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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는 나무 음악동호회/위대한 클래식 음악가 스크랩 베토벤의 생애
tomato4758 추천 0 조회 23 13.04.23 13: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음악의 혁명가  루드비히 반 베토벤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본의 콜로뉴

궁정음악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작지만 개방적인 도시였던 본(Bonn)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부친 요한은 본 궁정악단의 테너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을 '천재'로 만들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에 관련해서는 그동안 악의에 찬 베토벤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왔다. 술주정뱅이인 그가 한 밤 중에 곤히 잠든 어린 소년 베토벤을 깨워 연습을 강요하는 철부지 또는 폐인과 같은 모습이 그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베토벤 아버지가 그의 자식들에게 펼친 음악교육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서서히 전개되고 있다. 부친 요한은 그의 세 아들 모두에게 음악교육을 실시하였고, 우선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엄격하게 지도하면서 고지식하게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방식을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테너가수이자 여러 악기를 연주하던 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er)가 그의 집으로 이사오자, 베토벤의 이종사촌으로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훗날 궁정음악가가 되는 로바티니(Franz Georg Rovatini)와 함께 자주 실내악을 연주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등, 하나에 국한됨 없이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그의 교육방식이 긍정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다. 베토벤의 초기 작품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작곡된 것이며 대부분이 트리오 작품(Op. 3, Op. 8, Op. 9, Op. 25, Op. 87)인 것도 그 영향을 단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다가 베토벤은 11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음악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을 받게된다. 그 전해(1780년)에 파이퍼가 본을 떠나고, 1781년에 로바티니가 사망하게 되자 아버지가 선택한 베토벤의 스승은 당시 본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재직하던 네페(Christian Gottlob Neefe: 1748-1798)였다. 네페는 바하(J. S. Bach)의 신봉자였으며, 그는 베토벤에게 특히 바로크 대위기법과 피아노 즉흥연주에 대한 기법을 전수하였다. 그밖에 네페는 1783년에 함부르크에서 출간되는 크라머의 '음악 매거진'(Magazin der Musik)에 베토벤이 작곡한 몇몇 작품의 출판을 의뢰하며 어린 베토벤이 바하 평균율을 얼마나 잘 치는지 소개하는 유명한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베토벤은 본 시절에 브로이닝(Breuning), 베글러(Wegler)가문과 친교를 나누며 문학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았고, 1798년에는 본 대학에 등록하여 계몽주의 사상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였다.

  베토벤은 1787년에 처음으로 빈을 방문하지만, 어머니의 사망으로 곧 바로 본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 후 1792년에 다시 선거후의 장학금과 함께 본으로 유학하여 하이든의 제자가 된다. 이때 그의 후원자인 발트슈타인 백작은 "모차르트의 정신을 하이든의 손에서 받아오다"라는 유명한 기념문을 작성해준다. 빈에서 그는 순식간에 즉흥연주에 능한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한편, 그는 살리에리(A. Salieri)에게서 성악예술을 그리고 알브레히츠(J. G. Albrechtsberger)에게서 대위법을 배운다. 베토벤의 친구인자 제자였던 리스(Ferdinand Ries)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 바 있다. "이 세 사람의 스승은 모두 베토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그의 공부태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의견이었다. 베토벤은 언제나 고집불통이었으며, 자기만족을 가져야만 했다. 때문에 몇몇 사항에서 대해서는, 이전에 결코 수업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아주 고통스럽고 힘든 경험을 통해서 습득해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그의 스승을 매우 존경했었다. 그는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 Op. 2를 하이든에게 헌정했으며, 그가 40대였을 때는 스스로를 살리에르의 제자라고 칭하였다.

