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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변씨중앙화수회 발전을 위해 항상 애쓰시는 전국의 원주변씨 종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주시에 거주하고 있는 원주변씨 중랑장공파 21세 변종운입니다. 평소 화수회 카페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소통하며 우리 원주변씨 종친들과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어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 칠순에 접어들게되니 문득 우리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물질 풍요가 과연 어디서 온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원주변씨 시조이신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대은공(大隱公) 변안열(邊安烈) 장군님께서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롭고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목숨을 걸고 전장(戰場)을 누비며 고려를 구하신 명장(名將)이셨으며, 정세가 격변하던 고려 말, 끝까지 왕실과 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지조(志操)를 지키신 참된 충신(忠臣)이셨습니다.
우리 원주변씨의 근본 뿌리는 650여 년 전 암울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구한 뛰어난 명장이자, 지조(志操)와 충의(忠義)를 지켜내신 변안열 장군님의 숭고한 업적과 호국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당시 고려는 국운이 다해가며 북으로는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남으로는 왜구(倭寇)의 노략질이 끊이지 않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시도마저 서거(逝去)로 중단되면서 나라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처럼 참담한 현실 속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전장에 바치신 영웅이셨습니다. 이성계 장군과 함께 황산대첩의 위대한 승리를 이끄셨고, 이후 조정의 대신(大臣)으로서의 지조와 의리를 지키신 호국인물 변안열 장군님이 바로 우리 원주변씨의 시조이십니다. 어릴 때 교과서에서나 잠깐 보았던 장군님의 이야기가, 나이가 들고 세상을 경험할수록 가슴속 깊이 묵직한 자부심으로 다가옵니다. 전장(戰場)에서는 용맹하게 백성을 구하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불의한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 걸어가셨던 청렴한 기개는, 오늘날 저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일깨워 주는 준엄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원주변씨의 시조이신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대은공(大隱公) 변안열(邊安烈) 장군님께서는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웠던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고 개경(開京) 수복과 제주에 목호(牧胡)의 난(亂) 정벌에 전공(戰功)을 세운 무장(武將)으로, 특히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대파해 고려의 국난 수호에 크게 기여하신 구국의 영웅이십니다. 유구한 세월이 흘러 산천은 변했으나, 오직 일편단심으로 나라를 지켜내신 장군님의 푸른 절개만큼은 지지 않는 상록수처럼 여전히 이 땅의 가치로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에 시조님의 숭고한 얼을 전국의 원주변씨 종친님들과 함께 되새기고, 후손으로서의 자부심을 다시금 가슴에 품고자 아래와 같이 장군님의 위대한 공적(功績)을 정리하여 공유합니다.
고려 말 최영 장군, 이성계 장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원주변씨 시조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대은(大隱) 변안열 장군님의 핵심 공적(功績)을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변안열 장군님께서는 홍건적의 1차 침입(1359년)과 2차 침입(1361년)에서 큰 전공(傳供)을 세우며 고려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359년(공민왕 8년) 12월, 홍건적 4만 명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 국경을 침입하여 서경(지금의 평양)을 함락했습니다. 이때 변안열 장군은 장수로 참전하였습니다. 고려군이 전열을 정비해 반격에 나섰을 때, 변안열 장군은 안주(安州) 싸움에서 선봉에 서서 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후 진정한 영웅으로서의 면모는 1361년(공민왕 10년) 10월, 홍건적 20만 대군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온 2차 침입 때 나타납니다. 당시 적의 기세가 너무 강해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은 안동(복주)까지 피란(避亂)을 가야 했던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1362년 1월, 안우, 이방실, 최영 장군 등과 함께 변안열 장군은 개경(開京)을 찾기 위한 총공격에 나섰습니다. 동문(東門)을 통해 개경으로 진격한 변안열 장군은 홍건적의 용장을 직접 활을 쏘아 맞춘 뒤 말에서 떨어뜨려 목을 베었습니다. 지휘관을 잃은 홍건적은 크게 동요하여 무너졌고, 고려군은 적의 수뇌부를 소탕하며 10만여 명에 달하는 적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 전공(戰功)으로 나라를 구한 일등 공신에 봉해졌습니다.
