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눈뜨고, 안경 찾고, 시계 보고, 냉장고 문 열고, 물 두잔 거푸 마시고, 오늘은 술 안 마신다 다짐하고, 베란다 문 열고, 재떨이 밤새 안녕하고, 담배 물고, 엠비시노래방 라이터로 불붙이고, 헛구역질 하고, 아깝지만 장초 끄고, 현관문 열고, 신문 집어 들고, 백화점 세일 광고 전단지 분리해서 내려놓고, 화장실에 앉고,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조선일보는 어떻게 썼을까 생각해 보고, 씩 웃고, 물 내리고, 칫솔에 시린메드 짜고, 구강협회가 권장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 닦고, 집사람이 권장하지 않는 방법으로 샤워하고, 지구가 권장하지 않는 방법으로 머리 감고, 옷 입고, 양말 신고, 구두 신고, 언제 구두 한번 닦아야겠다 생각하고, 언제일지는 기약 없고, 엘리베이터 타고,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하고, 차 세워 둔 곳 한참 생각하고, 발견하고, 언제 세차 한번 해야겠다 생각하고, 언제일지는 기약 없고, 시동 걸고, 손석희 듣고, 당신이 담배를 끊지 않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끊습니다 금연 광고 듣고, 씩 웃으며 담배 한 대 물고, 웃다가 깜빡이 켜지 않고 끼어드는 놈 욕하고, 미즈메디 병원 앞을 지나고, 벌써 그 사람 이름은 잊어버렸고, 사무실 도착하고, 지하에 주차하고, 엘리베이터 타고, 6층에 내리고, 건성으로 “굿모닝”하고, 건성으로 “굿모닝”하는 대답 듣고, 뜨거운 물 머그잔에 가득 붓고, 커피믹스 들고 설탕 조절 부분 꼭 집고, 툴툴 털어 넣고, 서너 번 젓고, 자리에 앉고, 방석 밤새 두툼해졌고, 기라로쉬 짝퉁 슬리퍼로 갈아 신고, 매직스테이션 컴퓨터 켜고, 한참 걸리고, 스팸 메일 지우고, 두어 개 사이트 게시판에 출석하고, 새벽에 올라온 술 취한 글들 읽으며 씩 웃고, 오늘의 할 일 생각하고, 술 광고 몇 개 만들어야 하고, 왜 내게 패션 광고는 들어오지 않을까 궁금하고, 내 옷차림 한 번 내려다보고, 씩 웃고, 이면지 찾고, 필통 뒤적이고, 열다섯 개나 되는 펜들 중에 붉은색 볼펜 딱 하나만 정상이고, 언제 한번 싹 쓸어다 버려야지 생각하고, 언제일지는 기약 없고, 끼적거리고 볼펜 돌리고, 두 바퀴째 돌리다 바닥에 볼펜 떨어트리고, 허리 굽혀 줍고, 먼지 털고, 언제 사무실 바닥 청소 한번 해야겠다 생각하고, 언제일지는 기약 없고, 술 맛 나는 헤드 카피 다시 생각하고, 다시 끼적거리고, 읽어 보고, 아니다 싶고, 찢어 버리고, 시계 보고, 12시고, 행복밥상 문 열고, 오늘의 메뉴 시키고, 반찬 중에 계란말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행복해서 씩 웃고, 잘 먹었습니다 예의 바르고, 양담배는 안 팝니다 아저씨 가게에 들러 담배 열갑 사고, 뿌듯해서 씩 웃고, 다시 커피 타고, 오전에 찢은 종이 다시 들여다보고, 괜히 다시 봤고,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다시 끼적거리고, 마침내 이거다 싶은 것 찾아내고, 스스로가 대견스러워 히죽히죽 웃고, 오늘 할 일 다 한 것 같고, 커피는 이미 식었고, 얼음 몇 개 떨어트려 냉커피로 부활시키고, 휴대폰 부르르 진동하고, 허벅지가 가볍게 떨리고, 시골에서 훈장질 하는 친구 놈이고, 에베레스트 도전한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히고, 부디 살아서 돌아오라 전하고, 나보다 멋지게 사는 놈이 부럽고, 휴대폰 다시 진동하고, 이번에는 잘못 걸려온 전화고, 잘못 거셨다 말하고, 잠시 후 잘못 걸어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문자 