  빈과 빈의 사교계는 마치 베토벤을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모차르트와 달리 베토벤은 궁정의 어떤 직책을 원한 적이 없었으며, 작곡의뢰, 작품(필사본과 인쇄본)의 판매, 공공 연주 그리고 귀족의 후원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의 생활양식은 그가 실제로 처한 상황보다 훨씬 검소하였다. 베토벤은 그의 집주인과 자주 다투었고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해야만 했다. 집주인들의 불평은 당시 베토벤이 어떠한 상태로 방을 쓰고 있었는가를 생각하며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었다. 베토벤은 자신을 위해서는 매우 절약했지만, 친구들에게는 평생동안 결코 인색하지 않았다. 1815년에 그의 동생이 사망하자, 9살 된 조카, 칼(Karl)의 후견인을 자처하지만,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베토벤은 동생의 처와 수년에 걸친 법정투쟁을 감수해야만 했다. 칼은 불안정하고 은혜를 모르는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칼은 베토벤의 사랑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그의 돈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베토벤은 스스로를 새시대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된다. 그는 이미 첫 번째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1, 2번과 함께 새로운 나라로 발을 들여놓았다. 1801년에 그는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1795년부터 시작된- 자신의 청각 장애가 심각하게 악화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음악가로서 인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베토벤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의 작품은 아직 18세기의 음악양식에 얽매인 곡들이다. 중기는 일명 '영웅적 시기'라고 일컬어진다. 마지막 시기는 거의 신비에 가까운 아주 개인적 양식을 형성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은 곧잘 "비의적"(esoterisch)이라고 명명되어 진다. 바하가 라이프찌히 시절(1723년-1750년)에 만든 작품이 그렇게 평가되듯이 말이다.

 

음악의 혁명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모차르트나 하이든의 그것과는 달리 극적 긴장감과 철학을 담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미 그의 작품번호 2에 속하는 세 편의 피아노 소나타는 사고의 넓이와 형식의 지배를 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18세기의 우아함과 거의 관계가 없었다. 1800년 이후의 베토벤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소나타 형식을 낭만적 차원으로 확대하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처음 쓰여진 그의 피아노 소나타 (제12번)는 내림 가장조(Op. 26)이다. 이 작품은 느린 템포의 변주곡으로 시작한다. 2악장은 장송곡이며 이어서 회오리바람 같은 피날레가 뒤따른다. 그 다음의 두 곡 (제13번과 제14번)에는 "마치 환타지처럼"(quasi una fantasia)이라는 부제를 작곡가 자신이 직접 달았다. 제14번은 음악 저널리스트였던 루드비히 렐슈탑(Ludwig Rellstab: 1799-1860)이 이 곡의 1악장을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의 달빛에 비치는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 같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되어 "월광 소나타"라는 별명을 얻은 곡이다. 이 두 곡은 관습적인 소나타 형식과는 아주 다르게 만들어진 것이다.

   피아노 소나타 작곡에 있어서의 주목할만한 발전과정은 1802년에 작곡한 Op. 31의 2번(제17번)부터 시작된다. 이 곡의 첫머리에 베토벤은 "지금까지의 곡에 만족하지 않으며 앞으로 새로운 길을 갈 것이다"라고 명시하였다. 베토벤은 이후 다양한 형식적 실험을 감행하였다. 그의 귀족 후원자의 이름을 따 명명된 일명 "발트슈타인"(Waldstein) 소나타 그리고 격렬한 "열정"(Appassionata)소나타는 -베토벤이 이후 4년 동안 더 이상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지 못할 정도로- 그 컨셉트가 아주 혁명적이다. 그리고 나서 그의 피아노 작품의 절정은 그의 마지막 네 작품에서 이루어진다. 이 일련의 작품은 제29번 일명 "함머클라비어"(Hammerklavier)부터 시작되어 그의 다단조 소나타(Op. 111)로 마감된다. 다단조의 조성은 베토벤이 그의 '질풍과 노도'(Strum und Drang)의 작품을 쓸 때 애용하던 조성이며, 그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 교향곡 5번, "운명"이 바로 이 조성으로 되어있다.