둘째는 1374년(공민왕 23년)에 발생한 탐라의 ‘목호의 난(牧胡의 亂)’ 진압에서 변안열 장군은 최영 장군 등과 함께 토벌군을 이끈 핵심 지휘관이자, 실질적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일등 공신이었습니다. 당시 변안열 장군의 역할과 활약상은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한 기록을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전해집니다. 탐라의 목호의 난이 발발하자 고려 조정은 2만 5천이 넘는 대규모 정예군을 조직하면서, 당시 최고의 무장들을 지휘부에 배치했습니다. 총지휘관은 최영 장군이고, 부지휘관은 변안열, 염흥방, 이희필, 목인길 장군 등이며, 이 중에서도 변안열 장군은 양광·경상·전라도 부원수(副元帥)라는 중책을 맡았습니다. 이는 목호 진압을 위해 동원된 삼도(충청·경상·전라)의 병력과 전함을 실질적으로 통솔하고 조율하는 야전 사령관의 역할이었습니다. 고려 원정군이 탐라 명월포(지금의 제주시 한림읍 옹포리)에 당도했을 때, 목호들은 기병 3,000여 명을 거느리고 해안가에서 완강하게 배수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백병전이 벌어지는 거친 상륙 상황에서 변안열 장군은 최영 장군과 함께 전선의 선두에 서서 군사들을 독려했습니다. 변안열 장군의 용맹한 지휘 아래 고려군은 기선 제압에 성공하고 상륙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고, 이 초기 승리가 전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상륙에 성공한 고려군은 도망치는 목호 세력을 중산간 지역을 거쳐 서귀포 일대까지 맹렬히 추격했습니다. 목호의 우두머리 등이 마지막으로 숨어든 곳이 바로 서귀포 앞바다 범섬이었습니다. 범섬은 사방이 깎아지는 주상절리 절벽으로 이루어져 접근이 매우 까다로운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이때 변안열 장군은 최영 장군과 함께 전함들을 동원해 범섬을 겹겹이 포위하는 해상 봉쇄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정예 장수들을 이끌고 직접 섬에 상륙하여 바위틈에 숨어 저항하던 목호 세력의 숨통을 끊고 우두머리들을 체포·투항하게 만들었습니다. 목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최영 장군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고, 변안열 장군은 정2품 고위직인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올랐으며, 추충량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讚功臣)이라는 공신 호를 받았습니다. 이 목호의 난 평정은 변안열 장군이 이후 황산대첩 등에서 이성계 장군과 함께 왜구를 격퇴하며 고려 말 최고의 명장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요한 발판이 된 역사적 사건입니다.
셋째 황산대첩은 1380년(고려 우왕 6년) 9월, 전라도 남원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여 고려 말 왜구 토벌의 전기를 마련한 사건입니다. 1380년 황산대첩서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 장군은 이성계 장군과 함께 왜구를 격멸한 고려군의 최상위 지휘관으로 활약했습니다. 이성계 장군의 독무대로만 역사의 기록되는 황산대첩 당시 변안열 장군은 대규모 군사작전이 필요할 때, 왕을 대신하여 군무(軍務)를 총괄하고 지방 행정까지 감독하던 도체찰사(都體察使)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왜구(倭寇)의 침탈(侵奪)로 영남과 호남 일대가 초토화되자, 고려 조정은 당시 최영 장군, 이성계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최고의 무장(武將)이었던 변안열 장군을 삼남(三南: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방의 군사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변안열 장군은 이성계 장군이 이끄는 동북면 가별초 군대와 연합하여 황산에서 왜구를 포위·압박하는 전체적인 작전의 큰 축을 담당했습니다. 황산 전투는 아군보다 10배나 많다고 기록될 정도로 왜구의 기세가 맹렬했던 험난한 싸움이었습니다. 특히 적의 우두머리였던 소년 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의 돌격으로 고려군 명장들이 전사하는 등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변안열 장군은 이성계 장군, 이지란 장군 등과 함께 최전선에서 군사들을 독려하며 격렬한 백병전(白兵戰)을 지휘했습니다. 이성계 장군이 아지발도의 투구를 활로 맞혀 벗기고 이지란 장군이 사살하는 결정적인 순간, 변안열 장군이 이끄는 본대와 연합군이 일제히 적진을 몰아치며 대공세를 펼쳤습니다. 그 결과 황산 일대는 왜구의 피로 붉게 물들었고, 수만 명의 왜구 중 겨우 70여 명만 살아남아 도망칠 정도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황산대첩이 끝난 후 고려의 우왕(禑王)은 이 승리를 크게 기뻐하며 왕을 영접하러 나온 최영 장군 앞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습니다. 