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시대의 시조 아이덴티티
- 윤재근, 홍성란 님의「왜 시조인가」를 읽고
*신 웅 순
1.
192,30년대의 시조부흥론, 시조혁신론은 시조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부르는 시조에서 짓는 시조, 읽는 시조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조부흥, 혁신운동이 시조의 현대화하는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시조가 시조창과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에는 가람의 시조 연작이라는 현대화 시조 작법이 중요한 인자로 자리하고 있다.
짓는 시조, 읽는 시조를 강조한 나머지 부르는 시조와의 화해를 전연 고려하지 않은 태도는 온 당치 못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시조의 과거가 창의 흐름이었다는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 울 수 없기 때문이다. 연작의 문제에 있어서는 과거의 것은 각수가 독립된 상태였던 것을 제목의 기능을 살리면서 현대 시조작법을 도입하여 여러 수가 서로 의존하면서 전개 통일 되도록 짓자는 주장이었다. 이런한 주장을 창작으로 실천하여 완성한 이가 이병기 자신이었고 오늘날 형태의 발 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엄격히 보면 시조의 전통적 연작법에서 어긋나는 것이다.(이응백 외, 『국어국문학자료사전』(한국사전 연구구,2002),1723쪽.)
시조는 형식이 3장 6구 12음보이다. 이것이 시조의 아이덴티티이다. 그런데 이를 연작으로 서로 의존하면서 전개 통일되도록 짓자는 주장이 이병기의 연작법이었다. 이는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적 연작법에서는 어긋나는 것이다. 이로 인해 3장 6구 12음보인 시조 독립체는 사실상 와해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조가 창의 흐름이라는 의식이 제거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조부흥론, 시조혁신론은 결국 문학이며 음악인 시조를 서로 다른 장르로 갈라놓은 장본인이 된 것이다.
여기에 윤재근 님의 시조 보법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왜 시조인가>를 읽고 시조는 무엇보다도 먼저 <무아의 자연과 시조창>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 있음을 밝혀둔다.(윤재근, 「왜 시조인가?」(화중련,2010.하반기 제10호),37쪽.)
시조가 의식의 날카로움을 박살내고 하염없는 휴식을 즐겨 누리도록 읊게 하고 부르게 하는 쪽으로 복귀한다면 현대시처럼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 터이다. 그러므로 시가로서 시조가 <무아 의 자연>을 외면하거나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위의 책, 41쪽.)
요지는 시조가 창(시조창)과 휴식(무아의 자연)이 기반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시조와는 거리가 멀다. 현대시조는 창을 기반으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반드시 휴식을 기반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윤재근 님이 우려하고 있는 것은 현대시조가 시조창(歌)과는 상관 없이 Modern poetry 정신(詩)으로 창작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조는 시가(詩歌)이어야 하는데 현대시조는 그렇치 않다는 것이다.
홍성란 님은 다음과 같이 현대시조를 말하고 있다.
가곡창과 시조창은 현대시조와는 분야를 달리한다. 다만 현대시조에서 창을 기반으로 한 음악적 연행은 사라졌으나 현대서정시로서의 시조는 문자언어로써 그 음악성을 최대한 구현해낼 수 있어 야한다. 문자언어로써 음악성을 구현해내야만 옛시조가 지닌 격조를 현대시조 또한 획득할 수 있 다.(홍성란,「왜 시조인가?」(화중련,2011.상반기 제11호), 57쪽.)
시조는 음률을 기반으로 한 노래시라는 점에서 시어의 음악성을 떠나서는 말할 수 없다. 가람이 말과 소리가 합치하여 내는 성향에 주목하였듯이 악곡으로서의 음악성이 아닌 문자언어로써 음악 성과 리듬감이 실리는 격조있는 시어를 구사해야한다. (위의 책, 60쪽.)
