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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을 말하기 전에......
낙동강은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태백산에서 태어난 낙동강은 음양의 부부라고 할 수 있는 남강과 낙동정맥, 낙남정맥으로 이루어졌다. 낙동강을 젖줄로 큰 영남은 이 겨레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산천에 일부다. 그러므로 이 땅의 산천을 알고 있어야 비로소 영남의 산천과 그 산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질과 기질의 옷을 입은 문화를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인문지리나 풍토학에서도 인간의 역사나 문화는 자연환경과 풍토의 산물이라고 하고 있다. 서양과 우리는 혈통과 함께 풍토가 다르므로 문화가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그런 문화의 차이를 알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산천을 보는 눈과 귀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사회의 여러 운동이 그러하듯 어느 운동보다 더 생태적이어야 할 환경운동이 운동가의 선동역량에 따라 사회에 나타나며 대다수 운동이 민중들의 삶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사회분위기 따라 한탕주의적인 소란으로 끝나고 있는 것은 운동의 전략이나 전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운동가 자신의 철학부재, 또는 잘못된 철학정신으로 인하여 이 땅의 민중들의 정서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운동가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운동의 풍토화가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사람과 산천을 한 몸”으로 보았기 때문에 정신이 곧 산과 강이었고 의식주가 생태였던 삶에서
풍수지리사상을 만들었다.
선조들은 우주순환원리를 음양의 상대적 변화운동으로 파악하고, 그런 음양운동에 작용하는 다섯가지 원소인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의 성질이 작용하는 그것들의 운동 특성을 이해하고,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한” 속에 생성소멸(生成消滅)하는 이법을 이치로 풀어낸 음양오행철학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음양오행철학은 생명사상이며 풍수지리사상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정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을 만들게 했다. 동양은 철학으로 인간정신의 본처인 우주정신으로 귀의하기 위하여 사유를 통해 물질세계를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절대 자아(自我)에 이르는 직관을 발전시켜 철학을 완성케 하고, 서양은 물질로 이루어진 우주의 몸에 들기 위해 물질의 구조를 분석하고 규명하여 과학산물을 만들어 인간생활을 발전시키기 위해 객관의 세계관을 갖도록 하였다. 동양의 철학정신이 생명(정신)에 있다면 서양철학 정신은 분석(물질=죽임)에 있다. 그와 같은 철학을 갖고 있는 서양에서 태어난 운동이 아무리 객관적인 논리를 갖고 있어도 생명운동은 될 수 없다.
몇 해 전 어느 자리에서 만났던 어떤 분은 우리민족을 백의민족, 즉 흰옷을 입은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염색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흰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는데, 아마 그분은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감물, 쪽빛하늘, 쪽물 들이는 쪽을 모르고 있었던가보다.
말이 나온 김에 한번 유쾌한 풀이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우리민족을 백의(白衣) 또는 배달민족이라고 칭하는 것은 우리 민족을 낳은 환인, 환웅, 환검으로 부르는 세분 할아버지의 머리글인 “환”은 환하다에서 나온 말이고 “환”은 “밝”되니 밝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 흰색은 모든 색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머니(모성)의 모든 것이며, 생태정신에서는 종의 차별이나 어떤 구별도 없는 오직 생명 그 자체로 귀한자리인 자궁을 말하고 있다. 또 이 땅의 등뼈인 백두대간의 머리글인 “백”도 백의(白衣)와 같은 밝음을 뜻하니 즉 백두란 밝은 머리 또는 흰머리가 되므로 우리 민족을 일러 밝은 정신을 갖고 있는 밝은 땅의 사람이라 하는 것이고 땅을 옷으로 보면 백의가 된다. 그러므로 백의민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배달에서도 “배”는 “밝”이 되고 “달”은 산(山)의 고어이므로 밝산이니 곧 밝은 땅을 뜻한다.
한때 우리산천의 소나무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소나무는 망국의 나무다”라는 말도 서양에서 공부하고 들어온 자칭 지식인 입에서 나왔던 말 때문에 일어났던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여기서 환경운동의 시조라고 하는 레이철 카슨이 살았던 1962년 미국으로 가보자. “지구의 어떤 동식물도 인간의 생존보다 중요하지 않다. 자연은 과학이 정복하고 이용해야할 대상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당시 미국은 농약인 DDT의 남용으로 인해 자연은 물론이고 사람까지도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당시 50세였던 레이철 카슨은 몸속에 든 암과 투쟁하며 DDT의 소식을 친구로부터 듣고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저서인「침묵의 봄」에서 “사람이 환경을 보호하지 못하면 환경도 사람을 해친다.”라고 했는데, 그 당시 그녀의 책은 미국사회에 큰 반응을 일으켰고 이에 놀란 미국정부는 환경보호청(EPA)을 만들었다. 훗날 카슨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정부로부터 환경운동의 시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레이철 카슨” 그녀는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자신에 몸에 든 암과 투쟁하며 정부를 업은 자본과 투쟁한 것은 안팎으로 적을 두고 있었는데 결코 굴하지 않고 오늘날의 환경운동 씨를 뿌린 맹렬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인 “환경보호”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녀도 어쩔 수 없는 미국인이며 미국이 가져온 서구철학을 정신으로 갖고 있던 서양인이었다.
한 예로 18세기 미국에서 태어난 시인이며 사상가였던 랄프월드 에머슨(1803년 생)은 “너 밖에서 너 자신을 찾지 말라”라는 다분히 동양적인 사유가 깃든 초월주의 사상으로 이성보다 직관을 내세워 서구합리주의 막다른 골목에서 서광의 빛을 던졌지만, 서양철학의 태생적 한계와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에 대한 인간우위의 정신을 심어 온 지구마을의 산천과 인간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던 것을 볼 때, 그들 사회에서 일어난 사상과 운동은 그들의 풍토와 사람살이에 맞는지는 몰라도 우리에게는 잘 포장된 상품일 뿐이다.
