서의 저술 동기, 즉 갈라디아 교회 내의 배교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긍휼과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을 쫓았던 것입니다.
1:6,7,8,9 다른 복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대치되는 것으로, 율법 준수와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했던 유대주의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의 거짓 교사들에 의해 급속도로 이 같은 율법주의에 물들어갔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직 믿음’, 즉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복음의 참된 진수를 붙잡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를 더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습니까?
명심하십시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7절 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교사들은 ‘다른 복음’이라는 미명 하에 무엇을 조장하고 있습니까? 교회의 분열과 혼란, 붕괴입니다. “...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7절 하)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다른 복음이 아닌 어떤 복음을 붙잡고 나아가야만 합니까? ‘바른 복음’입니다.
구 분 |
내 용 |
비고 |
바른 복음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사건이 그 핵심(갈 1:4) |
사람의 뜻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임(갈 1:11,12). |
다른 복음 |
다른 복음은 없음(갈 1:7).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음. |
다만 어떤 자들이 교회를 교란하고, 복음을 변질시키고자 만들어 낸 것임(1:7). |
1:11,12 바울의 사도직 근거: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 즉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 어디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
그렇다면 과연 바울은 언제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그분의 계시를 받았던 것일까요? 필시 이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의 회심 사건과 그 직후일 것입니다(행 9장; 갈 1:17).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5~17)
한편, 바울은 바울의 회심 사건과 그의 예루살렘 방문 사이에는 약 3년 이라는 공백기가 있는데 이는 그가 회심 후 3년 동안 아라비아, 즉 다메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야지대에서 체류,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가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곧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하여 복음전파 사역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갈 1:17,18)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지금 나에게도 그런 기간이 있었습니까?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만나며 사명을 준비하는 아라비아에서의 3년과 같은 그런 시간들 말입니다.
2:1~10 바울의 제3차 예루살렘 방문과 예루살렘 공의회: 여기서 자신의 제3차 예루살렘 방문과 예루살렘 공의회(주후 49년)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행15:1~29). 이 방문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과 율법준수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이 공의회에서는 무엇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습니까? 할례의 무효성과 이방인들에 대한 율법 강요의 부당함입니다.
2:1 십사 년 후에: 이는 바울이 1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를 만난 때부터 계산한 기간입니다. 주요행적의 연대를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 분 |
연 대 |
비 고 |
관련구절 |
바울의 회심 |
AD 32년 |
다메섹 →아라비아(3년간) →다메섹 |
행9:1~19 갈1:17 |
1차 방문 |
AD 35년 (37년 ?) |
3년 만에 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머묾. |
갈1:18~24 행9:26~29 |
길리기아 전도 |
|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름. 바울은 10여 년간 길리기아 다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 다소와 그 주변 지역들에서 복음을 증거 함. |
|
안디옥교회 공동목회 |
|
안디옥 교회가 설립됨. 예루살렘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교회에 파송. 바나바가 바울을 다소에서 데리고 와서 안디옥에서 1년간 공동목회.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순교를 당함(AD 44년) |
행12:1,2 행12:19~26 |
대기근 |
AD 45년 |
전국적인 흉년이 발생. |
|
2차 방문 |
AD 46년 |
안디옥교회는 유대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바나바와 바울을 예루살렘에 파송. 마가 요한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옴. |
행11:30 행12:25 |
1차 전도여행 |
47~49년 |
안디옥교회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바나바, 바울 (수행자: 마가 요한). 구브로를 경유하여 남 갈라디아 지역(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옴. |
행13,14장 |
율법논쟁 |
|
유대주의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파송되어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적지 않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율법준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베드로는 구약의 율법에 근거한 그들의 책망이 두려운 나머지 그 식탁에서 뜨고 말았고, 바나바조차 그 외식에 미혹되고 말았다. 결국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등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확실한 매듭을 짓도록 했습니다. |
행15:1 갈2:11~14 |
3차 방문 |
AD 49년 |
결국 예루살렘 공회는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진리를 전적으로 수용, 모든 교회에 이와 같은 결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행15:2~35 |
2차 전도여행 |
50~52년 |
바나바와 결별(마가 요한 수행 문제로 인해). 바울은 실라 등과 함께 소아시아(남 갈라디아 지역을 포함)를 지나 마게도냐 및 아가야 지방을 순회하면서 복음 증거(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 고린도교회 등이 설립됨). 이 기간 동안 데살로니가전후서 기록. |
행15:36~ 18:22 |
3차 전도여행 |
53~57년 |
얼마 후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들은 굳건하게 한 후 에베소에 도착. 바울은 3년에 걸친 여행 기간의 대부분을 에베소에서 보냄. 3차 전도여행이 끝나갈 무렵 바울은 다시 한 번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보낼 구제헌금을 모으기 위해 열심히 노력. 이 기간 동안 고린도전후서와 로마서, 갈라디아서 기록. |
행18:23~ 21:17 |
2:4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이는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유대인 신자들로,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복음의 진리를 배격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와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성도들을 다시 율법의 멍에로 옭아매어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도록 하고자 했던 자들입니다(고후11:26; 벧후2:1).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2:4) /“...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고후11:26 하)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
2:2,6 유력한 자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 요한, (주의 형제) 야고보 등을 지칭.
2:7~9 유대인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 이 부분은 바울의 사도권과 그가 전파한 복음의 진실성이 (AD 49년 예루살렘 공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된 것은 물론,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결정된 사실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9절)
할례자의 사도 (유대인의 사도) |
주로 이스라엘 12지파를 대상으로 사역함 |
12사도(맛디아 포함) |
이방인의 사도 |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함 |
바울, 바나바 |
2:11~14 베드로의 외식: 이는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주의 형제 야고보가 보낸) 율법주의적 경향을 띤 유대인들이 도착하자 그 자리를 피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결과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유대인들과 바나바 역시 그 외식에 미혹되었구요.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2,13절)
결국 바울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하고 맙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말입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14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유대 율법주의는 아니지만 여전히 신(新) 율법주의 등에 얽매어 있지는 않습니까?
