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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1.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충돌, 예루살렘!~
지난 천 년간 중동의 성지는 언제나 피로 물들어 있었다.
세계 3대 종교가 이곳에서 수많은 갈등과 분쟁을 일으켜 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상처를 남긴 것은
11세기에 시작되어 200년간 계속 되었던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것은
고작 수백 마일 거리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영토,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성스러운 전쟁.
하지만 그것을 목격한 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각각의 입장에서 서술한 역사 기록들은 위대한 영웅들의 무용담과 전투 기록들이 담겨 있다.
신의 이름으로 목숨을 바쳐 싸웠던 사람들.
두 위대한 신앙의 충돌.
그것이 바로 십자군전쟁이다.
세상에 모든 도시들 중 예루살렘만큼 험난한 과거와 미래를 지닌 곳은 없을 것이다.
유대교에선 헤롯왕과 솔로몬왕의 위대한 신전이 있는 곳.
이슬람교에선 마호메트가 천국으로 승천했던 곳.
기독교에선 그들의 메시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
그후 4세기 동안 점차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시로써
기독교를 옹호하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하지만 7세기에 들어 예루살렘은 새로운 세력 이슬람교의 차지가 되었다.
그로부터 400년후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유럽 전역에서 6만여 명의 전사들이 모여들어 전쟁을 준비한다.
2. 신 중심의 중세사회, 교황과 황제의 엇갈린 욕망!~
지도자 중 한 명인 베테랑 장군, 고드프르와 드 뷔용 공작도
다시 예루살렘을 하느님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3천 마일의 거리를 지나는 3년간의 십자군 원정길에 오른다.
고드프르와는 단순한 무사가 아니었다.
카톨릭 교회에 후원자이며 열렬한 신앙심의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만드는 방법은 단 한가지였죠.
그건 바로 십자군 전쟁이 영혼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현안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신앙이었습니다."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십자군 전사들을 대체적으로 아우르는 단어인 프랑크인들을
이슬람 세계에선 이슬람 문명을 파괴하려고 침입한 야만인들이라고 인식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십자군이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두들 당시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타라크 알리, '살라딘' 저자
십자군 전사들은 무엇을 위해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험난한 길을 선택했던 것일까?
극심한 기아와 잦은 전쟁에 폐허가 되어버린 유럽은 저주받은 땅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찾을 기회가 필요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11세기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시끄러운 세상이었는지 보고 놀라실겁니다.
조직화된 중앙정부도 없고 프랑스나 대제국 스페인도 건설되기 전이죠.
따라서 크고 작은 지방 성주들의 뺏고 빼앗기는 전쟁들이 끝없이 일어났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러웨이 런던 대학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한 학식있는 기독교인의 기록이 있다.
티레의 대주교이자 왕의 친구이자 기욤은 그가 목격한 십자군 원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거의 모든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의는 이미 빛을 잃었으며 온 나라는 폭력에 물들고 있다.
모든 세상 일에는 사기와 음모와 배신이 서려 있다.
모든 미덕은 산산조각나고 쓸모없는 가치가 되었다.
이 세상은 악이 지배한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이 무정부 상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조직은 단 하나, 교회뿐이었다.
11세기 서부 유럽은 기독교 신앙의 지배를 받았다.
"중세사회는 기독교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종교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세속적인 현대인은 상상이 불가능할 정도죠."
- 폴 크로퍼드 교수, 알마대학
"당시 사람들은 언제나 죄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인간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죄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숨쉬는 것 자체가 죄악이었던 것이죠."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그 죄악은 신앙으로 살 수 있었지만
교회는 유럽 사회 전반에 영향을 줄 정치적 힘이 부족했다.
유럽의 세속적 통치자들과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교황은 정치권 밖으로 밀려났지만
1088년 로마에 입성한 새로운 교황 우르바노스 2세는 달랐다.
"우르바노스 2세는 정치, 사회, 종교적 실효를 읽을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을 이용해 유용한 결과를 배출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러웨이 런던 대학
교황은 카톨릭 교회를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세우기를 원했다.
그 기도에 대한 답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오랜 종교적 라이벌로부터 날아들었다.
1095년. 지원을 요청하는 급한 전갈이 교황 우르바노스 2세에게 전해졌다.
교회에 오랜 종교적 라이벌이자 그리스정교회 수장인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콘스탄티노플 황궁으로부터 보내온 전갈이었다.
당시 이슬람 세력은 셀주크투르크족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생겨나 영토를 찾아 중동 지역까지 밀려온 종족이다.
수만 명을 헤아리는 투르크족은 두려움을 몰랐다.
그들은 페르시아, 시리아,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마침내 예루살렘까지 손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북쪽으로 돌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문앞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지금껏 유지되던 권력 균형에 큰변화가 일고 있었습니다.
비잔틴 지역은 징세와 징병을 할 수 있는 지역을 잃고 쇠망해갔습니다."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1095년 황제 알렉시우스는 반격을 계획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황제는
종교적 동지인 교황에게
투르크족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는
소수 정예 기사들을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교황은
이것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기회로 삼을 생각이었다.
"당시의 교황들은 정치적 성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지금의 교황들도 정치에 관여하고 있지만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교황들은 음모, 저작, 책동 등 각종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가들이었습니다.
교회의 정치가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교황은 비잔틴 제국의 위기를 기회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십자군을 모집해
이슬람과의 성전을 통해
교황권을 강화하고
로마를 세계 권력의 중심지로 회복시킬 생각이었다.
"교황이 십자군을 일으킨 데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서유럽의 세속인 통치자에게 넘어갔던 기사단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 기사단의 무력이 교회를 노릴 위험을 없애는 것입니다.
또한 이단자들을 몰아내고 성지를 회복하는 것이었지요."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3. 부와 권력, 그리고 속죄와 천국행, 십자군의 진군!~
1095년 11월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가슴을 울리는 교황의 연설이 울러퍼진다.
교황은
왕자, 기사, 성직자, 일반인 모두
카톨릭 깃발 아래 모여
성지를 회복할 것을 호소했다.
"교황 우르바노스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마치 미국의 빌리그린 목사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처럼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연설장에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지요."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그의 연설엔 교묘한 종교적 선동이 숨어 있었다.
성지순례자들에게
이슬람 세력이 가한 잔혹 행위를 과장해 들려주면서
투르크족을 악마로 규정하며
십자군전쟁이 두 신앙간에 최후의 전쟁이 될거라고 호소했다.
"그의 연설은 마치 하느님의 말씀처럼 들렸고
청중은 모두 신의 계시에 귀를 기우렸다.
우리 신앙의 요람이며 주님의 고향이자 구원의 원천인 그곳이 주님을 받들지 않는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오랜 세월 그 사악한 믿음을 계승한 이슬람교도들이 우리 그리스도가 몸을 누이신 그곳에서 폭정을 일삼고 있다.
우리 성지를 짐승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성직자들은 성소에서 살해되고, 처녀들은 매춘과 죽음 중 선택을 강요받았다. "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모두가 감정적으로 격앙된 상태였습니다.
우르바노스가 성전 참전을 강조하자
사람들은 십자가를 받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어 만든 십자가를 가슴에 붙여
그들의 기독교 형제들을 구하러 동방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던 것입니다."
- 토머스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 대학
드높은 영광과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로
수만 명의 남자와 여자, 온가족, 혹은 마을 전체가 교황 우르바노스의 십자군에 동참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생생히 기록한 한 십자군 병사가 말했듯이
그들에겐 부를 얻을 수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이 있었다.
"교황은 말씀하셨다.
구원을 원하는 자는 망설이지 말고 성전에 기대어 울어라.
부유하지 않은 자에게도 성스러운 자비가 내릴 것이다.
또한 사악한 종족으로부터 성묘를 구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손수 지배하라."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순수한 종교와 사상만으로는 동기 부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중동은 세계의 모든 상인들이 통과하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들은 그 돈을 노리고 참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엄청난 부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보다 더 큰보상이 그들에게 주어진다.
교황 우르바노스가
십자군에 영혼을 바친 자들에게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형제와 친척을 상대로 싸웠던 자들에게
야만인과 싸울 성스러운 기회를 주겠다.
세속적인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구하고
기독교를 구할 목적으로 십자군 원정에 오르는 자는
누구나 지금까지 저지른 모든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교황 우르바노스의 계략은 적중했습니다.
서유럽 기사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은 거죠.
그는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속죄받지 못하면 지옥에 가리라고 말했습니다.
교황은 전쟁에 나가면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십자군에 지원하면 죄를 사면받고 지옥에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설교를 통해
기독교의 교리조차 변경했다.
그는 성전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모세의 여섯 번째 계율은
이번 이단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이번 전쟁이 하느님의 뜻이며 그가 전사들의 영혼을 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 모르는 위험한 발언이었지요.
어쩌든 이교도에 대한 분노가 서유럽 전체에서 끓어올랐습니다.
또한 로마카톨릭 이외의 모든 비기독교 신자들을 적대하기 시작했지요."
십자군이 유럽을 떠나기도 전에
교황의 설교에 자극받은 광신도들은 피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광신도들은 자신들과 신앙이 다른 기독교들을 모두 이단자라 생각했다.
"유대인들에 대한 순례자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독교에 반하는 적이라며 유대인들을 마구 학살했다.
그들은 많은 유대인들의 목을 베었다.
또한 유대인들의 집과 교회당을 파괴하고 그곳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나눠 가졌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유럽 전역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학살되었다.
결국 죄 없는 자들의 억울한 죽음이
제 1차 원정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4. 비잔틴제국을 너머 예루살렘으로!~
그러나 황제 알렉시우스의 배신!~
1096년 가을, 교황의 연설이 있은 지 1년만에
프랑스와 독일, 이탈이아의 군대가 그들의 기독교 형제의 나라들을 구하고
이슬람으로부터 성지를 되찾기 위한 3천 마일의 원정에 나섰다.