그런 상품의 포장지를 뜯고 나면 그 내용물에 니체의 자연주의와 카슨의 환경이 있으며 에머슨의 사상도 있다. 그들의 배경에는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인 대지가 펼쳐져 있고 그곳에 살았던 자연이며 사람이었던 우리 민족의 핏줄인 원주민들과 그들을 통솔했던 추장 시애틀의 “대지는 내 어머니이다.”라는 말도 바람과 함께 불고 있을 것이다.
카슨의 환경보호라는 말에는 이미 동양철학의 대상이었던 자연 “스스로 그러한”정신은 없었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보면 생명이나 생태계를 말하고자 할 때 바로 이 땅의 분명한 계절, 먼동과 저녁노을 그리고 해와 달, 비와 눈과 바람이 함께 하여 사람과 한 몸이 된 짙은 흙냄새가 나는 생명이 깃든 풍수지리사상을 눈과 귀로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풍수지리사상은 우리 민족이 한반도 땅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사상이었다.
18세기인 1769년 조선시대 사람인 여암 신경준은 예부터 내려오는 “여지편람(與地便覽)”을 연구 보완하여 「산경표」를 발표했는데, 이 「산경표」에서는 별다른 설명 없이 여지편람의 낙남정간(남강의 남쪽울타리)을 낙남정맥으로 고쳤다.
산경표는 이 땅의 풍수지리사상이 짙게 배어있는 산수도표로서 백두산이 아시아 대륙에 뿌리박고 한반도에 큰 줄기를 일으켜
1 정간과 13 정맥의 가지를 치고, 물은 큰 줄기를 울타리로 삼아 흘러 대간은 이 땅을 흐르는 모든 물의 분수령이며 지방마다
다른 기질을 뿌리고 키운 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사상에서 선조들은 이 땅에 삼영산(三靈山)과 세 곳의 삼태극(三太極)을 말하고 있다.
삼영산(백두산, 태백산, 한라산)은 제 스스로 지혜가 있어 맑고 밝으며 우리 민족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혈구다. 그 역할을 보면 음양에서 땅을 어머니로 보는데 백두산이 머리요, 태백산은 생명지인 자궁이며 한라산은 발이 된다. 영산에는 생명을 낳고 키울 수 있는 양수(자궁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천지(백두산), 천황(황지의 옛 이름:태백산), 백록담(한라산)이며 다른 민족의 기운이 성하지 못하는 곳이다.
이 땅의 많은 산(山)을 명산대찰이라고 하는데 명산(明山)이란 지혜가 없었거나, 있어도 스스로 열지 못하기 때문에 석가모니의 불법으로 지혜를 열어 주었다고 하여 개산(開山)이라고 말하는데서 알 수 있다. 물론 태백산에는 태백산 정암사와 부석사가 있다. 그러나 적멸보궁인 정암사는 자장율사가 태백산에 들었다가 불사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함백산 품인 지금의 정선 땅 목골에 절을 짓고는 이름을 태백산 정암사라고 하였고, 부석사는 영주 땅 봉황산 품에 있는 절(寺)로 역시 태백산 부석사라고 칭하였을 뿐이다.
태백을 자궁으로 보는 것은 조선조의 토정 이지함이나 「격암유록」을 쓴 남사고는 태백을 일러 “천년병화 불입지요, 활인지요”라 했고, 민간에서 전해오는 삼재(三災)가 들지 못하는 십승지지는 태백산을 기점으로 북쪽에는 한 곳도 없고 모두 태백산 남쪽으로 있는데 태백산 주변에는 세 곳이 몰려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도참서」에서는 양백지간(兩百枝幹)을 태백산과 소백산이라 하지만 보통 태백과 함백을 양백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그 사이를 흐르는 내(川)를 소도천 이라 하고, 땅은 소도(삼한시대의 신성불가침 지역)라고 한다.
삼태극이란 고대의 우리 태극사상으로서 천지인(天地人)을 뜻하는 삼원색(빨강, 노랑, 파랑)을 일원 안에 그려 넣은 것으로 삼계 평등사상이 있다. 물길로는 삼수령이 되는데 백두산(압록강, 두만강, 송화강), 태백산(낙동강, 한강, 오십천)의 피재와 전북의 경계에 솟아있는 장안산(금강, 남강, 섬진강)이며 여타 작은 정맥의 삼수령은 격으로 논(論) 하지 않는다.
이 땅에 풍수사상이 잠시 묘터나 집터를 보는 지관들의 삶에 숨어 있었던 것은 일제 36년이 열렸던 때였다. 1903년 고또 분지로는 한반도 땅속의 지질맥을 따라 산줄기를 긋고 “한반도의 지질 구조”를 발표하면서 한반도 땅의 모습이 허리 구부린 노인과 같다고 하거나 토끼에 비유했는데, 그 당시 육당 최남선은 “맹호형국론”으로 공박했으나 토끼에 밀리게 된다. 1908년 야스 쇼에이의 “한국지리”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산맥구조가 오차가 많아서 일본에 전문대가의 새로운 산맥을 쓰노라」라는 이유서와 함께 예의 그 “신식” 산맥은 우리 교과서에 실리게 된다. 고또 분지로의 산맥에서는 이 땅의 백두대간을 마천령, 태백, 소백산맥의 세 조각으로 나누어 등뼈 자리에서 박탈하고 지금의 낙동강 동쪽 울타리인 낙동정맥을 포함시켜 태백산맥으로 부르며 친절하게도 태백산맥은 한반도 땅을 동서로 나눈다고 했다.