율법주의 |
유대 율법주의 |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다.’ 율법 준수와 할례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 이는 복음의 진리와 대치되는 것으로, 복음의 진리를 배격하고 교회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임 |
로마교회 율법주의 |
‘그리스도의 공로 외에 인간의 선행, 공덕이 필요하다’ 성경만큼이나 교회의 유전(전통), 그리스도의 공로만큼이나 행위공로가 중요하다고 주장. 이 역시 복음의 진리와 대치, 배격하는 것임. | |
신 율법주의 |
‘믿음 외에도 다른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 이를테면 행위(행위구원론), 신비적 합일(신비주의), 맹신적 은사체험(은사주의) 등. |
2:16 의롭게 되는 것(칭의: Justification): 이는 법정 용어로서 ‘무죄의 선포’를 의미합니다. 이 같은 칭의(稱義)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무능력이 전제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주권적인 은총에 기인한 것입니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본서의 대강령인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 진리의 핵심을 요약한 것으로, 롬 1:17과 함께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내세운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란 주제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3:11; 5:4).
제2부 이신득의에 대한 설명 (3:1~4:31)
여기서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복음의 핵심을 아래와 같이 8개 항목의 역사적인 사실과 논리적인 변증으로써 규명하고 있습니다. ①갈라디아인들이 믿음으로 시작한 것처럼, 그 영적 성장 역시 믿음으로 이어가야 함(3:1-5). ②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원리는 항상 적용되어야 함(3:6-9). ③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되었음(3:10-14). ④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은 율법으로 소멸되지 않음(3:15-18). ⑤율법의 목적은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로 이끄는 것(3:19-22). ⑥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양자가 됨(3:23-4:7). ⑦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자유를 찾아야 함(4:8-20). ⑧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율법보다 우월함(4:21-31).
1. 믿음에 근거하여 |
율법의 행위가 아닌 듣고 믿음에서 임 |
3:1~5 |
2.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
그가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심 |
3:6~9 |
3. 율법을 통하여 |
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심. |
3:10~14 |
② 언약이 율법보다 앞섬. |
3:15~18 | |
③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하여 진 것.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한시적으로 |
3:19~22 | |
④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믿음이 온 후로는 더 이상 그 아래에 있지 않음. |
3:23~4:11 | |
4. 개인적인 간증을 통하여 |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
4:12~20 |
5. 비유를 통하여 |
하갈과 사라 /이스마엘과 이삭 비유 |
4:21~31 |
3:1~5 바울의 책망: 이 부분은 바울은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을 용납하고 그들의 교훈을 따른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과 영적 무지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절)
한편, 여기서 ‘어리석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에토스’는 생각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자의 처신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눅24:25; 딤전6:9).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각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의 반(半) 타의 반(半)에 의해서 말입니다.
혹자는 ‘텔레비전’을 가리켜 ‘바보상자’라 칭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한 채 그저 텔레비전만 보게 만든다고 해서였습니다. 헌데 지금은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그보다 상황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갈수록 사람들이 생각하길 싫어합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읽더라도 고전적인 책보다는 시트콤 같은 가벼운 주제의 책들을 읽습니다. 마치 생각할 능력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활용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의 형편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3:6~9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바울이 구약의 율법을 파괴한다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비난에 대해, 그는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실례를 들어 성경 속 이신칭의의 교리를 변증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주장 |
바울이 구약의 율법을 파괴한다. |
사도 바울의 변증 |
①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모든 족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작정하심(갈3:8). |
②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다 정하심.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근거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믿음이다(창15:6). | |
③ 430년 후에 생긴 (모세) 율법이 이 언약을 폐기할 수 없다(갈3:17). | |
④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는 신구약을 망라하여 일관된 맥을 형성하는 성경의 핵심적인 사상이다(합2:4). |
3:8,9 복(헬, 율로기아):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의미함(벧전3:9).
3:10~14 율법과 율법주의: 바울은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과 논쟁하면서 목적과 기능적인 면에서 복음을 율법과 분명히 구분합니다. 한편, 그가 대항하고 반박했던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닌, 율법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유대주의(율법주의) 사상이었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율 법 |
범법하므로 더하여 진 것(갈3:19). 죄를 깨닫게 함(롬3:20: 7:7) 그러나 그 역할을 어디까지나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임(한시적, 갈3:19) |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함(롬7:12). |
율법주의 |
율법의 본질을 왜곡시킴 율법의 본질보다는 그 형식에 집착하게 하고, 행위구원을 믿게 만듦. |
그러나 율법주의는 불의하며 악한 것이다. |
* 율법 자체는 선하나, 그 율법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율법주의가 악한 것이다. |
3:14 성령의 약속: 이는 요엘서 2:28의 예언대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성도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을 가리킵니다(요14:16-18). 이 약속은 오순절 날 성취되었으며(행2장) 성령님은 이후 계속해서 우리 중에 내재하시면서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붙들고 계십니다.