홍성란 님은 가곡이나 시조창은 현대시조와 분야가 다르다고 했다. 이미 현대시조에서 창을 기반으로 한 음악적 연행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다만 문자 언어의 음악성을 최대한 구현해 낼 수 있어야 현대시조가 옛시조가 지닌 격조를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윤재근 님과 홍성란 님의 사고의 충돌이 생긴다.
윤재근 님은 현대시조도 읊거나 창이 있는 시를 써야한다고 하고 홍성란 님은 창이 사라진 대신 음악성이 실린 격조있는 시를 써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홍성란 님은 이미 시조는 창으로는 실릴 수 없고 현대성과 음악성을 담지한 문자언어로서의 현대시조를 써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2.
홍성란 님은 현대시조가 100여년 전에 창이라는 음악적 기반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현대시조는 창이라는 음악적 기반을 떠나 인쇄매체를 통해 시각적으로 수용되고, 노래가 아닌 낭독이나 낭송으로 향수하는 시문학이 된지 100년이 넘었다. 위의 책 60쪽.)
100여년이라면 국권침탈과 시조부흥운동 전이 될 것이다. 이 때는 개화기 시조에서 현대시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시조에서 음악적 기반을 떠나기 시작한, 시조사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당시 프로 문학의 세력 확장에 대한 대항으로 최남선과 이광수, 정인보를 중심으로 한 국민 문 학론이 대두되었다. 이 국민 문학의 핵심이 시조 부흥 운동이다. 최남선, 이광수의 뒤를 이어 이병 기,조운 등 시조의 혁신을 주장하고 나섰고 현대 시조의 나아가야할 구체적인 방향도 제시되었다. 과거와 같이 악곡의 창사로서 존재하는 시조가 아니라 우리의 언어적 특성과 민족적 리듬이 응결 된 단시 형식으로서의 시조가 가지는 중요성과 부활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이다.(신웅순, 『시조예술론』(박문사,2011),154쪽.)
1910년대에는 서양 민요나 찬송가를 번안하거나 일본 창가의 선율에 노랫말만 우리말로 바꾸어 불렀다. 20년대에 이르러서「사의 찬미」나 「낙화유수」 같은 지금의 가요가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때였다. 이 때에도 시조(단시조)가 시절가조라는 인식을 갖고 많은 시조인들은 시조창을 국민 가요처럼 부르고 있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5,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어른들이 시조창을 불렀었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1920년대 프로 문학에 대한 위기감의 팽배로 일부 식자들은 대항마로 국민문학인 시조를 선택했다. 시조부흥운동과 시조혁신론을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소수의 식자층에서 일어난 것이지 국민들의 의식에서 대중적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현대시조는 최남선, 정인보, 이병기, 조운, 이은상, 김상옥 등으로 이어져 겨우 시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태극의 시조운동으로 현대시조는 비로소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많은 시조시인들의 대거 등단으로 현대문단의 현대시와 함께 나란히 어깨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반면 1960년대 이후 시조창은 석암제의 창 보급으로 대중화 되어 무려 100만명이나 넘는 시조인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양규태,『석암 정경태 생애와 정가 』(신아출판사,2006),40쪽.)정황이야 어쨋튼 1920년대 이후 시가로서의 시조는 하나는 시조창으로 하나는 시조 문학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3.
시조창은 1800년 전후하여 생겼다. 최초의 시조 악보는 영조 때에 편찬한 서유구의 『유예지』이다. 그 후 1864년으로 추정되는 『삼죽금보』에 소이시조, 지금의 지름시조가 생겼다. 이 때에만 해도 사설시조의 악보는 보이지 않았다.
시조창이 불리워지기 이전에는 시조가 가곡으로 불리워졌다. 가곡은 시조를 노랫말로 해서 5장으로 불리워지는 정가이다.