  베토벤은 빈에서 바하의 평균율과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 이름을 얻었다. 그는 특히 즉흥연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모차르트와 달리 베토벤은 빈에서 확고한 위치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청중들은 베토벤의 정열적이고 탁월한 피아노 즉흥연주에 매료되었으며, 차츰차츰 그의 교향곡에도 환호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베토벤은 빈에서 결코 불행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베토벤은 그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을 위해 자신의 피아노협주곡의 카덴차를 작곡해주었으며, 아주 멋진 피아노 트리오 (일명 "대공 트리오")를 헌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루돌프 대공이 후에 올뮈츠(Olm tz)의 대사교로 임명되었을 때는 그의 대관식을 위해 장엄미사(Missa solemnis)를 작곡하였다. 이 미사곡의 음악은 전지전능의 신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과 예수가 인류를 위해 짊어진 무서운 고통을 다루고 있다. 베토벤의 카톨릭 미사의 해석은 아무리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베토벤의 위대성이 가장 잘 발휘된 장르는 그의 오케스트라 작품이다. 그의 교향곡 제1번과 제2번이 하이든의 후기 교향곡에 의해 정형화된 "고전적 모델"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면, 베토벤은 그의 제3번 교향곡부터는 그의 특유의, 오로지 베토벤만의 음악언어와 형식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 곡은 본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대한 흠모에서 고안되었다. 그 근거는 1804년 8월에 쓰여진 총보 필사본에 적힌 "대심포니/제목: 보나파르트"(Sinfonia grande/initolata Banaparte)에서 암시된다. 그리하여 이 곡은 "영웅"(Eroica)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곧 베토벤이 이 곡에서 의미하는 '영웅'인지에 대해서는 음악학자들간에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베토벤의 제자이자 비서였던 쉰들러에 의해 전해진 일화가 상당 부분 왜곡되고 거짓임으로 밝혀졌고, 쉰들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 이 곡에 얽힌 나폴레옹 관련 일화 역시 여러 음악학자들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곡은 기존의 교향곡이 느린 템포의 서주부로 시작한다는 통념을 깨고 포르티시모의 단 두 개의 화현으로 서주부를 처리한 후 곧바로 알레그로 악장으로 돌입한다. 제1악장은 기존에 작곡된 교향곡의 전 악장을 합쳐놓은 것보다도 더 길게 전개되고 있으며 드라마틱한 착상으로 가득 차 있다. 제2악장은 특이하게도 기존의 오라토리오나 오페라에서 사용되던 장송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장송곡의 삽입 때문에 나폴레옹과 이 곡과의 연계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주장을 반박하는 학자들에게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 곡이 작곡되고 발표될 당시 나폴레옹은 멀쩡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제3악장 스케르초는 매우 생동감이 넘치고 다이나믹하며, 특히 호른을 위한 트리오가 인상적이다. 피날레는 변주곡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이 곡에 나오는 두 테마는 베토벤이 이전에 작곡한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피조물"(Gesch pfe des Prometheus)과 피아노 변주곡(Op. 35)에서 차용된 것이다. 때문에 이 곡에서 암시되는 '영웅'을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나오는 영웅으로 해석하는 음악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바로 이 신화의 줄거리에 의해 교향곡 제2악장의 장송곡 삽입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토벤의 영웅교향곡은 그때까지 알려졌던 교향곡의 통념을 훨씬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베토벤은 이 곡을 계기로 청중들로 하여금 음악을 여흥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 기존의 인식을 탈피하게 만들고, 음악을 인류의 신성에 대해 고하는 전도사의 위치로 승격시킨다. 이때 베토벤은 분명히 영웅이 폭풍우 속에서 신들에 반항하는 괴테의 드라마 단편,  "프로메테우스(Prpmetheus)"를 떠올렸을 것이다.

