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종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주시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변씨 중랑장공파 21세 변종운입니다. 평소 화수회 카페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통하며 우리 원주변씨 종친들과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올해 칠순에 접어드니 문득 우리 백성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물질 풍요가 어디서 올 수가 있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원주변씨 시조님의 고려 말 원수(元帥)로서 나라를 지키신 탁월한 용병술과 충절의 표상이 된 불굴의 기개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 원주변씨 후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이에 저는 부족한 지식을 동원하여 관련 기록을 저의 관점에서 정리하여 시조님의 호국정신을 숭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시조님의 빛나는 업적을 공유해 봅니다. 정성을 다해 올리는 저의 이 글이 시조님의 성덕(盛德)을 기리고 종친 간의 화합을 도모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중앙화수회 홍보이사. 변 종운 告,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197번지 대은시조 묘소(大隱始祖 墓所)는 1390년 정월 16일 始祖께서 순절하시자 원천부원군 묘소는 양주 주엽산(注葉山)에 모셨으나 광릉(세종대왕의 능)과 가깝다는 이유로 1468년 풍양현 건천면 지사동(芝沙洞) 인좌 현 위치로 이장(移葬)하였고, 시조배위 진한국부인 원주원씨 묘소는 이곳에서 5리 떨어진 풍양현 건천면 사능리 오리동에 있었으나 1985년 6월 16일 시조 묘소를 단장하면서 이곳으로 이장(移葬)하여 쌍분(雙墳)으로 모셨습니다.
고려 말 원주변씨 시조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 장군님께서는 국가의 존망(存亡)이 위태할 때마다 전장에 나가 싸우신 혁혁한 전공(戰功)은 오늘날 전국 각지에서 근면성실하게 살아가는 우리 원주변씨 후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고려 말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한 구국의 영웅이셨습니다. 특히 홍건적을 격퇴하여 수도개경을 되찾고, 황산대첩에서 이성계 장군과 왜구(倭寇)를 소탕(掃蕩)하며 보여준 변안열 장군님의 용맹함은 당대 최고의 장수였음을 증명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한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원주변씨 시조 대은 변안열 장군님은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名將)이었습니다. 그리고 장군님은 무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출장입상(出將入相)하시며 판삼사사(判三司事)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시며 군사 행정과 국방 전략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은 고려 우왕 14년, 즉 1388년 음력 5월 22일부터 6월 3일 사이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성계가 요동 정벌군을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 도착한 뒤 회군하여 개경으로 돌아와 정변을 일으킨 것이죠.
이성계 장군의 위화도 회군은 단순히 군사를 개경으로 돌린 사건을 넘어, 고려라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신질서를 세우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회군 이후 이성계 장군은 개경을 점령하고 실권자였던 최영 장군을 제거했고, 이어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세웠으나, 곧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창왕마저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 장군은 실질적으로 군사권을 장악하며 실권자의 힘을 다졌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장군은 정적들의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1389년 10월 11일 자신의 생일 잔치를 베풀고, 변안열 장군과 정몽주 등 주요 대신들을 초대했습니다. 주연(酒宴)의 목적은 역성혁명을 꿈꾸던 이성계와 그 일파(특히 이성계 아들 이방원)가 고려에 충성하는 大臣들을 회유하거나 그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방원이 '하여가'를 통해서 새왕조 창건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자, 변안열 장군은 불굴가(不屈歌)로 , 정몽주는 '단심가'로 응수하며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밝혔습니다.
穴吾之胸洞如斗(혈오지흉동여두)
내 가슴 구멍 뚫어
貫以藁索長又長(관이고색장우장)
동아줄 길게 꿰어
前牽後引磨且戛(전견후인마차알)
앞뒤로 끌고 당겨
任汝之爲吾不辭 (임여지위오불사)
이 한 몸 가루된들
有慾奪吾主(유욕탈오주)
임 향한 이 굳은 뜻을
此事吾不屈(차사오불굴)
내 뉘라고 굽히랴.
특히 변안열 장군은 당시 강력한 정예병(精銳兵) 200명을 거느리고 공병(公兵)을 장악해 전공(戰功)이 많았기에, 이성계 장군 생일잔치에서 변안열 장군의 확고한 태도는 이성계 혁명 일파에게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역성혁명 일파들은 변안열 장군을 회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변안열 장군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1389년 말(공양왕 1년), 폐위된 우왕(禑王)을 복위시키려 했던 김저와 정득후의 사건이 터집니다. 이들은 이성계 장군을 암살하고 우왕을 다시 세우려다 실패했는데, 심문 과정에서 변안열 장군께서 이 모의(謨議)에 가담했다는 진술이 나왔습니다. 당시 사헌부(司憲府)는 이를 근거로 변안열 장군을 강력하게 탄핵했습니다. 변안열 장군은 충직한 성품으로 우왕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했던 인물이었기에, 신진사대부 혁명 세력에게는 제거 대상 1순위가 되었습니다.