일제 36년이 지나고 해방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이 땅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 “신식”산맥인 광주, 노령, 차령산맥으로 부르고 이 땅의 산천을 음․양의 부부라고 할 수 있는 산과 강을 이혼시켜버리고 있으며 이 땅의 학교에서는 아직도 산맥이 가르쳐지고 있다.
“옛말에 산천을 모르는 자는 문화를 안다고 하지 말라”라고 했다.
여기서 산천은 서양 물리학의 산천이 아니라 우리 생명정신의 산천이다. 확실히 산경표에 이 땅의 풍수지리사상이 배어 있고 음양오행으로 풀어 볼 지혜가 있으며 이 민족의 역사와 미래를 볼 수 있는 시간여행 안내서이다.
산경표는 “산은 대륙에 뿌리내리고 큰 줄기 일으켜 해안으로 뻗어나가며 강은 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그 가지를 대륙으로 뻗어가네”라는 역상구조(逆相構造)가 드러나고 “산은 울타리를 치고 물을 제 품에 가두고 물은 산을 넘지 않네.
그러므로 산은 사람을 가두고, 물은 사람을 어울리게 하여 산이 이질적 문화를 키우고 있는 동안 물은 동질성을 키우네”라는 풍수사상이 녹아든 산수도표이다.
이 도표에서 우리는 이 땅의 선조들이 말했던 “산천은 기질을 낳고 인걸은 지령에 있다”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신경준의 「산경표」와 일본인 고또 분지로의 산맥 그림은 동․서양의 정신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두 일본인에 의해 완성된 산맥정신은 일본인들이 이 땅의 지하자원을 빼앗아 가기 위한 것이고 그들이 박은 쇠침(단혈주)은 아시아 대륙의 기운을 한반도 땅을 거쳐 일본 땅 후지산으로 모이게 하기 위한 풍수비법이었지만 경상도 땅에는 팥고물이라도 떨어졌으니 할 말은 없다. 또 그들의 행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땅의 대간과 정맥들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윤년제 농사에 땅이 살아나듯 어느 날부터 산경표에 깃든 우리 정신이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우리는 「산경표」에서 많은 풍수사상을 배웠으나 또 다른 의문도 갖게 된다.
백두대간과 함께 1 정간과 13 정맥의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북한 쪽은 접어두고 남쪽 땅의 한강(한북정맥, 한남정맥)과 금강(금북정맥, 금남정맥)은 각기 남북 울타리를 만들었으나 영남 땅의 남쪽을 서(西)에서 동(東)으로 흐르는 약 180km가 되는 남강의 북쪽 울타리는 이름조차 없다. 또 호남의 광주와 나주벌을 적시는 영산강의 서쪽 울타리와 섬진강의 동쪽 울타리도 이름이 없다.
왜 신경준은 산경표에서 낙남정간(落南正幹)을 낙남정맥으로 한 격 낮추어 1 대간 1 정간 13 정맥으로 했을까? 어쩌면 13 정맥의 “13” 이 갖고 있는 의미를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은 산경표와는 조금 다르지만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말한 낙동강발원지와 한강발원지에서도 가질 수 있다. 낙동강발원지를 황지라고 하면서 “주변 여러 곳의 물줄기와 함께”라고 했던 다소 애매한 말이나, 한강발원지를 오대산 우퉁수라고 했는데 태백산 금대봉의 고목나무샘이 오대산 우퉁수보다 32km나 먼 물길에 대한 설명이 없다.(1986년쯤 정신문화원에 다니던 이형석 씨에 의해 태백산 금대봉 고목나무 샘이 기존의 발원지라고 알려졌던 오대산 우퉁수보다 32km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강발원지를 바꿔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낙동강발원지인 황지(黃池)도 황지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너덜샘으로 발표했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정확도가 매우 높다는 것이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한다면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지지」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 의문을 우리 산천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풍수지리 사상으로 풀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발원지 이야기를 하고 산경표로 들어가보자.
음양( 陰陽 )에서 땅(土)을 음(陰)인 여자로 본다고 했다. 그것은 어머니와 같은 덕성과 생명의 창조성 때문이다. 태백은 이 땅의 등뼈인 백두대간이 태백산으로 들어오면서 새을(乙) 자의 지형이 이루어지는데, 함백산과 태백산을 음양의 부부로 해서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 있는 동아리 형국이다. 다만 하늘내(天川)가 흘러가는 남쪽인 동점 구문소만 낮은 곳이다. 그러므로 천의봉(매봉)과 구봉사이에 있는 피재(해발 930m)에서 태어난 낙동정맥과 대간사이는 자궁이라 할 수 있고, 그 깊은 곳에 있는 황지(天潢 = 황지의 옛 이름)는 자궁에 고여 있는 양수라고 할 수 있다. 양수의 길이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한강발원지는 대간의 서쪽인 금대봉 창죽동에 있는데, 여기서 자궁이며 승지인 황지로 오기 위해서는 대간의 주능이며 삼수령 또는 삼태극 형태가 이루어지는 피재를 넘어야 한다. 황지가 외부의 어떤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될 자궁이라고 한다면 발원지의 상징성을 갖고 있는 곳을 의도적으로 숨겨야 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남쪽의 큰 강이라고 할 수 있는 발원지가 한 지역에 같이 모여 있다면 다른 이(외세)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고 그것은 곧 위협을 뜻하기 때문에 생명지로서의 황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신경준의 산경표에 “13”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13이란 10+3으로 10이란 무극제(무극, 황극, 태극), 기독교의 십(十) 자가, 불교의 만(卍) 자, 나치의 철십자, 음시대의 십천(十天) 자, 1+2+3+4=10 생수의 합, 여자의 질구(씨의 합이 되는 씹구멍), 음양의 한해 자란 성장 음(陰)을 말한다. 또 3을 풀어보자 3이란 오행의 나무(木) 방위의 동쪽(東), 색은 청(靑), 짐승은 토끼(卯), 계절은 봄(春), 음양의 양(陽),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길 3 (우리 민족의 9夷, 삼신상제, 삼한, 삼국, 후삼국, 3번의 통일 민족, 삼십삼인의 독립선언, 일본치하 36년, 군부정권 3, 삼 김씨시대 )을 말한다. 13수를 풀어보면 예수의 13번째 제자, 하루 오전 12시 지난 13시, 12달 뒤의 새해, 서양천문 12궁이 끝나고 뒤돌아온 첫 궁, 서양인들이 기피하는 수 13, 미국연방의 처음 13개주, 황극수 13, 우리민족의 열매수 13,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의 13 석자(천도교 최제우선사가 옥황상제를 만나 받아 내린 주문)등으로 풀 수 있다.
