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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으면 그만인가 | ||||
심령연구/ 연재 제5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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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쓰는 것은 靈界를 규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일부 인사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것은 더우기 아니다. 독자 여러분이 [인간은 육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자는 것 뿐이다.
육체에서 벗어난 유체를 옷으로 입고 있는 영혼은 그의 옷을 언제까지 걸치고 있는 것일까?
대개 육체에서 벗어난 대로의 유체는 극히 조잡한 유체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영혼의 핵인 자아의 발달 정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그것은 대체적으로 유체로서는 가장 하급의 조잡한 일종의 물질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유체를 물질이라 할때 [그러면 그 유체가 우리 눈에 안보이느냐?]할 것이다. 이 유체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물질보다도 정묘하여 마치 공기와도 같이 안 보인다. 이것이 영혼자아가 입는 옷감이며 옷인 것이다. 육체를 덧옷으로 본다면 유체는 겉옷이고, 육체를 겉옷으로 본다면 유체는 속옷(내의)이다.그런데 영혼은 이 속옷을 여러겹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정화되어 그 의식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그의 옷도 정화되어 조잡한 유체를 벗고 보다 정교한 유체를 걸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이 높을수록 그의 유체는 정밀 정교하다. 의식의 정도에 따라 부단히 그의 영적 환경이나 조건이 향상된다. 흔히들 천녀의 옷소매를 구름과 같이 안개와 같이 부드러운 비단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점에서 수긍할 만 하다.
영적 자아가 향상하여 정교한 유체를 갖게 되면 이를 영체라 부르게 된다. 유체는 그만큼 에— 텔체로서는 둔탁하고 조잡한 형질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체의 핵심, 영체보다 다시 정묘한 에— 텔체의 精麗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근본은 순수한 본성자아의 자기상실로 인하여 나타난 착각현상의 차별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자아의 각성에 따라 혹은 유로 혹은 정밀하게 혹은 거칠게 그의 형질을 나투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마음정도에 따라 옷(유체)의 정도가 다른 것이다.
[8] 에— 텔체와 심성관계 앞서 필자는 에— 텔체를 유체, 영체, 본체로 구별하고 이들은 육체와 함께 자아가 행사하는 기관으로서 각기의 작용을 분담한다고 하였다. 즉 육체는 주로 욕망을, 유체는 주로 감정을, 영체는 주로 이지를, 본체는 주로 예지를 맡고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위에서 유체가 가지는 여러 층의 구성을 살피면서 그의 정추에 따라 유체 내지 본체가 구별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여기서 에— 텔체와 심성과의 관계를 잠간 살피고 지나갈 필요가 있다.
예지, 이성, 감정, 욕망, 이 4종의 인간 심성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경험적 관찰로는 욕망은 육체적 욕구를 충족 보전, 확대시키고자 하는 본능적 욕망으로서 그의 발동 형태는 극히 조잡하다. 강한 자극과 격렬한 충동을 상반한다. 다음에 감정은 개아의 안정상황의 표정이다. 결핍에서 공허를, 위험에서 공포를, 조화에서 안정을, 활동에서 환희를 충족에서 안락을 향상에서 긍지를..... 불안의 제거와 욕망의 충족과 이상의 달성에서 생명이 느끼는 상태를 나타낸다.
다음에 이지는 감정과 욕망에 물들지 않은 깊은 심성의 빛이다. 이는 자타 분별 없는 자아에서 비치는 분별이며 자기 분석력이다. 이에는 대립이 없다. 일체평등 無私의 자아가 발하는 본연의 照破力이다.
다음에 예지는 무엇인가? 이는 근본생명의 자기 확인이며 자기 결단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확인으로 참된 자기 위치를 정립하고 일체 존재의 존재적 당위를 결정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지가 근본지며 생명으로 하여금 본래의 방향을 유지케 하는 근본질서의 유지자다.