광해군 2년 1610년 양덕수가 엮은 『양금신보』에는 만․중․삭대엽이 고려가요인 진작(진작은 정과정곡의 딴 이름으로 군신연주지사, 10구체의 노래이다.『대악후보』권 5에 진작의 이름으로 악보가 전하고 있다. 장사훈, 『국악대사전』(세광음악출판사,1984), 658쪽. 이 노래는 의종 5년 (1151년)에 지었다.『한국사 연표』(다미디어,2003), 196쪽.)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중․삭대엽은 현 정가인 가곡의 조종격이다. 또한 시조가 가곡에서 분화되었다고 본다면(『삼죽금보 』에는 시조가 5장으로 기보되어 있다. 지금도 가곡은 시조를 5장으로 부른다. 이를 들어 시조창이 가곡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시조예술 』(문경출판사,2007), 9쪽.)시조창의 연원은 가곡, 만․중․삭대엽을 거쳐 정과정곡 삼진작(1151년)까 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신웅순, 앞의 책, 150쪽.)
위 계보는 시조가 가곡, 시조창, 시조문학과 같은 3가지 형태로 진행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1151년 삼진작에서 만․중․삭대엽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가곡으로 이어져 1800년대에는 가곡은 가곡과 시조창으로, 1920년대에는 시조창은 시조창과 시조문학으로 분화되어 왔다.
이는 시조의 아이텐티티는 창으로 연행되어야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윤재근 님이 언급한 시조의 아이덴티티일 것이다.
필자는 역대 교본 시조사전과 비교하면서 가곡 악보로 전해지고 있는 김기수 편의 정가 남창 100선, 여창 88선의 주제를 분석해본 적이 있었다.(신웅순,『문학‧음악상에 있어서의 시조연구』,「가곡의 시조시 주제연구」(푸른사상,2006),74쪽.)
주로 자연과 인생, 사랑의 주제가 73%나 되었다. 타 주제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이는 시조가 윤재근 님이 언급한 무아의 자연이나 휴식이라야한다는 점을 증명해주고 있는 한 예가 될 것이다.
문제는 1920년부터 시조가 짓는 시조, 읽는 시조로 전환하면서 시조의 아이덴티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언급한 바 대로 시조의 아이텐티티는 시(詩)와 가(歌)이다. 현대 시조가 시와 가로 분리, 서로 다른 장르로 굳어졌다면 이는 원래의 시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현대시조는 이미 시조에서 창의 연행은 사라졌는가? 현대시조는 악곡을 배제한 채 문자 언어로서만 존재해야하는가. 현대시조에 있어서의 문자언어로서의 음악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홍성란 님이 말하는 음악성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시조에 있어서는 악곡이나 문자언어의 음악성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시조에서는 음악과 문학이 함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조가 가곡이나 시조창으로 시연될 수 없는 것이라면 굳이 3장, 6구, 12음보로 창작해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3장 6구 12음보는 가곡이나 시조창으로 불리워지는 가장 최적의 시가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현대 시조는 악곡이 사라진 3장 6구 12음보의 정형시가 될 것이다.
지금도 가곡에 현대 시조를 엊어 부르는 이도 있고(2010년 4월 6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 30호 김영기 여창 가곡 독창회가 열렸다. 이 때 필자의 「내 사랑은 42」가 이벤트 곡으로 우조 두거로 올려졌다.『시조예술』(한국시조예술연구회,2010,가을호) 권두언에서 ) 시조인들이 현대시조를 평시조, 지름시조, 중허리 시조, 우조 시조 등으로 부르고 있음도 상기해야한다. 오히려 격조있는 현대 시조가 음악성을 더 높여주면 높여 주었지 옛시조의 음악성보다 결코 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시조를 창으로 시연하지 않을 뿐이지 시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시조가 문자 언어만이 아니라는 것에서 벗어나야 미래의 시조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수 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시조 시인들 중 단장, 양장, 여러 장에 시조를 붙여 단장 시조, 양장시조, 혼합시조를 만드는 이가 있다. 이쯤에 이르면 시조의 아니덴티티는 사라지고 만다. 이는 가곡으로도 시조창으로도 시연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조 3장에서도 한 참 멀어져 있다. 단장, 양장, 혼합시조는 차라리 짧은 시, 긴 시일뿐이다. 그것이 시조라고 한다면 몇 개의 장의 조합으로도 4, 5, 6장과 같은 시조들을 얼마든지 생산해 낼 수 있다. 이는 시조가 3장 형식의 음악, 문학이라는 것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사설시조(장시조)는 3장에서 1장만 어긋나 있을뿐 초․종장은 시조의 정의를 따르고 있음을 상기해야한다.