3:16,19 약속하신 자손: 이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지칭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16절) 한편, 23절의 ‘믿음’ 역시 믿음의 주요 또한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23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3:23,25 초등교사(헬, 파이다고고스): 이는 ‘어린아이를 보호하거나 시종 드는 사람’이란 뜻으로, 실제 어린아이가 학교에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하는 일을 책임진 노예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초등교사로 비유된 율법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으로, 사람들을 참된 스승이자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25절)
율법을 지칭하는 상징적 표현들 |
초등교사 (3:23,25) |
어린아이가 학교에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하는 일을 책임진 노예를 지칭함. 이는 율법이 사람들을 참된 스승이자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만 했음을 가리킴. |
후견인 청지기 (4:2) |
이는 각각 가정교사와 보호자(후견인), 주의 뜻을 받들어 주인의 재산과 노예들을 관리하는 자(청지기)를 각각 의미함. 상속자가 어릴 적에는 후견인과 청지기(율법)의 보호와 관리 아래 있어야 했으나, 장성한 후에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가리킴. |
4:5 아들의 명분(헬, 위오데시아): 이는 ‘양자가 됨’이란 뜻으로,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요1:12: 롬8:15).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4:6 아들의 영: 이는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4:3,9 초등학문(헬, 스토이케이아): 문자적으로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유대인의 율법주의나 이방인의 천체숭배 사상 및 우상숭배(갈4:10), 그 밖의 기독교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의식과 사상 등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 것들입니까? 약하고 천박하기에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즉,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초등학문에 집착하다보면, 결국 이것들은 우리를 종처럼 부리게 된다는 점입니다(9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9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이와 같은 것들에 종노릇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4:13~15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이 부분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처음 전할 당시의 상황에 대한 언급입니다. 즉 바울은 심한 질병을 안은 채(고후12:7) 전도여행을 하던 중 갈라디아 지역을 방문,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인 적대자들과는 달리 바울을 무시하지 않고 사도로서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4:13,14) 복음을 즉시 받아들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을 정도로(4:15)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깊이 결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 이렇게 변질된 채 다른 복음을 쫓고 있으니, 바울로써는 얼마나 기막힌 일이었겠습니까?
구분 |
옛 언약(율법) |
새 언약(복음) |
비 고 |
24절 |
하갈 |
사라 |
율법의 기원은 종의 위치에 있는 모세이나, 복음의 기원은 본부인과 같은 그리스도이시다. |
22절 |
여종 |
자유자 |
하갈이 사라에게 속한 것 같이, 율법은 복음에 종속된다. |
28절 |
이스마엘 |
이삭 |
율법은 율법에 종속된 자를 생산하나, 복음은 자유자를 낳는다. |
23절 |
종 |
약속의 자녀 |
복음은 언약의 본질이나, 율법은 복음을 섬기는 위치에 머문다. |
25, 26절 |
구속 |
자유 |
율법은 인간을 영원히 속박하나, 복음은 자유하게 한다. |
29절 |
육체 |
성령 |
율법은 인간의 노력이 요구되나, 복음은 성령의 감동에 기인한다. |
30절 |
추방 |
유업상속 |
율법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으나, 복음은 구원을 이룬다. |
제3부 이신득의의 적용 (5:1~6:10)
이 부분에서는 율법주의와 은혜는 상반되므로 율법에 대한 강조뿐만 아니라 지나친 자유만을 주장하는 방종 역시 옳지 못하므로, 결국 성도는 자신에게 부여된 자유를 육체의 정욕을 좇는데 쓸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힘쓰며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데 쏟아 부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
5:1~12 |
2. 자유와 사랑에 관하여 |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
5:13~15 |
3. 육체와 성령에 관하여 |
① 성령과 육체의 싸움 |
5:16~26 |
② 육체의 15가지 열매 |
5:19~26 | |
③ 성령의 9가지 열매 |
5:22~26 | |
4. 구체적인 실천 강령 2가지 |
① 짐을 서로 지라 |
6:1~5 |
②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
6:6~10 |
5:1~12 할례의 무익성: 앞에서 믿음(복음)의 우월성을 논증한 바울은 이제 그 논증의 결론으로 할례의 무익성을 선포합니다. “...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절) 왜 입니까? 그는 곧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이며, 또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3,4절) 한편 이 부분은 교리에서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율법주의자들 |
‘할례를 받아야만’ 의롭게 되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함. |
바울의 변증 |
①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 |
② 할례를 행함은 율법주의로 되돌아가 죄의 멍에를 다시 메는 것이다. | |
③ 이런 자는 도리어 믿음과 은혜에서 분리되어 멸망할 수밖에 없다. | |
④ 할례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에 없으며 경건에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 |
5:3 의무를 가진 자(헬, 오페이레테스): 이는 ‘죄 있는 자’란 뜻으로, 즉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율법의 정죄를 받는 자라는 의미를 더 가지고 있습니다.
5:6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이는 구원이 율법 준수나 종교의식이 아닌, 오직 사랑을 동반한 믿음에 의해 가능케 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면 믿음이지 왜 사랑을 동반한 믿음입니까? 참된 믿음은 언제나 사랑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절)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2:22)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살전1:3)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혹 그렇다면 그 믿음은 사랑을 동반하고 있습니까? 그 믿음이 사랑으로써 역사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5:9 적은 누룩: 이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릇된 교리 또는 그것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을 의미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 그와 같은 그릇된 교리나 혹 그것을 은밀히 퍼뜨리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깨어서 근신해야 할 것입니다.
5:10 다른 마음: 이 역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빨리 돌이키시길 바랍니다.
5:12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이는 당시 갈라디아 일부 지역의 여신 ‘아티스 시벨레’ 숭배 의식 때 성행하던 이교 제사장들의 거세 풍습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즉 거세한 사람이 생식 능력을 상실해 버리듯, 갈라디아 교회 스스로가 교회 내에서 그릇된 교훈을 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을 완전히 축출해 버리기를 원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을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12절)
5:13~15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은 반드시 무엇을 동반해야 합니까? 사랑입니다. “...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절) 본문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믿음은 (죄와 율법에게 종노릇 하던)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참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5:13)
그런데 이 같은 자유는 어찌 사용해야 합니까? 방종(放縱) 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아도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
왜 입니까? 율법의 참된 정신 또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5:14). 믿음은 사랑으로써 역사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5:6).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 하는 것 대신, 오직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릇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자유로 방종의 기회를 삼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방종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5:15)
5:16~24 육체의 일 15가지와 성령의 열매 9가지:
육체의 일 (19~21절) |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음,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함. | |
성령의 열매 (22, 23절) |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 | |
성령을 따라 행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지만,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 하다 보면 육체의 일들밖에 낼 수 없다. 왜냐하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기 때문이다(16,17절).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 |
한편, 여기서 ‘희락’(헬, 카라)은 구원받은 자의 거룩한 기쁨을, ‘오래 참음’(헬, 마크로뒤미아)은 남의 잘못을 덮어 주는 용서를, ‘자비’(헬, 크레스토테스)는 이웃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사랑을, ‘양선’(헬, 아기도쉬네)은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행하는 ‘선행’을 각각 의미합니다.