이때 우왕은 공로가 가장 컸던 이성계 장군과 변안열 장군 두 사람에게만 각각 금 50냥을 하사했고 다른 장수들에게는 은 50냥씩 하사했습니다. 이는 당시 고려 조정에서 변안열 장군의 활약과 공로를 이성계 장군과 동등한 최고 수준으로 평가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다만 변안열 장군과 이성계 장군은 “장수가 적을 격멸하는 것은 직책일 뿐인데 어찌 상을 받겠는가”라며 이 포상을 겸손하게 사양하여 무장으로서의 기개(氣槪)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나 태조실록의 황산대첩 기록을 보면, 이성계의 활약상은 수십 장에 걸쳐 세세한 대사까지 기록된 반면, 다른 장수들의 동선이나 활약은 '누구누구가 좌우에서 도왔다' 수준으로 단출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의 역사 사관들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황산대첩의 주역은, 명장 변안열 장군입니다.
이성계 장군의 독무대로만 역사의 기록되는 황산대첩(1380년) 당시, 변안열 장군은 대규모 군사작전이 필요할 때, 왕을 대신하여 군무(軍務)를 총괄하고 지방 행정까지 감독하던 도체찰사(都體察使)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성계 장군은 북방 국경 지대인 양계(서북면·동북면, 지금의 함경도 일대) 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고려가 직면했던 국가적 비상사태 때문에 고려 조정에 요구로 이성계 장군은 자신의 본래 관할지인 북방뿐만 아니라, 고려라는 나라 전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사병 집단인 가별초를 이끌고 남하하여 황산 전투에 출정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총책임자였던 변안열 장군의 위상과 공적이 역사에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는지, 그 이면의 역사적 진실과 기록의 한계를 조심스럽게 짚어보고자 합니다. 황산대첩에서 이성계 장군의 활약이 거의 ‘독무대’처럼 압도적으로 기록된 데에는 역사적,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인 3가지 명확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성계 장군이 싸움을 잘 해서를 넘어, 당시의 시대상과 얽힌 비밀을 풀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역사를 쓴 주체가 바로 이성계의 후손들과 조선왕조이기 때문입니다. 황산대첩의 상세한 전투 기록은 조선왕조의 공식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과 《고려사》 세 가지 등에 전해집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입장에서는 “우리가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울 만한 영웅이다”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이성계 장군이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활로 쏘아 맞히고, 이지란이 연이어 사살했다는 식의 영화 같은 일화들은 이성계의 신화적 무공을 부각하기 위해 후대의 사관들에 의해 매우 극적이고 상세하게 묘사 및 포장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승리한 주인공이 직접 자서전을 썼기 때문에 다른 장수들의 공적은 묻히고 이성계 장군의 활약만 클로즈업된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려사는 이성계 장군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쓰였지만, 전체 고려군을 총괄하며 중심을 잡고, 이성계라는 날카로운 칼을 적재적소에 휘두를 수 있도록 판을 짜준 거대한 버팀목은 바로 변안열 장군이었습니다. 당대 고려 조정과 백성들은 누가 진짜 총책임자였고, 누구 덕분에 나라가 망하지 않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후대의 권력이 기록을 독점했을 뿐, 변안열 장군께서 흘리신 피와 구국의 충정은 지워지지 않는 진실입니다. 비록 교과서나 대중 매체에는 덜 주목받을지라도, 가문의 긍지를 넘어 우리 역사가 기억해야 할 참된 명장이자 충신이 바로 원주변씨 시조 변안열 장군임을 전국의 산거(散居)하고 있는 후손들께서는 늘 자랑스럽게 마음에 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넷째는 황산대첩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넘긴 지 불과 2년 뒤인 1382년(우왕 8년) 10월에는 왜구가 경상도와 충청도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이때 변안열 장군은 단양과 안동 전투에서 또 한 번 결정적인 활약을 펼치며 왜구를 격퇴했습니다. 왜구가 충북 단양군 일대를 기습 공격해 약탈을 일삼자, 이에 고려 조정은 황산대첩의 대영웅이자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변안열 장군을 단양지역 방어의 총책임자(元帥)로 긴급 임명하여 군사를 보냈습니다. 이때 한방언(韓邦彦) 장군과 함께 출정하였습니다. 