“13”을 이와 같은 음양오행철학으로 풀어보는 것은 이러한 수(數)와 이름에는 이 땅의 선조들의 우주관, 자연관, 생명관, 미래관이 숨 쉬고 있고 이 숨결을 통해서 후손인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후손의 생명을 염려하고 있었다면 신경 주는 후손인 우리에게 꿈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신경준의 13 정맥의 “13”은 이 땅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열쇠라 할 수 있다.
이런 선조들의 정신을 음미하면서 이 겨레를 이 끌었던 영남으로 들어가 보자. 어쩌면 가야인과 신라인들의 숨소리가 들릴는지 모른다.그런 숨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들의 문(門)이라고 할 수 있는 영남의 영(嶺)과 함께 그들의 젖줄인 낙동강의 이름을 알아보자.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영남지방의 “영(嶺)”, 즉 고개를 문경의 조령이나 소백산의 죽령을 말하는데 아직은 죽령보다 조령을 기준으로 영의 남쪽이므로 영남으로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조령이나 죽령은 삶의 나눔이나 군사 전력상으로는 매우 중요한 고개임에는 틀림없으나 오늘날의 경상남북도인 영남의 북쪽 고개는 되지 않는다. 물론 경남 쪽에서는 북쪽이 되지만 이 땅을 지배했던 실질 세력들이 경북의 사람들이었다면 고개의 남쪽이라는 영남이란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면 이 땅의 동서를 나누며 물줄기와 기질을 나누는 대간의 중요성을 볼 때 대간을 넘는 고개여야 하고 북쪽에 있는 고개라면 단연 태백산의 천령(天 嶺)이라고 할 수 있다.
천령이 있는 태백산은 신라 오악(五岳) 사상에서 북악(北岳)인 주산(主山)이었으며, 신라의 기림왕이나 일성왕이 친히 태백산에 오르거나 멀리서 태백을 향해 제(祭)를 드렸던 산이고, 영남문화의 음양(陰陽) 기운인 낙동강과 낙동 정맥이 태어나는 산이다.
또 대간의 생명지이며 자궁이기도 하고 남쪽의 모든 산과 강의 등마루라고 할 수 있다. 이 산의 주봉인 만경대와 부쇠봉 사이로
넘는 천령(해발 1,540m)은 경북 봉화에서 강원도 삼척(예전에는 태백 지방이 삼척군이었다)으로 넘어 다녔던 재다.
그러므로 역사적 배경이나 풍수지리사상으로 보아도 태백산 천령(하늘재)이 기준이어야 영남지방이란 지방명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낙동강 이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낙동강은 가락(가야)의 동쪽에 있는 강이라고 하여 가락의 “락”과 동쪽의 “동”을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물론 가락이 일어난 김해는 백두대간에서 멀리 떨어져 대간의 정신과는 약간 다른 산악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이 땅의 사람들이 풍수지리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쩐지?이다.
‘낙동’이란 이 땅의 중심선을 백두대간이라고 보면 대간의 동쪽에 떨어지는 물줄기가 모여 흐르는 강이기 때문에 낙동강으로 부른다고 해야 이해가 된다. 또 낙동강이 음양의 오누이인 낙동 정맥의 “낙동”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태백에는 낙동강의 이름과 관계되는 전설(태백문화원 김강산 씨에 의해 발굴)이 있다. 낙동강이 태어나는 태백시 동점동 장광터는 황지, 장성에서 흐르는 하늘내(陰水)가 빠져나오는 동점 구문소 앞인데 여기서 낙동 정맥의 최고봉인 백병산(해발 1,254.2M)에서 흘러오는 철암천(陽水)이 만나 질펀한 유희 끝에 낙동강을 낳은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구문소 석벽이 뚫어지기 전 안쪽에는 하늘내의 물이 모인 큰 소(沼)가 있어 여기에 백룡이 살고, 석벽의 밖은 철암천이 모여 큰 소를 이루었는데 이 소(沼)에는 청룡이 살았다. 두 용은 남천의 주도권을 놓고 늘 싸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백룡이 꾀를 내어 석벽 아래로 구멍을 내놓고 이튿날 다시 싸우다가 지는 척하고 있는데 청룡은 자기 힘에 굴복한 줄 알고 방심하고 있었다. 이때 구멍을 통해 나간 백룡은 청룡을 뒤에서 덮쳐 이기고 그 여세를 몰아 장광터 앞의 산 등 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용이 올라간 산이 용우이산이고 등날을 용(龍)의 등날이라고 한다.
풍수적으로 보면 함백산이 가지 친 연화봉 끝자락에 있는 구문소 석벽은 여자의 처녀막이었고 이 석벽이 뚫어졌다는 것은 처녀막이 뚫어졌다는 것이니 곧 처녀에서 어머니로 되었다는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남천은 낙동강으로 태어났다.
다시 전설로 돌아가 백룡(음)은 하늘로 올라가고 청룡(양)은 땅에 남아있게 되었으니 풍수사상에서 청룡은 좌청룡이라고 하고
“청(靑)”은 동쪽을 뜻하므로 낙동이란 이름이 태어난다.
