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행 문
** 재경 경남도민회 남해 식목행사에 다녀와서 **
- 도송 구재운 記 -
금년 봄은 춘래 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3월이 다 가는데도 눈발이 날리며
쉬이 봄날이 올것 같지 않는데, 재경경남도민회 향토기념식수행사에 출발하는
3월31일 사당동 주차장엔 궂은비만 주룩 주룩 그침 없이 내리고 있었다.
2호차 관광버스에는 45명 만석으로 남해군 향우회원 30명과 타 시군 향우 15명, 남녀 반반으로 잘 어울리는 분위기속에 김해 조자종 이사의 익살스런 유모어와 안내로 남해로 가는 여행길 마음은 따스해 지더라.
한참을 달려 산청의 삼거리 식당에서 추어탕과 다슬기탕으로 중식을 하면서 1호차의 향우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첫건배를 들었다.
빗길를 쉴새없이 달려 하동 포구를 거쳐 남해의 관문 남해대교에 이르니
노량해협의 거친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현장이라 감회가 깊었다.
1973년에 건설된 길이 660m의 남해대교는 섬이었던 남해도와 육지인 하동군을 연결하는 교량으로 한려해상국립공원(閑麗海上國立公園) 지역과 남해도 전체의 개발에 크게 이바지 하고, 타 지역보다 교육열이 높은 남해군민들의 품성 때문에 이 다리를 지나 많은 남해인들이 타지로 출세의 꿈을 안고 건너갔으며,
당시 15만여명이었던 인구는 현재 5만명을 겨우 턱걸이하고 있다는 웃지못할
사연도 있다고 하였다.
대교를 건너니 하늘이 보이지 않은 멋진 ?꽃 터널을 지나 노량마을에 도착하니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렬사와 실물크기의 거북선이 떠 있었다.핏물로
붉게 물들인 역사의 현장 관음포는 이충무공이 1598년11월 19일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왜선 50척을 격파하고 독전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순국하면서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戰方急愼勿言我死) 라는 마지막 명령을 유언으로 남기고 순국하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지요 순국지다.
이순신장군의 유해가 맨처음 육지로 옮겨진 이곳에 이락사(李落祠)를 세우고,
전승지 관음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첨망대(瞻望臺)를 2층 누각으로
건립하여, 노량해전 영상을 입체 영화로 생생 하게 재연하여 후손들이 그 당시
처절했던 전투현장을 실감나게 하였다.
나는 월남 전투에 전투중대장으로 1년간 참전 했는데 월남으로 갈적엔
C-54공군수송기로 편히 갔지만, 귀국 시엔 미국 대형 수송함을 타고 5일간
인도양을 항해시 소위 롤링(좌우)과 피칭(상하)으로 멀미를 심하게 하여
부산의 3육군병원 신세를 진적이 있는데...
남해의 관광해안도로을 달리는 관광버스는 올라갔다 내려갔다 롤링과 피칭을
다하고 있어 골머리가 띵하는데,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에 바다 물안개마저
가득하여 해안절경은 고사하고, 차창엔 한폭의 산수화가 펼쳐 지더라.
해안도로 끝자락에 위치한 암수바위(일명 가천미륵불) 와 다랭이논으로 유명한 가천마을은 남해의 지도상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양을 한 남해섬의 회음부에 위치하고 있어, 새 생명을 탄생시킬 신성한 곳이라 하였다.
두 巨石中 숫바위는 높이5.9m로 발기한 남자의 굳센 성기와 같고,
암바위는 아기를 밴 어머니상으로 아이러니컬한 형상이지만 이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천재지변을 막고 풍어와 득아의 소원을 이루는
조선후기 여성들이 미륵불 신앙의 구원처 였다고 하였다.
우리나라 15번째 명승으로 지정된 다랭이 논은 자연을 그대로 살리면서
층층을 직각으로 돌담을 쌓아 한 치의 땅도 허용하지 않고 일궈낸
농경시대의 산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현재에도 두평 정도 되는 밭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어느날 전답 주인이
하루 종일 논에 일을 하다가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기 논을 헤아려 보았는데 논 한때기가 없어 졌다.