6:1~5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 앞서 말한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반드시 성도의 삶 속에서 나타나고 드러나야 합니다. 예컨대 짐을 서로 지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한편, 여기서 ‘짐’(헬, 바레)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과중한 시련이나 고통, 어려움 등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나눠서 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2절 상)
무엇을 위해서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 하)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또한 이를 위해선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적 성찰입니다. 자기기만과 언제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비교심리나 자기기만 등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주범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3,4절)
5:6~10 재물의 올바른 사용: 성령의 열매는 또한 물질 사용 면에서 어찌 나타나야 합니까? 육체의 욕심이 아닌 성령을 따라 행하고,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며 사회적으로 봉사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점을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 |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 |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됨(6:8). |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됨(6:8). |
물론 선을 행하다 보면 (당장에 뚜렷한 성과가 보이질 않아) 낙심하게 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치지 마십시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때가 이르러 그 결실을 거둘 날이 오게 될 테니 말입니다(6:9). |
제4부 결론: 할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6:11~18)
바울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할례의 무익성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본서의 핵심 주제 곧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환기시켜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도록 마지막까지 당부했던 것입니다.
할례 문제 에 관하여 |
율법주의자들 |
그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며, 또한 그 육체로 자랑하려 함. 환난과 핍박 대신 안일과 타협함. |
6:11~13 |
사도 바울 |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을 것임. |
6:14~18 |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이는 본서의 진실성을 증명하고 자신의 주요 논점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한편, 바울은 안질 등을 앓고 있던 터라 그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부득이하게 더디오와 같은 자들로 하여금 서신의 대부분을 대필하게 했지만, 말미에 가서는 마치 서명하듯 자신이 직접 큰 글자로 몇 글자 적곤 했던 것입니다.
6:17 예수의 흔적: ‘흔적’(헬, 스티그마타)은 종이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낙인(烙印)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당한 핍박의 흔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누리는 각종 부귀와 영화, 지위 등입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처럼 주를 위해 일하면서 얻은 영광의 상처들입니까?
아라비아에서의 3년(1:13~19)
* 회심 이후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갈 1:15,16)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곧바로 회심 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행 9:22)
그런데 바울의 회심 이후의 행적이 모연합니다. 어째서입니까? 그의 회심 사건과 예루살렘 방문 사이에는 공백기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약 3년씩이나 말입니다. 바울은 과연 그 기간 동안 어디서 무얼 했던 것일까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그 행적이 묘연했던 것일까요? 본문을 통해 살펴봄으로써 함께 도전을 받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갈1:16,17)
회심 직후 그는 혈육(일가친척)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 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 역시 만나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그들을 무시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더 큰 우선순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 말입니다.
사실 그는 (자신의 고백대로) 유대교에 있을 때 기독교를 박해하고 멸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13절) 그것도 여러 연갑자들보다 더욱 지나치도록 열심을 내어 말입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14절)
그런데 그 열심은 올바른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빗나간 열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1)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박해하고 있으면서도(행9:4,5) 이것이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간주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왜 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3)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겠습니까? 그것도 그분을 대적하고 박해했던 모습으로 말입니다. “...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따라서 그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오직 주님과의 일대일 교제를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인적이 드문 광야 한 복판에 들어가서 말입니다.
* 아라비아 광야에 들어가 3년간 머물렀습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17,18절)
회심 직후 그는 아라비아, 즉 다메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야지대에서 체류했습니다. 그것도 3년씩이나 말입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18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곧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하여 복음전파 사역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지금 나에게도 그런 기간이 있었습니까?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만나며 사명을 준비하는 아라비아에서의 3년과 같은 그런 시간들 말입니다.
한편, 바울은 이후로도 종종 이 같은 시간을 가짐으로써 인생의 고비 때마다 새 힘과 평안을 얻곤 했습니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육로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행 20:13)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울처럼 주님과 동행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일대일의 긴밀한 교제 속에서 말입니다.
사실 많은 믿음의 사람들 역시 이와 같은 주님과의 밀월(honeymoon) 시간(또는 기간)을 가지곤 했습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창 24:63)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 32:24)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행 7:30)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사6:1)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1:48)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지금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까? 나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만나며 사명을 준비하는 아라비아에서의 3년과 같은 그런 시간 말입니다. 인생의 고비 때마다 새 힘과 방향을 얻는 드로아에서 앗소까지의 시간, 그리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가졌던 주님과의 그 밀월(honeymoon)의 시간 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자!(3:1~5)
*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누가 너희를 꾀더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본문은 바울은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을 용납하고 그들의 교훈을 따른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과 영적 무지를 질타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1절)
한편, 우리는 본 절의 첫 단어, ‘어리석도다’라는 한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에토스’가 생각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자의 처신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24:25)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6:9)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각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의 반(半) 타의 반(半)에 의해서 말입니다. 혹자는 ‘텔레비전’을 가리켜 ‘바보상자’라 칭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한 채 그저 텔레비전만 보게 만든다고 해서 입니다. 헌데 지금은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그보다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해졌습니다. 갈수록 사람들이 생각하길 싫어합니다. 책 읽기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읽더라도 고전적인 책보다는 시트콤 같은 가벼운 주제의 책들을 읽습니다. 마치 생각할 능력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활용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의 형편이 이와 같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믿음으로 시작했으나 율법으로 마치려 했으며,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육체로 망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왜 입니까?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을 용납하고 그들의 교훈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말씀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더 가까이 함으로써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명심하십시오. 생각하는 능력은 그냥 길러지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말씀을 통해 그 지혜와 명철을 얻을 때에라야 가능합니다. 또한 하루아침에 되질 않습니다. 날마다 더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만 가능합니다.