북부 유럽 대부분의 지도자는 고드프르와 드 뷔용이었다.
"1차 원정의 지도자 중 한 명인 고드프르와는 원정때 성직자를 대동할 정도로 신앙이 깊었지요.
또한 십자군 원정 이전에도 명성을 얻은 유능한 장군이었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리웨이 런던대학
고드프르와 옆에는 그의 동생 보댕 드 블로뉴 백작이 있었다.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인 보댕은 한때 성직자의 길을 걸었지만 여색과 전쟁의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했다.
"보댕은 욕망과 육체의 쾌락에 사로잡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성격 중 일부였을 뿐이었습니다.
고댕은 자신을 거스르는 자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실리주의자였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리웨이 런던대학
군역사학자인 존 프랑스 교수는 11세기 역사 기록을 토대로 고드프르와와 고댕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
이 자료들은 십자군의 행군길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은 개인적으로 땅을 팔거나 저당 잡힌 돈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원정에 필요한 돈은 대략 6년 정도의 수입에 해당되었지요.
부유한 귀족들은 모든 재산을 처분해 하졸 모두를 데리고 원정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들의 아내들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어 대부분 남편을 따라 나섰습니다.
말하자면 한 도시나 마을 전체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난 거죠.
그 많은 사람들의 식량을 어떻게 조달했을지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일부는 식량을 약탈하기도 했겠지만
원칙적으로는 지나가는 길에 농민들에게 비싼 값을 지불하고 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존 프랑스 교수
6개월 동안 고드프르와의 군대는 동부 유럽의 강과 산맥을 넘어 천 마일을 진군했다.
그들은 마침내 다른 십자군 원정 병력군과의 합류 지점인 동방 정교회의 심장 콘스탄티노플에 다달았다.
이스탄불의 옛이름인 콘스탄티노플은
현재 터어키 최고의 공업도시이자 대표적인 이슬람 도시다.
하지만 900년 전엔 유럽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마지막 기독교 도시로
십자군은 이곳 보스포러스 해역을 넘어 이슬람 영토로 진군할 예정이었다.
바로 이곳에 동방 정교회의 본거지 성소피아 성당이 자릴 잡고 있다.
번쩍이는 황금모자이크로 장식된 성당은 콘스탄티노플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십자군 전사들은 성당을 가까이서 볼 수가 없었다.
9미터 높이의 두꺼운 돌벽이 도시를 따라 10마일 이상 도시를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동지가 도시를 방문하면 황제가 성문을 열어 그를 도시안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십자군 부대 앞에서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여기는 콘스탄티노플로 들어가는 열 개의 금문 중 하나가 있던 곳입니다.
마치 파리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세 개의 아치로 이루어진 문입니다.
꼭대기엔 네 개의 청동 코끼리상이 있고, 그 주변의 벽은 역사적인 영웅들의 무용담으로 장식했습니다.
십자군은 이 웅대한 개선문에 놀랐겠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였죠."
황제 알렉시우스는 문을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교황 우르바노스에게 정예군의 파병을 요청했던 황제는 6만의 십자군 대군을 보고 격분했다.
"황제는 원래 300여 명의 정예 기사부대를 지원받아 위험 지역에 배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황제에겐 떠들썩한 수만의 대군이
한 역사가가 적었듯이 마치 메뚜기의 재앙처럼 보였을 것이다라는 것이죠.
군사들은 끝도 없이 황제의 도시로 밀려들어왔습니다."
황제의 종교적 라이벌이 보낸 대군이 도시 밖에 캠프를 차리자 황제는 큰위협을 느꼈다.
그에겐 그들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알렉시우스는 위기를 극복할 묘안을 생각해냈다.
"황제 알렉시우스는 간악하고 교활한 인물이었다.
그는 마치 전갈처럼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는 악의를 보이지 않지만
꼬리에는 강한 독을 품고 있는 상종하지 못할 인물이었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황제는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들을 황궁안에 있는 자신의 방에 불러들였다.
알렉시우스는 고드프르와 형제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 했다.
하지만 그들 이외에 다른 한 명의 지도자가 문제였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하던 노르만 용병 대장의 장자 보이몽 드 프랑크가 그 주인공이었다.
" 보이몽은 훌륭한 외모와 풍채를 지닌 것으로 아주 유명한 인물입니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빛나는 전공을 세우면서 양떼를 쫓는 성난 사자란 찬사를 받았습니다."
보이몽의 무공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시칠리아에서 이슬람 세력과 격돌해 승리했고
지난 몇 년간 비잔틴 제국과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십자군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보이몽도 정치가가 아닌 군인으로서 황제의 술책에 넘어가고 말았다.
"황제는 위대한 장군 보이몽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예를 다해 그를 접대하라고 명령했다.
보이몽이 고드프르와와 보댕과 캠프를 틀자, 황제는 그들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황제는 간교한 계략으로 그들의 발목을 묶어두고자 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알렉시우스는 많은 영토를 잃고 있었다.
그는 잃었던 땅을 되찾아 십자군이 아닌 자신의 영토로 삼고자 했다.
황제는 비장의 카드를 숨기고 있었다.
"십자군은 준비된 군대가 아니어서 식량문제가 가장 심각했죠.
현대의 군대처럼 보급책이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식량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알렉시우스는 그 점을 이용해 그들과 협상을 했습니다.
그들이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황제는 식량공급을 중지해버립니다.
굶주림에 지친 군대들은 제국을 공격할 수도 있지만
결국 식량을 쥐고 있는 황제 뜻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식량을 보급해주는 댓가로 세 명의 십자군 지도자들은 황제로부터 충성서약을 강요받는다.
서약의 내용은 원정대의 최고통수권이 황제에게 있으며
투르크족으로부터 탈환한 영토는 모두 비잔틴제국과 동방 정교회에 귀속된다는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대는 새로운 동맹 비잔틴제국의 도움으로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넌다.
원정대는 곧 적의 영토에 진입하고 그들의 불안한 동맹은 첫번째 실험대에 오른다.
콘스탄티노플의 지원을 받고 있는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까지 천 마일 이상을 남겨놓고 있었다.
출정 몇 주 후인 1097년 10월, 원정대는 처음으로 적의 도시에 도착한다.
니케아는 한때 비잔틴제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20년 전 투르크족이 점령한 후 지금은 술탄, 크르츠아르슬러의 요새로 사용되고 있었다.
"저기 북쪽의 언덕을 넘어서 십자군이 내려왔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해 저기 언덕을 넘어 들어와 온 도시를 둘러싸고 강력한 포위망을 형성했습니다.
결전의 순간이 다가오자 군사들은 적을 섬멸할 생각에 신이 났습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 존 프랑스 교수, 스완지대학
3마일의 두꺼운 장벽이 둘러싸여 있는 니케아를 침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튼튼한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공격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대충 봐도 높이가 10미터를 넘고, 여기 보이는 탑은 30미터가 넘습니다.
적이 어느 방향에서 침입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 존 프랑스 교수, 스완지대학
십자군은 6주 동안 니케아를 포위했다.
전투는 격렬했지만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렸다.
이제 첫번째 승리가 눈앞에 와 있었다.
비록 빼앗은 영토는 황제 알렉시우스에게 넘겨주기로 했지만
그들은 니케아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잔틴 동맹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다.
도시의 서쪽 측면을 따라 흐르는 아스카니아 호수.
1097년 6월 18일.
도시와 전리품을 모두 차지하기 위한 비잔틴제국의 밀사가 이곳에 도착한다.
"비잔틴제국은 십자군을 돕기 위해 호수에 배를 댔습니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지요.
그들은 도시에 갇힌 투르크족과 비밀리에 접촉했습니다.
그들은 피에 굶주린 십자군에 도륙 당하느니 비잔틴에게 항복하길 택했습니다.
그날 아침 성벽에는 항복을 뜻하는 황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비잔틴 황제의 항복의 깃발을 목격한 십자군 병사들은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기독교 형제인 황제 알렉시우스가 이들을 배신한 것이다.
"알렉시우스가 투르크족과 내통해 도시를 손에 넣자 십자군은 분노에 떨었습니다.
그들이 동맹국이라고 믿었던 황제에게 배신을 당한 것이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길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십자군 원정 계획에도 크나큰 차질이 생기게 된 겁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리웨이 런던대학
니케아의 전리품을 빼앗긴 십자군은 캠프를 철수한 뒤, 예루살렘을 향해 적진 깊숙히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투르크의 술탄 크르츠아르스란이 언덕위에서 그들의 행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략요충지를 잃은 술탄은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십자군에게 중요한 도시 니케아를 빼앗긴 술탄 크르츠아르스란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적군에게 기습하기 위해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술탄은 5만이 넘는 군사를 모두 동원할 생각이었다.
십자군보다 먼저 정찰병을 보낸 그는 기습하기 좋은 장소를 찾아내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또렐라융전투라는 이름으로 십자군 역사의 한획을 긋고 있다.
오랜 연구 끝에도 정확한 전투 장소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존 프랑스 교수는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정확한 장소를 찾았다고 주장한다.
"전투에 대한 기록으로 남지만 전투 장소를 찾기란 어렵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곳이 두 계곡 사이였고 늪이 하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두 계곡 사이의 지점은 매우 넓은 장소였을 겁니다.
양쪽 군사를 총동원하려면 넓은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죠."
프랑스 교수는 1097년 십자군이 걸었던 길을 지나고 있다.
당시에는 다섯 명 정도만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이었다.