[9] 에— 텔체와 심성관계가 주는 교훈 이상 네 가지 심성을 마음의 파장으로 비유하면, 예지는 극히 미세하고 정밀한 파장이고 욕망은 가장 거칠고 긴 파장이며 중간에 있는 감정은 욕망에 가깝고 이지는 예지에 가까운 파장이다. 그래서 가장 정교한 에— 텔체인 본체에 예지가, 그리고 가장 거칠은 육체에 욕망이 , 그리고 영체에 이지가 유체에 감정이 주로 작용하는 이유를 알만하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 둘 것은 심성의 精皎와 깊은 안정이야말로 인격의 중추라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깊은 예지가 안장되어 있으며 생사를 초월하고 생사를 구사하는 자재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의 반대인 본능의 추구와 감각적 충동에의 예속화는 인격의 타락이며 자성공능의 음폐이며 지존한 자기 본성의 모독이며 지혜와 능력의 말살이다.
또한 감정에의 맹종도 자성에의 배반이며 지혜의 오용을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성을 확인하고 참된 자아를 확립하여 자성 왕국을 회복하는 데 노력하고 그의 실현에 가치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이지는 자성 예지에 종속하고 그의 빛이어야 하며 결코 감정이 나 욕망의 도구가 될수 없는 것이다. 감정도 욕망도 이성의 비춤에 따라 조절되고 행사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인간지성은 인간동물적 욕구충족에 동원되어 금수계에도 볼 수 없는 잔인무도 추악하기 이를데 없는 인간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예지의 조명아래 비로소 생명은 본래적인 정상을 시현한다. 이지도 감정도 구김없이 그 모든 성능을 발휘한다. 육체도 정상적인 생명발전을 이룩한다. 욕망이 제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가치가 무엇이며 인격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일단의 해답도 나올 만하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동물적 욕망의 조절방법은 억제만으로 될수 없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높은 이상과 자성도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인간의식의 촛점이 깊은 자아에 맞추어지고 그에 접근할수록 인간의 감정적 육체적 충동과 욕구는 저절로 조절된다. 발말초감각의 자극과 강렬한 충격적 감각으로 자기의 불안과 공허를 달래거나 도피코자 하는 퇴폐적이며 세기말적인 인간방황과 광란상은 여기에서 근본적 치유법이 발견되는 것이다.
[10] 유체표층부의 종말과 유령 육체에서 벗어난 에— 텔체는 그 표면이 우선 조잡한 유체임을 멸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을 거쳐 유체가 육체에서 이탈한 다음에는 유체의 조잡한 층이 또한 벗겨진다. 이것은 영의 의식정도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 영의 발달 정도가 높을수록 즉시 이탈하는 것이다. 이 유체의 표층부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은 극히 정교 미세한, 감득하기 어려운 물질이다. 그래서 그를 통제하고 있던 주체적인 靈我와 분리된 다음에는 이물질을 점차 분해된다. 그리고는 앞에서 말한 푸라나의 경우처럼 또다른 유체에 이용될 소재로써 지상에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 유체 표층부가 즉시 분해되지 않고 잠시동안 그형태를 유지하고서 죽은자의 집이나 혹은 묘지근처에 머무는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령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생전의 의식정도의 동차성에 이끌려 분해하기 이전에 잠시 그 형개를 유진한 것뿐인 것이다. 여기에는 영적 자아가 없는 것이므로 사람에게 영향 줄 아무런 힘도 없다. 겁낼 것도 없다. 곧 분해되어 없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한가지 유의해 둘 것은 이 유체의 껍질을 이용할 때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영매적 소질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푸라나의 활력을 이 유체에 작용시키는 때인데 영혼의 물질화 형상화 실험에 이를 사용한다. 이 밖의 유령현상은 다른 기회에 언급하겠다.)