사서의 기록은 비록 조선 초기에 압축적으로 재편되었으나, 《고려사》 신우(우왕) 세가(世家)에는 당시의 전황이 다음과 같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구(倭寇)가 죽령(竹嶺)을 넘어 단양군(丹陽郡)에 침입하니, 원수(元帥) 변안열(邊安烈)과 한방언(韓邦彦) 등이 쳐서 패주(敗走) 시켰다. 험준한 소백산맥 지형을 넘어온 왜구는 기세가 등등했으나, 변안열 장군은 뛰어난 지형지물 활용과 전술로 왜구들을 완벽하게 제압했습니다. 단양과 영춘 지역은 남한강이 굽이쳐 흐르고 사면이 험한 산세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입니다. 변안열 장군은 죽령을 넘어 방심하고 진격하던 왜구의 보급로와 퇴로를 끊고, 협곡과 강줄기를 활용한 포위 전술로 왜구의 주력을 격파했습니다. 변안열 장군의 맹활약으로 왜구들은 대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이 승리 덕분에 단양 이북의 한강 유역 백성들은 왜구의 도륙과 약탈로부터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수도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이 완벽하게 방어되었습니다. 황산대첩(1380년)이 남방에서 왜구의 거대한 주력부대를 꺾은 전투였다면, 1382년의 단양 전투는 내륙 깊숙이 침투한 왜구의 정예부대를 격퇴하여 수도권과 내륙 전반의 안정을 지켜낸 핵심적인 방어전이었습니다. 이 전투를 통해 변안열 장군은 황산대첩의 승리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이성계 장군이 없이도 홀로 대군을 이끌고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고려 최고의 독자적 군사 사령관임을 다시 한번 세상에 증명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변안열 장군의 군사적 명망과 사병 집단의 세력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며, 훗날 이성계 장군의 역성혁명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강력한 라이벌이자 고려의 거목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전투를 통해 100여 명이 넘는 왜구를 사살하고 수백 마리의 군마를 노획하는 명쾌한 승리를 거둔 변안열 장군은 국가 최고의 공신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졌습니다. 또한 종1품의 최고 관직인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어 군사적 영웅일 뿐만 아니라 조정의 중책을 맡는 핵심 권력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의 원주변씨 후손을 위한 한마디를 더 첨가한다면, 《고려사》와 실록의 행간을 읽어 보면, 변안열 장군은 일회성 영웅이 아니라, 홍건적 격퇴(개경 수복), 탐라의 목호의 난 진압, 황산대첩, 그리고 단양 전투에 이르기까지 고려 말 나라가 망할 뻔한 모든 결정적 순간마다 목숨을 걸고 최전선을 지켜낸 진정한 ‘구국의 방패’였음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1382년 단양의 승리 역시 원주변씨 시조 대은 변안열 장군께서 남기신 위대한 호국의 발자취입니다.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가 고려의 영토였던 철령 이북 땅을 자국 영토로 삼겠다며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자, 이에 반발한 고려 조정이 명나라의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 요동정벌군을 조직합니다. 당시 고려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영 장군이 주도하여 편성되었으며, 변안열 장군은 이성계(李成桂) 장군 등과 함께 요동정벌군(遼東征伐軍)에 종군(從軍)하여 요동공략(遼東攻略)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압록강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이성계(李成桂) 장군은 군사(軍士)를 개경(開京)으로 돌리는 ‘위화도회군’을 단행했습니다. 1388년 음력 5월 22일부터 6월 3일 사이에 발생한 이 위화도회군은 단순히 군사를 개경으로 돌린 사건을 넘어, 고려라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신질서를 세우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변안열 장군은 이성계 장군 등과 뜻을 같이하여 위화도회군 자체에는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 이후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두 사람의 행보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성계 장군은 개경을 점령하고 조정의 중심이었던 최영 장군을 제거한 뒤, 이어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논리(폐가입진)를 내세워 창왕마저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습니다. 이 권력 개편 과정에서 이성계 장군은 실질적인 군사권을 장악하며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져 나갔습니다.