6만 대군이 이 길을 건너는데만 해도 사흘이 걸린 정도였다.
그 결과 보이몽이 이끄는 선발대가 본군에서 떨어져 나오고 말았다.
그들은 하는 수없이 크르츠아르스란이 잠복하고 있는 그 계곡에 캠프를 차렸다.
"이곳은 매우 평평하고 광활합니다.
계곡이 만나는 지점이죠. 아마도 이 지점이 확실한 거 같습니다."
존 프랑스 교수는 니케아로부터 35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십자군의 첫전투지역인 또렐라융을 찾아냈다.
"바로 여깁니다.
모든 현대적인 건축물을 치워놓고 보면 이곳이 바로 두 계곡이 만나는 평원입니다.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죠. 또한 땅도 습지처럼 매우 축축하죠.
우리는 지금 십자군 전쟁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그 장소에 서 있는 겁니다."
1097년 7월 1일 새벽.
단독으로 캠프를 치고 있는 보이몽의 군대를 향해 수만 명의 투르크군이 공격해왔다.
프랑스 교수는 당시 전쟁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확히 묘사한다.
"십자군의 최후 방어선은 저기 지프차가 있는 곳까지였을 것입니다.
투르크군은 저기 언덕에서부터 내려와 십자군을 기습했겠지요."
전투에 참가했던 한 십자군 병사는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보이몽이 말했다.
그리스도의 용맹한 전사들이여!~힘겨운 전투가 눈앞에 놓여 있다!~
모든 전사들은 나아가 적에 맞서 싸우라!~"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끊임없이 밀려오는 투르크군의 공격에 십자군은 꼼짝없이 포위되었다.
아무리 많이 죽여도 투르크군의 공격은 끝이 없었다.
투르크 기병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고
십자군 병사들은 그들의 새로운 전술에 대응할 힘을 잃었다.
그들은 단순한 기병이 아니라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궁수들이었다.
"셀주크투르크족은 매우 용감하고 민첩하며 매우 뛰어난 궁수들이었습니다.
서유럽 기사들과는 달리 무장이 가벼워 기동력이 있었지요.
그들은 빠른 속도로 달리며 정확하게 활을 쏠 수 있었습니다."
-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투르크군은 놀라운 전술로 보이몽의 2만 병사들을 섬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놀라운 능력은 기마, 궁술 뿐만이 아니었다.
"투르크군은 우리를 사방에서 포위하고 화살과 창을 던졌고 먼 거리에서 활을 쏘아댔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먼 거리에서 활을 쏘아댈 수 있었는지 확인되지는 않았다.
타에프 엘 박사는 최근 아랍어로 쓰여진 한 이슬람 문서에서
비밀을 풀어줄지도 모르는 녹키야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녹키야는 투르크군에 소속된 족궁수부대였습니다.
부대원들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뒤
다리 사이에 거대한 활을 넣고 수백 미터까지 날려보냈습니다.
어떤 기록에 보면 그들이 활을 쏠 때 그 수가 엄청나서 잠시 동안 햇빛을 가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미 군사 4천을 잃은 보이몽의 진영으로 투르크군이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그는 군사들에게 진영의 사선을 엄호하라고 명령했다.
바로 그때 계곡 넘어에서 구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위대하고도 위대한 장군 고드프르와와 그의 동생 보댕이 이끄는 신의 전사들이
위기에 빠진 그들의 형제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고드프르와와 보댕의 지원 부대가 합세한 십자군은 이제 5만 대군을 헤아렸다.
지원군의 합류로 십자군의 수는 투르크군의 수를 압도했다.
"투르크족은 더 이상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훗날을 기약하며 재빨리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투르크군의 전략전술은 매우 뛰어났습니다.
한 십자군 병사는 이렇게 말했지요.
'그들의 전술은 뛰어나다.
그들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만 제외하고, 그들은 뛰어난 전사들이다.'"
십자군 전사들은 스스로 천하무적이라고 자신했다.
한 전사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5주후면 예루살렘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빚나갔다.
한 달이 지났지만
예루살렘까지는 아직 수백 마일이 남아 있었고
수백 명의 병사들이
전투가 아닌 고된 행군으로 목숨을 잃어갔다.
1. 기근과 무더위, 역병속 행군은 이어지고!~
보댕의 사리사욕, 에데사를 차지하다!~
도릴라이옹에서 크르츠아르슬란의 투르크군을 성공적으로 물리쳤지만
십자군의 지도자들은 또 다른 잠복 기습을 염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름길을 뒤로 하고
안티타우르스 산맥을 지나는 먼길을 선택했다.
몇 년후 한 젊은 기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가 올랐던 산은 끔찍할 정도로 높고 가팔랐습니다.
군사들 모두 또 다른 산을 넘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말들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짐을 실은 짐승들도 힘을 잃고 쓰러졌다."
일렬로 행군해야 했던 병사들은 무려 3주만에야 산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병사들이 건조지대인 비시리아에 다다르자
30도의 무더위가 그들을 괴롭혔다.
"그곳은 물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는 볼모지였다.
우리는 굶주림과 갈증으로 고통 받았지만 먹을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 한 젊은 십자군 병사의 기록
"당시 500명 이상이 고달픔 여정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전사들의 준마들이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번쩍이는 이빨을 드러내고 주인을 지켜줘야 할 그들이
짐을 실은 짐승들과 함께 다를 것 없이 지쳐 쓰러져 갔다는 것이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몇달간 계속된 힘든 여정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이 일어난다.
십자군 최고지도자 중 한 명인 보댕의 아내 고띨드가 죽은 것이다.
"고띨드는 매우 부유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가 가진 부동산과 재물은 모두 남편 보댕의 차지가 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녀가 죽으면
그녀의 재산이 모두 그녀의 가족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그에겐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만 겁니다.
아내가 죽자마자 보댕의 머리속에는 오직 탐욕만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이때 그는 마음을 다졌고
부를 얻기 위해 정복할 영토를 찾기 시작합니다.."
- 톰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대학
그가 아내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기록은 없다.
대신 보댕은 수백 명의 기사들을 데리고 단독 작전을 위해 본대를 떠난다.
아내의 죽음으로 잃은 재산을 보상받는 가장 쉬운 길은 스스로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동쪽에서 백 마일 떨어진 곳에 에데사라는 알맞은 목표물이 있었다.
"에데사는 부유한 곳이죠.
금속세공술이 발달했고,
유프라테스강과 인접해 있어 토지도 매우 비옥합니다.
또한 동방에서 온 값진 향신료와 장신구들이
이곳에 모였다가 지중해로 운반되는 무역로이기도 했습니다.
보댕에겐 더 없이 좋은 목표물이었지요."
- 톰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대학
문제는 그곳이 이슬람 영토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곳은 투르크와 맞서고 있는 기독교 지역이었다.
하지만 에데사 주민들은 계속 되는 이슬람의 공격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위대한 십자군 지도자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에데사 주민들은
군주 토러스에게 보댕을 불러들이라고 청원했다.
"에데사의 군주는 아르베니아 기독교인 토러스였다.
토러스는 후계자도 없는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늙은이였다.
그는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을 바로잡을 힘도, 사악한 이교도들을 막아낼 힘도 갖고 있지 못했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보댕은 비싼 값의 지원을 약속했다.
투르크로부터 에데사를 지켜주는 대신 도시의 상속을 약속 받는다.
힘없는 군주는 자신의 사후에 도시를 물러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는 또한 보댕을 양자로 맞아드리면서 스스로의 무덤을 팠다.
보댕은 토러스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에데자의 사악한 조언자들이 보댕에게
이미 상속을 약속한 토러스를 암살하고 도시를 차지하도록 부추겼다.
토러스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났다.
토러스는 밧줄을 성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그는 반역자들이 쏜 화살에 맞아 거리로 떨어졌다.
그들은 군주의 머리를 잘라 창에 꽂은 뒤 광장으로 가져와 모든 시민에게 보여줬다."
- 한 젊은 십자군 병사의 기록
"십자군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었습니다.
십자군의 대의명분은 동방 기독교 형제들을 이슬람세력의 위협으로부터 구하겠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보댕은 이미 그 이념을 상실하고 오직 자신의 영토를 차지하겠다는 일념으로
도시의 군주를 살해하고 도시를 자기 손에 넣은 겁니다."
- 톰 에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대학
"만약 이슬람교가 발생하기전
중동지역에 동방 정교회만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겁니다.
대신 다른 명분이 댔겠지요.
이를테면 동방 정교회는 정통 기독교가 아니며
자신들만이 정통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동방 기독교인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십자군 전사들을 북쪽에서 침입한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기독교 원리주의자라고 여겼겠지요."
- 타리크 알리, 살라딘 저자
2. 보에몽, 안티오크를 차지하다!~
보댕이 에데사 점령을 자축하고 있는 동안
십자군 본대는 남서쪽으로 150마일 떨어진 철벽 요새인 안티오크에 당도했다.
사도 성 바울로 시대 이후 독실한 기독교가 뿌리를 내렸지만
1085년 이후 투르크에게 요새를 빼앗겼다.
십자군 병사들에게 안티오크는 예루살렘만큼이나 값진 목표물이었다.
안티오크의 옛모습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그 번영했던 도시의 잔재가 터어키 변두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 1년후,
한 병사는 1097년 그 화려했던 도시를 처음 본 감명을 이렇게 기록했다.
"안티오크는 두 겹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하나는 매우 높고 넓었다.
거대한 암벽으로 된 성벽안에는 450여 개의 탑이 솟아 있었다.
도시는 네 개의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벽을 따라 흘렸다.
도시의 모든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십자군이 이 도시를 탐낸 데는 여러 이유가 있죠.