[11] 업경대(照心鏡) 독자들 중에는 아마도 목련극을 보았으리라. 연전에 [지옥문]이란 이름으로 영화화한 적도 있었으니..... . 한대 목련존자의 어머니가 죽어서 명부에 잡혀가니 생전의 죄상이 드러나는데 그 하나하나가 앞에 놓인 거울을 현생대로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는 죄를 부정하거나 회피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이른바 업경대라는 것이다. 현세에 있었던 일체가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그렇다고 죄상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보존용도 아니다. 영이나 죽음을 허망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라면 몰라도 죽음을 긍정하는 마당에 있는 범부에게는 이것이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은 영적 자아 즉 영혼이 육체에서 탈출하여 육체만을 걸치고 있을 때 생전에 행한 모든 기억이, 마치영화를 보듯이 나타난다. 부분만이 아니라 전생애 동안의 행위의 기록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을 흔히 업경대 또는 照心鏡이라 한다.
업경대 현상은 어떻게 해서 나타나는 것일까? 생각컨대 이것은 불보살의 자비 위신력에 의하여 인간 개아 깊숙이 잠들어 있는 본성광명에 충격을 줌으로써 그의 생애 필림을 눈 앞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인간은 반성과 참괴심이 우러나 영적 향상을 기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마음속에 성령의 빛이 밝게 비춰 자신의 전생애를 비춰 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니 성인을 만남으로써 마음에 진실한 생각이 들게 되고 따라서 자기행위를 돌이켜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하옇든 , 이 업경대 현상은 사실이다. 생전에 행한 어떤 수치스러운 일도 사정없이 드러난다. 이것도 바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일상처럼 돌아가는 것이다.그래서 하찮은 작은 일까지도 다시 반복하여 객관적 입장에 서서 관찰하고 반성하고 뼈에 사무치게 회개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히 영적 향상을 위한 학습이 아닐 수 없다.
[12] 한 村老의 業鏡 現象 이하에 업경대 현상이 어떻게 인간 수업을 가져오는가를 소개한다. 여기서는 인간이 저지른 그릇된 생각, 그릇된 행위 등이 실로는 영원 확고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본심 앞에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이며 따라서 본심 앞에 나타나면서 없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러한 두렵고 그릇된 생각들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 큰 부담이 되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상태를 흐리게 하여 迷의 경계로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업경대 즉 조심경에 드러남으로써 깊이 뉘우치게 된다. 그래서 조심경이야말로 洗靈 淨靈의 장소라고 하고 있다. 현세에서 아무리 고관이었거나 필부라 하더라도 누구하나 예외없이 이 조심경 앞에서 영적인 몸을 맑혀 현세에서 묻은 더러운 때를 털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서 靈身이나 마음이 맑고 밝게 되어 다음영계의 수해장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앞서 소개한 바 있는 村上氏의 영계통신에서 인용한다.
[13] 照心寂滅 얼마를 가서 나는 작은 六角堂 같은 집앞에 왔다. 문은 굳게 닫혀 열릴것 같지도 않다. 올려다보니 [조심적멸]이라는 글자가 금색에 빛나고 있어서 앞에 오는 영인들을 비춰 주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육각당 곁을 걷고 있었더니 옆에 있던 문이 열리고 나는 어느덧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당에 들어와서 나는 놀라서 목을 움추리고 말았다.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차근 정신을 차려보니 한 노인이 방바닥에 이마를 부비면서 괴로워하고 있다.