잠언 기자 역시 깊은 물과도 같은 모략을 무엇으로 길러 낼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마음의 명철입니다. 물론 그 명철은 말씀을 가까이 할 때 얻어지는 것이구요.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잠 20: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각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고 있지는 않습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말씀을 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오직 주의 말씀을 통해 날마다 그 지혜와 명철을 쌓아나가야 합니다. 생각하는 능력은 하루아침에 그냥 길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 다시는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85:8)
앞서 우리는 ‘어리석도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에토스’ 즉, ‘생각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함’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헌데 이는 마치 예수님의 비유 중 어떤 자를 연상시키는 것 같습니까? 달란트 비유의 한 달란트 맡은 자입니다.
왜 입니까? 충분한 능력과 기회를 부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한 채 그 주인에게 책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마25:26) 어째서 그는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습니까? 다른 이들은 그것으로 열심히 장사하는 동안 그 혼자서 땅을 파고 그것을 묻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25:18)
참고로, 전문가들에 의하면 한 달란트는 20kg에서 40kg정도이며, 보통은 33kg정도라고 합니다. 2012년 당시 금의 가격은 1 그램당 약 6만 774원로서, 이 가격을 적용하면 1 달란트 (33kg 적용)는 약 20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으로 환산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결국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한 달란트가 소위 푼돈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잠재되어 있는 것까지 포함해서) 많은 능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푼돈 수준이 아닌) 여전히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한 채 묶여두고만 있지 않습니까? 또한 어떻습니까? ‘생각’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채 땅에 묻어 놓고만 있지 않습니까? 한달란트 맡았던 자처럼 말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25:18)
* 생각은 선물이자 능력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잠 20:5)
생각이 선물일 수 있냐구요? 물론이고 말구요. 혹자를 말하기를 ‘바야흐로 상상력이 돈이 되고, 이야기가 자원이 되는 시대가 도래 했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영국의 인기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는 끝났지만 그것이 만들어낸 세상은 실로 엄청납니다. ‘해리 포터’의 브랜드가치는 150억 달러를 넘었고, 원작자 조앤 롤링의 재산은 무려 10억 달러에 이릅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대니얼 래드클리프의 총수익은 5000만 파운드(1000억 원)에 육박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7권의 책과 8편의 영화, 그리고 각종 게임과 테마파크 등 ‘해리 포터’ 시리즈가 영국 경제에 기여하는 효과는 연간 6조원 규모로 삼성전자의 연간 순이익 규모를 능가한다고 합니다. 국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울연가’로 시작된 한류 드라마의 붐은 ‘한때’라는 비판도 많았지만, 그 비판이 무색할 정도로 한국 드라마에 대한 아시아 시장의 관심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 해 지상파 드라마 수출액만 해도 9500만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국내 문화산업계에서도 ‘한국판 해리 포터’로 불릴 만한 ‘원천 스토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입니다. 새로운 스토리 개발은 한류산업의 존폐뿐만 아니라 일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절실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2011년 10월, KBS1 ‘상상력과 이야기가 황금알을 낳는 시대’ 인용).
이래도 생각이 선물일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생각이 능력일 수 없다고 여기시렵니까?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생각은 곧 귀한 선물이자 큰 능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낭비요 손해이겠습니까?
하물며 우리 크리스천들이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와 상상력이 만난다면, 말씀과 상상력이 친구가 된다면 얼마나 멋진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꼽히는 C.S.루이스(1898∼1963)가 그리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 변증과는 달리 날카로운 지성과 한계를 모를 상상력으로 비기독인들의 지성과 감성을 송두리째 점령해 냈고, 지극히 상식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현대인들에게 증명해 보였으며, 탁월한 논리력과 설득력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해 내는 등 기독인을 넘어 비기독인들에게도 많은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의 소설인 ‘나니아 연대기’가 영화로도 개봉돼, 많은 주목을 끌고 있구요. 루이스 전문가인 마이클 위드 교수(영국 케임브리지대)가 루이스에 대해 “상상력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께 속한 실재로 돌아오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실재를 누리게 하고 있다”고 증언한 바와 같이 말입니다(크리스천투데이 ‘한국에서 만난 C.S.루이스, 기독교와 루이스의 상상력’ 중에서).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각(상상력)이 곧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자 능력임을 믿고 그리 고백하고 있습니까? 또한 날마다 그 생각들을 통해 말씀 속에서 진귀한 보물과 영감, 아이디어 등을 퍼 올리고 있습니까?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15)
* 서로 왕 노릇 하는 대신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갈 5:13 상)
인간관계 대부분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서로 왕 노릇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즉 높은 데 그 마음을 두기 때문이며, 또한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12:16)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그 마음을 높은 데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낮은 데 두는 것 대신 말입니다. 또한 어떻습니까? 혹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을 서로 같이 하는 것 대신 말입니다.
이 같은 이유 등으로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균열(龜裂) 내지는 파국(破局)을 맞고 맙니다. 마음이 서로 맞지 않는데 함께 무슨 일을 이룰 수 있으며, 각자가 제 잘난 맛에 살고 있는데 어찌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결국 우리는 무얼 어찌 해야 합니까? 왕 노릇 하기를 멈춰야 합니다. 높아진 그 자리만큼 다시 내려와야 합니다. 높은 데 그 마음을 두기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높아진 마음을 억지로라도 끌어내려야 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기를 중단해야 합니다. 지식은 반지름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식이 원의 반지름이라면 그 반지름만한 원둘레가 우리의 지식이 닿지 않는 무지의 부분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8:2)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갈 6:3)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왕 노릇 하려 하고 있진 않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서로 물고 뜯으면 피차 멸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3,14)
대신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즉 더 이상 그 마음을 높은 데 두지 않고 오히려 낮은 데 두어야 하며, 또 스스로 지혜 있는 체 여기는 대신 겸손한 마음으로 종노릇해나가야 한단 말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12:16)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인간관계 실패원인은 서로 왕 노릇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한 부대에 지휘관이 둘일 수 없으며, 한 배에 선장이 둘일 순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서로 지휘관 또는 선장이 되려고 합니다. 결국 이 과정에서 무수한 마찰과 파열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구요.