4.
홍난파는 1920년 말에서 1930년 초까지 이은상 시를 갖고 근대가곡을 작곡했다. 이 중 여덟 곡에 시조를 근대가곡의 노랫말로 썼는데 이 노랫말 가운데에 시조 형식을 차용한 것들이 적잖이 발견된다. (김세중,『정간보로 읽는 옛노래』(예솔,2005), 265-266쪽.)
「성불사의 밤」,「그리움」,「옛동산에 올라」,「장안사」,「봄처녀」,「금강에 살어리랏다」,「고향생각」,「사랑」 등이 그것이다. 현대 가곡은 가곡․ 시조의 5, 3장, 가곡의 대여음과 중여음, 시조의 여박과 어단성장 그리고 장행갈이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웅순,앞의 책, 11-118쪽)서양 음악을 공부했던 홍난파에게 1920년대 당시에도 시조창은 현대음악 분야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1970년도 판 석암 정경태의 『증보주해 선율보 시조보』에 장면, 정경태, 이은상 등의 현대 시조들이 기보되어 시조창으로 불리워졌다. 작금에라도 창작 시조 시조창 대회를 열 수 있다면 현대시조로 이에 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으리라고 본다. 서예에도 자신의 창작글을 붓글씨로 쓰는 공모나 휘호 대회가 있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시조도 탈바꿈해야 한다. 윤재근 님의 말대로 심의를 첨예화는, 시로써만 극점을 치달을 것이 아니라 여유와 휴식이 있는, 짓고 부르는 예술성이 있는 시조로 현대적 복원을 해야한다.
글자수에 크게 구애받지 말라. 2자, 3,4,5자면 어떠랴. 길고 짧음의 자수마다 시조창은 가락을 조금 변형해 부르면 된다. 서양 음악처럼 박자의 길이도 정확하지 않아도 된다. 1박이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다. 여유와 휴식이 있는 것이 바로 시조창이다. 혼자 부르면 심심풀이 노래요, 여럿이 부르면 돌림노래요, 술을 마시면 권주가, 봄이면 꽃노래, 달밤이면 달의 노래요, 그리우면 님의 노래이다. 또한 심신을 수양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복식호흡, 건강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음악․문학치료에도 많은 효과가 있음도 알아야한다.
시조시인들은 기천명 밖에 아니되나 시조창하는 시조인들은 150만을 육박한다. 시조가 시조시인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하지 말라. 시조창은 시조 창작을 그리워하고 있고 시조 시인들은 시조창을 그리워하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시조는 9백여년을 지나오면서 우리 몸 속에 저절로 DNA가 생겨 지금까지 흘러오고 있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우리 고유 시가 형식이다.
시조 형식(단시조)을 갖추었으면서 시조창으로도 부를 수 있는, 자유시보다도 더 잘 쓰는 시조시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시를 쓴다면 어느 시인 못지 않은 유명한 국민 시인이 되었을 것이다. 우견일지 모르나 시조가 문학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시조시인이 있다면 차라리 시를 쓰는 편이 낫다. 창의 기반이 없는 시조는 그냥 정형시일뿐 현대시와 다를 게 무엇이랴.