가장 중요한 건 전략상 이유였습니다.
안티오크는 시리아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이어서
이곳을 점령하지 못하면 군수품과 보급로 요청도 어려웠을 겁니다.
종교적으로도 안티오크는 예루살렘과 위상이 맘먹었습니다.
이곳은 사도 성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명을 받아 교회를 세운 초기 기독교 발상지 중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그곳은 십자군 병사들에게 영적인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곳이었습니다."
- 톰 에스브리지 박사
안티오크 주민 대부분은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정교 기독교인들이었다.
투르크인들은 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지만
도성밖의 십자군은 이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투르크인들을 몰아내고
도시를 온전한 기독교 영토로 만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티오크는 방어가 철저한 도시였습니다.
성 꼭대기에서 평지까지 거대한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지요.
안쪽으로는 두텁고 견고한 성벽이 높이 쌓여 있었고
바깥쪽으로는 일련의 탑들이 도시를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습니다.
탑들은 서로 견고하게 맞물러 있어서 파성태를 사용해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 존 프랑스 교수
기독교 역사가들만이 안티오크의 처절한 전쟁을 기록한 것만은 아니다.
이븐 알 아티르는 그가 프랑크인이라 일컫는 십자군에 대항한 이슬람 영웅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영웅은 안티오크의 투르크족 군주 야기시안이었다.
"안티오크의 군주 야기시안은 불굴의 용기와 힘, 지혜와 판단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수많은 프랑크족들을 죽이지 못했다면 이슬람 영토는 단숨에 그들에 손에 넘어갔을 것이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
이븐 알 아티르는 큰귀와 흰수염을 지닌 야기시안의 무용담을 기록했다.
"프랑크인들이 도시 가까이 다가오자
야기시안은 백성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의심스러웠다.
그는 이슬람인을 도성 밖으로 보내 참호를 파게 했다.
다음날 기독교인들을 보내 같은 일을 시켰다.
그들이 일을 마치고 도시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그는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안티오크는 그대들 것이나 프랑크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내가 잠시 맡아두겠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
야기시안은 안티오크를 지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도시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십자군의 동정에 귀를 기울렸다.
"모든 이슬람 기록에서 야기시안은
안티오크를 지키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했던 영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군대를 조직해 십자군의 군수품을 약탈하고
야간기습공격으로 막사에 불을 지르고 식수를 빼앗는 등 많은 무공을 세웠습니다.
홀로 십자군 대군에 맞서 훌륭하게 도시를 지켜냈습니다."
-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그의 노력은 빛을 발했다.
십자군은 8개월 동안이나 도시 밖에 묶여 있었고 캠프의 상황은 더욱 처참해져만 갔다.
식량도 거의 없는데다가 쫓겨난 기독교인들까지 먹여 살려야 했다.
교착상태가 길어질수록 병사들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기독교 역사가인 기욤 드 티레는 말의 피를 받아 마셔야 했던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군사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더구나 역병까지 퍼져 많은 군사들이 죽어나가고
게다가 장소가 부족해 그들을 묻을 자리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기아와 질병으로 인해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고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까지 더해 군대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살아 남은 자는 처음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 기욤 드 티레의 기록 중
병사들의 고통은 심해져 갔다.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는 중세 이슬람역사서에서
안티오크의 군주 야기시안이 적의 포위를 뚫고 외부에 지원 요청을 할 수 있었던 방법을 찾아냈다.
"방법은 바로 비둘기였습니다.
셀주크 투르크인이 최초로 특급 우편배달부를 만들어낸 셈이죠.
비둘기의 다리에 쪽지를 만들어 보내면
몇 시간안에 이슬람 영토에 다다라서 지원군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달후 정찰병들은 대규모 투르크 지원군이 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다급해진 십자군은 이제 도시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보에몽은 드디어 돌파구를 찾는데 성공한다.
바로 이슬람 내부의 반역자였다.
"그는 흉갑을 제조하는 피로주라는 병기공이었다.
도시에서 계곡으로 흐르는 강의 하류지역에서 일하는 자였다.
그는 오랫동안 야기시안 밑에서 일했지만 결국 프랑크족과 내통했다.
그들은 피로주에게 뇌물을 바쳤다."
- 이븐 알 아티르 기록 중
"피로주는 성을 한 개도 아닌 세 개나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보에몽이 사람을 제대로 본거죠.
그는 언제든지 군주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쟁에서 가장 큰 적수는 내부인의 반역입니다."
- 존 프랑스 교수
"모든 준비를 마쳤다.
병사들은 피로주가 지키는 성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보에몽 장군이 우리에게 낮게 소리쳤다.
'신의 가호를 빌며 마음을 굳게 먹어 사다리를 올라라.
안티오크는 곧 하느님의 도시가 될 것이다."
- 십자군에 참전한 젊은 병사의 기록 중
"피로주가 책임을 맡고 있었던 성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이곳이 본탑의 토대인 것 같아요.
성벽의 끝부분이 남쪽의 방어선으로 이어집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때 이곳에 피로주의 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십자군 병사들은 저 앞의 언덕을 넘어 일제히 이곳으로 몰려들어 왔을 것입니다.
피로주는 여기서 횃불을 흔들고 있었겠지요."
- 존 프랑스 교수
"우리는 사다리를 가지고 와서 성벽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일제히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 십자군에 참전한 젊은 병사의 기록 중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다리가 부서졌지요."
- 존 프랑스 교수
그러나 돌이키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군사들은 다른 사다리를 이용해 피로주의 성에 올랐다.
몇 분안에 군사들이 성벽안으로 밀려들었고 성문이 열리면서
밖에서 기다리던 군사들까지도 모두 모였다.
"성문이 열리면서 병사들은 물밀듯이 성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 존 프랑스 교수, 스완지대학
8개월간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병사들은 더 이상 거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안티오크의 기독교 주민들의 안내를 받아
집과 거리와 모스크 안에 있던 모든 이슬람교인들을 잡아 무참히 살해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도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보에몽은 주저하지 않고 우리 군의 깃발을 성벽 꼭대기에 꽂으라고 명령했다.
도시의 거리는 온통 시체들로 넘쳐나 그 악취로 인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좁은 길 어느 한곳에도 시체가 널려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 구분없이 모두가 학살되었습니다.
어린이는 물론 부녀자와 노인들까지 모두 죽여
그동안 당한 고생을 되갚고 자신들이 이곳의 진정한 주인임을 과시했습니다."
-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하지만 십자군의 눈을 피해 달아난 한 투르크인이 있었다.
바로 야기시안이었다.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야기시안은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황한 그는 30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도성 밖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은 그는 도시를 지키지 않고 달아난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괴로움에 목놓아 울었고 목숨을 끊으려는 순간
그곳을 지나던 한 양치기가 그의 목을 베어 안티오크의 프랑크인들에게 가져갔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
보에몽에겐 야기시안의 머리도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에겐 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야기시안이 살해된 다음날,
그의 전갈을 받은 투르크 지원군이 안티오크에 당도한 것이었다.
기독교 점령군들은 다시 포위를 당한 신세에 놓이게 되었다.
1098년 6월.
도성 포위 8개월만에 십자군은 드디어 안티오크를 점령했다.
하지만 이들은 곧 적군과 위치를 바꿔 성안에 갇힌 신세가 되었고
도성 밖의 투르크군들은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군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모두 꼼짝없이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병사들을 다시 일어나게 하는 방법은
하느님이 그들 편에 계시다는 종교적 신념을 심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 존 프랑스 교수
병사들은 기적을 빌었고 마침내 답을 얻었다.
한 병사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계시는 절대로 환상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느님이 내리시는 겁니다.
성령의 힘으로 가능한거죠."
- 번트 베쉬 신부, 예루살렘 총대주교 관구
계시를 받은 이는 미천한 신분의 사제였지만
이 소식은 십자군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그는 피터 바로톨로뮤이란 이름의 신자였다.
그가 말했다. '어느날 밤 사도 안드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안티오크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가거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렸던 성스러운 창이 그곳에 묻혀 있다.'
그는 이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렸던 창은 수백 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순간에 정말 창을 찾아낸다면
십자군 병사들은 다시 한 번 강한 종교적 신념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유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에 그가 남긴 유품은 있을 수가 없지요.
다만 십자가나 창처럼 그분의 몸에 닿았던 물건들이 남아 있을 뿐이지요."
- 번트 베쉬 신부, 예루살렘 총대주교 관구
"그는 복잡한 종교이야기가 아닌 간단한 유품으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고 했습니다.
구체적인 신의 계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고
그 어떤 것보다도 설득력이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 존 프랑스 교수
피터 바로톨로뮤은 손수 12사도를 선정해
성스러운 창이 묻혀 있다고 계시된 성당으로 달려가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땅을 파 보았지만 창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때 피터가 직접 성당안으로 들어가더니 오래된 쇠덩이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는 그것이 성스러운 창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랍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메사아의 창이 성당 안에 묻혀 있다는 주장은 간교한 사제의 농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병사들에게 그것을 찾으면 승리할 것이다, 찾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먼저 성당으로 달려가 쇠덩이를 묻은 후 자신의 발자욱을 지워 흔적을 없앴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
"십자군 병사들은 이전에도 여러번 신성한 유품들을 위조한 적이 있습니다.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은 신성한 유품을 위조하여 만들어 그것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어떠한 유품이든 말만 잘 만들어내면 그것이 신성한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십자군 병사들에게는 성스러운 창처럼 그들의 신념을 확고하게 하는 유품이 필요했으니까요."
- 타리크 알리, '살라딘' 저자
"그건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있죠.
그들은 신성한 물건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고
거짓으로부터 진실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이죠."
