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고인돌
창녕에는 송현, 말흘리 고인돌(300여기), 계성면 계성리 고인돌(3기), 계성면 사리 고인돌(6기), 계성면 일미사지 고인돌(10여기), 장마면 유리 고인돌(7~9기), 도천면 죽사리 고인돌(3기), 도천면 도천리 고인돌(3기), 부곡면 부곡리 고인돌(2기), 부곡면 온정리, 청암리 고인돌(3기), 고암면 계팔리 고인돌(1기), 부곡면 구산리 지석묘군(10기), 고암만 괴산리(2기), 고암면 신기리(1기)등 350여기가 있지만 장마면 유리 고인돌만 창녕지석묘로 이름 붙여져 경상남도 기념물2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리 고인돌은 영취산에서 발원한 계성천이 사리 고인돌 북쪽을 지나 곧 낙동강 하류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동북쪽으로 5㎞ 거리의 계성리에는 계성천변 야트막한 산능선에 10여기의 대형 뫼[桂城古墳群]이 있다. 이곳은 계성면과 장마면의 경계 지역으로서 고인돌 아래 마을은 계성면이지만 고인돌이 있는 언덕은 장마면에 속한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화왕산(757m)과 영취산(737m)에서 발원된 계성천은 이 곳 계성면과 장마면 일대의 드넓은 평야를 돌아서 남지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며, 화왕산과 영취산의 날카롭고 우람한 산세에 비하여 장마면 일대는 해발 50미터 정도로 완만한 능선의 부드러운 곡선이 눈에 띄는 나지막한 언덕과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인돌은 해발 50m언덕 능선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능선은 북쪽으로 열려진 말굽꼴평면으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능선 서쪽에 고인돌이 세워져있고, 말굽꼴 울안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이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구릉 밑이나 평지에 있는 다른 지역의 고인돌과는 달리 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해 있고 특이한 입지조건으로 학술적 가치를 가진다.
고인돌 장축은 동서향으로, 고인돌이 위치한 능선은 이와는 직각으로 남북향으로 뻗어있다. 이 고인돌은 동서 4.5m, 남북 3.1m, 높이 2.5m 크기의 모가 둥근 상자 모양의 덩어리돌로 덮개돌을 하고 그 아래에 고여진 받침돌은 25㎝ 높이의 둥근 알꼴인데, 네 모퉁이에 각각 하나씩, 그리고 북쪽 중앙에 하나를 배치하여 모두 5개의 받침돌이‘∴’ 모양의 평면으로 고여져 닷발(五足成)을 이루고 있다. 무덤방은 길이 1m, 넓이 0.3m 돌널형태이다. 고인돌 남쪽 앞에는 북쪽에 비하여 더 널직한 마당이 마련되어 있는데, 특히 평안남도 북창 대평리, 강화 부근리, 전북 고창 도산리 등의 대형 고인돌에서는 고인돌의 길다란 측면에 이같이 널직한 마당이나 묘역을 만든 경우가 많이 발견되어, 마당에서 제사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
< 유리 지석묘 >
10년전 이종손자
5년전
원래는 이 능선 위에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어 ‘칠성바위’라고 불렀으며, 1920년대에 도로개설에 필요한 석재를 채취하면서 모두 파괴하려 했으나, 이 고인돌만큼은 신령하다고 주민이 반대하여 이것만 남게 되었다. 높다랗고 거대한 덮개돌의 웟면에는 알구멍(性穴, 바위구명)이 파여져 있는데 이 알 구멍을 선사인들이 불을 지피기 위하여 나무막대기를 돌렸던 발화구멍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고인돌 앞에는 ‘발화석’이라고 새긴 조그만 창석 푯돌을 세워놓았는데, 윗부분이 깨어져서 현재는 ‘화석’이라는 글자만 남아있다. 1962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파괴된 고인돌 가운데 고인돌이 세워져 있었던 유구만을 발굴하였는데, 언덕의 지반은 판상으로 뜯어내기 쉬운 혈암층의 암반으로 암반에서 파낸 판석 조각을 겹겹이 쌓아 긴네모꼴의 무덤방을 만들었고, 덮개돌과 받침돌은 유구의 암질과 전혀 다른 것으로, 암질의 바위는 영취산아래의 계곡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계곡에서 운반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 발굴조사 시 유리고인돌 유적지에서는 출토품이 전혀 없었지만, 두부를 자른 듯이 정확하게 긴네모꼴 무덤방을 만든 솜씨는 이들이 매우 정교한 채석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에서 발굴된 무덤방은 길이 1m 깊이 30㎝에 못 미치는 작은 크기여서, 초분 한 뒤에 세골 하여 유골만 안치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계성면 사리 지석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