물론 전설이란 사실관계보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지만 이것이다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가락의 동쪽이니 낙동이라 하는 등식은 같은 지방에서 일어난 신라(경주는 낙동수계는 아님)가 오백 년 조금 못된 그것도 경남 지방을 무대로 했던 가락에 비해 1000년 가까운 세월을 지금의 한반도 땅의 2/3를 지배했던 시간이나 공간으로 봐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과연 역사란 단지 기록되었다 하여 진실이다라는 진위를 논하기 전에 낙동강에 의해 핀 영남 문화가 곧 이 겨레의 문화였다는
역사를 인식하고 자긍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잘 있거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고 하며 청나라에 끌려갔던 김상용
같은 이의 기개가 영남인의 정신이라면 전설이 갖고 있는 상징성과 함께 어울려야 비로소 영남 문화가 살아있게 된다.
조선 성종 때 사람인 여헌 장형광이 “산과 물이 어울려 기세가 화합하고 정기와 맑음이 모여 대대로 인물이 태어났다”라고
자랑한 선산은 고려 말 선죽교 돌다리에서 피 흔적을 남기고 죽어간 포은 정몽주와 함께 영남 선비를 기개를 더 높인 야은
길재의 고향이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네 /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고 읆었던
길재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고향으로 내려와 많은 후학을 가르쳐 뒷날 조선에서 꽃이 핀 영남 학문의
씨를 뿌린 대학자이기도 하다. 또 선산은 신라 불교의 초석을 놓았다는 아도화상이 머슴으로 살았던 곳이고 유교의 학문이
뿌려진 곳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불교와 유교가 이곳에서 피었다고 할 수 있는데 여헌 장형광의 자랑은 그럴 만하다. 선산을 안고 있는 영남지방을 풍수사상으로 보면 백두대간을 머리에 베고 낙동정맥과 낙남정맥을 양팔 삼아 낙동강 젖줄을 명당수로 큰 지방이다. 이런 터에 선산은 한 작은 고을일 뿐이다. 그러므로 더 큰 문화의 줄기를 찾기 위해서는 초기 영남문화의 씨를 뿌린 가야와 신라를 만나러 가자!
가야와 신라는 애초부터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았다고 보는데 가야는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하는 어업과 약간의 농사를 했던 부족으로 생각되고 신라는 농경을 하고 있던 부족이 원주민이었고 수렵민들은 나중에 합류된 부족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그 수렵민들은 전통 산악부족으로서 백두대간을 타고 남하한 부족으로 볼 수 있다. 다시 가야로 들어가 보자. 가야를 해양부족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낙남정맥의 끝자락에 안겨있는 김해라는 지명과 김수로왕의 이름, 그리고 그의 부인이었던 허황옥의 행적에서 알 수 있다. 김해의 “김”은 금(金)이 되고 금은 “해(太陽)”가 되니 광명을 뜻하고 김해의 “해(海)”는 바다를 뜻하니 바로 광명바다 즉 아침바다를 뜻한다. 김수로왕이 태어난 구지봉의 “구(龜)”는 거북을 뜻하며 거북은 바다에 사는 짐승이다. 또한 왕비 허황옥은 바닷길을 통해 김해로 들어왔다. 김해를 오행으로 풀어보면 “김(金)”은 쇠가 되고 방향은 서방(西方)이며 닭(酉)이 되므로 아침바다에서 일어나
문명을 열었다는 이야기가 담겨있고 철기문화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가야 문화권에 들었던 경남지방의 산 이름에 바다를 뜻하는 “어(魚)”자가 나타나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신라가 일어난 지금의 경주는 낙동정맥의 중하류 분지에 있는 고장으로 낙동정맥에서 발원하여 포항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형산강 상류에 있다. 원래의 이름은 새벌이라 하였으니 “새”는 샛바람 즉 동풍을 뜻하는 “샛”에서 나온 발음으로 아침을 뜻하고 “벌”은 들과 같은 의미이므로 곧 아침 벌이며 문명을 여는 벌이란 뜻이다.
사실 신라가 일어난 새벌도 중요하지만 낙동정맥의 고현산에서 가지를 친 토함산(吐咸山) 지맥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토함산 지맥은 동북으로 뻗어나가 포항 구룡포에 금오산을 올리고는 호미 곶에서 멈추는데 이 지맥 때문에 형산강물길이 동북쪽으로 흘러 포항 영일만으로 빠져들게 된다. 호미 곶은 한반도에서 가장 빨리 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토함산과 금오산의 의미를 풀어 보자.
“토”는 토한다 또는 뱉어낸다는 뜻이고 “함”은 모두라고 했으니 ‘모두 뱉어 낸다’라고 할 수 있고 “토”는 십이지에서 묘(卯)가 되며 “묘”는 토끼가 되고 토끼는 동쪽 짐승을 뜻하므로 즉 새벌 분지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는 의미가 있다. 금오산의 “금오”는 ‘해를 먹고사는 짐승’이라 하며 금오자체가 태양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토함이 뱉어내는 것은 금오가 호미 곶에서 빨아들인 광명기운을 새 벌에 뱉어내는 것이다. 신라는 남산을 금오산으로 이름 붙이고 새벌을 금성 즉 해(太陽)의 성으로 바꾼다. 그건 형산강이 영일만으로 빠지고 영일만은 북쪽을 향해 팔을 벌리고 생명 기운을 담는데 이 충만한 생명기운은 차갑기까지 하여 웬만한 열기로는
성장시킬 수 없으므로 풍수비법 중 하나인 이름으로 열기를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지금의 지방명이 옛날과는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남의 주산인 태백산도 대여산, 계수산, 작약산에서 변천되어 왔는데 말은 다르지만 그 뜻하는 의미가 같다. 지방명에도 같은 정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물줄기와 산줄기를 나무로 비유해 보면 잎이 피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뿌리의 생명수와 잎의 성장수가 각각의 물관을 통해 오르내리고 하듯 물길도 현상과 이면 즉 땅 위와 땅 아래 물길은 반대로 흐르게 되어 있다. 만약 형산강 물길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든가 영일만이 동쪽이나 남쪽으로 벌려져 있다면 신라의 천년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 초기 신라인들은 풍수지리 사상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다.