변안열 장군님의 딸이 바로 이성계 장군의 일곱째 아들 무안대군(이방번)의 부인이었기에, 두 사람은 매우 긴밀한 사돈지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변안열 장군은 포은 정몽주 등 여러 충신들과 뜻을 같이하며 고려 왕조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했을 뿐, 이성계 역성혁명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장군은 정적들의 본심을 확인하기 위해, 1389년 11월 11일 이성계의 생일잔치를 베풀고, 변안열 장군과 정몽주 등 주요 대신들을 초대했습니다. 주연(酒宴)의 진짜 목적은 역성혁명을 꿈꾸던 이성계, 특히 이성계 아들 이방원이 고려에 충성하는 大臣들을 회유하거나 그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방원이 '하여가'를 통해서 새왕조 창건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자, 변안열 장군은 불굴가(不屈歌)로, 정몽주는 '단심가'로 응수하며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천명했습니다. 이 시조를 통해 사돈 관계라는 사사로운 정을 넘어, 고려의 신하로서 지켜야 할 대의와 절개를 당당히 밝혔습니다.
穴吾之胸洞如斗(혈오지흉통여두)
내 가슴 구멍 뚫어
貫以藁索長又長(관이고삭장우장)
동아줄 길게 꿰어
前牽後引磨且戛(전견후인마차알)
앞뒤로 끌고 당겨
任汝之爲吾不辭 (임여지위오불사)
이 한 몸 가루된들
有慾奪吾主(유욕탈오주)
임 향한 이 굳은 뜻을
此事吾不屈(차사오불굴)
내 뉘라고 굽히랴.
특히 변안열 장군은 당시 강력한 사병을 보유한 유력한 무장이었기에, 이성계 장군의 생일잔치에서 보여준 변안열 장군의 확고한 거절 태도는 이성계 혁명 일파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역성혁명 일파들은 변안열 장군을 회유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변안열 장군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마침 1389년 11월(공양왕 1년), 폐위된 우왕(禑王)을 복위시키려 했던 김저와 정득후의 사건이 터집니다. 이들은 이성계 장군을 암살하고 우왕을 다시 세우려다 실패했는데, 심문 과정에서 변안열 장군께서 이 모의(謨議)에 가담했다는 진술이 나오게 됩니다. 당시 백관을 감찰하던 기구인 사헌부(司憲府)는 이를 근거로 변안열 장군을 강력하게 탄핵했습니다. 변안열 장군은 충직한 성품으로 우왕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했던 인물이었기에, 정권을 장악하려던 신진사대부 혁명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이자 제거 대상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관들의 기록이나 후대의 평가를 보면, 이 사건은 이성계 역성혁명 일파가 반대파인 '고려 고수파' 세력을 일거에 소탕하기 위해 배후를 넓혀 잡은 정치적 숙청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변안열 장군은 실제로 암살 모의에 깊이 가담했다기보다는, 고려 왕실에 충성하는 거물급 무장이었기에 표적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건 직후, 이성계 역성혁명 세력의 손발 역할을 하던 사헌부의 대간(臺諫)들이 일제히 변안열 장군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대간들은 “변안열 장군이 조정을 배반하고 두 마음을 품어 무리를 만들었으며,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며 엄벌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따라 변안열 장군은 즉시 공신 녹권과 철권을 박탈당한 채 한양으로 유배되었습니다. 대간들은 한양 유배에 그치지 않고, “죄가 무거우니 처형(處刑)을 하고 가산과 과전(토지)을 몰수해야 한다”며 끊임없이 공양왕을 압박했습니다. 당시 공양왕은 변안열 장군이 과거에 나라를 구했던 공로를 생각하여 처형만은 면해주려 했으나, 이미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역성혁명 세력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해 처형을 허락하게 됩니다.