필자는 2000년대에 이르러 시조의 아이텐티티 복원 차원에서 『시조예술』을 창간한 바가 있다. 시조 시인들의 시조창 부르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이제 현대시조도 창과 함께 시연할 수 있는 현대적인 시조창 복원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조는 우리 일상 생활에서 춘하추동 자연환경에 어울려 언제 어디서나 부를 수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어단성장(語短聲長), 어불범각(語不犯角), 율여상조(律呂相調)의 규칙과 함께 음색, 박자, 화성 등 양동음정(陽動陰靜)의 강약과 억양절주(抑楊節奏)의 묘를 발휘하게 된다면 현대시조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유례없는 우리만의 고유한 세계적인 시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한시가 네 줄이이요, 한국은 시조가 석 줄이요, 일본은 단가가 두 줄이다. 이 중에서 음악과 문학이 함께 있는 석줄의 시조는 세계 도처 어디에도 없다.
어느 유명한 서양 음악가가 우리의 가곡을 듣고 지구상에 이런 천상의 음악이 어디 있는가 하고 감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우리 문화를 모르는데도 문학이 음악과 함께 실리면 이렇게 세계 어느 누구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시조를 노랫말로 하고 있는 가곡이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제 평시조만이라도 복원하여 우리 시조 아이텐티티를 우리 시조인, 시조시인들이 현대적으로 복원, 향유하여 즐겼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평시조에는 시조 악상이라는 것이 있다. 주로 향제 평시조를 표준으로 초․중․종장의 가락 진행법과 표현 방법을 묘사한 것이다.
초장에서는 ‘한가한 구름 산에 떠오를 듯, 나르는 솔개 창공을 선회하듯, 찬서리 내린 새벽 달처럼, 외로운 등불에 하늘거리는 연기처럼’ 부르고, 중장에서는 ‘아득히 구름 속으로 들어가듯, 길고 긴 강의 흐르는 물처럼, 높은 산에 돌 굴러내리듯, 모래 사장에 사뿐 내리는 기러기처럼’ 부르고, 종장에는 '먼 포구에서 돌아오는 돛배처럼, 넓고 넓은 동정호에 뜬 달처럼, 맺음은 움직일 수 없는 반석처럼’ 부르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악상은 평시조에 한한 것이어서 외 시조들 지름시조나, 사설시조, 사설지름시조, 엮음지름시조 등 많은 시조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는 시조를 짓고 부르는데 하나의 표준 악상으로 시조창자나 시조시인들게 유용한 기제를 제공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현대 시조가 악곡에서 사라졌다면 엄밀히 말해 현대시조는 진정한 시조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에 와 그 느린 구태의연한 시조창을 누가 부르겠느냐고 말한다면 필자는 할 말이 없다.
5.
옛시조는 역사이다. 역사를 단 석줄로 요약하여 가곡과 시조창이라는 세계에 유래없는 우리 고유의 음악이자 문학인 독특한 시조 장르를 만들어냈다. 시조는 이렇게 위대하다. 시조가 창과 결합하여 현대적인 복원을 할 때 자유시를 쓰는 이들과는 차원이 달라 감히 시조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세계인들에게 현대시조를 내놓아 보았자 한낱 정형시라 여길뿐 어느 하나 눈길을 내주지 않는다. 시조창과 함께 내놓아야 그들의 눈은 비로소 휘둥그래질 것이다.
시조가 문학이라고만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차라리 눈물 흘릴 수 있는 감동적인 시를 쓰는 편이 낫다. 시조시인이라면 평시조 하나쯤은 부를 수 있고 불러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진정한 시조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부를 수 없다면 시조창하는 이에게 부르도록 해보라. 이것이 한국의 멋이고 여유이며 풍류가 아니겠는가. 필자의 지나친 기우일까. 이도 아니라면 900여년을 이어온 시조님에게 혹여 죄를 짓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필자의 본「현시대의 시조 아이덴티티」는 「왜 시조인가」에 우견의 답일 수도 있다.
윤재근, 홍성란 님께 심려를 끼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동안 필자가 연구해왔던 <음악․문학으로서의 시조 연구>의 우매한 결론임을 말씀 드린다. 두 석학님의 고견과 지혜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