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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비를 뚫고 속리산에 오르다
“경태야, 마음을 울리는 글이 하나 있는데 들어 볼래?”
라며 나의 산행도우미를 맡아 준 친구가 운을 떼었다.
“바르고 참된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은 그 도를 멀리 하려 들고, 산은 속과 떨어지지 않는데 속이 산과 떨어졌다.”
중앙여고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친구 이중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문장대가 떠나갈 듯하다. 긴 겨울잠을 자고 있던 이름 모를 들꽃이 눈을 뜨는 것 같다. 나 또한 힘든 산행에 고통스러워하던 전신의 신경세포들이 신선한 에너지를 공급해줘 고맙다고 환호를 하는 것 같다.
친구가 읊어준 글귀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속리산을 보고 지은 한시로 문장대 정상의 표지목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봄의 불청객 황사구름 아래로 퍼붓는 흙비를 맞으며 나는 한국산악회 전북지부 회원 24 명과 함께 속리산 등정에 나섰다. 집을 나설 때부터 비가 너무 쏟아져 나는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 휴가 나온 큰 아들 민이의 배웅을 받으니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한국산악회가 어떤 곳인가. 어떠한 악천후 속에서도 결정된 스케줄은 반드시 강행하는 사막의 불사조이자 무서운 악당들의 소굴이 아니던가.
특히 이번에는 ‘KBS 2TV 생방송 오늘’의 촬영 팀에서 우리의 산행을 촬영하기로 했다. 그들은 새벽어둠을 뚫고 서울에서 비호처럼 달려와 전주에서 우리와 합류했다.
이번 산행은 촬영 관계로 두 팀으로 나누어 A팀은 6시간 30분 코스를, B팀은 이보다 2시간 짧은 4시간 30 분 코스로 나누어 산행을 하기로 했다. 나는 14 명의 산악회원과 함께 B팀에 합류하여 정상에 도전하기로 했다.
“송 선생님, 비가 너무 내려 촬영이 곤란할 것 같아요. 카메라 때문에요.”
결국 촬영은 중단되었다. 촬영 팀은 삼일 후 전주 근교의 모악산행을 촬영하기로 약속하고 철수했다. 나는 심 PD의 소극적인 촬영 자세에 실망감을 조금 느끼면서 산행을 계속했다.
우리는 용감무쌍한 병사처럼 폭우를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천년의 고찰 법주사 뜰 앞을 지나 문장대를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여전히 씩씩했다.
“최 교수, 이번 산행을 위해 많은 장비를 마련했던데 등산화와 스틱상태는 어때?”
“아주 편하고 좋다.”
나의 죽마고우인 예원대 사회복지대학원장 최낙관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소풍가는 소년의 발걸음 소리처럼 내 왼편에서 경쾌하게 들려왔다.
최 교수는 근거리 산행은 많이 했지만 원거리 산행은 처음이라며 어린애마냥 설렌다고 했다.
“경태야, 불규칙한 돌계단이야. 조심해라.”
“중기야, 오케이!”
남한의 중심부에 위치한 속리산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해발 1,057 미터 속리산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변성 퇴적암이 섞여 있어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있어 시각장애인인 내가 산행하기에는 무척 힘든 코스다. 그러나 뛰어 넘어야할 관문이 아니던가. 그리고 훌륭한 동행자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어 마치 나는 발에 제트엔진을 단 듯 든든했다.
“경태야, 50 센티미터 정도의 바위계단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 그리고 왼쪽은 절벽이니까 조심해서 잘 따라와.”
“어메, 무서워라. 벌써 숨이 차네. 그리고 바위가 미끄러워 착지하기도 힘들구나. 앗, 중기야! 배낭끈을 놓쳤어. 잠시만 기다려.”
낭떠러지라는 말에 긴장한 탓인지 나는 갑자기 도우미 배낭을 놓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도우미와 보조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것이다. 나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으며 페이스 조절을 했다. 산행은 계속되었다.
“경태야, 웅장한 바위들이 정말 멋지고 황홀하다.”
“낙관아, 고생해서 올라온 보람이 있지?”
“그래. 야, 정말 멋지고 좋다 야, 꿈 속의 세상 같다.”
“이게 바로 등산의 매력이야. 사진이나 영상물로 감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장비도 잘 갖췄으니 좋은 추억 거리 많이 만들어 보자구. 허허허.”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산을 오르니 힘듦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얼마를 올라갔을까. 쏟아지던 폭우가 다행히 그쳤다. 그러나 냉혹한 추위는 여전히 우리의 육체를 옭아매고 있었다.
발끝에 정신을 집중하며 울퉁불퉁한 바위코스를 올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고소한 파전냄새가 코끝에 스쳐왔다. 몸의 긴장감이 스르르 풀렸다.
“야, 냄새 죽여준다. 속이 마구 뒤집힐 것 같아. 우리 먹고 가자.”