영남인들을 수렵부족이라고 보는 것은 그들의 탈춤, 큰 억양, 음식, 집단성에 더하여 풍수사상이 매우 철저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영남 땅은 가야의 해양부족과 신라의 산악부족이 다투었던 각축장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가야를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수렵부족에게 전쟁은 일상이었고 전략과 전술의 운용에서 능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원인은 가락의
김해가 낙남정맥의 품에 있었고 남강과 남쪽 바다의 열기는 불기운으로 오행에서 가장 쉽게 소멸하고 마는 특성을 갖고 있는
것도 큰 이유가 된다.
가야와 신라에 의해 뿌려진 영남문화는 두 나라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후 고려와 조선이 태어나고 무대도 다른 지방으로 옮겨 가지만 영남의 성바지(토착성씨)들이 하는 큰기침에 고려와 조선의 하루해가 뜨고 질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그것은 고려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하였고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였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영남인 들이 산천을 보는 눈은 오늘까지도 서로 대립하며 공존하고 있는 호남과 비교에서 알 수 있다. 영남인들의 탈춤과 호남인들의 소리에는 그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남사람들의 탈춤은 수렵의 정신이 담겨 있고 호남사람들의 소리에는 농경의 정신이 담겨 있으며 호남인들의 소리 문화와 음식, 억양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농경부족도 산천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는 아니며 단지 필요요소일 뿐이나 수렵인에게는 절대요소로 작용한다.
호남의 강과 산은 영남과는 매우 다르다. 특히, 금강은 한강과 함께 남북정맥의 울타리를 만들어 오행으로 보면 북(수. 음)은 물이고 남(불. 양)은 불로서 수극화(水剋火)의 상극기운을 불어넣었다. 영남과 호남의 기질차이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영남의 산천에 붙은 이름은 목생화(木生火)라는 상생기운이 넘치게 하였는데 호남은 머리부터 수화상극(水火相剋)의 기운을
불어넣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원래 금강은 전북장수 신무산에서 시작하여 충남과 충북으로 거슬러 올라와 계룡산을 휘돌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전북 군산에서 서해로 빠져드는 강이다. 고려왕조에서 본다면 이 물길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쪽으로 흘러 오르다가 계룡산 북쪽을 지나며 다시 물머리를 서남쪽으로 틀어서 내려가는데 이 형국을 고려왕조를 싫어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풍수적 이유에서 고려의
훈요 10조가 만들어진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풍수사상에 물길은 문화의 동질성을 갖게 한다고 했는데 금강과 섬진강은 그 물길이 서로 다른 도(道)와 공유하고 있지만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과 함께 각각의 하류를 바다에 대고 있어 이 물길들은 동질성보다 이질성을 키운다. 즉, 세 강 모두 저마다의 울타리를 가지고 있으며 같은 호남 지방인 전북과 전남 사이를 지나는 호남정맥 때문에 같은 문화권이라지만 경상남북도를 아우르는
낙동강 같은 동질의 문화는 찾을 수 없다. 즉 영남인과 호남인에게 있어서 기질의 차이는 동질성과 이질성이라고 할 수 있다.
호남인들은 반골기질이 강하다고 한다. 곡식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식량이고 넓은 농경지는 곧 많은 군사를 거느릴 수 있다.
넓고 비옥한 농토는 바로 국력이었고 어느 시대나 비옥한 농토는 착취 대상이었다. 그런 조건을 갖고 있는 호남의 넓은 들은
오히려 그 지방 사람들이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위협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살기 위해 힘을 가진 세력들에 붙는 약삭빠른 사람들과 토착지주들은 힘 있는 세력들에 붙어 다니고,
힘있는 세력들은 그들을 통해 쉽게 식량을 확보할 수 있으니 그들의 뒷배를 봐 줄 수 밖 에 없다. 그러한 일들이 반복하여 일어나니 몇몇 지주들은 전라도 넓은 땅을 차지하고 나머지는 소작인으로 전락하였는데 소작인들의 마누라와 딸은 지주와 힘있는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기 일쑤였다. 그에 대한 반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라도 사람들의 반골기질은 강과 산의 풍수적 요소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것보다 인간적 요소인 사회나 정치환경에 의해서 길러진 표면적 기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라남, 북도를 일컫는 호남지방의 사람살이는 산천의 이질적인 요소와 정치 환경에 의 표면적 기질 가지고는
이해가 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그것은 다른 시각으로 보면 다섯 강줄기의 울타리가 있다는 것은 저마다의 물길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물길은 호남의 넓은 평야에 젖줄로 물 때문에 분쟁이 일어날 소지가 적다. 그리고 호남의 남쪽과 서쪽 바다를 끼고 있는 것은 영남 지방의 동남쪽 바다와 차이가 없지만 바다와 육지 사아에 형성된 갯벌은 풍부한 제3의 식량 보급창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좋은 조건들을 갖고 있는 호남 지방의 사람들이 지난 2500년간을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고 하면 그 원인은 다른 데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호남지방의 “호(湖)”와 호남 땅의 머리에 모자를 씌운 듯 흐르는 금강의