- 번트 베쉬 신부, 예루살렘 총대주교 관구
"십자군 병사들은 믿음을 확인하고 전쟁 의지를 드높혔습니다.
종교적 환희를 맛보는 순간이었죠.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병사들은 다시 일어나 싸울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 존 프랑스 교수
"여섯 개의 전선이 일제히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우리는 십자기의 지시에 맞추어 일제히 성문 밖에서 명령을 기다렸다.
전투태세를 갖추고 진군해오는 우리 군을 보고 투르크군은 이렇게 말했다.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본때를 보여주자.'
하지만 우리군이 마침내 그 위용을 드러내자 그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십자군의 군마는 고작 200마리 뿐이었지만
그들은 성스러운 창을 높이 들고 투르크군과 정면으로 대적했다.
이때 한 병사는 하느님이 보낸 성스러운 군대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때 백마를 타고 깃발을 든 수많은 군사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곧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지원군임을 깨달았다.
투르크군은 놀라서 달아났고 우리는 결국 승리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그 환영이 사실이든 아니면 사기진작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든
안티오크는 다시 한 번 기독교의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약속처럼 동방정교회에 귀속되지는 않았다.
보에몽이 일 년 전 알렉시우스 황제와 한 약속을 어기고
자신이 안티오크의 군주가 된 것이다.
"보에몽은 안티오크를 차지할 욕심에 알렉시우스와 한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탈환하는 모든 영토를 황제에게 바치겠다는 서약을 어긴 거죠.
또한 그는 십자군이 기반으로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념마저 내던졌습니다.
비잔틴을 도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자던 로마 교황 우르바노스의 뜻이 퇴색 되어버린 것입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십자군은 많은 영토를 손에 넣었다.
보댕은 에데사를, 보에몽은 안티오크를 지배했다.
두 사람 모두 큰부자가 된 것이다.
3. 마아라트노만에서의 잔혹한 대학살!~
십자군, 인육까지 먹다!~
1098년말까지 십자군은 공국을 지배하는데 시간을 허비했고
예루살렘으로 진군을 계속 해야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내부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그들의 향후 행보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전투를 계속 해야 하는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병사들의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나눠졌고 의욕을 잃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는 병사들도 있었지요.
원정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 톰 에스브리지 박사
병사들은 예루살렘으로 남진을 주장했지만, 지도자들은 여전히 논쟁을 계속 했다.
이들은 이미 십자군 원정의 목적을 잊은 지 오래였다.
안티오크에서 말을 달려 이틀 거리인 마아라트노만에서 드디어 병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차 십자군은 이곳에서 대학살을 자행했습니다.
모든 역사학자들이 꼭 한 번 와 봐야 할 곳이죠.
1차 십자군이 그들의 극악무도한 본색을 드러냈던 곳이니까요."
-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십자군 병사들은 이곳에서 가장 잔혹한 살육을 저질렀다.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는 십자군이 충격적인 학살을 저지른 마아라트노만을 처음 방문했다.
시리아의 북쪽 끝에 위치한 이곳은 11세기의 위용을 잃은 지 오래다
유적지를 놀이터 삼은 아이들은 박사를 신기한 듯 따라다닌다.
"이곳이 마아라트노만의 요새가 있었던 곳 같습니다.
왼쪽으로는 모스크의 잔재들이 남아 있고, 오른쪽으로는 도시의 군주가 살았던 성이 보입니다.
이건 교회 같은데요,
마아라트노만의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인들과 더불어 평화롭게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병사들은 종교와는 상관없이 마라드노만의 모든 주민들을 무참히 살해했죠."
-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십자군 병사들이 안티오크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보에몽이 이끄는 소규모의 부대가 1098년 11월 이곳에 도착한다.
"안티오크에서 멀지않은 마아라트노만는 투르크족과 사라센인이 대부분이다.
보에몽은 사라센 지도층에 역관을 보내
가족들과 가산을 정리해 성문위에 있는 궁에 피해 있으면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알렸다.
우리는 도시안으로 들어가
집이든 창고든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약탈을 했다.
새벽녘까지 주민 전체가 몰살되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기록을 보면 말이야 그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단다.
그들은 불을 피워놓고
사람들을 산 채로 불속에 집어넣었지.
겨우겨우 달아난 자들도 결국은 십자군에 잡혀 수없이 칼에 찔러 죽임을 당했지.
도시안에서만 무려 2만 5천 명이 살해되었지.
그들은 이슬람교인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 어린이, 부녀자, 노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모두 죽였단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청소'라는 전쟁범죄를 저지른거야."
- 타에프 엘-아즈하리 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십자군의 잔혹한 행위는 더 이상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아라트노만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건 그 이후에 벌어진 사태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34일간 머물렀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또 어떤 이들은 도시안에서 더 이상 약탈할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상태에 만족할 줄 모르고 답답해 했다.
급기야 그들은 시체들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심지어 시체의 살을 잘라 요리해 먹는 자들도 있었다.
우리 부대에선
어른의 시체를 단지에 넣어 끓여 먹고
어린 아이의 시체를 꼬챙이에 꽂아 구워 먹었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성스러운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쟁의 목표는 오직 적을 이기는 것 뿐이죠.
전쟁에는 살인과 폭력, 선동, 위협,
말하자면 죽음과 충격과 공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인육을 먹는 행위는
적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주기 위한 작전입니다.
봐라, 우리는 너희를 산 채로 잡아먹을 정도로 강하다라는 뜻이죠.
어쩌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으니까요.
그들은 산 채로 십자군에 잡아먹힐까봐 두려워했습니다."
- 타리크 알리, '살라딘' 저자
4. 3년, 3천 마일의 행군!~
드디어 성지 예루살렘 탈환!~
그리고 이어지는 대학살!~
마아라트의 참극을 목격한 지도자들은 더 이상 군사들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십자군이 그 임무를 완수하고 성지를 탈환할 때가 온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은 다소 온건적인 이슬람세력인 파티마 왕조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은 십자군에게 화의를 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99년 6월.
처음 유렵을 떠났던 6만 대군의
1/4도 채 되지 않는 1만 3천 명의 십자군 전사들이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맞이한 예루살렘의 문턱에 당도한다.
"십자군 전사들은
드디어 그들이 목적했던 예루살렘의 성문 앞에 다다랐습니다.
3년간 3천 마일에 달하는 긴여정,
극심한 고통과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그들은 성지에 도착했습니다.
병사들은 감격해 울었고
땅에 입을 맞추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임무가 남아 있었죠."
- 톰 에스브리지 박사
3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십자군은 예루살렘 총공격을 준비했다.
성벽은 15미터 높이에 두께는 3미터나 되었다.
도시 내부로 침입하려면 사다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슬람군이 이미 주변의 나무들을 모두 없애버린 상태였다.
십자군 병사들은 나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마침내 땅속의 구덩이에서 400개의 손질된 목재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신이 그들 편에 서 계심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목재는 15미터 성벽을 허물 공성탑 두 개를 제조하고 남을 정도였다.
결전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1099년 7월 14일.
십자군은 두 줄로 나눠져 공격을 개시한다.
두 개의 공성탑은 각각 도시의 북서쪽과 남쪽에 설치된다.
두 군데 중 어느 한 곳의 벽만 무너져도 예루살렘은 함락될 수 있었다.
"머리위로 수많은 돌과 대포와 화살이 빗발친다고 상상해보십시요.
전쟁은 잔혹하고 격렬했습니다.
십자군은 인간폭탄을 사용하기도 했는데요,
말 그대로 이슬람군을 잡아 투석기에 넣고 성벽을 향해 발사하는 것이었죠."
- 톰 에스브리지 박사
남쪽에선 이슬람군이 기름단지와 불화살로 십자군의 공성탑을 공격했고
마침내 하나를 불태워버리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위대한 십자군 지도자 고드프르와가 이끄는 북서쪽 진영의 공성탑 하나 뿐이었다.
"고드프르와는 작전을 변경했습니다.
여기 레이몽 아길레라는 사람이 쓴 기록을 보면
고드프르와는 성 스테판성당과 요셉 계곡 사이로 부대를 이동했다고 씌여 있습니다."
- 톰 에스브리지 박사
고드프르와는 이슬람군 방어선의 취약 부분을 발견했지만
그곳은 도시 북동쪽으로 1마일 더 가야 하는 곳이었다.
몇 시간후 날이 저물자 고드프르와는 군사들에게
공성탑을 옮겨 방어가 소홀한 지역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바로 이곳이 십자군 병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침입한 장소입니다."
- 톰 에스브리지 박사
이슬람군은 고드프르와의 공성탑을 무너트리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들은 쇠갈고리를 던져 그것으로 탑을 무너트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은 거대한 낫을 가져와 그들의 사슬을 잘라버렸죠.
성벽위에서 잠시 동안 불이 난 틈을 타 고드프르와는 성벽 아래에 가교를 내려 성벽에 대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 톰 에스브리지 박사
성벽이 무너지고 이슬람군은 모두 달아났다.
마침내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을 손에 넣었다.
"우리는 솔로몬 신전까지 사라센인을 추격해 모두 죽였고,
신전의 벽은 모두 피로 물들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이는 자는 모두 칼로 머리를 베었다.
살아남은 사라센인은 시체를 끌고 와 성문 앞에 높이 쌓아두었다.
높이 쌓여 있는 시체들은 마치 장작더미인양 불태워졌다.
이보다 더 끔찍한 이교도 학살은 들어본 적이 없다.
죽은 자가 얼마인지는 하늘만이 아신다.
예루살렘은 우리 것이다."
- 한 젊은 십자군 기사의 기록 중
"모든 고난을 뒤로 하고
처음 그들이 목적했던 대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정말 기적같은 일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하느님이 그들을 굽어 살핀다고 생각했고
십자군에 참여한 모든 서유럽 사람들은
하느님께서도 일어서길 바란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죠."