몇 번이고 세어 보아도 똑 같았다. 결국은 포기 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벗어둔 삿갓을 드니 그 밑에 한배미가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 일행은 다시 해안도로를 타고 남해섬의 아름다운 포구 앵강만을 돌아
상주 해수욕장 해변식당 오아시스에서 생선회와 매운탕으로 저녁 만찬을
즐기고, 은근한 기분에 구름다리를 건너 해안길 산책에 나섰더니 밤바다의
무서운 파도소리가 세차게 몰아쳐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숙소 자유해수 유자랜드는 3층으로 된 규모가 매우 큰 찜질방이라 잠자리가
일정하지 않아 땀을 빼고 사워를 반복하며 수면실에서 자지만, 많은 분들이
노래방, 대폿집에서 밤늦게 까지 회포를 풀며 정담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다음날 4월1일은 비가 개고 산뜻하여 인접한 남해의 유명한 상주해수욕장의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는 은모래 백사장를 걸으며 해류에 떠밀려온 해초를 줍고 저멀리 돛섬의 좌.우 포구에는 어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2km의 반달형 백사장은 천혜의 큰 호수이고 북쪽으로 영산인 금산(錦山)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천혜의 자연 경관이라 여름 성수기엔 100만명의 피서객이 몰려온다 하였다.
아침 조반은 해변을 같이 걷던 남해 향우들과 생선매운탕으로 정답게 즐기고, 자유 시간으 로 주위의 경치를 배경으로 촬영도 하며 이틀간에 낯이 익은
향우끼리 정담을 나누는 장면 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인접 공설 운동장으로
이동 기념촬영을 하는데 잠간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니 야외행사는 취소되고, 상주 초등학교 체육관 실내행사로 진행되었다.
행사장 입구에는 남해군민의 각계각층의 환영단이 행사장 입구 양편에 갖가지 유니폼을 입고 도열해 “어서오세요” 우리를 박수로 맞이해 주어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이번 在日/ 在京 道民會식목행사는 1회 1975년 양산을 시작으로 금년에 35회가 남해군에서 실시되는데. 금년에도 재일본 도민회에서는 도쿄도민회를 포함
9개지역회에서 400여명의 재일동포가 참석하였고, 재경 도민회원도 100명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남해군 산림녹지과장의 사회로 진행된 행사에는 먼저 김태호 경남지사와
정현태 남해군수의 힘찬 환영사에 이어 정찬우 재경 경남도민회장의 축사가
있었고, 함안 김용기 감사가 부채에 그린 서예작품 2점이 고성 제재형 고문과
재일 동포회장 부부에게 증정 되어 박수갈채를 받기도 하였다.그리고 중식은 남해 특산물로 만든 키위 와인으로 축배를 들며 식도락을 즐겼다.
기념식수는 각지역 회장단과 유관 단체장들로 간단히 실시하였으며...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하여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했는데, 이번 남해의 도민 식수행사는 우천으로 계획된
상주생활체육공원에 나무를 직접 심지는 못했지만 남해 사람들의 다뜻한
온정을 피부로 느끼며 섬사람들의 어렵고 힘들었던 역사와 세월,
그리고 그들의 굳센 의지를 체험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풍치와 청정해역의
풍부한 수산물이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있음도 알았다.
귀경길에 남해의 최남단 미조 어판장에 들렸지만 경매는 끝나고,
명산물 죽방렴의 멸치와 청정 미역등 해산물을 쇼핑하며 동해안의
해안관광도로를 따라 창선, 삼천포대교를 건너 귀경길에 올랐다.
이번 여행길은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남해군의 배려로 문화관광 해설사의 안내와 설명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훌륭한 해설가들이 있었다.
바로 서울에서 같이 승차한 남해 향우회원들이었다.
이들은 고향 남해에서 출생하여 청소년 시절을 지낸 토박이요, 산역사의 증인들로 지금 서울에서 살지만 마음은 언제나 고향 남해에 있는듯 하였다.
재경남해 지역면 회장을 비롯하여 도민회 여성 직능부장,홍보부장,
그리고 송범두씨 등 그들이 돌아가며 마이크를 잡고 구수한 입담으로 굽이 굽이 얽힌 전설과 숨은 이야기를 들러주어 우리를 즐겁고 들뜨게 했는데,
간첩선 침투 사건, 귀순자 김만철 가족의 자유가옥, 귀국간호사 독일촌, 그리고 갖가지 섬사람들의 미풍양속을 익살과 유모어로 소개해 주어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끝
필자 와 정찬우 재경 경남도민회장, 고문 제재형씨
남해 상주 해수욕장 은모래 백사장에서
남해의 남단에 있는 가천 암,수바위의 전경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戰方急愼勿言我死)
김태호 경남 도지사가 도민회장의 축사를 경청 장면
재일동포 도쿄(동경)도민회원들의 모습
남건 바위 앞에선 필자
첫댓글 기행문에잘 다녀오셨고재미있게 써내러간 긴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송죽님 고밉습니다,..
요즘바뻐서 못들어왔더니 남해관광글이 올라왔네요 사통팔달 팔방미인이신 도송님 글에 감동적으로잘봤어요 아름다운 노후를 보내시는 도송님 장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