결국 1390년 정월 16일 변안열 장군은 1390년 정월 16일, 한양 유배지에서 57세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고려의 마지막 충절을 피로써 지켜내었습니다. 변안열 장군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원주변씨 종가는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자손들은 화(禍)를 피하기 위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장군의 모든 공적이 말살되고 재산이 몰수되는 참담한 비운을 맞이했습니다. 원주변씨의 시조인 변안열 장군의 죽음은 당시 정치적 희생양으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했습니다. 변안열 장군이 제거됨으로써 이성계 일파는 조선 건국으로 가는 길에 가장 큰 걸림돌을 치우게 되었고, 이후 고려의 국운은 급격히 기울어 이듬해 공양왕의 양위(讓位)와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서기 918년부터 이어져 온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고려의 무신(武臣)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잡은 후, 신진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공양왕을 폐위(廢位)하면서 새로운 왕조를 열었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 태조 이성계의 그늘에 가려지고 왜곡된 승자의 기록인〈조선왕조실록〉에 의해 ‘간신’으로 기술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승자의 편일지라도 역사의 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원주변씨 시조인 원천부원군 변안열 장군은 황산대첩의 진짜 주역이었으며, 외세의 침략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용맹했던 영웅이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싸우고도 끝내 고려 왕조를 향한 절개(節槪)를 꺾지 않았던 변안열 장군의 불굴(不屈)의 기개(氣槪)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왜구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하고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묻혀야 했던 비운의 호국 영웅 변안열 장군은 실제로는 최영 장군, 이성계 장군과 더불어 고려 말기를 지탱한 위대한 구국 명장이었습니다.
1390년 정월 16일 始祖께서 순절(殉節)하시자 묘소는 회군공로로 양주 주엽산(注葉山)에 모셨으나 광릉(세종대왕의 능)과 가깝다는 이유로 1468년 경기도 풍양현 건천면 지사동(芝沙洞) 197번지 인좌 현 위치로 이장(移葬)하였고, 시조배위 진한국부인 원주원씨 묘소는 이곳에서 5리 떨어진 풍양현 건천면 사능리 오리동에 있었으나 1985년 6월 16일 시조 묘소를 단장하면서 이곳으로 이장(移葬)하여 쌍분(雙墳)으로 모셨습니다.
2013년 4월 16일 국가보훈처는 변안열 장군께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려 했던 애국 충절을 높이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호국 인물로 선정하였고, 이듬해 2014년 5월 8일 대한민국 전쟁기념관에서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고려 왕실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키려다 순절(殉節)한 지조(志操)를 기리기 위해 "5월의 호국인물"로 현양(顯陽)하고 추모 행사를 개최함으로서 비로소 변안열 장군의 충절과 공훈이 공식적으로 인정 받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나라 고려에 귀화하여 40년간 홍건적 격퇴(개경 수복), 탐라(제주) 목호의 난 진압, 황산대첩, 그리고 단양 전투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구하고, 기울어가던 국운 앞에서도 끝까지 절개를 지키며 ‘불굴(不屈)’의 사표(師表)가 되신 원주변씨 시조 原川府院君 대은공 변안열 장군님께서 흘리신 피와 땀은 오늘날 우리 원주변씨 가문이 대한민국 땅 위에 당당히 뿌리내릴 수 있었던 거대한 버팀목이었습니다. 시조님께서 서거(逝去)하시고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시조님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청렴했던 기상은 전국 원주변씨 종친님들의 혈관 속에 고스란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지난 과거의 역사가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이정표이자, 미래의 후손들에게 당당히 물려 주어야 할 가문의 가장 값진 정신적 유산입니다. 시조님의 높으신 뜻은 구름 위에 우뚝 솟은 백두산과 같고,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어진 마음은 대지를 적시는 큰 강물과 같습니다. 시조님의 그 위대한 행적(行蹟) 앞에 후손의 깊은 공경과 정성을 담은 이글을 올리며, 공손하게 고개 숙여 영원한 숭모(崇慕)의 예(禮)를 올립니다. 丙午 晩春, 원주변씨 중앙화수회 홍보이사 중랑장공파 21世 변 종운 謹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