- 톰 에스브리지 박사
고향인 북유럽을 떠나온 지 3년만에 고드프르와는 예루살렘에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맞이한 곳에서 왕의 칭호를 받기를 거절했다.
1년후 그는 성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욕심 많은 군주 보댕이 달려와 그의 자리를 대신 했다.
형처럼 겸손한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댕은 예루살렘의 왕에 오른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졌다.
하지만 6만여 명의 병사가 3천 마일의 대장정을 떠나게 한 장본인 교황 우르바노스는
예루살렘이 400년만에 기독교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예루살렘이 폭이 80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십자군은 자그마치 3만 명의 유대인과 이슬람인을 학살했다.
소식을 들은 이슬람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십자군은 아랍세계에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슬람을 침입한 야만족이며
그들의 잔혹한 행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어제 일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서구세력이 이슬람지역을 침범할 때마다
십자군이 또 다시 일어났다고 말하곤 합니다.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에도
미국대통령이 서슴치 않고 테러를 막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들은 이슬람인들은 십자군이란 단어 하나에도 공포에 몸서리를 쳤습니다."
- 타리크 알리, '살라딘' 저자
십자군 전사들이 승리를 기뻐하며 예루살렘 통치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을 무렵
이슬람세력들은 서서히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슬람인들의 분노가 폭발해 예루살렘을 덮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의 번영과 이슬람의 반격 준비!~
1096년 6만이 넘는 유럽의 기독교인 병사들이 고향을 떠나 십자군 원정길에 올랐다.
그들의 목적지는 예루살렘.
지난 400년간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통치권 아래 놓여 있었다.
십자군은 그곳을 되찾겠다고 맹세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또 부활하신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이 시작된 곳이니까요.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세상의 중심입니다."
-번트 베쉬 신부, 예루살렘 총대주교 관구
십자군 전사들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3천 마일의 행군길에서
이슬람세력과 수없는 전투를 벌여야 했다.
원정 3년만에 그들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당도한다.
도시안에 있던 사람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슬람인, 유대인, 심지어 기독교인까지 3만여 명의 주민들이 몰살당했다.
십자군이 성지탈환을 기뻐하는 동안 이슬람인들은 서서히 반격을 준비했다.
이제 막 형태를 갖춘 십자군 왕국을 위협할 한 명의 이슬람 지도자 살라딘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슬람 성전 지하드가 시작된다.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신전에 모인 주민들은 모두 불태워 죽였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풀어주겠다던 이슬람인과의 약속도 무참히 짓밟았지요."
- 타리크 알리, '살라딘' 저자
이슬람인들은 두 곳의 성소가 모독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십자군은 안탈라사원을 마구간으로 사용했고
예언자 마호메트가 승천했다고 하는 바위사원에서는 이슬람의 잔재를 파괴하고 사원을 교회로 바꾸려고 했다.
도시 중심에 세워진 예수의 수난상은 예루살렘이 예수의 도시임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이슬람인들은 십자군이 그들에게 저지른 폭력과 잔인한 학살에 몸서리쳤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학살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겁니다."
- 타리크 알리, '살라딘' 저자
북동쪽으로 140마일 떨어진 도시 다마스쿠스에서는
수천 명의 이슬람인들이 우마이야사원에 모여 예루살렘 참사를 애도했다.
십자군의 만행에 보복하려는 이슬람인들의 의지는 드높았지만
1099년에 이슬람세계는 그럴만한 힘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12세기 가장 유명한 사가인 이븐 알 아티르는 지도자들의 분열을 그 이유로 지적했다.
"기독교인들이 우리 영토를 장악해가고 있을 무렵
이슬람 지도자들은 자기들끼리 분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세계는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에 대항할 힘을 키우지 못했다."
- 이븐 알 아티르 기록 중
"이슬람 문화는 매우 훌륭하고 수학, 과학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치 분야에 있어서는 안정적인 국가를 형성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여러 명의 강력한 지방통치자들이 각자의 도시국가를 통치하는 정도였습니다."
- 타리크 알리, '살라딘' 저자
마호메트 사후 이슬람세계는 크게 두 갈래의 종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바그다드와 알레포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와
카이로를 중심으로 한 시아파가 그것이다.
기독교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선 양분된 종파를 하나로 묶을 지도자가 필요했다.
이슬람의 반격은 십자군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티레의 대주교인 기욤이 쓴 십자군원정 기록은 오늘날 가장 중요한 십자군 역사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사라센, 즉 이슬람인들이 어떻게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을 괴롭혔는지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 주변 지역에는 우리의 적, 사라센 이교도들이 살고 있었다.
왕국내에서도 안전이 완전히 보장되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겁에 질러 아무도 성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 기욤 드 티레 기록 중
제1차 원정 이후 예루살렘에 남은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왕국의 입지를 보다 공고히 할 필요를 느꼈다.
"예루살렘 탈환 이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고 기사 200~300명만 남았습니다.
예루살렘은 꽤 큰도시였지만 텅빈 도시 같았을 겁니다.
이제 남은 십자군이 할 일은
도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예루살렘으로 오게 하는 것이었지요."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러웨이 런던대학
카톨릭교회는 유럽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의 이주를 권장했다.
이슬람교인, 동방정교회인, 유대인들의 집이 새로운 이주자들의 거처로 제공되었다.
"예루살렘으로의 이주를 권장하는 광고가 서유럽 각지에 퍼졌습니다.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서부로 가자고 광고했듯이 말이죠.
이주자들에겐 재산과 세금 감면 혜택까지 주어졌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지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 빠질 수 없는 장점이었죠."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러웨이 런던대학
"충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예수께서 사시던 곳을 가보고 싶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성모마리아와 그리스도의 사도들,
그리고 기독교가 토대를 두고 있는 유대교의 예언자들이 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번트 베쉬 신부, 예루살렘 총대주교 관구
제1차 십자군원정 이후 예루살렘은 대도시 성지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인구도 크게 불어나 중세 파리와 맘먹는 3만 명에 달했다.
"제1차 십자군원정 이후 급선무는 예루살렘왕국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주변 기독교 영토와 결속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지요."
- 톰 애스브리지 박사, 퀸 메리 런던대학
유럽인들은 점령한 도시들에 새로운 농장과 마을, 성곽을 세우고
에데사, 안티오크, 트리폴리, 예루살렘 등 네 개의 강력한 십자군 국가를 창설했다.
이젠 기독교의 차지가 된 예루살렘으로 유럽의 순례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매년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지를 찾아 성지에서 예배 드리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오늘날의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먹고 자고 병을 치료받을 장소와 가이드북이 필요했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러웨이 런던대학
12세기 가이드북에선 가장 가볼만한 곳으로 성묘교회를 들고 있다.
중요한 성지들을 한곳에 집결시키기 위해 십자군이 재건축한 곳으로 순례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었다.
가이드북에는 또한 모든 순례자들이 꼭 들러야 할 기념품 가계도 담겨 있다.
"기념품을 사려고 하는데요"
"예.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성수를 찾고 있는데요.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예. 성수와 성유, 성향, 성토도 있습니다.
"성수는 어느 곳 물이죠?"
"요르단 강물입니다. 성묘교회에서 축성된 물이죠."
예루살렘의 뒷골목엔 기념품 상점 뿐만 아니라 음식점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맛없는 음식점 거리로 유명한 곳이었죠.
중세 베스트푸드점이라고 할까요.
여행 중 몸이 아프면 치료를 받을 곳이 필요하죠.
가이드북에선 어떻게 안내하고 있는지 알아보죠.
'성묘사원옆에 병원이 있는데 늘 환자들로 가득차 있다.
내가 갔을 때도 환자가 2천 명을 넘었다.
하룻밤 사이에 50명 이상 죽어나가기도 했지만
그 자리는 곧 다른 환자들이 그들의 빈자리를 메웠다.'"
성지탈환 이후 십자군은 세례요한병원을 운영했다.
이곳에서 순결과 청빈, 그리고 복종을 맹세한 사람들이 환자들을 보살폈다.
그후 '기사단'이라고 알려진 이들은
성지를 오가는 수천 순례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군사적 업무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순례자들의 주변에는 언제나 강도들이 들끓었습니다.
12세기 성지순례 안내서에 보면
자파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는 숨진 순례자들의 유골이 즐비했다는 기록이 있지요.
또한 동료의 시신을 묻어주려고 멈췄다가 그 무덤이 자신의 무덤이 될거라고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 폴 크로포드 교수
순례자들의 안전을 수호하기 위해 두 번째 자선단체가 설립되었다.
금욕적인 수도사와 무사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갖춘 그들은
이교도와의 전쟁이 헌신과 구원을 동시에 실현하는 방법이라 여겼다.
그들은 유대교 신전인 솔로몬 템플을 기점으로 구성되어 '템플기사단'이라고 불렀다.
두 기사단은 이슬람세력의 가장 큰 적으로 성장했으며 가장 강력하고 두려운 십자군의 상징이 되었다.
"두 기사단은 십자군 점령지에서 엄청나게 큰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구기사단과 템플기사단 모두 군사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요.
그들은 곧 십자군 국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엘리트 군사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 폴 크로포드 교수
구기사단과 템플기사단은 곧 새왕국의 방어력 증강을 위한 성곽 건축을 관장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론 시리아에 위치한 크락데슈발리에가 있다.
2. 이슬람의 반격, 성전 지하드!~
장기, 에데사를 탈환하다!~
거대한 기독교 성채들은 이슬람교가 범접 못할 십자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슬람인들은 여전히 십자군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재탈환 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투쟁과 성전을 뜻하는 지하드가 다시 한 번 언급되기 시작한다.