받고, 별 기분 좋은 문자도 다 받아 본다며 씩 웃고, 나보다 멋지게 사는 사람들 참 많고, 여의도 가야하고, 누구는 에베레스트도 가는데 나는 여의도도 가기 싫고, 그냥 메일로 첨부해서 보낸다고 우기고, 그러라는 고마운 대답 듣고, 졸지에 3시간쯤 벌었고, 네이버 축구방 들어가서 박주영 소식 확인하고, 에스비에스 골프닷컴 들어가서 박세리 소식 확인하고, 왜 새 노래를 발표 안 하는지 김민기 소식은 확인할 길 없고, 양병집의 「양단 몇 마름」을 번갈아 듣고, 동아 출판사가 펴낸 국어사전에서 ‘양단’찾아보고, 여러 가지 무늬를 놓아 두껍게 짠 고급 비단이라 적혀 있고, 하나 배웠고, 내친 김에 ‘마름’도 찾아보고, 이엉을 엮어 말아 놓은 단이라 적혀 있고, 알 듯 말 듯하고, 이엉까지 찾아보려다 관두고, 놀고, 또 놀고, 지루하고, 하품하고, 바둑 한 판 두려고 한게임에 들어가고, 아이디와 비밀번호 틀리고, 쫓겨나고, 비가 올 것 같고, 출출하고, “한 잔 어때?”문자 보내려다 “한잔 어때?”문자 받고, 씩 웃으며 “콜!” 문자 보내고, 일찍 들어오느냐는 문자 받고, 일찍 들어가지만 다시 나간다는 문자 보내고, 사무실 나서고, 엘리베이터 타고, 지하 3층인지 4층인지 또 헛갈리고, 차창에 붙어 있는 무담보 무이자 당일 대출 명함 던져 버리고, 막히는 퇴근길에 합류하고, 나 때문에 더 막히고, 백미현 듣고, 언제 한번 미사리 가봐야지 생각하고, 언제일지는 기약 없고, 나란히 가는 차 운전하는 여자 쳐다보고, 그녀도 나를 쳐다보고, 얼른 고개 돌리며 안 본 척하고, 혼자 씩 웃고, 노란 불인데 과감하게 건너고, 파란 불 끝에 건넌 척하고,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하고 경비 아저씨가 택배 찾아가라 손짓하고, 시골 엄마가 보내신 돌산 갓김치고, 입이 벌어지게 웃고, 고속 터미널에서 물표 번호 들고 갓김치 찾아오던 기억 떠오르고, 세상 많이 변했고, 우리 엄마는 하나도 안 변했고, 순댓국집 문 열고, 왁자지껄 시끄럽고, 주인아줌마 반가운 척하고, 씩 웃으며 단골임을 과시하고, 아무도 오지 않았고, 담배와 라이터 내려놓고, 참이슬 시키고, 먼저 반 잔쯤 들이켜고, 식도에서 위장까지 싸하고, 미친놈처럼 혼자 씩 웃고, 순댓국은 좋은데 김치가 섭섭하고, 집에 두고 온 갓김치 다시 생각나고, 한 놈 들어오고, 두 놈 들어오고, 술잔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목소리 커지고, 웃기지도 않은 얘기에 낄낄거리고, 분하지도 않은 얘기에 흥분하고, 옆 자리 사람들은 오늘도 대통령을 씹어 대고, 그래 씹어라 씹어 씩 웃으며 한 잔 더 털어 놓고, 엄기영 앵커는 내일 뵙겠다 하고, 우리도 주인 아줌마에게 내일 뵙겠다며 일어서고, 자리 옮기고, 생맥주 시원하고, 잔 부딪히는 소리는 더 시원하고, 금연하는 놈도 담배를 물기 시작하고, 방광 크다는 놈도 화장실 들락거리고, 어느새 마이크 잡고, 「양단 몇 마름」은 없고,「나는 곰이다」는 있고, 주인아저씨 서비스 20분 더 찍어 주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고,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아니 새벽이 밝아오고, 계산은 누가 했는지 모르고, 손 흔들고, 비는 내리고, 기분 좋을 만큼 비에 젖고, 경비 아저씨는 졸고 있고, 엘리베이터 타고, 3층에 내리고, 일곱 자리나 되는 비밀번호 손이 알아서 누르고, 문열고, 문닫고, 고요하고, TV 켜고, YIN과 OCN 사이에서 갈등하고, 쓰러지고, 눈감고, 오늘은 몇 번이나 씩 웃었는지 세어 보고, 한 번 더 씩 웃고․․․․․․.
첫댓글 너무 길다...짱난다
살아보면 금방인데 글로 써놓으니 무쟈게 긴 하루처럼 보이네요 ㅎㅎㅎㅎ
글씨가 작아 안보인당~~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