그러나 성경은 그리 말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에게 지휘관 또는 선장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서로에게 종노릇하라고 말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하) 우리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몸소 보여주신 그 모범에 따라 말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 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3,14)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6,27)
한편,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서로 종노릇하되 오직 이것으로 (이것을 통하여) 그리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입니까? 사랑, 즉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여기는 그 사랑 말입니다.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졌나니.”(갈 5:13,14)
결국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마치 ‘짐을 서로 지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표현이듯 말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서로 왕 노릇 하려는 것 대신 오직 그 사랑으로 종노릇하기를 힘쓰고 있습니까? 물론 우리의 힘만으로는,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할 줄 압니다. 오직 무엇으로만이 가능합니까?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또는 ‘끄는도다’)....”(고후5:14 상)
지금 이 시간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며 이끄시는 그 사랑으로 충만한 가운데 오직 그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두 종류의 열매(5:16~24)
* 열매로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6~18)
사람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열매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7:16 상) 여기서 열매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 사람의 행실입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0,21)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아니 어떤 종류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까? 좋은 열매입니까? 아니면 나쁜 열매입니까?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7:17) 이왕이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런데 열매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 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열매가 있습니다. 즉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입니다. 본서의 표현대로 라면, 육체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 말입니다.
육체의 열매는 무엇을 말합니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들입니다(갈 5:16,17). 예컨대 음행과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파당,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입니다.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혹 의도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런 것들과 더 친하고, 이런 것들을 맺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것 대신에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입니다. 예컨대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과 같은 것 말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참고로, 이 두 종류의 열매 모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 사람의 행실이나 성품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삶과 그 행실 면에서 좋은 열매 또는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힘쓰며 애쓰고 있습니까?
* 이왕이면 육체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그러기 위해선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17절 상) 결국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 이 둘은 내 안에서 사이좋게 공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17절 하)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열매, 즉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선 어찌 해야 합니까? 육체의 소욕을 거스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마치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본성을 거슬러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 말입니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롬11:24)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누구의 힘을 힘입어야 가능합니까? 성령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하) 오직 누굴 따라 행해야 한단 말입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어떤 종류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까? 나쁜 열매입니까? 아니면 좋은 열매입니까? 육체의 열매입니까? 아니면 성령의 열매입니까? 나쁜 열매가 아닌 좋은 열매, 육체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선 어찌 해야 합니까? 육체의 소욕, 즉 본성을 거스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내 힘과 능력으로는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누굴 힘입어야 하며, 또한 누굴 따라 행하여야 합니까? 성령 하나님입니다.
열매 맺는 인생(갈5:22,23)
* 별난 인생, 모난 인생, 열매 맺는 인생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이 세상에는 다양한 인생들이 존재합니다. 예컨대 별난 인생, 모난 인생, 그리고 열매 맺는 인생 등 말입니다.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왕이면 모난 인생, 별난 인생보다는 열매 맺는 인생을 살지 않으시렵니까? 본문을 통해 어떤 인생이 열매 맺는 인생이며, 또한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어떤 인생이 열매 맺는 인생입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는 인생, 즉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생입니다. “...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갈 5:16,22,23)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열매를 맺는 건 사실입니다. 어떤 종류의 열매 말입니까? 음행과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 육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맺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그 유업으로 얻지 못함이 분명합니다(갈 5:19~21). “...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21절 하)
이왕이면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성령의 열매입니다. 또한 이왕이면 어떤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생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 성령의 열매들을 맺는 인생이 됩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먼저, 우리는 사랑(Love)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헌데 9가지 열매 중 왜 ‘사랑’이 제일 먼저 소개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사랑’이 모든 성령의 열매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마22:37~40)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그 열매들을 맺는 길이요, 또한 그 은사들을 올바로 사용하는 통로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모든 결실의 기초인 ‘사랑’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둘째, 희락(Joy)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헌데 이 ‘희락’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환경과 조건에서 비롯된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환경과 조건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기쁨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희락’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날마다 영혼 깊은 곳으로 솟구쳐 나오는 그 기쁨과 행복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중에서도 기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어떤 환경과 조건 등에만 연연해하고 있습니까?
셋째, 화평(Peace)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물론 이는 ‘문제없음(No Proble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오히려 숱한 문제와 역경 속에서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평안’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로 말미암아 가정, 교회, 사회 등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 말입니다.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참된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화평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세상이 도무지 줄 수 없는 그 평안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이는 ‘문제없음(No Problem)’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입니다.
넷째, 오래 참음(Patience)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는 타인에게 괜한 오해나 억울함을 당해도 분내지 않고 오히려 참고 견디며 악들을 선으로 이겨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 하냐 구요? 내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내 근시안적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천리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같은 사람은 모든 문제와 상황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다 객관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기에, 참고 견디며 온전히 인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바라봄으로써 인내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참고 인내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다섯째, 자비(Kindness)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는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성품입니다. 헌데 이는 도무지 우리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같은 긍휼을 어찌 소유할 수 있습니까? 날 향하신 하나님의 한없는 긍휼과 인자하심을 깨닫고 누림으로써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긍휼하심을 깨닫고 있습니까? 도무지 긍휼히 여길 수 없는 상황 중에서도 긍휼히 여기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받은 바 그 은혜가 넘치면 자비의 열매 역시 넘쳐나기 시작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여섯째, 양선(Goodness)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는 즉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거나 기대치 않고 값없이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리 하셨듯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를 돕고 있습니까? 어떤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값없이 주며 또한 기쁨으로 나누고 있습니까? 도무지 나눌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값없이 나누며 주고 있느냔 말입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11:1)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14:13,14)
일곱째, 충성(Faithfulness)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는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에든지 모든 일에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자세를 가리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또한 이는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Coram Deo)’의 자세로 살아가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하) 즉, 상황이 어떠함과 유․불리에 상관없이 믿을 만하고, 신뢰할 만한 인생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슨 일에든지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며, 범사에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Coram Deo)’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상황이 어떠함과 유․불리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덟째, 온유(Gentleness)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는 분노와 시기 등 육체의 소욕들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그 말씀을 좇아 행동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1,3) 즉 비방을 받으나 비방을 하지 않고, 모욕을 받으나 모욕하지 않으며, 고난을 당하나 친히 그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으려 하는 신앙 자세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온유함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5:38~41)
끝으로, 우리는 절제(Selfcontrol)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는 즉 믿는 자가 성령의 은혜에 사로잡혀 자신을 제어하며, 또한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 한편, ‘사랑’이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그 출발이라면, ‘절제’는 그 마무리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입니까? 신앙생활은 ‘절제를 통해서라야’ 비로소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날마다 말씀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제어하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닌 질서의 하나님이시란 점을 말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2,33) 뭐든지 과하면 탈이 나는 법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때에 맞는 말이 더욱 빛나는 법이구요.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짐을 서로 지라(6:1~5)
* 탈집단화, 개인주의화 사조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3:1,2,4)
흔히들 현대사회를 일컬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사회’라 규정하곤 합니다. 모더니즘(Modernism)의 연속선상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으로, 비역사성, 비정치성, 해체, 탈장르화 등을 주장하는 그런 사회 말입니다.