12세기 초반 지하드의 깃발 아래 모여 십자군을 몰아내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다.
"지하드는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이념이죠.
지하드는 7세기 마호메트 시대에서 기원된 것으로, 십자군을 상대로 새롭게 생겨난 용어는 아닙니다.
이슬람의 원리인 지하드가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일어난 것이죠."
- 조나단 필립스 박사, 로열 할러웨이 런던대학
이반 알빈 장기는 오늘날 이슬람 영토인 모슬의 총독이었다.
현명했지만 무자비한 장기의 목표는 영토확장이었다.
그는 십자군을 상대로 일어난 첫번째 지하드로 이슬람 역사에 기록된다.
"그의 가장 큰 목적은 십자군을 몰아내고 성지를 되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시리아를 통일해야 했습니다."
- 타에프 엘 아즈하리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알레포는 이슬람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 중 하나였다.
제1차 십자군도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곳이다.
대부분 이슬람 도시와 마찬가지로 알레포도 독립적인 도시국가였다.
장기는 알레포 도시를 세력 기반으로 삼아 십자군을 물리칠 계획을 세웠다.
막강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장기는 알레포를 방어해주겠다고 약속한다.
1180년, 조약이 체결되고 장기는 통치권을 획득한다.
이로써 장기는 북부시리아의 일인자 자리에 오른다.
"그가 권좌에 오르기전 이슬람에는 강력한 통치자가 없었다.
또한 기독교세력의 침입으로 이슬람세력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가 다시 정의를 꽃피웠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
장기는 무려 20년간에 걸친 시리아의 분쟁을 끝내고 북부시리아를 통일한다.
"한 부하는 그를 성난 사자와 삵괭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가 들었다면 그 부하는 살아남지 못했겠지요.
장기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부하들은 언제나 겁에 질러 있었지요.
만약 그가 농작물을 밟지 말라고 명령을 했는데 누군가 명령을 어겼다면 즉시 그를 처형을 했습니다."
- 폴 크로포드 교수
1144년, 장기는 십자군에게 자신의 무자비함을 모두 보여줄 준비를 다 마친다.
목표물은 전략요충지 알레포에서 120마일 떨어진 십자군공국 에데사였다.
장기는 알맞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기는 항시 에데사를 주시하며 그곳을 손에 넣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데사 군주가 자릴 비운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그것이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
1144년 에데사.
십자군 세력이 생긴 지 반 세기만에 이슬람세력은 드디어 반격을 개시한다.
장기는 3만 대군을 이끌고 도시를 포위했다.
도시 방어를 위해 남아 있던 얼마 안 되는 기사들은 당황했고 성급히 성안으로 후퇴했다.
이슬람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복수의 순간을 아랍의 역사가 이븐 알 아티르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들은 쉬지않고 성벽을 때려부숴지만 그들에게 대항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장기의 군사들은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무수했다.
도시는 온통 이슬람 군사들로 가득찼다.
새들조차도 두려움에 날개를 접었고
물 샐 틈 없는 완벽한 호위와 가공할 위력에 파괴가 계속 되었던 것이다."
이슬람군이 에데사 내부에 침입할 수 있는 방법은 성벽을 허물고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장기는 광부들을 데리고 들어와 벽의 어느 곳을 부수어야 할지 조사하도록 했다.
"벽을 넘어 침입하는 건 활에 맞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하지만 성벽 아랜 지하 통로가 있었기 때문에 장기의 군사들은 그것을 찾아내 바닥을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존 프랑스 교수, 스완지대학
기독교 주민들은 지하 통로를 방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장기의 위력적인 공격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슬람군은 터널을 지탱하는 나무틀에 불을 질렀다.
나무틀이 불에 타면서 그 위에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하통로 덕분에 장기의 군사들은 빠르게 도시안으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존 프랑스 교수, 스완지대학
도시안으로 들어간 이슬람군은 기독교 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들이 살해됐다.
기욤 드 티레는 에데사 주민들이 공포에 질러 도시 중심에 세워진 요새로 몰려들던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선량한 에데사 주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요새로 몰려들었지만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성문앞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려 하다가 결국 질식사하거나 압사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마침내 에데사를 손에 넣은 장기는 이슬람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기독교 공국을 향한 첫번째 지하드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에데사 점령은 예루살렘 탈환에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이번 성공으로 이슬람인들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지요."
- 타라크 알리, 살라딘 저자
자신감은 얻게 되었지만 장기는 백성들의 신망을 얻지는 못했다.
그는 여전히 포악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노예 한 명이 그에게 하찮은 잘못을 저지르자, 장기는 다음날 아침 그를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던 그 노예는 장기를 먼저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 폴 크로포드 교수
"위대한 장기가 막사에서 자고 있을 때 그 노예가 장기를 찔렸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막지는 못하였다."
- 이븐 알 아티르
3. 제2차 십자군원정의 참패!와 이슬람세계의 단결과 승리!~
누르 알딘의 다마스쿠스를 지배하다!~
에데사를 점령한 지 2년만에 장기는 침상에서 살해되고 만다.
이슬람의 희망도 그와 함께 사라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위업을 계승할 자가 있었다.
장기의 아들로 누르 알 딘으로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통치자였다.
무자비한 투르크족 전사 장기의 아들 누르알딘은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아 이슬람세계를 통일하고 예루살렘을 되찾기를 희망했다.
1145 알레포.
"누르알딘은 신앙심이 매우 깊었지요.
화려한 의상과 사치스런 음식, 여자와 재물을 탐내는 바그다드의 칼리프들과는 달리 유희를 전혀 즐기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절제를 하지 않았으므로 기독교세력에 패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 타라크 알리, 살라딘 저자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을 지켜본 기독교인들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메세지는 간결하고 강력했다.
단결과 지하드.
"누르알딘의 비전은 매우 직설적이었습니다.
'야만인들이 우리의 영토를 짓밟고 있다.
우리는 영토를 되찾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신의 이름으로 성전을 일으켜야 한다.'"
- 타라크 알리, 살라딘 저자
한편 유럽에선 에데사 함락 소식이 전해진다.
1145년 12월 1일 교황 유기니우스3세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기에 이른다.
제2의 십자군 원정을 천명한 것이다.
"제2차 십자군원정은 야심찬 계획으로 시작되었지요.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차지할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십자군들은 1차 십자군들의 위업을 재현할거라고 자신하고 있었지요.
교회에선 십자군 전사들에게 아버지의 위업을 계승할 것을 설교했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교황의 설득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응답했다.
프랑스의 왕 루이7세와 그의 부유한 아내 아퀴테네 엘리우네르였다.
"제1차 십자군을 귀족들이 이끈데 이어
이번에는 프랑스의 왕 루이7세가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3년간 자리를 비우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원정에 나선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죠."
- 조나단 필립스 박사
신앙심이 매우 깊은 루이7세는 에데사를 재탈환하고
십자군 영토를 확장해 제1차 십자군원정을 계승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의 경험이 전혀 없었고 타고난 군지도자도 아니었다.
1147년 5월, 3만 명 이상의 제2차 십자군기사들이 원정길에 오른다.
십자군의 중심엔 300명의 템플기사단이 있었다.
십자군이 프랑스를 떠나 헝가리, 비잔틴제국 등 소아시아에 당도하는데만 5개월이 걸렸다.
그들은 로마 도로를 따라 터어키 중부의 험난한 지형을 통과하고 있었다.
"제2차 십자군은 전략상의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들은 겨울에 지금의 터어키 영토인 아나폴리아 남동부의 산악지대를 통과했습니다.
이 시기엔 식량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이동하기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요한 모든 식량을 직접 운반해야 했습니다.
지금 뒤에 보이는 것처럼 높은 산이 많이 있고 길이 좁아서 짐을 실은 동물들도 자꾸만 쓰러지곤 했습니다."
- 존 프랑스 교수
2차 십자군의 문제는 원정로를 잘못 택한 것 뿐만이 아니었다.
투르크족의 영토를 관통하는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이슬람군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이곳은 산악지대이긴 하지만 외부로 노출된 통로가 많이 있습니다.
투르크군은 이곳에 잠복하며 그들의 취약 부분을 노리고 있었지요.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탄탄한 결속력입니다."
- 존 프랑스 교수
하지만 매서운 추위로 십자군은 점차 결속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중무장한 선대는 점점 본대와 멀어졌고루이와 엘레오노르를 태운 마차는 점점 늦어져서 적에게 노출되었다.
투르크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독교 역사학자 기욤 드 티레는 이 상황을 신의 형벌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우리 군대를 공격했다.
갑작스런 투르크군의 공격에 우리 군대는 힘없이 무너졌다.
이교도의 승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
우리 군사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날 프랑크족의 영광스런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루이와 엘레오노르는 몸을 피했지만 수천 명의 군사들은 목숨을 잃었다.
사태 수습을 위해 루이는 군사통수권을 템플기사단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십자군 전사들은 1차 원정에서 차지한 안티오크에서 행군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2만으로 감소한 십자군은 이미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누르알딘의 군대와 대치했다.
루이는 에데사를 탈환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다마스쿠스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곳은 누르 알 딘도 오랫동안 노려왔던 도시였다.
문제는 누가 먼저 차지하냐는 것이었다.1148년 루이가 먼저 공격을 시도한다.
"다마스쿠스의 공격은 누르 알 딘에겐 선전포고의 의미였죠.
그가 알레포에 이어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는다면 두도시를 차지하는 최초의 이슬람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군 공국의 동쪽 변경 전체가 단 한 명의 지도자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 폴 크로포드 교수
한때 다마스쿠스는 십자군과 동맹관계였지만
최근엔 적대적으로 변해 있었다.