正面 단에는 관세음보살이 계셨고 그 좌우로는 각각 3체의 작은 보살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주위에는 크기는 사람 몸 만한 타원형의 거울이 가득하게 짜여 있어서 얼핏 보기에 고기비눌 같아 보였다. 노인은 여기서 거울에 나타나는 자기의 모양을 보고 놀란 것이다. 한참 보고 있다가 노인은 부끄러움을 참을 길 없어 단정면의 관세음보살님 앞에 나와 일심으로 염불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세음보살에게서 뻗쳐나는 광채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거울에 반사되어 눈을 뜰 수가 없을지경이었다. 노인이 이 당에 들어섰을 때는, 눈부신 광채로 해서 쓰러질 뻔한 것을 일심 염불해서 근근히 실신을 면했었다. 그러다가 얼마를 지났던지 저 강렬했던 광채도 사라지고 끝 모를 고요 속에 투명한 듯한 자신의 영채를 꿈속에서 보는 듯하면서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눈에 비친 거울을 보니 거기에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좋아.] 하면서 노인은 그 그림자 속에 녹아들 듯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14] 소년시절의 노인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한 남아가 통통한 솜옷에 짚신을 신고 눈속을 뛰놀고 있다. 그림자는 바뀌면서 낫으막한 산밑에 큼직한 참나무가 하늘에 높이 솟아 있고 그 나무밑에 한 초가집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노인이 오랜 동안 살아 온 집이었다. 노인은 어느 덧 유년 시절의 자기로 되돌아간 착각에 빠져 있었다.
해는 지고 어둠이 집에 찾아들었다. 방에 병으로 누워 있는 어머니 얼굴이 보인다. 그렇게도 아름답고 인자하신 어머니의 얼굴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훌쭉해진 어머니를 발견했을 때 슬프고 쓸쓸함이 마치 둑을 터놓은 물처럼 밀려와서 노인은 어린아이 같이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아침 동녘이 트일 무렵, 어머니는 잠든 듯이 이땅을 떠났다. 장례도 끝나고 동리사람도 친척도 다 가버린 적막한 집에서, 거의말을 잊은 듯한 아버지를 애먹이고 보채기도 한다.
이러한 며칠이 지난 어떤 날, 새엄마가 집에 오셨다. 새엄마는 아주 좋은 장나감을 주었지만 그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새엄마를 따를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로 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많이도 상하게 했다. 그래도 동네 아이들과 다투지만 지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모아서 산으로 뛰어 다녔다. 어떤 때는 손아래 아이가 겁을 먹고 개울을 못 건너는 것을, 담력을 길러 준다고 그 아이를 물속으로 차 넣으려하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호되게 꾸지람을 당했다. 열두세 살이 되던 골목대장 시절까지는 하도 장난이 심해서 이웃이나 부모님을 많이도 걱정시켰다.
[15] 청년 시절 이렇게 차례로 엮어가는 자신의 과거를 보면서 노인은 나쁜 짓도 많이 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옆 거울을 보니 노인의 청년시절이 나타났다. 깊은 산에 들어가 힘차게 고목을 찍어내는 청년의 모습은 훌륭했다. 이때는 동리 젊은이의 두령으로 튼튼한 위치에 서 있었다. 술도 좋아하고 노래도 잘 부른다. 그리고 다음 거울에 나타난 것은 이웃마을 처녀와 결혼하려는 시절이다. 상대방에 청혼을 했는데 결론은 나지 않고 날짜만 지나간다. 속이 타서 알아보니 한마을에 있는 같은 또래의 청년이 혼담을 질투하여 자기를 비방 중상한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청년을 대단히 미워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집에 달려가서 호되게 힐문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사실을 부인하며 증거를 대라고 역습해 왔다. 화가 치밀은 그는 청년과 한바탕 싸우려고 하는데 청년의 어머니가 나와 말리는 바람에 돌아온다. 그리고 사사건건 그 청년과 대립하고 다투었다. 노인은 여기까지 보면서 자기자신이 처량해졌다. 이 깊은 산촌 기껏해야 15,6호 밖에 안되는 이 속에서 정말 미워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슬펐다. 왜 이렇게 미워하고 또 미움받아야 할까!
[이것도 전생인연인거요]라고 말해 주던 단골절의 노스님 말씀이 생각났다. 그는 생전에 마을의 古老로 존경받고 또한 노승에게서 [常住念佛]의 법문을 듣고 부터는 염불삼매에 들게 되면서 어느덧 미움을 잊게 되었다.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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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_()()()_
매일 매일 밝은 마음 공부가 중요함을....행으로 공부하렵니다..고잘미섬공...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