성경 역시 이 시대를 향해 공동체보다 자기 자신을, 신의보다 돈을, 감사보다 불평을,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딤후3:1~4). 이 같은 시류(時流)는 고스란히 교회 안으로 들어와, 결국 경건의 능력들을 상실하게 만든 것입니다. 즉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그런 상황 말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딤후3:5 상)
이와 같은 자들에게서 돌이키십시오. 이 같은 시류(時流)로부터 돌아서십시오. “....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하) 이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요 또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그들처럼 공동체보다 자기 자신을, 신의보다는 돈을 더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들처럼 감사보다 불평을,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쾌락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도 그들처럼 해체나 분열 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느냔 말입니다. 돌이키십시오. 돌아서십시오.
* 이것들로부터 우리는 돌아서야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돌이켜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돌아서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짐을 서로 지기 시작함으로써 말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 상) 어떤 짐을 말입니까? 짐(헬, 바레), 즉 혼자서는 감당하기에는 과중한 시련이나 고통, 어려움 등입니다. “너희가 짐(또는 무거운 짐)을 지라....”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짐을 서로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못 본 채 하고 있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우리 중 하나에게 지금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과중한 짐이 맡겨졌다면, 이는 필시 우리로 하여금 짐을 서로 나눠지라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 그것들을 일으킬지니라.”(신22:4) 또한 잊지 마십시오. 혼자서는 도무지 안 되지만 두 세 사람이면 능히 그 짐을 나누어 질 수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12)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물론 짐을 서로 지기 전에, 혹 서로에게 혹 짐이 되지 않도록 각각 자기의 짐부터 성실히 지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5) 자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라야 또 다른 사람들 능히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각각 자신의 짐을 성실히 감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가고 있느냔 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마지막 날에 그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하나님의 심판 날에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14:12) /“...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계20:12 하)
* 또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야 합니다.
“....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하)
본문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나 더 꺼내고 있습니다. 무엇 말입니까? 짐을 서로 나눠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그리스도의 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찍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3:23)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땅히 그분의 법을 성취하고자 노력하고 애쓰고 있습니까? 서로 사랑함으로써 말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헌데 서로 사랑한다는 건 (오늘 본문에 의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그 무거운 짐들을 서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저 말과 혀로만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말과 혀로만이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또한 각각 자신의 일을 돌아볼뿐더러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아 짐을 서로 지도록 힘쓰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해체와 분열을 조장하는 현 시류와 맞서서 말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자(6:1~18)
*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며 또한 짐을 서로 지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
5장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비시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 바울은 본장에 이르러 몇 가지 실제적인 권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입니까?
첫째, 각각 자기의 짐을 지며 또한 짐을 나눠서 지도록 힘써야 합니다(1~5절).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가 져야 할 짐, 즉 사명이 있습니다. 남녀노유 할 것 없이 말입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5절) 물론 그 짐이란 개인마다 그 종류와 무게가 다 다릅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각각 자기의 짐, 즉 그리스도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자 힘쓰고 또한 애쓰고 있습니까? 각자의 자리와 그 위치에서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어떻습니까? 각각 자신의 일을 살피고 또 살피고 있습니까? 괜스레 남들과 비교하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히거나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3,4절)
한편, 우리는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형편과 처지도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너희 (무거운)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 여기서 ‘짐’(헬, 바레)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과중한 시련이나 고통, 어려움 등’을 의미합니다. 종종 혼자서 지기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보고만 있어야 합니다.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나눠져야 할 것입니다. 왜 입니까? 바로 이와 같은 것이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그 법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다. 각자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자 힘쓰고 있습니까? 또한 적극적으로 다른 이들의 짐을 나눠지고자 애쓰고 있느냔 말입니다.
*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9,10절)
둘째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6~10절). 기회 있는 대로 착한 일을 행하되 지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9절) 여기서 ‘낙심하지 말지니’(헬, 메 엥카코멘)는 ‘지치지 말라’는 뜻으로, 선을 행하는 중에 피곤을 느끼거나 싫증을 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선(善)을 행하고 있습니까? 지금 착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구요?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지 못했다 구요?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내십시오. 조금만 더 인내하다 보면, 조금만 더 정진해 가다 보면, 때가 이르매 거두며, 조만간 그 끝을 보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절)
한편, 우리는 더욱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리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핏 값으로 사신 내 형제요 자매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주님과 그분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또한 즐거워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14절 상) 세상에 대하여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믿음의 고백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하)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날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있느냔 말입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또는 짐)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말입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9,30)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6:5) 본서의 핵심주제 곧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 위에 서서 말입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6:7~10)
*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듯이 인생에도...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듯이 인생에도 인생법칙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영적인 원리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된다는 ‘파종의 제1법칙’입니다. “....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심지 않은 것이 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심겨졌기 때문에 지금 날 수 있는 것입니까? 심지 않고서 거둘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거두고 싶다면 그 전에 미리 심는 수고를 마쳐야 합니다. 거두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만사를 제쳐두고 심는 일에 열중해야 합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파종하되 부지런히 심고 있습니까? 좋은 종자들로 말입니다.