“네 코는 사냥개 코구나. 정말 귀신이네. 앞에 막걸리집이 있다.”
“중기야, 하산하면서 한 잔 쭈우욱 들이키자. 지금 마시면 정상에 도착하기도 전에 취하니까. 하하하”
우리는 속리산의 명주 ‘대추막걸리’의 유혹을 간신히 뿌리치고 주막 앞을 입맛을 다시며 지나 정상을 향해 기암괴석을 하나하나 힘들게 정복해 나갔다.
문장대 정상을 약 1 킬로미터 남겨두고 앞서가던 일행이 큰소리로 말한다.
“배고픈데 우리 여기서 점심 먹고 갈까요?”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오뎅 국물로 아침을 시원찮게 해결한 까닭에 내 뱃가죽은 매미가 참나무에 달라붙듯 허리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는 대피소 앞 야외 통나무테이블에 오순도순 앉아 도시락을 풀기 시작했다.
늦게 출발한 탓에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새벽잠을 좇으며 정성들여 장만해준 문어버섯주먹밥에 보온병에서 갓 따른 따끈한 우롱차를 마시자 나는 시베리아보다 차가웠던 속 떨림이 다소 진정되었다.
낙관이는 정말 소풍을 왔는지 황제의 오찬도 부럽지 않을 돼지불고기백반과 법정스님이 즐겨 드셨다는 무말랭이 무침, 향기가 솔솔 풍기는 쌉소롬한 취나물, 고소한 계란말이 등등의 진수성찬을 펼쳐 놓았다.
선배님들은 추운 속에 막걸리가 만병통치약이라며 막걸리 잔에 얼음보다 차가운 막걸리를 그득히 채워 분주하게 돌려 주셨다. 마치 사랑하는 친동생에게 보약을 주는 듯이 말이다.
“캬! 막걸리 맛 죽여준다.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야. 이게 사람 사는 맛 아닌교. 선배님 고맙심더.”
성별과 연령 구별 없이 소탈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주는 회원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친형제보다 더한 진한 애정을 느낀다. 그들의 사랑에 나는 나의 닫힌 마음의 빗장이 어느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힘든 산행을 즐겨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맹목적이고 숭고한 희생과 봉사정신이야말로 각박하고 이기심에 찌든 많은 이들에게 사랑의 메신저가 되어줄 수 있는 힘이다.
미움과 불신으로 점철된 우리의 사고에 사랑과 신뢰를 심어주는 우리 산악인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천사들이 아닌가 한다.
각박하고 혼탁한 사회시류에서 탈피했다는 생각이 들자 꽁꽁 얼었던 내 마음에 남녘의 따스한 훈풍이 불어온다. 굽어 있었던 양손은 봄날에 눈녹 듯 녹아내리고 어느새 두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황제의 오찬도 부럽지 않을 사랑의 점심이었다. 꿀맛 같은 늦은 점심의 아쉬움을 저 남극으로 보내고 우리는 정상을 향해 한발 한발 바위코스를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이었다.
“경태야, 문장대 정상이다. 음지에는 아직도 잔설이 하얗게 쌓여있고 빙벽도 멋지구나.”
나는 갑자기 30년 전, 대학시절 유스호스텔 서클의 회장직을 맡아 회원들과 속리산 유스호스텔에서 호스텔링을 할 때 와보았던 문장대에서의 아련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형이상학적으로 생긴 화강암과 변성퇴적암이 만들어내는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들. 주변 풍경도 가히 절경이라 할 수 있었지. 마치 어느 행성에 불시착하여 수많은 분화구를 밟으며 아름다운 환희와 탄성을 질렀던 그 시절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 당시 근처 천왕봉에 올랐을 때 우리를 인도했던 어느 고승이 들려준 ‘삼파수’이야기가 쌩쌩 부는 차가운 바람소리와 함께 귓가에 쟁쟁하게 울려 퍼졌다.
“인간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점지된 것일까? 자신의 미래 운명을 안다면 인생의 매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것이 어찌 보면 인생을 멋지게 만들어 갈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닐까?
한낱 미물에 불과한 한 개의 물방울이 어디로 튀느냐에 따라 그 물방울의 운명이 달라짐을 알게 하는 산 증인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지.
천왕봉에서 어디로 물방울이 튀느냐에 따라 물방울의 행선지가 결정되네. 동쪽으로 가면 낙동강이요, 서쪽이나 북쪽으로 튀면 한강이고, 남쪽으로 떨어지면 금강으로 흐르지. 순간의 운명이 김해평야로, 만경평야로 그리고 2천만이 거주하는 수도권의 젖줄이 되는 것이라네.”