"지금껏 아무도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마스쿠스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마스쿠스 사람들도 그들의 집과 재산과 가족을 지키고 싶어했습니다."
- 타에프 엘 아즈하리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다마스쿠스의 군주는 알데포의 군주
누르 알딘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독립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도시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들은 프랑크족 십자군에 대항해 이슬람 도시를 지켜내고자 했습니다.
모두들 신앙을 위해 싸우다가 천국에 갈 각오가 되어 있었지요."
- 타에프 엘 아즈하리박사, 카이로 헬완대학
그들의 목숨을 건 항쟁을 이끄는 지도자가 있었으니 이른한 살의 율법학자 알 핀달라위였다.
다마스쿠스에선 지금까지도 그의 무용담이 회자된다.
카페에선 한 이야기꾼이 그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사악한 십자군 병사들은 다마스쿠스를 차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5만의 보병과 기병대가 우리 도시로 밀려왔고 우리 주민들은 맞서 싸웠다.
성벽 가까이 과수원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늙은 율법학자 알 핀달라위는 전쟁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그는 전쟁터에 달려나와 마치 신이 내린 전사처럼 기독교인들을 무찔렀다.
그가 말했다. '내 목숨은 이미 신에게 맡겼다.'
하지만 밤새 공포스런 전투에 시달린 주민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말았다.
혈투 끝에 이슬람군은 십자군을 제압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시 성벽 가까이까지 쳐들어왔다.
알 핀달라위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지전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싸움을 계속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도성 근처에서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도성 근처 과수원에서 벌어진 며칠간의 전투에서 수천 명의 이슬람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립을 주장하던 다마스쿠스 주민들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누르알딘에게 지원군을 요청한다.
마침내 누르 알 딘은 기다리던 기회를 얻었지만, 루이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누르알딘과 대결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다마스쿠스를 포기한다면 치욕을 당하게 되겠지만, 그들과 대결한다고 해도 질 게 뻔했죠.
결국 그들은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지요.
도시 포위 진영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후퇴하기로 한 것입니다.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죠."
- 존 프랑스 교수
루이는 회복할 수 없는 치욕을 안고 유럽으로 돌아간다.
드높은 희망을 품고 시작된 제2차 십자군원정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난다.
루이가 예루살렘에 발길을 닿지도 못하고 돌아가자, 이슬람세력은 더욱 강력히 단결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상황을 개탄한다.
"그들은 포위를 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결과 성지를 지키는 병사들은 더욱 줄어들었다 .
이때부터 동방의 기독교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 기욤 드 티레
"2차 원정의 실패로 동방의 세계는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신의 가호로 승리를 얻었다며 기뻐했죠.
1차 원정 당시 십자군 대군이 몰려왔을 때 이슬람인들은 뼈아픈 패배를 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왕이 이끄는 군대에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유럽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이죠.
이슬람세력은 동방에서 기독교세력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되었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제2차 원정의 실패로 누르 알 딘은 보다 쉽게 다마스쿠스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위협과 설득을 통해 자신의 영토에 통합될 것을 설득했다.
그는 오직 단합된 이슬람의 힘만이 십자군 영토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마스쿠스는 그의 끝없는 설득에 결국 손을 들었다.
1154년 4월. 마침내 누르 알딘이 입성한다.
"모두들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기쁨에 들떴다.
부자와 가난한 자, 귀족과 상인들이 모두 나와 그의 장수를 기원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승리를 자신했다."
- 이븐 알 아티르의 기록 중
"주민들은 쌀과 꽃잎을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고
그의 용기를 찬양하며 모두들 행복해 했습니다.
누르 알딘은 모든 아랍인들이 한민족이며
하나로 뭉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최초의 지도자였습니다."
- 타라크 알리, 살라딘 저자
"사상 처음으로 이슬람계에 강력한 두도시가 한사람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지하드를 일으켜 기독교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 조나단 필립스 박사
에데사, 알레포, 다마스쿠스 등
이제 십자군원정의 동쪽 변경지역은 모두 누르알딘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마지막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올가미를 더욱 죄어야 했다.
기독교 영토를 완전히 포위하려면 남쪽의 부유한 영토 이집트가 필요했다.
4. 이슬람의 신화적 인물 살라딘,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하다!~
1160년 이슬람을 통일한 누르알딘의 목표는 십자군 왕국을 완전히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미 시리아를 손에 넣은 그는 이집트와 독립적인 수도 카이로를 원했다.
"당시 카이로는 무기력한 남편을 둔 젊고 이쁜 아내에 비유할 수 있죠.
누르 알딘이 기독교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선 이곳을 먼저 손에 넣어야 했습니다.
카이로를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십자군에게 선수를 빼앗길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 타라크 알리, 살라딘 저자
십자군도 카이로를 노리고 있던 중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부유한 지역 이집트는 1160년 당시 모든 세력의 목표물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독립을 원했다.
이슬람의 한 종파인 시아파의 거점으로써
수니파세력의 지도자 누르 알딘을 기독교세력만큼이나 적대했다.
하지만 1168년 십자군이 저지른 치명적 실수로 인해 누르 알딘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십자군 병사들이 이집트 부근의 카이로 지역에서 시아파 이슬람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것이다.
"카이로 지도부는 항복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이 그런 일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쉽게 도시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만행 소식을 듣자 그들은 다시 항쟁을 결심했다.
결국 이집트세력들은 누르 알딘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 타라크 알리, 살라딘 저자
마침내 기다리던 전갈을 받은 누르 알딘은
그의 부하 중 가장 유능하고 야심에 찬 살라딘을 카이로로 급파한다.
이슬람세계에서 살라딘은 신화적인 인물이다.
살라딘의 절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인 바하 알딘에 의해 살라딘의 생애는 재창조되었다.
바하 알 딘은 살라딘의 열렬한 숭배자이기도 했다.
"나는 위대한 영웅 살라딘의 숭고한 무용담을 가감없이 진실되게 기록했다."
- 바하 알딘의 기록 중
마치 중세의 보도관처럼 그는 살라딘의 무용담을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살라딘은 출정하는 순간부터 지하드를 위해서가 아니면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 바하 알딘의 기록 중
살라딘은 누르 알딘과 마찬가지로 십자군을 몰아내기 위해 이집트와 시라아 모두를 원했다.
하지만 직접 그곳을 통치한다는 건 누르 알딘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먼저 그는 이집트 지도자들의 손에서 영토를 빼앗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참 희한하게도 살라딘이 권력을 잡아가는 동안
그에게 방해가 될 수 있는 이집트의 지도자들이 시기적절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살라딘과 연관이 있다는 의심을 낳았죠.
하지만 그들의 사인에 공통점이 없어 사실을 증명할 수 없지만요."
- 폴 크로포드 교수
1169년말 경쟁자들의 시기적절한 죽음 덕분에 살라딘은 이집트의 모든 영토를 지배하게 되어,
그의 주인 누르 알딘과 맞먹는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누르 알딘은 종종 살라딘을 야심가라고 칭했지요.
그는 살라딘의 반역을 처벌하고 싶어 했습니다."
- 타에프 엘 아즈하리 박사
5년후 반역을 저지른 살라딘을 제거하기도 전에 누르 알딘은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는다.
당시 그는 쉰일곱 살이었다.
살라딘은 누르 알딘의 거점도시인 알데포로 달려왔지만
이미 후계자가 발표된 뒤였다.
시리아의 새지도자가 된 누르 알딘의 아들 알 사이흐는 열두 살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살라딘의 군대를 알데포의 도성 밖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이어서 대담한 계획을 시도한다.
종교원리주의자 무사들에게 살라딘의 제거를 명령한 것이다.
암살을 뜻하는 어세신이라는 단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어세신이라는 단어는 마리화나를 뜻하는 헤시시란 단어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누군가를 암살하려면 마리화나에 의지하지 않고는 힘들었기 때문에 이런 유례가 생긴 거죠."
- 타라크 알리
암살자들은 도성밖에 있는 살라딘의 막사로 숨어들어갔다.
그들은 호위병 한 명을 죽이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살라딘 경미한 부상만 입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살라딘 암살에 성공했다면 거대한 혼란이 야기되었을 겁니다.
암살자들이 그의 막사에 침입했다는 사실만으로 살라딘은 큰충격을 받았지요."
- 타라크 알리
일 년후 알라딘은 알데포 점령을 목적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번엔 보안에 철저를 기했다.
사방에 호위병을 배치하고 석회와 잿가루를 뿌려 침입자의 발자욱을 재고자 했다.
하지만 불가사의하게도 암살자들은 다시 한 번 살라딘의 막사에 침입한다.
그들은 살라딘의 베개옆에 과자를 두고 간다.
그리고 물러가지 않으면 다음에 기필코 살라딘을 죽이겠다는 경고문도 놓아두고 갔다.
살라딘은 또 다시 알레포에서 물러난다.
마침내 기회를 잡기까지 7년이 흘렸다.
1181년, 그의 경쟁자 알 사이흐가 열아홉 살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앞서간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그도 역시 의문을 죽음을 맞았다.
"살라딘이 무자비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권력을 잡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알 사이흐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 타라크 알리
시리아와 이집트는 이제 살라딘의 차지였다.
80년 동안의 이슬람 분열이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살라딘은 십자군의 영토를 완전히 포위하고 기독교세력을 위협했습니다.
이슬람세력에 포위된 기독교세력들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동안 그들이 염려했던 상황이 현실로 이어졌으니까요."
- 톰 에스브리지 박사
전쟁과 위협을 통해 이슬람세력을 통일한 살라딘은 이제 기독교세력이 차지한 성지를 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