“금(錦)”에 있다. 같은 한반도에 살며 기질의 차이로 부딪히는 영남의 “영(嶺)”은 배산임수의 풍주적인 조건을 갖추었는데 호남지방은 북쪽이라고 할 수 있는 충청도에 호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호(湖)”를 썼다는 것은 싸움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하는 배수진의 형국으로 만들었다. 음양으로 보면 호남의 호와 금강의 금은 모두 “음(陰)”으로서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는 “억음존양(抑陰尊陽)”에 의해 천대받았던 기운이었다. 물을 담고 있는 호수가 없는 지방에 “호(湖)”를 썼다는 것은 어미없는 자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말로는 처녀가 아아를 낳은 형국이다. 그러므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삶에 일대 전환점이 되는 계기가 마련되는데 바로 흐르기만 하던 금강의 대청호가 만들어졌고 그 호수로 인하여 호남 지방은 정상적인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선조들은 그 당시부터 지금의 세상을 미리 보기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금강 이남의 사람들에게 질박한 삶을 살게 하였던 것은 쇠 쟁기를 만들 때 담금질(불에 넣어 두드리고 물에 넣는 행위)하므로서 더욱 단단한 쟁기가 되는 것처럼 어려움을 이길수 있는 정신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바로 우리가 살아 왔던 시대는 동질성의 결집력이 있어야 했던 시대로 태산(민족) 지석(영남)이 필요한 시대였고 앞으로 세상은 저마다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호남의 춘풍세류(春風細柳-버드나무 가지는 잔바람에도 흔들리기 때문에 원목은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가 필요한 시대라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지방 사람들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충청도와 경기도 그리고 강원도 지방은 이 민족을 위해서 아무런 역할이 없었다고 한다면 설득력이 없다. 충청도는 영남과 호남을 잇는 허리(중매자) 역할을 하게 되어 있고 강원도와 경기도는 남, 북한의 허리로서 중매자가 된다.
이 땅의 선조들은 지혜로웠다. 그들은 산과 강 그리고 인간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조들은 우주가 언제 어떻게 변화하고 그런 변화에 의해 인간생활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이 우리 민족에게 어떤 운명의 길을 가게 할 것인가 알고 있었다. 선조들은 그런 지혜를 바탕으로 정밀한 설계도를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민족 구성원인 각 부족들의 이동시기와 장소를 정하고 그 장소에는 어떤 부족이 들어가야 되며 이 민족을 위해 해야 될 역할까지 그렸다. 그리고 어떤 부족이 먼저 이 민족을 이끌어야 하고 뒤따라 이끌어야 될 부족까지 정하고 그들의 앉은 처소에 따라 산천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지구마을에서 가장 좋은 터라고 할 수 있는 한반도와 한반도 땅의 산천의 이름을 통해서 선조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신라와 가야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선조들의 지혜를 빌려 다시 영남의 산천으로 들어가 보자. 백두대간의 등줄기인 태백산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낙동정맥과 낙동강, 그리고 대간의 남쪽인 지리산에서 나온 낙남정맥과 남강이 두 음양오누이의 서로 짝을
찾아주고 혹시 훼방꾼이 될 듯싶은 남강의 북쪽 울타리는 이름조차 짓지 않았다. 음양오행으로 보면 “동(東)”은 양(陽)이며 나무(木)가 되고 “남(南)”도 양(陽)이며 불(火)이 되니 목생화(木生火)하고, 화보목(火母木)한다. 즉 나무에서 불이 태어나고 불의 열기를 받아 나무가 자라는 상생기운이 넘치고 영남의 동쪽과 남쪽바다에서 발생되는 산소에 의해 불기운이 확산하여 자칫 목(木)이 가지만 요란히 뻗치는 것을 막기 위해 백두대간의 “백”인 쇠(金) 기운으로 단단한 껍질로 형체를 만들어 씌우니 목(木)은 본래의 직진성으로 살아난다.
그러한 풍수 비보에 의해 영남인들은 어울림과 타협의 조화기운보다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정당화하고 한번 정한 소신은 굽히지 않는 다소 독선적인 기질로 태어난다. 그런 기질은 전쟁과 전염병, 중상과 모략으로 오직 승리하는 자가 곧 선(善)이었던 선천을 이 민족이 헤쳐 나올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이 되었다. 그러므로 영남인들이 지난 2500여 년간을 이 민족을 이끌며
불교와 유교의 씨를 뿌렸고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썼는가 하면 일연은 「삼국유사」를 남겼다. 또 문익점은 목화씨를 붓대롱 속에 감추고 들여와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하였다. 영남인들이 이 민족을 이끌고 문화까지 낳을 수 있었던 것은 영남이 대간의
동쪽에 있는 지방이고 해(문명)는 동쪽에 먼저 뜨는 이치에서 알 수 있다. 선천의 마지막에 들어 진리체계가 다른 유불선(儒彿仙)의 하나 됨과 무극제(無極帝)의 강림(降臨)을 예언한 최제우의 천도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이 일어난 동북방을 주역의 팔괘에서 보면 가장 추운 자리에 있는
간(艮) 방이며, 간은 구(拘) 야니 우리는 개간나 개새끼가 된다. 또한 구석(拘席) 자리에 있으며, 십이지에서 보면 하루 중 가장
추운 새벽인 인(寅) 시에서 태어났다. 동북방은 오행에서 나무가 되니 새벽나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석자리에 있으니 한이 생기고, 새벽의 언몸을 녹이기 위해 뜨거움을 찾게 되니 한과 추운 몸은 풀려야 한다. 다른 민족 같으면 먹는 음식이 적당히 따뜻해야 하지만 우리는 음식도, 사랑도 뜨거워야 하고, 벌(부관참시)을 주는 것도 뜨거워야 한다. 집의 방향도 가장 뜨거운 남방을 찾는다. 뜨겁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우리는 풀림의 민족이다. 아기를 낳는 것도 몸을 풀었다고 하고, 봄이 오면 겨울이 풀렸다고 하고, 신풀이, 화풀이, 속풀이 등의 말에서 우리 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이며 풀림과 뜨거움의 민족임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백두대간은 한과 풀림과 뜨거움을 낳고 키운 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과 풀림, 뜨거움에서는 어디에 살고 있어도 변할 수 없는 하나가 된다. 한이 아리랑이든, 고개가 아리랑이든, 물길이 아리랑이든 우리 민족은 아리랑에서도 하나가 된다. 이러한 아픔이 있었기에 우리민족은 우주사시인 가을들녘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 주역에서도 “성언호간(成言乎艮)” 즉 만물이 태어나는 방향을 동북방이라고 하였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언제나 변하고 있었기에 역사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변화가 지구차원의 변화가 아닌 우주사(宇宙事)의 전무후무한 큰 변화가 오고 있다. 그런 우주사의 변화는 우주정신의 사시(春夏秋冬)인 봄, 여름의 선천(先天-양) 세상에서
후천(後天-음)의 가을 겨울, 즉 하추교역(夏秋交易)이기에 들었기 때문이다. 봄과 여름이 모든 생명을 성숙시키기 위해 다투는 기운이라고 한다면 가을, 겨울의 후천은 투쟁정신으로 달려왔던 기운을 여과시키고 수렴하여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상생과 대동정신이 펼쳐지는 기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기운을 원시반본이라고 하는데 그런 변화를 나무에 비유하면 봄의 뿌리에서
가지로 올라갔던 생명수가 가지로 올라가 본래의 목적인 씨를 맺은 후 가을바람과 함께 다시 뿌리로 돌아가는 이치를 말한다.