  베토벤은 그의 제5번 교향곡에서도 이러한 영웅적 음악행위를 계속하여 펼친다. 제1악장의 모티브처럼 "운명이 이렇게 문을 두들겼을지"는 몰라도 베토벤은 복수의 여신을 극복하고 승리의 전진을 행한다. 이러한 내용은 제1악장의 단조(다단조) 하행 모티프가 피날레에서는 장조(다장조) 상행 모티브로 전환되면서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전개방식은 그의 제9번 교향곡에서도 반복·사용되고 있으며, 이후 19세기 교향곡 작곡가들에 의해서도 계속적으로 구사된다. 음악학자들은 이러한 베토벤의 교향곡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괴로움을 극복하고 환희의 순간으로'(per aspera ad astra)라는 라틴어 경구를 도입하였다. 독자들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과 함께- 교향곡 제9번이 음울한 분위기의 라단조로 시작하여 쉴러의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를 텍스트로 하는 라장조 곡으로 힘차게 전개되는 것을 들으면 위 경구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베토벤 교향곡 제6번은 "전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베토벤이 겨울에는 빈에 거주하고 나머지 계절에는 농촌에 살면서 자연의 풍경을 사랑하고 전원 속에서 산책을 즐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베토벤은 자연에 대한 긍정적 표현을 바로 이 곡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곡은 결코 자연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음악으로 그리는 '프로그램 음악'이 아니다. 베토벤 자신도 이를 철저히 경계하며 1808년에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전원교향곡은 회화적 묘사가 아니다. 전원의 기쁨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여러 가지 느낌의 표현이고 이와 함께 몇 가지 감정이 곁들여 있다". 또 악보의 제1바이올린 성부 앞에 "묘사보다는 더욱 느낌의 표현을 가지고(mehr Ausdruck der Empfindung als Malerei)"라고 기록하였다. 이로써 베토벤 자신은 외형적이고 사실적인 프로그램 음악과 확실한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그렇다고 이 교향곡은 "절대음악"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이 곡의 범주는 베토벤의 스케취북에 "Sinfonia caracteristica/Sinfonia pastorella"라는 메모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성격적 교향곡"이라는 부류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성격적" 작품(교향곡)이라 함은 절대음악과 프로그램음악의 경계에 놓여있는 것으로서, 후에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에 의해 '서정적 피아노 소품'의 형태로 새롭게 부상하는 장르이다. 베토벤이 그의 6번 교향곡을 통해서 인간과 그 주위의 자연을 연계시키고, 인류를 자연의 한 부분, 즉 우리의 생명 위에 놓여있는 실제적 힘으로서 불확실하며, 긴장감이 가득하고, 아주 멋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나타나게 했다면, 그의 7번 교향곡에서는 그에 반해서 이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곡은 인간이 가지고 생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으며, 인생 자체에 놓여있는 멜랑코리에 대해서는 단지 피상적인 눈길만을 주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제9번은 그의 '장엄미사'와 함께 거대 양식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새로운 전망을 펼치고 있는 곡이다. 이 곡은 인류의 영역으로서 우주 전체를 벗겨내면서 쉴러(Friedrich von Schiller)의 '환희의 송가'(Ode an die Freude)를 텍스트로 한 합창 피날레로 이어진다. 베토벤은 1, 2, 3악장의 주요 모티브를 제4악장의 도입부에 레치타티보 형식으로 다시 한번 인용함으로써 전 악장들과 4악장을 연계시키는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1, 2, 3악장에서 인간은 불안, 환호, 태연함을 경험한다. 그러다가 그는 무한하고 드넓은 광야로 인도되어 완벽하고 영원한 낙원에 눈길을 보내게 된다.

 

 

새로운 세계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사중주의 두 장르에서도 이전의 어느 작곡가도 감행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였다. 이들 작품은 아주 비밀스럽고, 유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건하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오랫동안 청중들에게 다가서지 못했다. 그의 중기 현악사중주곡인 일명 "라주몹스키" 현악사중주곡(Op. 59)은 동시대인으로부터 이해 받지 못했으며, 이 곡의 운지번호를 요청받은 라디카티(Felice Radicati)는 "음악이 아니다"라는 판정을 내릴 정도였다. 베토벤은 라디카티에게 말하기를 "이 음악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세대를 위한 음악이라네"라고 일갈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주하기 힘들고 수준 높은 청중들의 귀를 요구하는 곡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기작품으로 들어가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특히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곡은 "신의 영역에 속하며", "일찍이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기이한 사념의 바다를 홀로 항해한다"고 할 정도로 비의(秘義)적이다. 베토벤은 이 곡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진실'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토벤은 그의 마지막 현악사중주곡(바장조, Op. 135)에서 일상생활의 골짜기로 뛰어들고 있다. 이 곡의 4악장에는 느린 도입 음형과 알레그로 주제 위에 "꼭 그래야 할까? 꼭 그래야 해!(Mu  es sein? - Es mu  sein! Es mu  sein!)"라는 가사가 적혀있다. 두 동기의 음정 진행은 자리바꿈 된 형태이다. 베토벤은 이 질문과 대답을 그의 마지막 현악사중주 마지막 악장에 던짐으로써 삶의 고통이나 불운에 대한 신비적 해결을 내리면서 '운명과 묵종'이라는 베토벤의 명제를 최종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http://www.musicology.co.kr/beethov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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