그렇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은 출발점이 같다. 그러나 그 운명은 다르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 어느 위치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기구한 운명이 될 수도 있고, 천하를 호령하는 기백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동쪽으로 떨어진 물방울이 김해평야가 싫다고 수도권으로 흘러가고 싶다고 투정을 부린다고 해서 물줄기의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다.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자연을 받아들이며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면 끝내 온 세상이 하나로 합쳐지는 바다로 간다. 남해든, 서해든, 동해든 여정의 방향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는 모두 넓은 대양에서 만나지 않는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힘든 자도, 고달픈 자도, 편하고 행복한자도, 인생의 종착역은 모두 같다. 잘난 자, 못난 자, 있는 자, 없는 자, 힘센 자, 약한 자, 장애인, 비장애인 할 것 없이 인생의 종착역은 같다. 다만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가는 여정이 제각기 다를 뿐이다.
그 여정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조물주께서 결정해준 대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여정을 조금씩 조금씩 조정해 가면서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내가 앞이 안 보인다고 해서 신세타령할 이유도 없다. 타고난 팔자요 운명으로 생각하고 세상과 발맞추어 한 발 한 발 전진해가면 되는 것이다. 세상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 내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내 운명을 개척하면 된다.
미국대륙 도보횡단을, 사하라 사막을 그리고 남극을 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세상의 모든 인간과 종착역에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빵 한 조각 덜 먹으면 어떻고, 구겨진 옷을 입으면 어떤가? 우리는 모두 맨 몸으로 만나지 않은가?
“경태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 어서 출발하자.”
산중에서 난데없이 깊은 사색에 빠진 나를 중기와 낙관이가 일깨워 주었다.
속리산은 최고봉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등 천 미터가 넘는 주봉들이 태고의 신비를 뽐내며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근간으로 하여 화양 선유 쌍곡 계곡이 제각기 자태를 뽐내며 산 아래로 산 아래로 아름답게 뻗어있다.
“아이젠을 채워야 할까봐. 미끄러워서 더 이상 못 올라가겠다.”
우리 삼총사는 잔설이 쌓인 가파른 경사코스를 따라 한참 올라갔다. 살얼음이 낀 바위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추억까지 남기며 우리는 입석대와 경업대를 거쳐 바위 탑에 도착했다.
“경태야, 이거 돌탑에 올려놓고 소원을 빌어라.”
나는 중기가 건네준 주먹만 한 돌을 돌탑에 올려놓은 후 소원을 빌었다.
‘산신령이시여! 입산허용을 감사드리며, 지진참사로 고통받고 있는 일본과 리비아를 포함한 중동의 민주세력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소서. 그늘진 곳에서 어둡게 생활하고 있는 지구촌의 민초들, 산악인들의 무탈 산행을, 사랑하는 지인들 그리고 천사 같은 가족들에게 행복과 평화와 건강을 듬뿍듬뿍 주소서!’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 마음속에 있는 소원들을 산 위에 너울처럼 풀어놓은 후 하산하기 시작했다.
“경태야, 내리막도 계속 바위코스야. 조심해!”
나는 문득 2년 전, 남아프리카의 나미브사막마라톤대회에서 눈물로 뛰었던 악마의 코스가 생각났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피쉬리버캐논 120킬로미터 구간을 달릴 때 날카로운 바위에 무릎을 수없이 부딪쳐 무릎부위의 유니폼이 너덜너덜한 상태로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달렸던 협곡. 이 구간도 피쉬리버캐논을 달리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의 험준한 코스였다.
“야,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나는 정이품송 근처에서 맛있게 끓인 부대라면을 생각하거나 넥스트요법을 수없이 되뇌면서 어려운 난관들을 통과해 나갔다.
‘주인님, 제발 그만 가세요’라고 나의 발바닥과 무릎의 신경세포들이 울그락붉으락 하며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가 귓전에 가득했는데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소리와 법주사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평화스러운 범종소리를 듣자 그 소리는 마치 ‘속세의 고통은 인내와 의지로 극복해야 하느니라’는 메시지로 들려왔다.
완등했다는 나 자신의 의지에 찬사를 보내며 끝까지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게 해준 24명의 산악천사님들에게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고르지 못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통과 위험을 무릅쓰고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안내도우미를 자청해준 친구 이중기와 어려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주변상황과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천상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들려준 친구 최낙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새벽잠을 물리면서까지 맛있는 도시락을 준비해준 사랑하는 아내와 휴가 나와 늦잠을 푹 자야 함에도 새벽 4시부터 촬영하느라 고생한 큰 아들 민이와 ‘응애! 응애! 응애!’ 우렁찬 목소리로 할아버지의 산행을 배웅해준 큰손자 진우와 며늘아기에게 감사를 전한다.
/달리는 희망제조기 송경태
신간도서 안내 : ‘신의 숨결 사하라’ 송경태 저 , 공간 루출판
폭풍은 참나무의 뿌리를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한다
장애인 세계최초 세계 4 대 극한사막마라톤 그랜드슬램 달성(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남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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