또한 파종의 제2법칙이 존재합니다. 무엇입니까?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복으로) 거둔다는 말이로다.”(고후9:6) 제1법칙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제1법칙이 심고 거두는 종류에 관한 것이라면, 제2법칙은 그 양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적게 심었습니까? 그렇다면 분명 그만큼만 거두게 될 것입니다. 지금 많이 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분명 그만큼 거두게 될 것입니다. 혹 적게 심어 놓고선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별다른 파종의 수고도 없이 수확할 것만 잔뜩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명심하십시오.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되,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점을 말입니다.
* 지금 나는 무엇으로 심고 있습니까?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지금 나는 무엇으로 심고 있습니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하여 심고 있습니까? 혹 자신의 육체, 곧 육체의 정욕을 이루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썩어질 세상으로부터 썩어질 것들만 거두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8절 상) 왜 입니까? 육체의 일들은 뻔하기 때문입니다. 곧 음행과 더러움, 음란, 우상숭배, 마술, 미움, 다툼, 분노, 이기심, 편 가르기, 분열,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 말입니다(갈 5:19~21). 혹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위해 심고 있습니까? 혹 내 삶 속에는 갈 5:19~21에서 나열된 것들이 나오고 있진 않습니까? 혹 이 같은 것들이 나오고 있다면, 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육체를 위해 심어왔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또한 지금 나는 무엇으로 심고 있습니까?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심고 있습니까? 혹 성령을 위하여 심고 있습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성령으로부터 썩지 아니할 것, 곧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절 하) 왜 입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곧 사랑과 기쁨, 평화, 인내, 자비, 착함, 성실, 온유, 절제 등 말입니다(갈 5:22,23).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위해 심고 있습니까? 혹 내 삶 속에서는 갈 5:22,23에서 나열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까? 혹 이와 같은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이미 성령을 따라 행하며 또한 성령을 위해 심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 여기에는 반드시 인내가 요구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물론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며, 또한 성령을 위해 심는다 해도, 모든 게 곧바로 결실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천하만사에는 모두 때와 기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3:1) 무슨 말입니까? 모든 일에는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본 절 역시 그 때를 언급하고 있긴 매 한가지이구요. “...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절 하)
결국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는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까? 인내입니다. 혹 지금 선을 행하고 있습니까? 선을 행하되 혹 그 결과물인 쉽사리 보이질 않아 낙심 중에 있지는 않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치지 마십시오. (여기서 ‘낙심하지 말지니’는 ‘지치지 말라’는 뜻) 선을 행하되 도중에 낙심하거나 싫증을 내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9절 상) 또한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 포기하지 아니하면....”(9절 중) 왜 입니까? 때가 되면, 하나님의 타이밍이 되면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절 하)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며, 또한 성령을 위해 심는다 하면서도, 당장에 어떤 결과물이 보이질 않는다고 해서 낙심해 있거나 지쳐 있지는 않습니까? 포기 직전에까지 가 있진 않습니까? 낙심하거나 지치지 마십시오. 또한 포기하지 마십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자랑(6:11~18)
* 세상은 육체를 자랑하나...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13절)
사도 바울은 본 서신을 마감하면서 새삼 할례의 무익성을 반복 강조하면서, 육체의 모양을 내고 또한 육체로 자랑하려 하는 자들, 즉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경계하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무엇 때문에 바울은 그들을 그토록 경계하고 또 경계했던 것입니까?
첫째, 그들은 인간적인 겉치레만 일삼는 외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12,13절)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즉, 그들은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오히려 경건의 모양(또는 육체의 모양)을 내려 했고, 또한 그 육체로 자랑을 일삼으려 했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그들처럼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며 또한 그 육체로 자랑하려 하고는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 그들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유대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박게 함은 ...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12,13절) 즉 그들은 여전히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복음의 참된 진리를 부인한 채 것, 할례로 대변되는 율법 준수를 주장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그들처럼 아직도 믿음 외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도 바울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복음의 참된 진리만을 붙잡고 나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이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셋째,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외면한 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12절 하) 사실 당시의 성도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는 할례를 전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갈 5:11) 그러나 거짓교사들은 이 같은 상황에서 할례 문제를 수용함으로써 교묘하게 박해를 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12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 그들처럼 인간적인 겉치레만 일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그들처럼 믿음 외에 다른 것들이 더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 그들처럼 복음의 참된 진리들을 외면한 채 개인의 영달을 위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즉,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오히려 경건의 모양(또는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고, 또한 그 육체로 자랑을 일삼으려 했던 자들처럼 말입니다.
*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그러나 우리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며 육체로 자랑하는 것 대신 말입니다. 왜 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며, 진정한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외면적이거나 인간적인 자랑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요? 겉보기에는 모두 대단하고 화려해 보이나 막상 겪어보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점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진정한 자랑거리를 찾은 이상 말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한편, 14절 자랑할(헬, 카우카오마이)은 ‘즐거워한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이 바로 복음 전파의 참된 출발점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떻습니까? 무얼 가장 즐거워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가장 큰 자랑거리로 삼고 있습니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사랑하며 그 십자가만을 단단히 붙잡고 나아가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오직 ‘예수의 흔적’을 자랑하면서 말입니다. “이후로는 노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절) 한편, 여기서 ‘흔적’이란 종이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낙인으로, 본문에서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당한 숱한 핍박과 고난의 흔적을 가리킵니다.
지금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주를 위해 일하고 주를 위해 살다가 얻은 영광의 상처가 있느냔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자랑이 아닌 오직 예수의 흔적만 자랑하면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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