탄핵 직후 변안열 장군은 한양으로 유배되었고, 공양왕은 사헌부와 사간원의 끊임없는 상소와 정치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처형을 결정하게 됩니다. 1390년 정월 16일 유배지에서 장군께서는 참형(斬刑)을 당하셨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고려의 구세력은 더욱 위축되었고, 조선 건국의 흐름은 가속화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변안열 장군은 몰락하였고 자손들은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모든 공적(功籍)이 말살되고 가재(家財)가 적몰되는 비운을 맞이하였습니다. 원주변씨 시조 대은 변안열 장군의 죽음은 당시 정치적 희생양으로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승자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은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 했던 변안열 장군의 전공(戰功)은 사라졌고 변안열 장군의 위상도 역사의 뒤안길로 묻히게 된 것입니다.
1380년대 후반에는 역동의 고려사가 엮어지는 시기였습니다. 줄지어 터지는 사건 때문에 숨 돌림 틈도 없었습니다. 고려의 요동 정벌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하면서부터 그 바람은 풍향도 풍속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변안열 장군은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장군이 사망한 뒤에는 이성계, 조민수와 더불어 고려 말 군사력의 삼각 구도를 이루었으나, 조민수까지 사망하자 변안열 장군이 이성계 장군에게 군사력으로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장군으로 남게 되었고, 고려 정국의 하늘에는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원주변씨 시조 변안열 장군의 최후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맞이한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원명 교체기의 동북아 정세는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동방의 해 뜨는 나라에도 쓰나미가 밀려오듯 한 왕조가 소멸하고 탄생했습니다.
2013년 4월 16일 국가보훈처는 변안열 장군께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 했던 애국 충절을 높이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호국 인물로 선정하였고, 이듬해 2014년 5월 8일 대한민국 전쟁기념관에서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고려 왕실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키려다 순절(殉節)한 지조(志操)를 기리기 위해 "5월의 호국인물"로 현양(顯陽)하고 추모 행사를 개최함으로서 비로소 변안열 장군의 충절과 공훈이 공식적으로 인정 받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나라 고려에 귀화하여 40년간 홍건적과 수많은 왜구를 격퇴하며 기울어가는 나라를 지켰고, 끝까지 충절(忠節)과 의리를 지키다 순절(殉節)하신 변안열 장군님의 이 정신적 유산은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격동의 시대에 시조님이 보여준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절개(節槪)"를 우리 후손들은 이어받아, 그것을 현대 사회의 복잡함 속에서 자신을 지탱하는 도덕적 이정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시조님의 높으신 뜻은 구름 위에 솟은 백두산과 같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어진 마음은 대지를 적시는 큰 강물과 같습니다. 나라에는 둘도 없는 명장(名將)과 충신(忠臣)이었던, 시조님의 그 위대한 행적(行蹟)을 기리며 공손하게 고개 숙여 숭모(崇慕)의 예(禮)를 올립니다. 원주변씨중앙화수회 홍보이사 중랑장공파 21世 변종운 告,
원주변씨시조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대은 변안열 장군님은 우리 원주변성전종인(原州邊姓全宗人)의 유전적 구성(DNA)을 물려주셨습니다. 시조님으로부터 후손에게 유전되는 신체적 형질, 잠재적 건강 특성, 성격과 기질 등은 수많은 세대를 거쳐 내려온 유전자의 결과물이며, 대대로 이어져 온 생명의 흐름과 유전적 연결고리 덕분에 후손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조님이 남기신 지식, 문화, 가치관, 희생덕분에 후손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문화적 토대가 마련 되어 내가 자유대한민국에 태어나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면서 시조님의 정신적 유산에 감사하는 태도는 매우 중요한 가치관이며 후손의 아름다운 마음가짐입니다.
시조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이란
♥ 시조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종친회 행사에 참여하면서 시조님을 기리는 제향(祭享)에 참여하여 나이드신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역사 자료 및 문헌을 검색하여 자신의 근원을 깨우치는 것이 후손이 시조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 기신제나 시향(時享) 등 전통적인 방식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중앙화수회와 유대를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 시조님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주어진 삶을 근실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자체가 가장 큰 감사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 현재 살아계신 부모님과 연로하신 친척들을 극진히 공경하는 효를 실천하는 것도 시조님께 감사하는 마음의 연장선입니다.
♥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시조님께서 겪었던 도전정신과 호국충절, 그리고 성취한 업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으며, 이는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丙午 晩春, 중앙화수회 홍보이사 변종운 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