원시반본에 의한 가을기운은 지난 수천 년 간을 우리 민족을 짓눌러왔던 모든 상극기운이 극즉반(剋則反)하여 한강과 금강의
수극화(水剋火) 기운이 상생기운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물에서 불이 태어나는 이치에 따라 수화상생(水火相生)하며 선천의
세상에서 지역민(차령이남)들, 아니 이 땅의 사람들에게 숫한 아픔을 토해냈던 (고려의 훈요십조) 금강이 비단옷으로 곱게 치장하고 새신랑(큰 통합의 겨레)을 기다리듯 소리 없이 흐른다. 그것은 그동안 기질의 차이로 갈등을 빚던 영호남이 오히려 민족의 꿈을 이루는 힘이 되며 그 힘에 의해 남북한이 하나가 된다. 이웃국가이며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은 다국가체제로 해체된다. 일본의 국기는 태양을 뜻하는데 후천의 시대는 달의 시대이며 달은 해가 져야 뜨는 법이다. 51개 주였던 미연방은 다시 13개 주로 돌아가며 선천의 강대국들이었던 나라들은 축소되거나 힘을 잃게 된다.
세계사의 문명정신에서는 동양의 철학정신이 서양으로 건너가 물질문명을 발전시킨 서양과학의 문명의 옷을 입고 생명과학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때에 태어나는 낙동강공동체의 낙동강 백서는 매우 중요한 시대적 사명감을 어깨에 걸머지고 있다. 물론 낙동강 공동체의 낙동강 백서는 “낙동강”에서 알 수 있듯이 영남이라는 한 지방에 대한 일종의 환경보고서라는 성격을 띠고 있지만 영남문화가 선천의 이 민족을 이끌었던 선도문화로서 자긍심과 함께 자존심을 갖고 있다면 이제는 사람과 산천을 갈라놓는 서양의 환경운동에서 벗어나 우리 선조들의 “사람이 곧 산천”이라는 생태정신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양에서
일어난 모든 운동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환경운동자체를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급격한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생태환경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낙동강공동체에는 우리나라에 있는 기존의 단체들과는 달리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회원들이나 지역민들의 열려있는 가슴과, 특히 대표로 있는 김상화 님의 삶이 곧 낙동강이었고 낙동강이 지난 25여 년간 그의 가슴이 된 삶이 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과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내가 영남지방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것은 따지고 보면 공동체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낙동강공동체를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운동이 이제는 우리 풍토화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경운동이 생명정신이 깃들어야 될 생태환경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며 불가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듯 우리 사람살이에서는 정신이든 물질이든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흘러야 한다. 만약 낙동강공동체가 이번에 생태정신의 씨를 뿌릴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한반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지구마을에 있는 각 민족의 풍토화를 낳게 하고 새로운 생명정신으로 태어 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할 기운을 북돋아 넣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문명의 씨를 뿌린 민족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구석자리에 앉아서 주는 밥(문화정신)이나 얻어먹는 개가 되어서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자긍심에 오히려 부끄러움이 되지 않을까? 진정한 부끄러움을 알 때 뒷날 선조들을 뵐 낯이 있고 영남문화의 씨를 뿌렸던 가야와 신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생명정신에는 병든 몸으로 암과 투쟁하며 영남의 산천을 누비다 먼저 하늘나라로 돌아간 김환희 님의 영혼도 있을 것이고
언니가 못다 한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가녀린 몸을 이끌고 주린 배와 밤잠을 설쳐야 했던 김은환 님의 아픔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모든 숨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들의 몸짓과 눈빛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한반도에서 두 번째
긴 강인 낙동강은 늙고 지쳐 목쉰 소리를 내고 있다. 또 다른 새벽을 열기 위해서는 낙동강이 잠시 잠을 잘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이 땅에 씨를 뿌렸던 가야와 신라를...그들을 진정으로 만나기 위해 풍수지리사상의 거울을 갖고 가야 한다.
끝으로 이 말을 하고 싶다. 우리 민족의 백의의 백색은 모든 색을 받아들이지만 스스로 밝기 때문에 모든 색을 어둡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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